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만무역

남만무역

[ 南蠻貿易 ]

요약 고려 중기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남방 여러 나라와 한국 사이에 이루어진 무역.

남방국가와의 물산(物産) 거래는 이미 고려 이전 삼국시대에도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보면 비록 직접적인 거래는 아니었으나, 신라에서는 당시 골품제도(骨品制度)의 계급을 표시하는 색복(色服)·거기(車騎)·옥사(屋舍) 등의 장식품으로 중국 당(唐)나라를 통하여 들어온 남방 여러 나라의 물품이 사용되었고, 또 의약품도 들어온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송나라와의 통상이 활발해지면서 이전의 부정기적(不定期的)인 대외무역이 점차 정기화되어 당시의 수도 개성의 문호를 이루는 예성강(禮成江) 입구의 벽란도(碧瀾渡)가 당당한 국제무역항구로 등장하였다. 통상사절의 왕래가 빈번해지자 조정에서는 외국사신이 도착하면 대시(大市)를 열어 많은 상품을 진열하고 물물교환을 행하게 하였고, 사절(使節)에 수행하는 외국상인의 수도 수백 명에 달하였다. 따라서 당시 남중국해(南中國海)에 자주 내항한 아라비아의 상선들은 송나라 상인의 고려와의 무역에 자극받아, 마침내 그들도 고려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그들이 본국을 떠나 고려까지 오려면 최소 1년이 걸리는 원거리였는데도 자주 내왕한 것을 보면, 고려의 국제무역으로서는 확실히 이채로운 것이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1024년(현종 15) 9월에 아라비아인(人) 열라자(悅羅慈) 등 100명이 내항하여 방물(方物)을 헌납하였고, 또 이듬해 9월에는 하선라자(夏先羅慈) 등 100명이 내항하여 토물(土物)을 바쳤으며, 다시 1040년(정종 6) 11월에는 보나합(保那盍) 등이 와서 수은(水銀)·용뇌(龍腦)·침향(沈香)·소목(蘇木) 등의 물품을 바치자, 왕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우대하게 하고 돌아갈 때는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고 한다. 충혜왕(忠惠王) 때는 귀화한 회교도에게 포(布)를 지급하고 대신 다른 물품을 받아 이익을 보았다고 한다. 고려가 이들을 우대한 것은 불교국으로서의 자비사상에 연유하는 점도 있겠으나, 그들이 페르시아·인도 등 세계의 진품을 가져왔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 밖에 고려에서는 원(元)나라를 통하여 인도산(印度産) 목면을 수입하였고, 의천(義天)의 제자인 조소(曺素)는 설탕으로 담을 쌓고 지냈다는 《파한집(破閑集)》의 기록으로 보아, 당시 남방무역이 꽤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무역관계는 상인 대 상인의 정식거래가 아니고 대개 진상(進上)·하사(下賜)·내헌토의(來獻土宜) 등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어디까지나 상인(또는 사신)들의 증여와 그에 대한 답례의 형식이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류큐[琉球]와 교역이 시작되었는데, 그 동기는 고려 말·조선 초에 왜구가 조선 연안에서 자주 약탈행위를 감행하여 약탈한 물건을 류큐에 매각하는 일이 있었고, 1397년(태조 6)에 류큐에서 사신을 보내 왜구에게서 매입한 조선인을 함께 송환해준 데서 비롯되었다. 그뒤 류큐는 1400년(정종 2)과 53년(단종 1)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예물을 헌납하였고, 세조 때는 3회나 내왕하여 대장경(大藏經)을 요구한 일이 있었으며, 1471년(성종 2)에는 세견선(歲遣船)을 보내는 등 서로 교통이 긴밀하였다.

1606년(선조 39)에는 토하포(土夏布)·파초포(芭蕉布) 각 20필, 배초(排草) 20근, 면초(綿綃) 20단(端), 황석초(黃石綃) 10단, 화문초(花文綃) 10단, 토선(土扇) 200파(把)를 헌납한 데대하여 조선에서도 사례로 물건을 보낸 사실로 미루어 교역이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1609년(광해군 1)까지 교역이 계속되다가 류큐가 일본에 의하여 정복됨으로써 교역이 단절되었다. 1397년(태조 6)에는 태국[暹羅:샴]에서 장사도(張思道) 일행 20명이 입국하여 소목(蘇木) 1,000근, 속향(束香) 1,000근을 바쳤는데, 이 밖에도 많은 진상품을 가져오다가 도중에 왜구에게 약탈당하였다고 한다.

1482년(성종 13)에도 사절을 보내어 많은 진상품을 가져와서 대장경을 청구하였다. 한편 자바[瓜哇]의 사자 진언상(陳彦祥) 일행도 회계(灰鷄)·공작(孔雀)·앵무·심향·용뇌·후추 등 많은 물품을 진상하였다. 이러한 진상품은 모두 그 대가를 바라는 것이었으며 조선 조정에서도 그때마다 의복·화(靴)·정포(正布)·면포(綿布)·백저포(白苧布)·흑마포(黑麻布)·녹비[鹿皮] 등으로 답례함으로써 교역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하여 중국을 통하지 않고도 서양의 문물이 수입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여러 서양 선박이 내항하여 직접 무역을 요청하자 당시 조정에서는 이를 모두 거절하고 더욱 강력한 통상수교거부정책을 펼쳐, 결과적으로 정치·경제면에서 후진국으로 낙오되는 원인이 되었다.

참조항목

남만, 무역

역참조항목

세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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