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포

강사포

[ 絳紗袍 ]

요약 국왕의 조복(朝服)에 해당하는 것으로, ‘수배신조현지복(受陪臣朝見之服)’이라 하여 삭망(朔望) ·조강(朝降) ·조강(詔降) ·진표(進表) ·조현(朝見) 등에 착용한 옷.

중국에서는 고대로부터 황제 ·황태자가 착용하던 것인데, 한국에서는 고려시대 공민왕(恭愍王)이 명(明)나라에 청하여 사여(賜與)받은 후 착용하게 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왕과 왕세자가 이를 착용하였다. 중국에서는 강사포에 황제는 통천관(通天冠), 황태자는 원유관(遠遊冠)을 쓰다가 명나라에 와서 피변(皮弁)으로 바뀌었으며, 고려시대 공민왕 당시 원유관 ·강사포를 사여할 때는 아직 피변으로 바꾸기 전의 일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世宗)이 명나라에 강사포를 청하였는데, 이 때는 이미 피변으로 바뀐 후였음에도 그대로 원유관과 함께 보내와 조선 후기까지 이를 그대로 착용하였다.

고종(高宗)은 황제위에 오르자 옛 중국 황제와 동격의 것인 통천관 ·강사포를 착용하였다. 강사포는 포(袍) ·상(裳) ·중단(中單) ·폐슬(蔽膝) ·혁대(革帶) ·대대(大帶) ·옥패(玉佩) ·수(綬) ·말(襪) ·석(舃)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강사포를 착용할 때에는 규(圭)를 들었고, 원유관(황제는 통천관)을 썼다. 그리고 고려 공민왕 때 명나라로부터 사여(賜與)된 강사포에는 방심곡령(方心曲領)이 따르고 있었다.

