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

기황후

[ 奇皇后 ]

요약 중국 원나라 혜종의 황후. 고려 출신으로 공녀(貢女)로 원나라로 보내졌다가 황후가 되었으며 북원(北元) 소종(昭宗)의 생모이다.
전 기황후 릉터

전 기황후 릉터

출생-사망 ? ~ ?
본관 행주
별칭 올제이 후투그(完者忽都, Öljei Khutugh), 보현숙성황후 (普顯淑聖皇后)
국적 고려, 중국 원(元)
활동분야 정치

고려 출신으로 몽골명은 올제이 후투그(完者忽都, Öljei Khutugh), 시호(諡號)는 보현숙성황후(普顯淑聖皇后)이다.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기자오(奇子敖)의 딸이다. 공녀(貢女)로 원나라 조정으로 보내져, 1333년 고려 출신의 환관(宦官) 고용보(高龍普)의 추천으로 궁녀(宮女)가 되었다. 혜종(惠宗, 順帝라고도 함. Toghun Temür, 재위 1333~1368)의 총애를 받아, 1338년 황태자 애유식리달렵[愛猷識里達獵,  Biligtü Khan Ayursiridara, 북원의 昭宗, 재위 1370~1378]을 낳았다.

혜종(惠宗)은 기씨(奇氏)를 총애하여 1335년 킵차크(Kypchaks) 출신의 다나슈리[答納失里, Danashri] 황후를 일족의 반란 사건을 이유로 폐위시키고 기씨를 황후로 삼으려 하였다. 하지만 조정의 실권자인 바얀(Bayan, 伯顏, ?~1340년)이 이를 반대하자, 1337년 옹기라트(Onggirat) 부족 출신의 바얀 후투그(伯颜忽都, Bayan Khutugh)를 황후로 삼았다. 그러나 1338년 기씨가 애유식리달렵[愛猷識里達獵]을 낳자, 그 이듬해에 그녀를 제2황후로 책봉했다.

기황후는 혜종의 총애를 배경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녀는 재정과 번위(番衛)를 맡아보는 황후 직속 기관인 휘정원(徽政院)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하여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資政院使)로 삼았다. 그리고 1353년 자신의 아들인 아유르시리다라[愛猷識里達獵]를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으며, 동향(同鄕) 출신의 환관 박불화(朴不花)를 군사 책임자인 추밀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삼아 군사권도 장악하였다.

한편, 고려에서는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奇轍, ?~1356)을 필두로 한 기씨(奇氏) 일족이 기황후의 배경을 믿고 권세를 휘두르다 1356년 공민왕의 반원 개혁정책으로 주살되었다. 그러자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하고 원나라에 있던 충숙왕의 아우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삼기 위해 1364년 고려 출신인 최유(崔濡)로 하여금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려를 공격케 하였다. 그러나 최유는 고려의 명장인 최영(崔瑩)에게 대패하였다.

이 무렵 원나라 조정에서는 황태자 지지파와 반대파 사이에 정쟁(政爭)이 격화되었다. 기황후는 혜종의 양위를 받아 황태자를 황위에 앉히려 하였는데, 1364년 반(反) 황태자파 장군인 볼라드 테무르[孛羅帖木児, Bolad Temür, ?~1365]는 도성인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를 점령해 기황후를 사로잡았다. 황태자는 타이위안[太原]에 주둔하고 있던 코케 테무르[擴廓帖木爾, Köke Temür, ?~1375]에게 피신하였고, 이듬해인 1365년 대도를 공격하여 볼라드 테무르[孛羅帖木児]를 죽였다.

1365년 제1황후인 바얀 후투그(伯颜忽都, Bayan Khutugh)가 죽자 기황후가 정후(正后)가 되었으나, 황태자의 황위 계승을 둘러싼 정쟁으로 원의 국력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각지의 반란 세력이 크게 성장하였다. 결국 1368년 주원장(朱元璋)은 반란 세력을 통일하여 명(明) 나라를 세우고 북벌(北伐)을 단행하여 대도(大都)를 점령했고, 이로써 원(元)은 멸망하였다. 혜종과 황태자 애유식리달렵[愛猷識里達獵] 등은 상도(上都,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多倫縣)로 피신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응창부(應昌府, 지금의 内蒙古 克什克腾旗)로 퇴각하였다. 1370년 혜종이 죽자 애유식리달렵[愛猷識里達獵]이 북원(北元) 소종(昭宗)으로 즉위하였다. 몽골 지역으로 패퇴한 뒤 기황후의 행적은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한편, 한국의 경기도 연천군 상리(上里)에는 기황후의 묘로 알려진 고분(古墳)이 있다. 실제 기황후의 묘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1656년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이 편찬한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에도 ‘속전원순제기황후묘(俗傳元順帝奇皇后墓)’라며 이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어, 조선 후기 이전부터 이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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