마이어 암셸 로트실트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

[ Mayer Amschel Rothschild ]

요약 국제적 금융재벌인 로스차일드 가(家)를 일으킨 독일의 유대계 금융업자.
출생-사망 1744.2.23 ~ 1812.9.19
별칭 메이어 암셸 로스차일드
국적 독일
활동분야 경제
출생지 독일 프랑크푸르트 유대지구

영어로는 메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라고 한다. 19세기 유럽의 산업화 과정을 지배했던 국제적 금융재벌 로스차일드 가(Rothschild family)를 일으킨 인물이다. 구틀 쉬나퍼(Gutle Schnapper)와 결혼해 암셸 마이어 폰 로트실트, 잘로몬 마이어 폰 로트실트, 나탄 마이어 폰 로트실트, 카를 마이어 폰 로트실트, 야콥 마이어 폰 로트실트 등의 다섯 아들과 다섯 딸을 두었다.

1744년 2월 23일 신성로마제국자유도시이던 프랑크푸르트의 게토(ghetto ; 유대인 거주구역)에서 유대계 상인인 암셸 모제스(Amschel Moses Rothschild)의 8남매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쇤셰 레히니흐(Schönche Lechnich)이다. 이들은 붉은 문패가 달린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독일어로 ‘붉은 방패(문패)’를 뜻하는 ‘로트실트(Rothschild)’를 가문의 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마이어의 아버지는 독실한 유대교도였으므로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어렸을 때 퓌르트(Fürth)에 있는 랍비 양성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1755년과 1756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잇달아 죽자 학교를 그만두고, 친척의 소개로 하노버 선제후국의 궁정유대인(Court Jew) 밑에서 일을 하며 금융업을 배웠다.

1764년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게토에서 환전상의 일을 시작한 마이어는 당시 헤센카젤(Hessen-Kassel) 공작의 후계자였던 빌헬름 9세(Wilhelm Ⅸ)와 거래를 하게 되면서 그의 신임을 얻었고, 1769년에는 하나우(Hanau) 궁의 궁정유대인이 되었다. 당시 헤센카젤 공국은 영국에 용병을 보내 큰 수익을 얻었으며, 프랑크푸르트도 영국 공산품들의 집산지로 번성했다. 마이어는 공국이 영국에게서 받은 상업어음을 현금으로 환전해주고, 영국의 면직물 등을 들여와 판매하면서 수익을 올렸다. 1785년 빌헬름 9세가 공국을 계승하고, 마이어의 첫째아들인 암셸과 둘째아들인 잘로몬이 빌헬름 9세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으면서 사업의 규모가 점차 커졌다. 1789년 마이어는 헤센카젤 공국의 정식 금융업자로 지명되어 대외 신용과 대부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빌헬름 9세의 후원으로 성장해가던 마이어 일가는 1792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전쟁과 1803년에 시작된 나폴레옹 전쟁 과정에서 빌헬름 9세의 영향력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세력을 확대해갔다. 프랑스 혁명전쟁으로 유통이 어려워지면서 대륙에서는 영국의 면제품 가격이 폭등했는데, 마이어는 1798년 셋째아들 나탄을 영국 맨체스터로 보내 면제품을 싼 가격에 안정적으로 구입해 대륙으로 들여와 유럽 각지에서 팔았다. 나탄은 1804년에는 런던에서 상업어음을 발행하는 금융업을 시작했는데, 이것은 마이어 일가의 활동이 금융업을 중심으로 전환되고, 사업 규모가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806년 나폴레옹이 헤센을 침공해 빌헬름 9세가 국외로 망명하자 마이어 일가는 그의 비밀 재산관리인이 되었다. 마이어와 그의 아들들은 프랑스군의 감시를 피해 각지를 돌면서 빌헬름 9세의 채권을 회수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투자사업을 벌여 큰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베를린칙령(대륙봉쇄령)으로 유럽 전역의 물자가 부족해지자 자신들의 정보망과 유통망을 이용해 영국의 면제품 등을 밀수해 팔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마이어는 1810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아들들과 함께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 부자회사(M. A. Rothschild & Söhne)’를 설립했다. 1812년 9월 19일에 사망했는데, 죽기 전에 형제들의 ‘협력(concordia)’을 강조하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마이어가 죽은 뒤에 프랑크푸르트의 사업은 맏아들인 암셸 마이어가 이었으며, 둘째아들인 잘로몬은 1819년에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이주해 그곳에 은행을 설립했다. 그리고 넷째아들인 카를은 1821년 양시칠리아 왕국의 수도인 나폴리로 진출했다. 마이어의 다섯 아들은 1822년에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황제인 프란츠 2세(Franz II)에게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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