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중건

경복궁 중건

[ Gyeongbokgung - , 景福宮 重建 ]

요약 1865∼1868년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한 일.

경복궁은 조선시대의 본궁(本宮)으로서 태조가 1395년(태조 4)에 창건한 것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燒失)된 이후, 역대의 왕은 재정이 부족하여 재건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19세기 초의 순조(純祖)·헌종(憲宗) 때에도 재건계획을 세우기는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고종(高宗)의 즉위와 함께 당시의 섭정(攝政)이던 흥선대원군이 단안을 내려 경복궁 중건계획을 발표하고, 1865년에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하여 공사에 착수하였다. 대원군은 조선 말기 이래로 외척(外戚)의 세도에 밀려 추락된 왕실의 존엄과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경복궁의 재건을 서둘렀던 것이다. 공사 착수 당시에는 반대하는 의견도 많았으나 대원군은 이에 굽히지 않고 총책임자가 되어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처음에는 일반 백성과 종친(宗親)들에게서 원납전(願納錢)이라는 기부금을 받았고, 부역(賦役)에도 신중을 기하여 민원(民怨)을 크게 사지 않으면서 공사를 진행하려 하였다. 그러자 백성들도 어느 정도는 이에 호응하였으며, 대원군은 부역으로 일하고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무동대(舞童隊)·농악대·남사당(男寺黨) 등을 동원하여 이들을 격려하였다.

그러나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차츰 폐단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큰 목재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왕릉(王陵)의 목재도 베어 오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 애써 모아온 거목(巨木)을 쌓아둔 목재장(木材場)에 불이 나서 많은 목재를 거의 다 태워버린 일도 있었다. 그런데도 대원군은 뜻을 굽히지 않고 이를 강행하니 여러 무리가 뒤따랐다.

재목은 강원도·함경도 등의 먼 지방에서 운반해 와야 했으며, 석재(石材)도 각처에서 모아들여야 했다. 심지어 서낭당의 큰 나무나 석재, 양반 집안의 선영(先塋)의 목재까지도 강제로 거두어들여야만 했다.

또 문제는 건축자재의 확보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공사비의 염출이 더 큰 문제였다. 이를 충당하기 위하여 조정에서는 공공연히 벼슬자리를 팔게 되었으며,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하기까지 하였다. 당백전은 오늘날의 통화증발(通貨增發)과 같은 폐해를 낳게 하여 물가앙등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곡절을 겪으면서도 대원군의 끈질긴 고집으로 1868년에 공사는 사실상 완성되었다.

중건된 경복궁은 조선 말기의 건축·공예·미술의 결정체(結晶體)라고 할 만한 것으로서 오늘날에 이르도록 그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건축 당시에는 왕족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원망의 대상이 되었으며, 국가의 경제적인 타격 또한 막심하여 대원군 몰락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역참조항목

관각류집, 문세, 영건도감, 경복궁의 재건, 서궐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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