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공철

남공철

[ 南公轍 ]

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 ·문장가. 1817년 우의정, 1821년 좌의정, 1823년 영의정에 올랐고, 1833년 봉조하가 되었다. 당시 제일의 문장가로 시와 글씨에 뛰어나 많은 금석문과 비갈을 썼으며, 경전을 연구하고 구양 수의 글을 숭상하고 본받았다. 저서에 《귀은당집》외 다수가 있다.
출생-사망 1760 ~ 1840
본관 의령
원평
사영 ·금릉
주요저서 《금릉집》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원평(元平), 호는 사영(思穎)·금릉(金陵)이며 서울 출신으로 아버지는 대제학 남유용(南有容)이다. 1780년(정조 4) 초시에 합격하고 1784년(정조 8) 음보로 세마(洗馬)에 등용되어 산청(山淸)·임실(任實) 등의 현감을 지냈다. 1792년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곧 이어 홍문관부교리·규장각직각에 임명되어 《규장전운(奎章全韻)》의 편찬에 참여했다.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임되었고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에 동참하였으며 주로 대사성(大司成)으로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순조(純祖)가 즉위한 후 아홉 번이나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제수받았고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으며 《정조실록(正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당시 제일의 문장가로 시와 글씨에 뛰어나 많은 금석문(金石文)과 비갈(碑碣)을 썼으며, 순조 때 전사자(全史字)라는 동활자를 만들었다. 경전(經典)을 연구하고 한(漢)·당·송나라의 여러 글을 읽었으며, 구양수(歐陽修)의 글을 숭상하여 본받았다. 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금릉집》, 저서에 《귀은당집(歸恩堂集)》(10권)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12권), 《영옹속고(穎翁續藁)》(5권), 《영은문집(瀛隱文集)》, 《영옹재속고(穎翁再續稿)》(3권), 《독례록(讀禮錄)》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