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기

김문기

[ 金文起 ]

요약 조선 시대 초기 문신. 예문관 검열 · 정언 · 함길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하고, 그의 가묘를 서울시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설치했다.
옥천 김문기 유허비

옥천 김문기 유허비

출생-사망 1399 ~ 1456
본관 김녕
여공
백촌
별칭 초명 효기

본관 김녕(金寧). 자 여공(汝恭). 호 백촌(白村). 초명 효기(孝起). 시호 충의(忠毅). 1426년(세종 8) 식년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였다. 1430년 예문관검열(檢閱)·정언(正言)·함길도관찰사를 역임하고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1456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한 단종복위(端宗復位)의 모의에 가담하였다. 모의가 발각되자 고문에 굴복하지 않다가 이개(李塏)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영조 때 9대손 정구(鼎九)의 송원(訟寃)으로 복관되었으며,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배향되었다. 1981년 서울시와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하고, 그의 가묘를 서울시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설치했다.

1977년에 김문기가 사육신에 해당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자 서울시, 문교부, 문화공보부, 국사편찬위원회 등이 심도있는 연구와 논의를 하였다. 그 결과 서울시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합의사항을 참조하여, '유응부의 사육신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김문기 선생을 사육신과 같은 충신으로 현창'하는 것으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