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

나성

[ 羅城 ]

요약 안팎 2중으로 구성된 성곽에서 안쪽의 작은 성과 그 바깥의 도시까지 감싼 바깥쪽의 긴 성벽. 고대 중국과 한국에서는 흔히 왕궁을 둘러싼 성벽을 왕성(王城) 혹은 내성(內城)이라 부르고, 그 바깥의 민가·도시·농토까지 둘러싼 또 하나의 성벽을 외곽(外郭) 혹은 곽(郭)·곽성(郭城)이라 불렀는데, 외곽을 나중에 나성(羅城) 혹은 나곽(羅郭)이라 부르기도 했다.
부여 나성

부여 나성

중국에서는 주(周)나라 때부터 왕이 사는 도성을 안팎 2중의 성벽으로 만들고 내성외곽(內城外郭) 혹은 성곽(城郭)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주례(周禮)》 등의 전통에 입각해 노(魯)나라의 곡부성(曲阜城)처럼 곽성 안 정중앙에 왕성을 축조하였으나, 국가간 전쟁이 치열해지는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서자 제(齊)나라의 임치고성(臨淄故城), 한(韓)나라의 한단고성(邯鄲故城), 연(燕)나라의 하도고성(下都故城)처럼 왕성을 곽성의 한쪽 구석 높은 지대에 쌓거나 아예 곽성 바깥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漢)나라 때부터 점차 도시 정비에 방위개념이 적용되었으며,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이르러서는 왕성을 기준으로 남쪽에 관청과 민가를 비롯한 시가지가 펼쳐지고 그것을 왕성과 연결된 또 하나의 성벽(곽성)이 에워싸는 형태가 전형적인 도성 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나성이라는 말은 당나라 때부터 사용했는데, 규모가 큰 성을 나성(羅城), 그 안쪽의 작은 성을 자성(子城), 나성 바깥의 3중 성벽을 아성(牙城)이라 불렀다고 한다. 

내성외곽으로 이루어진 중국의 도성 체계는 고구려와 백제에 영향을 주었다. 고구려는 서기 552년(양원왕 8)에 새로 장안성(長安城)을 쌓기 시작했으며, 서기 586년(평원왕 28)에는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대동강변의 자연지형을 이용해 쌓은 장안성은 3중의 석성으로서, 야트막한 산과 그 기슭에 왕궁을 포함하는 산성과 중성이 잇대어 있고 그 서남쪽으로 펼쳐진 넓은 평지에 시가지를 둘러싼 나성이 붙어있는 구조이다. 백제는 서기 538년(성왕 16)에 웅진(熊津)에서 사비(泗沘)로 도읍을 옮겼는데, 사비에는 왕성 바깥의 시가지를 둘러싼 나성을 쌓았다. 그것이 오늘날의 부여나성(扶餘羅城)이다. 다만, 부여나성을 천도할 때부터 쌓았는지 나중에 쌓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편, 신라는 나성을 쌓는 대신 경주분지 주변 곳곳에 산성을 쌓아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나성제도는 고려왕조로 이어졌다. 고려는 거란족의 위협이 거세지던 무렵 20여년에 걸쳐 왕성 바깥의 시가지와 논밭까지 에워싼 나성을 축조해 1029년(현종 20)에 완성하였다. 또, 몽고가 침입하자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뒤 왕궁·관청이 있는 강화내성 바깥에 다시 민가와 논밭까지 감싼 나성을 쌓았는데, 이를 강화중성(江華中城)이라 한다. 조선왕조의 한양성(漢陽城)도 도시를 감싼 평지성이라는 점에서 나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한양성은 내부에 따로 왕궁을 둘러싼 내성을 쌓지 않아 바깥쪽의 성벽 하나뿐이므로 나성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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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나성

부여 나성 출처: doop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