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봉수

경봉수

[ 京烽燧 ]

요약 조선시대 서울 목멱산(木覓山:南山)에 있던 중앙 봉수(烽燧:봉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여기에 집결하였다. 목멱산봉수 또는 남산봉수라고도 하였다. 여기에는 5개소의 봉수대가 있어 전국 5개 주요 간선로(幹線路)의 직봉(直烽)으로부터 전해지는 봉수를 관장하였는데, 제1봉수대에서는 영안도(永安道:咸鏡道) 두만강변의 우암(牛巖:慶興 西水羅)을 기점으로 강원도를 거쳐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에 이르는 봉수를, 제2봉수대에서는 경상도 동남 해변의 응봉(鷹峰:釜山 多大浦)을 기점으로 충청도를 거쳐 광주(廣州) 천림산(天臨山)에 이르는 봉수를, 제3봉수대는 평안도 서북 압록강변의 여둔대(餘屯臺:江界 滿浦)를 기점으로 내륙으로 해서 황해도를 거쳐 한성 무악 동봉(毋岳東峰)에 이르는 봉수를, 제4봉수대는 평안도 의주(義州)를 기점으로 해안을 따라 황해도를 거쳐 한성 무악 서봉(西峰)에 이르는 봉수를, 제5봉수대는 전라도 서남 해변의 돌산포(突山浦:麗水 防踏鎭)를 기점으로 충청도를 거쳐 양천(陽川) 개화산(開花山)에 이르는 봉수를 각각 맡았다.

경봉수에는 봉수군(烽燧軍) 및 오장(伍長:監考)을 오원(五員)이라 하여 배치하는 외에 금군(禁軍:처음에는 忠順衛軍) 중에서 고액녹봉자(高額祿俸者)를 봉수군장(烽燧軍將)에 임명하고, 교대로 수직(守直)하게 하여 변방으로부터 올라오는 정보를 병조(兵曹)에 보고하게 하였다. 봉수군의 정원은 15명이던 것을 1446년(세종 28) 이후 20명으로 늘려, 5개소의 봉수대마다 2명씩 상·하 양번(兩番)으로 나누어 망대(望臺)에서 주야로 망을 보게 하였다.

오장은 정원 10명으로, 상·하 양번으로 나누어 5개소의 봉수대마다 1명씩 번을 서면서 봉수군을 독려 감독하고, 봉수대의 이상 유무를 봉수군장에게 보고하며, 봉수군장은 병조의 무비사(武備司)에 보고하였다. 그리고 봉수군의 출퇴번(出退番)의 편의를 위하여 반드시 부근의 주민을 중심으로 차출하였는데, 남산과 무악 봉수군에게는 매호(每戶) 군보(軍保) 3명씩을 속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