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문화재-
중원고구려비
종 목 국보 제205호
지 정 일 1981.03.18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부락 280-11
시 대 고구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기도 했지만 비의 중요성을 몰랐던 동네 주민들이 우물가의 빨래판으로 사용하기도 하여 발견된 당시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전부대사자’·‘제위’·‘사자’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신라토내’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려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충추 장미산성
종 목 사적 제400호
지 정 일 1997.11.11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 산77-1외
시 대 고구려
충주시 가금면에 있는 장미산의 능선을 따라 둘러 쌓은 둘레 약 2.9㎞의 삼국시대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4권에 보면 ‘하천 서쪽 28리에 옛 석성이 있다’라는 기록과 『대동지지』에 ‘장미산의 옛 성의 터가 남아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1992년 조사결과 성 안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들을 통해 백제·고구려·신라가 차례로 이 성을 점령, 경영하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북쪽에 있는 절인 봉학사 지역 일부를 빼고는 성벽이 원래 모습대로 남아 있다. 성벽은 돌을 대강 다듬어 직사각형으로 쌓았는데, 서쪽과 서남쪽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북쪽 정상부분의 성벽을 따라 있는 좁고 긴 군사용 참호는 주변 성벽의 재료를 이용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남쪽의 대림산성과 강 건너편 탄금대의 토성, 충주산성과 서로를 보호하며 도왔을 것으로 보인다.
파주의 오두산성(사적 제351호)과 지형조건이 비슷해 성을 쌓은 시대나 배경 등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유적이다.
포천반월성지
종 목 사적 제403호
지 정 일 1998.02.20
소 재 지 경기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산5-1외
시 대 고구려
포천시 군내면에 있는 산성이 있는 자리로 길이는 1,08포천시 군내면에 있는 산성이 있는 자리로 길이는 1,080m이다. 산성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쌓았다고 전해지나, 조사결과 고구려 때 쌓은 성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러 책에 고성(古城), 산성, 반월산성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대동지지』를 통하여 광해군 10년(1618)에 고쳐 쌓고, 인조 1년(1623)부터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연려실기술』, 『포천군읍지』, 『견성지』에서도 돌로 쌓았다는 기록과 함께 여러 가지 당시 성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현재 성의 옛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시설물로는 남쪽과 북쪽의 문터, 성벽 바깥쪽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 만든 치성 4개소, 건물터 6곳, 배수시설이었던 수구터, 장수의 지휘대였던 장대터,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세웠던 망대터 등이 있다.
동수묘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순리에 있는 고구려시대 벽화고분. 북한 국보 제28호. 안악 제3호분이라고도 하며, 북한의 지정 명칭은 ‘하무덤’이다. 높이 7m, 남북 길이 33m, 동서 길이 약 30m에 이르는 방대원형의 토분으로, 1949년에 발굴 조사하였다. 널방 안에 진나라 때 사경체로 쓴 묵서가 있어 이 고분이 357년(고국원왕 27)에 조성된 한국 최고의 벽화고분임이 밝혀졌다.
장군총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석릉. 3세기 초부터 427년까지 고구려가 도읍한 지안현 퉁거우평야에는 광개토왕릉비와 고구려 최대형급의 무덤인 태왕릉, 사신총 등 석릉과 토분 1만 기가 있으나 외형이 거의 완존한 석릉은 이것뿐이다.
광개토대왕비
중국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 비신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고구려문화재의특징
고구려는 정치와 군사적으로 강국이었으며, 제국적인 성격을 띄웠으나, 동시에 정신이 자유롭고 문화가 매우 발달한 문화 국가였다. 고조선과 부여를 계승하였으므로 초기부터 문화가 발달했으며 5세기에 이르러 영토가 확대되면서 질적으로 더욱 성숙해졌고, 보다 다양성을 띄게 되었다.
고구려 문화는 중국의 문화와 다른 점이 많다. 문화의 주체가 되는 종족이 전혀 다르다. 또한 중국문화는 유교적 전통이 강하고,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하였으므로 보다 체계적이고 이동성(mobility)이 약하다. 문화를 수혈받는 지역이 서역의 일부와 남쪽이었다. 반면에 고구려는 서역 및 북방 초원, 그리고 대삼림 지대의 문화를 수용했으므로 경제 형태도 다양하고, 문화도 각양각색이며, 이동성이 강한 특성이 있다. 때문에 중국 문화를 자극하고, 영향을 주었으며, 전체적으로는 동아시아 문화에 활력과 개방성을 불어 넣어주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는 만주 지역의 비중있는 문화적 공간이 사라짐으로써 동아시아 문화는 중국 문화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전반적으로 정체성을 띄우게 되었다.
고구려는 독특한 지리 문화적 특성과 유목 민족이 누리는 자유로운 정신성을 바탕으로, 문화적으로는 개방적이었고, 보편성을 지닌 세계적인 인식을 가졌다. 그러한 반면에 자기 집단과 문화에 대한 자아 의식이 강하여 종족 정체성에 충실하였다. 때문에 정치 군사적으로 제국이었음에도 다른 민족들을 힘으로 억압하지 않았다. 고구려인들의 정체성과 포용력있는 문화 생태, 자유를 끝없이 희구하는 정신성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자유스러운 고분 벽화나 웅대하고 성스러운 광개토대왕비문 등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아름다운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 문화의 특징이라 하면 패기가 있고 용감하고 씩씩하며 용맹하고 더불어 고구려의 기상이 돋보인다.
손아파 답변답변확정좀 부탁드립니다. 궁금한점은 쪽지 보내주시구요...그리구 참고로 요약하면서 요령것 쓰셔야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