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문화유적과 문화>
1. 전기가야문화 가야의 문화는 기원전 1세기부터 4세기 이전의 것을 전기가야문화로 구분해 볼 수 있다.
4세기 이전의 가야 지역 중에서 문화적인 선진 지역은 김해를 비롯한 경남 해안지대였다.
이는 그 지역의 독특한 생활유적인 분묘유적[패총(貝塚),목관(木棺) 또는 목곽(木槨)을 내부구조로 가진 토광묘(土壙墓)]속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지역의 패총에는
양산 패총,
부산 조도 패총,
김해 봉황동(구 회현리) 패총,
부원동 패총,
진해 웅천 패총,
창원 성산 패총 등이 있다.
이들은 철기문화요소가 나타나는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시작해 5세기 정도까지 존속되었던 생활유적이다.
패총문화의 기본 요소로서는
굴 껍데기를 비롯한 수많은 패각과,
환원염으로 소성된 적갈색·회색 계통의 와질토기(瓦質土器) 및 고식도질토기(古式陶質土器),
철도자(鐵刀子), 철겸(鐵鎌), 철촉(鐵鏃)등의 철제이기(鐵製利器)를 들 수 있다.
한편 이 지역에는 토광목관묘·목곽묘 등의 분묘유적도 상당히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서
창원 다호리 목관묘,
김해 양동리 목관묘,
김해 지내동 옹관묘,
고성 송천리 석관묘,
밀양 내이동 목관묘,
동래 구서동 목관묘 등이 있다.
그리고 3∼4세기의 것으로서
김해 예안리, 양동리, 칠산동, 퇴래리, 대성동 등의 목곽묘를 비롯해서,
동래 노포동·복천동 토광묘, 부산 화명동 석곽묘, 창원 삼동동 옹관묘 등이 있다.
가야 지역을 포괄하는 전체 영남 지역의 토광묘 유적들을 분석해, 전기가야문화의 발전과정을 단계적으로 추론해 보자. 영남 일대 토광묘문화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정리해 볼 수 있다.
① 후기무문토기문화(세형동검문화) 계열의 토광목관묘 단계,
② 와질토기를 부장하는 토광목관묘 단계,
③ 와질토기를 부장하는 토광목곽묘 단계,
④ 도질토기를 부장하는 토광목곽묘 단계 등이다.
유물 상호간의 상대편년에 따르면,
대체로 1단계는 기원 전 1세기경,
2단계는 기원 후 1세기부터 2세기 전반까지,
3단계는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후반까지,
4단계는 4세기경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1단계 경주 입실리 유적, 조양동 5호분과 창원 다호리 1호분 등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새로이 발굴된 토광묘는 길이 2.7m, 너비 1.3m, 깊이 2m 정도의 토광에 목관이 설치되어 있다.
그 내부에는 전 단계 이래의 흑색 및 갈색 무문토기와 칠기류(漆器類), 그리고 세형동검(細形銅劍)·동모(銅矛)·동탁(銅鐸)·동경(銅鏡) 및 철단검(鐵短劍)·철부(鐵斧) 등 청동기 위주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 시기의 토기는 후기무문토기 이래의 갈색점토대발(褐色粘土帶鉢)과 흑도장경호(黑陶長頸壺) 등의 기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토기를 제외한 무기·장신구 등은 거의 모두 북한 서부 지역의 세형동검 문화유형을 보이고 있다.
