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슬

폐슬

[ 蔽膝 ]

요약 무릎 앞을 가리는 하의(下衣).

옛날 임금의 면복(冕服)의 곤복(袞服), 원유관포(遠遊冠袍)의 강사포(絳紗袍), 벼슬아치의 조복(朝服) ·제복(祭服)에 딸린 것으로, 의(衣)와 상(裳) 위에 착용하여 무릎 앞만 가린다. 원시 사회에서는 짐승과 물고기를 잡아 식량으로 쓰고 가죽을 이용하여 겨우 앞을 가렸다. 이것이 폐슬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문화가 발전하고 의복이 발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복이나 제복 위에 폐슬을 계속 착용하였다. 이는 일찍이 그들에게는 물을 마시면 그 본을 잊지 않는다는 음수사원(飮水思源) 사상이 있어, 그 근원을 이루는 불망조덕(不忘祖德)을 표시하여 최초로 발명한 복장인 폐슬에 대한 불망에서라고 한다. 따라서 의료(衣料)로 포백(布帛)이 생긴 후에도 얼마 동안은 가죽으로 폐슬을 만들어 착용한 것을 볼 수 있다.

폐슬의 형태는, 《(隋書)》 예의지(禮儀志)에 설명되어 있는 것을 보면 “위의 나비를 1척으로 하여 천수(天數)를 상징하였고, 아래 나비는 2척으로 하여 지수(地數)를 상징하였으며, 길이 3척으로 하여 삼재(三才)를 상징하였다” 라고 되어 있어, 을 이루었다. 《(唐書)》 거복지(車服志)에는 “목이 5촌이고 어깨에 나비 2촌의 양각(兩角)이 있어, 혁대에 부식시켰다”라고 되어 있어, 폐슬 위에는 가운데에 5촌 나비의 목을 만들고, 양쪽 어깨에 해당하는 부분에 나비 2촌의 각(角)을 만들어 혁대에 이었음을 알 수 있다. 《(宋史)》 여복지(輿服志)에는 “위에는 비(紕)가 있고 아래에는 준(純)이 있다”라고도 하여, 폐슬에는 연식(緣飾)이 있어 위의 것을 비, 아래의 것을 준이라 일컬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국왕의 구장복(九章服)의 폐슬을 보면, 훈색(纁色)의 증(繒:비단)으로 만들었으며, 같은 색의 같은 감으로 위에 비, 아래에 준을 둘렀고, 준식(純飾) 안쪽에 오색선조(五色線條)로 된 순(紃:끈)을 둘렀다. 안 양편에는 위에서 5치 밑으로 내려 차례로 조(藻) ·분미(粉米) ·보(黼) ·불(黻)의 4문장(紋章)을 수놓았으며, 비식(紕飾) 위의 가운데에 옷깃 같은 목이 있고, 목 양 옆에 옥구(玉鉤) 1개씩이 달려 있다.

(高宗)이 황제가 된 1897년(광무 원년)에 정한 12장복(十二章服)의 폐슬을 보면 훈색 나(羅)로 만들고, 다른 것은 같으며, 안에는 위에 용(龍) 1개, 아래에 화(火) 3개의 문장을 수놓았다. 또한 벼슬아치의 조복 ·제복의 폐슬은, 왕복의 것과 형태는 같으면서 적색 초(綃:生絲로 얇게 짠옷감)로 만들었으며, 같은 색과 같은 감의 비와 준의 면식이 있고, 준식 안쪽에 백색선조(白色線條)를 둘렀다. 여기에는 문식(紋飾)이 없었다. 조선 후기에는 조복의 적초의(赤綃衣)와 제복의 청초의(靑綃衣) 앞에는 각기 같은 색의 소형 폐슬 모양의 것을 달고 폐슬은 없어졌는데, 이것을 속칭 ‘눈물받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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