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진

김가진

[ 金嘉鎭 ]

요약 구한말 주 일본공사를 역임하여 외교에 밝았다. 일본으로 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지만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대동단 총재로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원하였고 항일 무장투쟁을 계획하였다.
출생-사망 1846 ~ 1922
본관 안동(安東)
동농(東農)
활동분야 독립운동

1846년 1월 서울 북부 순화방(順化坊) 신교동(新橋洞)에서 출생하였다. 본관 안동 김씨이며, 호 동농(東農)이다. 직계 조상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이며 부친은 예조판서와 한성부판윤을 지낸 김응균이다. 시문(詩文)과 글씨에 뛰어났고 권문세가의 집안에서 출생하였지만 서얼이라는 신분제한 때문에 과거에 나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1877년 적서차별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올려 규장각 검서관에 발탁되어 출사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1883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외교업무 관장)이 신설되어 유길준과 함께 주사로 임명되었다. 188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조선의 개화 필요성과 방법론을 역설한 봉서(封書)를 올려 주목받았으며 이후 개화정책을 주도하게 되었다. 특히 청나라의 내정간섭에 반발하여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하였다가 발각되어 유배형을 받았다. 유배에서 풀려나 중국 양무운동을 시찰하였으며 주차일본공사관참찬관(駐箚日本公使館參贊官)에 임명되어 수년간 도쿄[東京]에 주재하였으며 이후 주일본판사대신(駐日本辦事大臣)으로 임명되었다. 친일반청 노선을 견지하여 청나라와 외교적으로 대립하였으며 민씨세력과 갈등을 빚어 한직으로 물러났다가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오르고 1895년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이 되었으며 박영효가 추진하는 개혁정책의 실무를 담당했다. 1895년 박영효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위기에 몰렸으며 을미사변 이후 제4차 김홍집내각이 들어서면서 상무회의소 발족, 건양협회(建陽協會) 창립에 가담하였다.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가 창설되면서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조성하는데 기여하였다.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적극 가담하여 헌의6조의 실행을 촉구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외무대신, 법무대신, 중추원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대해 민영환 등과 함께 반대하였으나 실패하자 1906년 충남관찰사로 자진 좌천하였다. 대한자강회, 대한협회에 가담하여 적극 활동하였다. 1910년에 국권피탈 후 일본정부로부터 남작(男爵) 작위가 주어졌으며 이후 대외활동을 하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대동단(大同團)을 창설하여 초대 총재로 선출되었다. 1919년 11월 의친왕 이강(李堈)을 상하이로 망명시켜 독립선언서 발표를 시도하다 중국 단동(丹東)에서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무산되고 말았다. 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으로 활약하였고 대동단을 통해 무장투쟁을 계획하였다. 1922년 7월 7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역참조항목

죽헌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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