특히 창원 다호리 1호분에서 출토된 철모는 형태상으로 보아 대동강 유역의 단조철기문화와의 연관성이 인정된다. 그러므로 그 새로운 문화가 전래된 계기는 기원전 2세기 말 위만조선의 멸망과 그에 따른 유이민 파급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목관의 규모나 유물의 성격에서 기술이나 부(富)의 축적이 충분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 시기는 영남 지방에 위만조선 계통의 선진문화가 일부 이주민과 함께 파급해 들어옴으로써, 앞으로 가야국과 같은 정치세력이 나타날 수 있는 ‘문화 기반’이 성립된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2단계 경주 조양동 38호분과 김해 양동리 2호분·7호분 및 창원 다호리 11호분 등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길이 3m, 너비 1.3m, 깊이 1∼1.5m 정도의 토광에 목관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내부에는 무문토기가 사라지고, 폐색요(閉塞窯)에서 제작되어 단단하면서도 흡수성이 강한 갈색 및 회색의 와질토기가 보인다. 또한 청동기가 거의 사라지고 철기가 늘어나 동경과 판상철부(板狀鐵斧)·단조철부·따비·철단검·철촉·철도자 등이 출토되었다.
이 시기의 토기문화는 1단계의 흑도장경호와 점토대발이 점진적으로 형태가 변화해, 조합우각형파수부장경호(組合牛角形把手附長頸壺)와 주머니형의 원저단경호(圓底短頸壺)로 발전하고 있다.
이는 영남 지역 토광묘문화가 후기무문토기시대의 문화기반을 근본적으로 제압했다기보다는, 그 기반을 토대로 해서 점진적으로 계승 발전되어 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2단계에는 타날문단경구형호(打捺文短頸球形壺)와 같은 새로운 기형의 토기가 나타나 공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기원전 3세기 말 이래 한반도 서북 지역 고조선 주민들이 사용하던 중국 전국계통(戰國系統)의 제도기술(製陶技術)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판상철부 등의 철기가 다량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 때에 철기 제조기술의 보편화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전반기에 속하는 양동리 2호분은 목관묘에다 농공구(農工具) 계통의 철기유물만 보인다.
이에 비해, 후반기인 양동리 7호분의 단계에는 작기는 해도 목곽이 나타난다. 그리고 철기 구성에서 철검·철모·철촉 등의 무기가 다량 추가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국가권력의 무력독점적 측면에서 전반기보다 한 단계의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로 보아, 전 단계에 나타나기 시작한 토광묘문화가 영남 지역 문화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기를 마련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2단계에 접어들면서 토착화해 발전해 나갔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국가 형성의 맹아를 보인 것이라고 하겠다.
(3) 3단계 부산 노포동 고분군과 김해 양동리 162호분, 경주 조양동 3호분 등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비교적 큰 고분의 경우는 길이 4∼5m, 너비 2∼2.5m, 깊이 0.3∼0.9m 정도이다. 그 외 여러 규모의 토광에 목곽과 목관이 설치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유물의 양이 많고 전 단계보다 약간 경질이면서 기종이 다양한 신식 와질토기가 나타나다. 철기 유물의 종류는 전 단계와 비슷하나 장검·환두대도(環頭大刀)와 보습·쇠스랑 등이 새로이 등장하였다.
이 시기의 토기유형인 화로형토기(火爐形土器), 유개대부장경호(有蓋臺附長頸壺) 및 직구호(直口壺)는 전 단계의 주머니호·조합우각형파수부장경호를 계승하였다. 그러면서도 토기 밑부분에 대족(臺足)이 붙고 뚜껑이 추가되어 낙랑계 토기와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영남 지역의 재래 토기문화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일부 새로운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보인다.
또한 대형 목곽이 설치되어 부장 유물의 양이 많아졌으며, 강한 무력과 권력을 상징하는 환두대도가 나타났다. 김해 양동리 162호분에서는 철기를 대량으로 만들기 위한 중간소재로서, 화폐의 기능을 가진 판상철부형 철정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볼 때, 3단계의 문화는 일부 외래적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재래문화를 토대로 권력 통합을 이룸으로써 각지에 단위 소국들이 나타날 정도로 발전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낙동강 유역에서는 김해 양동리 지방의 문화가 양적·질적 측면에서 가장 발전된 면모를 보였다.
