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여
[ 金慶餘 ]
- 요약
조선 중기 문신. 정언 · 지평 등을 지내고,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피란하였다. 출처와 의리에 분명하였으며, 송준길 · 송시열과 친교가 두터웠다. 문집에《송애집》이 있다.
김경여신도비
출생-사망 | 1596 ~ 16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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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경주 |
자 | 유선 |
호 | 송애 |
시호 | 문정 |
주요저서 | 《송애집》 |
본관 경주. 자 유선(由善). 호 송애(松厓). 시호 문정(文貞). 이귀(李貴)의 사위.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624년(인조 2) 익위사익위(翊衛司翊衛)가 되고, 163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언(正言) ·지평(持平) 등을 지내고,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피란하였다. 이듬해 청나라에 항복한 뒤에는 조정에 나가지 않고, 고향 회덕(懷德)으로 돌아갔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대간(臺諫)에 임명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교역(金郊驛)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649년(효종 1) 대사간이 되고, 김자점(金自點)의 잘못을 탄핵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군사력 배양에 힘썼다. 이어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좌찬성이 추증되고 회덕의 정절서원(靖節書院)에 배향되었다. 출처와 의리에 분명하였으며,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과 친교가 두터웠다. 문집에 《송애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