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납

공납

[ 貢納 ]

요약 지방의 토산물을 현물로 내는 세금제도.

당나라 조세제도인 조용조(租庸調) 중에서 개별 민호를 대상으로 부과하여 징수한 조(調)에 해당된다. 그 기원은 통일신라시대로 소급된다고 하지만, 지금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주로 베[麻布]와 비단 같은 직물과 과실류를 바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에는 949년(광종 즉위)에 각 주현에서 중앙정부에 내야 할 공물인 세공(歲貢)의 수를 정하였고, 1041년(정종 7)에 그 품목을 조정하였는데, 이때 세공으로 정해진 것은 쌀 ·조 ·황금 ·백은 ·베 ·명주 ·면포 ·백적동(白赤銅) ·철 ·소금 ·실 ·꿀 ·쇠가죽 ·쇠심줄[筋角] 등이었다. 1066년(문종 20) 해마다 일정하게 내는 상공(常貢)과 특산물을 수시로 내는 별공(別貢)으로 구분하였고, 쇠가죽 ·쇠심줄 같은 것은 쌀 ·베로 대신 납부할 수 있게 하였다.

상공은 미리 정해진 공물의 종류와 액수를 주현에 할당하여 왕실 ·궁원(宮院) 및 정부의 각 기관 등에 매년 납부하게 하였으며, 각 주현에서는 이 공물을 민호에게 분배하여 거두었다. 이때 민호는 남자 장정수를 기준으로 9등급으로 나누었다.

이 시기에는 상공보다도 수시로 별공을 거두면서 관리가 심하게 가렴주구하여 공납이 농민의 가장 큰 부담의 하나가 되었다. 특히, 전국 각 지방에 특수한 촌락인 소(所)를 설치하여 금 ·은 ·동 ·철 ·도자기 ·약재 ·해산물 ·말 ·종이 ·먹 등이나 특수한 수공업품을 제작하여 헌납하게 하였다.

조선왕조가 개창된 뒤에 마련된 공납제는 대체로 고려시대의 제도를 답습하였다. 1392년(태조 1) 10월에 공부상정도감(貢賦詳定都監)을 설치하여 각 지방의 토산물을 기준으로 공물의 품목과 수량을 정하고, 그 장부인 공안(貢案)을 마련하여 조선시대 공납제의 기초를 놓았다. 그러나 이때 새로 제정된 공납제가 전국적으로 실시된 것은 태종대에 들어와서이다.

1408년(태종 8) 9월에 제주, 1413년 11월에 함경 ·평안도에서 내야 할 공물의 품목과 수량을 정함으로써 전국에 걸친 공납제가 마련되었다. 각 지방의 공물의 품목과 수량을 정할 때는 토지 면적을 기준으로 하여 그 지방의 생산물로 부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중앙정부의 1년 경비를 참작하도록 하였다. 남자 장정수를 기준으로 공물을 부과하던 것이, 고려 말, 조선 초 농사기술의 발달로 땅을 놀리지 않고 매년 경작할 수 있게 되고 농업생산력도 크게 증대되면서, 보다 경제적인 의미를 가지는 토지면적을 기준으로 한다는 원칙을 마련하였다.

공납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먼저 중앙정부에서 각 군현에 공물의 품목과 수량을 적은 장부인 공안을 보내면 각 지방에서는 부과된 공물을 백성에게 직접 징수하거나 향리 장인(匠人) 및 지방관청 소속 노비 또는 상번한 군사 등을 사역하여 마련하였다. 대개 민간에서 쉽게 마련할 수 있는 직물류 ·수산물 ·과실류 ·목재류 등은 일반 백성이 내게 하고, 모피류 ·수육류 및 재배해야 하는 약재 등은 지방관청에서 마련하여 공물 상납하는 일을 맡는 하급관리인 공리(貢吏)에게 정부의 관청에 직접 내게 하였다.

그뒤 세조 ·성종 연간에 여러 차례 공안을 개정하였고, 세조대에 국가의 지출명세서인 횡간(橫看)을 제정함으로써 조선 초기 공납제의 성격이 결정되었다. 성종대에는 제도상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공납과정에서의 중앙관청 관리의 농간을 제거하고자 공납제를 일부 개선하였다.

그러나 이때 정비된 공납제는 그 제도 및 운영과정에 몇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였다. 공물의 품목과 수량이 장기적으로 고정되어, 다음해의 것을 앞당겨 징수하는 인납(引納) 및 본래의 용도와 달리 사용하는 별용(別用) 등이 이루어졌고, 또한 여기에 별공이 이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그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품이 공물로 지정되기도 하여, 심한 경우에는 산간지대에 해산물을 배당하거나, 평야지대에 사냥한 짐승과 그 가죽 등을 배당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공안의 개정을 통하여 그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공물을 조정하는 것이 당면한 과제였다.

이 밖에 공물을 상납하는 과정에서 관리가 여러 가지 트집을 잡아 그 지방에서 마련한 공물을 받지 않거나[點退], 관리와 상인이 결탁하여 대신 납부하고 농민으로부터 높은 가격을 받아내는[防納] 등의 비리행위가 자행되었다. 그리하여 중종대에 조광조(趙光祖)가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나 구체적인 대안이 마련되지 못하였고, 그 뒤 선조대에 이이(李珥)가 공물을 쌀로 대신 거두는 방법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본래 현물을 납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 공납제는 자연경제가 지배적인 전근대사회에서 국가재정 및 지배계층의 소비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수공업의 일정한 발달을 전제로 한 것이면서도 아직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이 미숙한 단계에서 실시되다가, 상품화폐경제가 어느 정도 발달한 16세기에 가서는 공물을 당시 교역의 수단이던 물품화폐, 즉 쌀 ·베로 거두는 대동법(大同法)으로 전환되었다.

참조항목

공물, 방납, 사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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