(4) 4단계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 경주 정래동 고분 등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길이 8m 정도의 세장형(細長形) 또는 주부곽식(主副槨式)의 대형 토광목곽묘가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그 내부에서는 화로형토기·단경호·무개무투창고배(無蓋無透窓高杯) 등의 도질토기가 나타난다. 그리고 대형 철모 등 철제무기의 수량이 급증하고 철제단갑(鐵製短甲)과 같은 무구도 출토되었다.
목곽의 대형화 또는 부곽의 설치에 따라 부장 공간이 확대되었다. 그러면서 그 공간에 수납된 토기와 철기 등의 부장품도 그만큼 더 늘어났다. 철제단갑의 출현은 정치권력의 무력적 성격이 강화된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의례적 관습에 따라 부장용(副葬用)으로 선호되었을 와질토기에 대신해 도질토기가 부장되기 시작한 것은, 정치권력의 성격이 보다 실질적인 것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그러므로 4단계는 기존의 소국들이 상호 충돌하면서 내부의 지배권력을 한층 더 실질적으로 강화시켜 나간 시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전반기에 낙동강 유역의 패권이 김해 양동리로부터 대성동으로 옮겨졌는데, 이는 지배 집단의 선택에 의한 이주인 듯하다.
이처럼 경상남도 해안지대의 주민들은 지속적으로 부(富)와 기술을 축적하면서 사회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경제기반으로서는 이 지역의 풍부한 노두철광상(露頭鐵鑛床) 및 양호한 해운 입지조건을 들 수 있다.
우선 철산지라는 면에서 볼 때, 당시 철기 제작의 부산물인 철재(鐵滓)가 나온 곳만 해도 김해 봉황동 패총, 창원 외동 성산 패총, 고성 패총, 김해 부원동 패총 등이 있다. 게다가 성산 패총에서는 야철지도 드러났다.
또한 창원 다호리나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단야도구인 철망치나 철집게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는 다양한 크기의 철정들이 수십 매씩 10의 배수로 출토되었다.
이는 낙동강 하류 지역이 철 공급의 중심지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또한 철 자원 개발 및 철기 제작기술의 보급에 따른 야철 그 자체가 이 지역의 발전 및 그에 따른 패총문화의 형성에 기본 동력으로 작용했음을 반영한다 하겠다.
다음으로 해운의 면에서 볼 때, 3세기 당시 낙랑에서 출발해 서해 및 남해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배가 구야한국(狗邪韓國)에 들렀다가 해협을 건너 왜지로 향했음을 전하는 문헌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아, 김해를 비롯한 경상남도 해안지대 가야제국의 입지적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당시 경상남도 해안지대의 세력들은 ≪위지≫ 한전 변진조에 보이듯이, 철을 매개로 한(韓)·예(濊)·왜(倭)·2군(二郡)과 활발한 교역을 벌여 이익을 얻고 있었다.
김해 패총에서 출토된 화천(貨泉), 창원 성산 서남구 패총의 패각층에서 나온 오수전(五銖錢), 김해 양동리 토광묘의 후한대(後漢代) 상방경(尙方鏡), 함안 사내리 고분에서 출토된 전한경(前漢鏡)을 모방한 소형 방제경(倣製鏡), 창원 다호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붓 및 칠기류 등은 낙랑과의 교역을 방증해 주는 것들이다.
그리고 김해 지내동 옹관묘에 부장된 대상구연토기(袋狀口緣土器)나 김해 부원동 패총에서 나온 이단구연호형토기(二段口緣壺形土器),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통형동기(筒形銅器)·파형동기(巴形銅器) 및 방추차형석제품(紡錘車形石製品) 등은 왜와의 교역 또는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또한 그 지역의 기층사회를 이루는 주민들은 이미 오곡과 벼를 재배하고 비단을 만들었다는 걸 기록으로 알 수 있다. 김해 부원동 A지구 패총에서 출토된 종류만 보더라도 벼·보리·밀·콩·조 등의 곡물과 굴·털조개 등의 해산물이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경상남도 해안지대의 세력기반은 도작(稻作)을 비롯한 농경문화와 조개 채취를 비롯한 어로문화를 저변으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보다 특징적인 것은 그 저변을 통괄하면서 철산업을 일으키고 있던 토광묘 계통 지배집단들의 해운을 이용한 중개무역이었다고 하겠다.