(1) 원유관:고려시대에 명(明)나라에서 보내온 원유관은 칠량관(七梁冠)에 금박산(金博山)이라 하여 산술(山述)에는 도금(塗金)을 하였고, 매미[蟬] 7수(首)를 위에 부시(附施)하였으며, 주취(珠翠)를 가시(加施)하였고, 서잠도(犀簪導)를 꽂았으며, 양쪽에 조영(組纓)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원유관은 현색의 나(羅)로 만든 구량관(九梁冠)에 양(梁)마다 황(黃) ·창(蒼) ·백(白) ·주(朱) ·흑(黑)의 순으로 5채옥을 앞에, 9옥 뒤에 9옥, 합하여 18옥을 가시하고 금잠(金簪)을 꽂았으며, 주조(朱組) 둘이 양쪽에 있어 턱 밑에서 맺고 나머지는 늘어뜨리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왕세자의 원유관은 왕의 것과 같으면서 팔량관(八梁冠)에 양마다 3채옥을 앞에, 8옥 뒤에 8옥, 합하여 16옥을 가시하였으며, 왕세손의 원유관은 칠량관에 양마다 3채옥을 앞에, 7옥 뒤에 7옥, 합하여 14옥을 가시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 후기 고종이 황제위에 오른 뒤 황태자의 원유관은 오사(烏紗)로 싼 구량관에 양마다 5채옥을 앞과 뒤에 9개씩 철(綴)하였으며, 관의 무(武)와 잠(簪)을 꽂는 곳과 영(纓)을 이은 곳은 모두 금식(金飾)을 하고 금잠을 꽂았으며, 주영(朱纓)을 늘어뜨렸다.
(2) 통천관:오사(烏紗)로 싼 십이량관(十二梁冠)으로 양마다에 5채옥을 가지고 앞과 뒤에 각 12개씩을 장식하였으며, 옥잠도(玉簪導)를 꽂고, 홍색 조영을 늘어뜨렸다.
(3) 포:강색(絳色)의 나로 지었으며, 강색의 깃에 도련과 수구에는 강색 선을 둘렀다.
(4) 상:강색의 나로 지었으며, 전3폭(前三幅) ·후4폭(後四幅)으로서 폭마다 양 갓을 1치씩 꿰메어 이를 삭폭(削幅)이라 하였으며, 허리 사이에는 많은 치마주름, 즉 벽적(襞積)이 있었고, 갓에는 준(純,緣)이 있어 이를 벽(綼)이라 하고, 아래도 준이 있어 이를 석(緆)이라 하였는데, 벽과 석의 넓이는 각 1치 반이고 겉과 안은 합하여 3치였다. 고종황제가 착용한 상은 홍상(紅裳)으로서, 제양은 같은 가운데 전3폭 ·후4폭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연속되어 있어 유(帷), 즉 휘장과 같이 하였다. 황태자의 것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5) 중단:백색 나로 지었으며, 적색 깃에 불문(黻紋) 11개가 있었고, 도련과 수구에는 적색 선을 둘렀다. 왕세자 ·왕세손은 이와 같은 것에다 다만 깃의 불문이 9개였다. 그리고 고종황제가 착용하던 중단은 소사(素紗)로 지었으며, 홍령(紅領)에 불문 13개가 있었고, 홍색 선을 도련과 수구에 두른 것이었다. 황태자의 것도 이와 같으면서 홍령에는 불문 11개를 한 것이었다.
(6) 폐슬:강색의 나로 지었으며, 위아래에 강색 선이 있어 위를 비(紕)라 하고, 아래를 준(純)이라 하였으며, 선 안에 5색으로 된 실띠, 즉 순(紃)을 둘렀고, 위의 양쪽에 금구(金鉤)가 있어 혁대에 걸게되어 있었다. 이것은 원래 무릎을 덮을 정도의 크기였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작은 행주치마 크기로 변모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고종황제와 황태자의 것에는 폐슬에 옥구(玉鉤)를 달게 되어 있었다.
(7) 혁대:금구철(金鉤강사포 본문 이미지 1)을 장식한 것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곤룡포(袞龍袍)의 옥대(玉帶)를 대용하였다.
(8) 대대:거죽을 백색 증(繒)으로 하고 안을 비색(緋色) 증으로 하여 합봉한 것으로, 위는 주색(朱色), 아래는 녹색(綠色)으로 연을 둘렀고, 청조(靑組)로써 맺고는 늘어뜨려 대대에 따른 신(紳)과 가지런하게 하였다.
(9) 옥패:위에 금구(金鉤)가 있고, 밑에 형(衡)이 있으며, 가운데에 거(琚)와 우(瑀)가 있고, 그 밑에 쌍황(雙璜)이 있어 그 사이에 쌍적(雙滴)이 있고, 또 충아(衝牙)가 있었는데, 모두 민옥(珉玉)으로 하였으며, 약옥주(藥玉珠)를 꿰었다. 이 설명만으로는 그 형태를 파악할 수 없는데, 이것은 고종황제와 황태자의 패제(佩制)에서 알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즉, 고종황제가 패용하던 옥패는 위에 금구가 있고, 밑에 형(珩) 1, 우(瑀) 1, 거(琚) 2, 충아(衝牙) 1, 황(璜) 2개가 있으며, 우(瑀) 밑에는 옥화(玉花)가 있고, 옥화에는 옥적(玉滴)을 2개 늘어뜨렸는데, 운룡문(雲龍紋)을 탁식(啄飾)하였고, 묘금(描金)하였다. 그리고 형(珩)으로부터 밑으로 조(組) 5줄을 이어 이에 옥주(玉珠)를 꿰었는데, 걸으면 충아와 두 옥적이 황과 부딪쳐 소리를 냈다. 이에는 옥패 받침으로 훈색 바탕에 황 ·백 ·적 ·현 ·표 ·녹의 6채로 짠 소수(小綬)가 딸려 있었다. 또한 황태자의 것도 이와 같은데 거(琚)가 1개였으며, 운룡문이 없었고, 옥패 받침인 소수도 훈색 바탕에 적 ·백 ·표 ·녹 4채로 짠 것이었다. 옥패는 좌우에 하나씩 차게 되어 있었다.
(10) 수:홍화금(紅花錦)으로 만들었고, 2개의 금환(金環)을 간시한 것이었다. 이것도 고종황제나 황태자의 수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에는 소수(小綏) 3개가 딸렸고, 밑에 청사망(靑絲網)을 늘인 것이었다. 고종황제가 착용한 수는 훈색 바탕에 황 ·백 ·적 ·현 ·표 ·녹의 6채로 짠 운룡문이 있는 것으로 소수 3개가 딸렸고, 옥환(玉環) 3개를 간시하였으며, 청사망을 늘인 것이었고, 황태자의 것은 훈색바탕에 적 ·백 ·표 ·녹 4채로 짠 것으로 옥환을 2개 간시한 것 이외에는 황제의 것과 같은 것이었다.
(11) 말:비색 단(緞)으로 거죽을 하고 비색 초(綃)로 안을 한 적말(赤襪)이었다.
(12) 석:비색 단으로 거죽을 하고 백색 증으로 안을 한 적석(赤舃)이었다. 고종황제가 착용한 적석은황색 조(條)로써 연을 두르고 현색 영(纓)으로써 맺게 되어 있었으며, 황태자의 것은 적석에 흑색 구준(絇純)을 하고 석수(舃首)를 흑식한 것이었다.
(13) 규:조선시대의 길례(吉禮)에는 청옥규, 가례(嘉禮)에는 백옥규였는데, 길이 9치, 나비 3치, 위의 염수(剡首) 1치 5푼의 것이었고, 왕세자 ·왕세손의 것은 길이 7치, 나비 3치, 염수 1치 5푼의 것이었다. 고종황제가 소지한 규는 백옥규로서 길이 1자 2치였고, 등마루에 쌍식문(雙植紋)을 하였으며, 위를 뾰족하게 한 것으로 밑을 황기(黃綺)로 맺고, 금룡문(金龍紋)이 있는 황기낭(黃綺囊)으로 도장(鞱藏)하였으며, 황태자의 것은 길이 9치 5푼으로 밑을 금(錦)으로 맺고 금낭(錦囊)에 도장한 것이었다.
(14) 방심곡령:이것은 고려시대 공민왕 때 명나라로부터 사여된 원유관 ·강사포에 있고, 조선시대에는 면복(冕服)과 조신(朝臣)의 제복(祭服)에 있었던 것인데, 백라(白羅)로 만들고 양쪽 갓에 영(纓)이 있어 왼쪽은 녹색, 오른쪽은 홍색으로 되어 있었으며, 가슴에 달게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