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차차웅

남해차차웅

[ 南解次次雄 ]

요약 신라의 제2대 왕 (재위 4∼24).
출생-사망 ? ~ 24
재위기간 4년∼24년
별칭 남해거서간

성은 박(朴)이고 이름[諱]은 남해(南解), 왕호(王號)는 차차웅(次次雄)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김대문(金大問)의 말을 인용하여 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도 하는데, 자충은 그 지방에서 무격(巫覡)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사람들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주관하는 무격을 경외(敬畏)하다가 점차 지위가 높은 존장(尊長)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新羅)의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적자(嫡子)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알영(閼英)이다. 왕비(王妃)는 아루부인(阿婁夫人)이라고도 하는 운제부인(雲帝夫人)이며,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노례(弩禮)나 유례(儒禮)라고도 한다, 재위 24∼57)과 나로(柰老), 아효부인[阿孝夫人, 아니부인(阿尼夫人)이라고도 한다] 등의 자녀를 낳았다.

《삼국사기》에는 남해차차웅이 체격이 장대하고 성품이 침착하고 중후했으며 지략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기원후 4년(남해 1) 혁거세거서간이 죽은 뒤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6년(남해 3)에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의 사당을 세워 친누이인 아로(阿老)로 하여금 사계절마다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리고 대보(大輔)의 직위를 만들어 나라의 일을 대신(大臣)에게 위임했는데, 8년(남해 5) 석탈해(昔脫解)가 뛰어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장녀(長女)인 아효(阿孝)와 결혼시켜 사위로 삼았고, 10년(남해 7)에는 그를 대보로 임명해 군사와 정치에 대한 사무를 맡겼다.

남해차차웅의 재위기에는 낙랑(樂浪)과 왜(倭) 등의 외침이 자주 발생했다. 4년(남해 1)에는 낙랑이 오랫동안 신라를 통치했던 혁거세거서간이 죽은 틈을 타서 신라를 침범해왔고, 14년(남해 11)에는 왜인이 100여척의 병선을 이끌고 쳐들어와 해변의 민가를 약탈했다. 남해차차웅은 6부의 경병(勁兵)을 보내 이를 방어하였으나, 낙랑이 그 틈을 타서 금성(金城)을 공격해오기도 했다.

남해차차웅의 재위기에는 자연재해도 자주 발생했다. 11년(남해 8) 봄과 여름에 심한 가뭄이 닥쳤으며, 18년(남해 15)에도 금성 일대에 가뭄이 닥쳤다. 그 해 가을에는 메뚜기 떼도 창궐해 남해차차웅은 창고의 곡식을 풀어서 굶주린 백성을 구제했다. 22년(남해 19)에는 전염병이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24년(남해 21)에도 메뚜기 떼가 곡식을 덮쳤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19년(남해 16) 북명(北溟)의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국(濊國) 왕의 인장을 발견해 남해 차차웅에게 바쳤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중국 신(新) 왕망(王莽)의 연호인 천봉(天鳳) 5년(18년)에 고구려에 복속했던 일곱 나라가 투항해왔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남해차차웅은 24년(남해 21)에 사망해 사릉원(蛇陵園) 안에 매장되었다. 그의 뒤는 태자인 유리이사금이 계승했다. 《삼국사기》에는 남해차차웅이 죽음을 앞두고 유리이사금과 석탈해에게 자신이 죽은 뒤에는 아들과 사위를 막론하고 나이가 많고 현명한 자가 왕위를 이으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그리고 태자인 유리이사금이 탈해에게 왕위를 사양했으나 석탈해가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빨이 많다고 하자 떡을 깨물어 유리이사금의 이빨이 더 많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에야 왕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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