그렇게 이룩한 사회경제적 축적 및 그에 바탕을 둔 정치체제의 발전은 상당한 수준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 결과 낙랑의 소멸 이후에도 전기가야연맹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후기가야문화
영남 지방 토광묘문화의 4단계 이후,
영남 지방의 고분 유적·유물의 계통은 크게 2개의 문화권으로 양분되기 시작한다.
그러한 현상은 석곽묘 유적에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문화권 양분은 곧 신라·가야 세력권의 분리와 관계가 있다.
이는 고구려의 배경 아래 경주세력의 주도로 일어나는 신라의 영역 팽창과 가야연맹권의 축소에 따른 결과로 파악된다. 그 시기는 문헌사료에서 신라가 고구려의 강한 영향 아래 있었다고 판단되는 신라 나물·실성·눌지 마립간대, 즉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에 걸치는 시기였으리라고 추정된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을 중심으로 해당 시기의 영남 지방 석곽묘관계 유적·유물을 지역적으로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묘제의 측면에서 볼 때, 적석목곽분이 나타나는 경주를 제외한 나머지 영남 지방의 묘제는 거의 모두 내부구조가 수혈식장방형석곽묘(竪穴式長方形石槨墓)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수혈식석곽묘의 발생 원인은 이원적이다.
먼저 원삼국시대의 토광목곽묘가 목곽 외부의 진흙 충전부를 돌로 채워 넣는 과도기를 거쳐 보다 편리한 축조방식인 수혈식석곽묘로 전환한 측면이 있다. 그리고 선사시대 이래의 지석묘 하부 구조 또는 석관묘나 수혈식의 작은 석곽이 계승되어 규모의 확장을 본 측면도 있다.
그러나 낙동강 동안 중심의 의성·안동·경산·대구·칠곡·성주·선산·창녕·울산·양산·부산 등지에서는 일찍부터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와 횡구식석곽묘(橫口式石槨墓)가 수혈식석곽묘와 공존하면서 축조되고 있었다.
그래서 같은 수혈식석곽묘라고 해도, 신라문화권에서는 평면 형태가 너비에 비해 길이가 짧은 장방형(너비 : 길이=1 : 1.3 정도)을 보인다. 이 지역에 일어나고 있던 적석목곽분 및 횡혈식·횡구식석곽묘 등 다양한 묘제의 변화는 기존의 토광목곽묘의 변천 과정에 고구려문화를 흡수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낙동강 서안 중심의 고령·합천·거창·함양·남원·함안·고성·사천·진주·산청·하동·김해·창원 등지에서는, 원삼국시대 이래의 토광목곽묘가 더욱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평면 형태가 너비에 비해 길이가 긴 장방형 즉 세장형(너비 : 길이=1 : 4 이상)을 보이는 할석 축조의 수혈식석곽묘가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다른 묘제는 보이지 않는다.
낙동강 서안 지역의 묘제에 이와 같이 수혈식석곽묘의 내부 구조를 답변확정한 묘제만이 보편적으로 성행한 이유는, 그 사회의 문화가 비교적 오랫동안 외부문화의 동향에 휩쓸리지 않고 수혈식 장제(葬制)만을 고집해 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편 출토유물 중에서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는 토기의 측면에서 볼 때, 영남 지방의 5∼6세기 토기는 고배(高杯)와 장경호(長頸壺)를 기본적인 기종(器種)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같은 기종이라고 하더라도 각 기종의 사이에는 지역에 따라 형태상·조합상에 약간의 차이점이 나타난다.
