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령탈춤

강령탈춤

[ Gangnyeong Talchum (Mask Dance Drama of Gangnyeong) , 康翎탈춤 ]

요약 황해도 강령지방에 전승되어오던 해서(海西)탈춤의 하나로 일종의 가면극(假面劇). 1970년 7월 22일 국가무형유산으재로 지정되었다.
강령탈춤 제7과장에 등장하는 미얄영감

강령탈춤 제7과장에 등장하는 미얄영감

지정종목 국가무형유산
지정일 1970년 7월 22일
관리단체 (사)국가무형유산 강령탈춤보존회
소재지 서울특별시
기예능보유자 김실자·김정순·이정석·송용태
종류/분류 무형유산 / 전통 공연·예술 / 연희

1970년 7월 22일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봉산탈춤과 더불어 해서탈춤의 쌍벽을 이룬다. 이 놀이는 해마다 5월 단오 때 단오놀이의 하나로 행하여지던 민속연희(民俗演戱)인데, 그 기원을 삼한시대에 두기도 한다. 이는 놀이에 등장하는 맏양반·둘째양반·재물대감을 각각 마한양반·진한양반·변한양반이라고 한 별칭에서 유추한 것 같으나, 오히려 한말 국권피탈과 더불어 해주감영 소속인 교방(敎坊)의 가무인(歌舞人)들이 해산되고, 통인청(通引廳)을 중심으로 집결되었던 탈군들이 해산되자 그 일부가 강령으로 모여들어 이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라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한편, 강령 부근의 재인부락(才人部落)인 강천리(康泉里)도 강령탈춤의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으리라 추측된다. 이 강령의 놀이패들은 5월 6∼8일의 3일간을 황해 감영에 나가서 각도에서 모인 여러 탈춤패들과 경연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 때 우승을 하면 감사(監司)에게서 돈 천 냥(千兩)을 상으로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봉산탈춤처럼 흥행되지는 못하였고, 오히려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점차 쇠퇴하여 일시 중단되었다가 8·15광복 이후 월남한 몇몇 연희자들에 의해 다시 재현되고 있다.

구성

강령탈춤은 본격적 탈놀음이 있기 전의 순서인 ‘길놀이’부터 시작되는데, 이 때는 말뚝이·사자·원숭이·먹중·상좌·노승·소무·취발이·양반 4명·영감·할미광대·남강노인·마부·잽이(악사) 6명 등의 순으로 서서 팔경대(八景臺)를 출발하여 마을을 한 바퀴 돈 뒤 놀이판에 이르게 되면, 먼저 탈고사를 지낸 다음에 본격적인 탈놀음으로 들어간다.

놀이의 내용은 파계승에 대한 조롱, 양반계급에 대한 모욕, 일부처첩(一夫妻妾)의 가정파탄과 서민생활의 폭로 등을 그린 7마당으로 구성되는데, 각 마당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마당(사자춤 마당)에서는 사자와 원숭이가 등장하여 타령·굿거리장단에 한참 춤을 추다 퇴장한다.

배경과 역사

강령탈춤에 등장하는 가면들은 말뚝이(8먹중 겸용) 2개·사자 2개·원숭이·먹중 2개·상좌(上佐) 2개·마부 2개·맏양반·둘째양반·셋째양반·도령·영감(셋째양반을 공용)·노승·취발이(8먹중 겸용) 등으로 그 배역은 21가지이나 겸용하는 것이 있어 실제로는 13개가 쓰인다. 이 탈들은 같은 해서탈춤계(系)의 봉산탈춤의 가면들보다 사실적(寫實的)인 얼굴로 ‘인물탈’이며, 의상에 있어서도 소매가 땅에 닿을 정도로 긴 회색 칡베장삼을 공통으로 입고 있다.

이 때문에 춤사위도 장삼소매를 고개 너머로 힘차게 휘두르는 ‘장삼춤’이 많다. 이러한 배역들 외에 무대 한편에서 반주하는 장고·북·피리 2·징·대금·해금·꽹과리 등의 악사들이 있어, 염불·타령·굿거리 등의 장단으로 춤놀이를 진행시킨다. 기능보유자(技能保有者)로는 악사 겸 가면제작자 박동신(朴東信), 맏양반·먹중 역을 맡는 김지옥(金知玉), 피리·장고악사인 지관룡 등이 지정되었다.

강령탈춤 본문 이미지 1
수심가긴아리신고산타령궁초댕기북청사자놀음산염불몽금포타령봉산탈춤강령탈춤산대놀이한오백년정선아리랑단오제가면극농부가육자배기새타령강강술래진도아리랑고싸움놀이강강술래돌실나이오광대놀이동래야류수영야류경산자인단오제뱃노래쾌지나칭칭밀양아리랑별신굿놀이차전놀이방아타령태평가풍년가양산도늴리리야도라지타령방천놀이오돌또기

카테고리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