우선 낙동강 동안의 북부 지역인 경주 황남동, 의성 탑리·장림동, 안동 마동·중가구동·조탑동, 경산 북사동·임당동, 대구 내당동·비산동·불로동·구암동, 칠곡 인동·약목, 성주 성산동, 선산 낙산동 고분군과 남부 지역인 울산 양동·화산리, 부산 복천동·당감동·오륜대·덕천동, 양산 북정리, 창녕 교동·계성 고분군 등지에서 출토된 토기유물들은 공통적으로 이단교열투창(二段交列透窓)의 유개고배(有蓋高杯)와 V자형 경부(頸部)의 대부장경호(臺附長頸壺)가 기본 조합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대구·경산·창녕·성주 등의 각 지역별 토기유물상은 경주 적석목곽분 출토 신라전기양식토기와 비슷하면서도 각각 약간의 이질적 요소가 보인다. 이것은 각 토기들이 해당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그 기형의 세부적인 형태까지 경주의 것을 따르고 있는 이상, 경주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또한 여기서 출토되는 유물 중에서 금동관(金銅冠)의 경우에 대구·경산·양산·동래·성주 등지에서 출토된 것은 경주의 적석목곽분들에서 출토된 금관(金冠)과 거의 비숫한 양식을 띠면서도 그 재료면에서 격이 떨어진다.
이는 각 지역 군장간의 신분 차이를 반영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유물상의 격의 차이는 장신구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방의 고분축조세력들은 아직 그 지역 지배층의 자체 기반이 완전히 해체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경주세력에 의한 일정한 규제를 받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라소국’ 또는 ‘신라계열 소국’으로 지칭해야 온당할 것이다. 특히 전기가야연맹에 속해 있다고 거론되던 지역 중에서 부산·창녕·성주·개령 등이 여기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신라의 세력 확장 및 가야연맹권의 축소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낙동강 서안의 북부 지역인 고령 지산리, 합천 옥전·삼가·봉계리·저포리·중반계·반계제, 거창 말흘리, 함양 상백리·백천리, 남원 월산리·건지리 고분군과 남부 지역인 함안 말산리·도항리, 진북 신촌리, 고성 오방리, 사천 예수리·송지리, 진주 가좌동·수정봉, 산청 중촌리, 하동 고리리, 김해 예안리·칠산동, 창원 도계동, 진해 성내동 고분군 등지에서 출토된 토기유물들은 낙동강 동안 지역의 신라양식토기들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여기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단직렬투창(二段直列透窓)의 유개고배(有蓋高杯), 유개장경호(有蓋長頸壺), 개배(蓋杯), 발형기대(鉢形器臺) 등으로서, 전체적인 토기 조합상만 놓고 보더라도 기대류(器臺類)가 그 말기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토기유물들은 낙동강 서안의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번창하였다. 특히 고령 지산리 32·33·34·35호분 및 44·45호분 등의 고분 규모나 유물 출토량은 가야 지역의 다른 고분군과 비교해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그러므로 후기가야문화권을 전기가야시대와 비교해 볼 때, 문화중심은 김해를 비롯한 경남 해안지대에서 고령을 비롯한 경상 내륙 산간 지방으로 옮겨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화중심의 이동과 영역의 축소 현상은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전반 사이에 일어난 것이었다.
이 시기는 고구려의 후원을 받아 신라가 급성장하고 전기가야연맹이 그에 대항하다가 해체되는 시기이다. 가야 지역 중에서 산간 내륙 지방은 5세기에 들어와 점차 많은 고분이 각처에 번성해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런데 그 지역에 성행하던 기대와 장경호 및 고배 등은 그 시원 형태를 창원·김해·부산 등의 4세기대 패총과 분묘유적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후기가야고분 출토 금속기 유물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철촉·철겸·도자·철모·대도(大刀)를 비롯한 철제무기이다. 그리고 마구·갑주·장신구 등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
이 중에서 철기의 제작기술이 당시 백제의 발전된 기법인 초강법(炒鋼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4세기 이전 경남 해안지대에서 출토된 철기유물들의 제조법인 괴련강(塊鍊鋼)과 같다는 점은 주목된다.
그러므로 5세기 이후에 고령·함양 등의 내륙 산간 지역이 급속히 개발되기 시작한 계기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경남 해안 지방의 몰락과 그로 인한 이주민 파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상 내륙 산간 지방에서 안정적인 농업기반을 유지하던 토착 세력들은 이들의 기술과 문화를 수용하면서 발전해, 늦어도 5세기 후반까지는 가야 전체의 문화 중심으로 대두하게 된 것이다.
한편 당시의 가야 남부 지역은 지역별로 서로 다른 문화를 영위하고 있었다. 따라서 유물상으로 보아 진주·사천·고성·함안 등의 서남부 지역과 창원·진해·김해 등의 동남부 지역으로 구분된다.
고성·함안 등의 서남부 지역에서는 이 지방의 독특한 토기형식으로서 수평구연호(水平口緣壺=廣口長頸壺), 1단세장형투창유개고배(一段細長形透窓有蓋高杯), 삼각형투창무개고배(三角形透窓無蓋高杯) 등이 나타났다.
그와 비슷한 형식을 띤 화염형투창무개고배(火炎形透窓無蓋高杯)는 지금까지의 출토 예로 보아 함안의 독자형식인 듯하다. 이러한 토기들의 분포상황은 5∼6세기에 걸쳐 이 지역이 급격한 문화 발전을 이루지는 못했어도, 백제·신라 등의 외부세력에 대해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지역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고령을 비롯한 가야 북부 지역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고령 지산리 계통의 토기 형식들인 2단직렬투창유개고배·유개장경호·기대·단추형꼭지뚜껑 등이 나타난다.
이러한 유물 출토상황은 5세기 후반 이후로 고령 대가야의 세력 및 문화가 가야 북부 지역에만 보급되는데 그치지 않고, 가야 서남부 지역의 일부까지 미쳤던 흔적을 보이는 증거로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가야 동남부 지역인 김해·창원 등지의 유물상은 서남부 지역의 그것과 상당히 구분되는 모습을 보인다. 창원·김해 지역은 4세기에는 부산 지역과 아울러 대형 목곽묘와 외반구연무투창고배(外反口緣無透窓高杯)의 중심 지역으로 융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5세기 이후로는 규모가 소형 석곽분 정도로 위축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낙동강 동안 양식 토기가 보편적으로 출현하고 있다. 그나마 5세기 전반에 속하는 유적·유물은 많지 않다.
김해·창원 지역의 이러한 문화유물상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전기가야의 주체세력이 큰 타격을 입고 괴멸된 후, 그 지역에 잔존한 소규모 집단들이 정신적 기준을 잃고 신라문화로 편향되는 경향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김해 예안리 고분군과 창원 도계동 고분군 등에서 고령계의 토기들이 출현하면서 유물의 양이 증대되고 있음을 보아, 5세기 후반에 이르러 고령 대가야의 문화적 영향 아래 다시 복구의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유적들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전부 대가야계통의 것으로 교체된 것은 아니다. 5세기 전반 이래의 신라토기들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가야 동남부 지역의 세력들이 대가야에 완전히 경도되었던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530년대에 신라·백제의 공세에 의해 가야연맹의 결속이 위기에 처하자, 김해와 창원의 세력들은 가장 먼저 신라에 자진해서 투항하게 되었던 듯하다.
그 뒤 6세기 중엽으로 편년되는 가야 고분유적으로는 고령 지방에서 발견된 5기의 횡혈식석실분과 합천 삼가 1호분 B·G유구 및 2호분 A·B유구, 합천 창리 A지구에서 내부구조가 장방형 수혈식석곽으로 이루어진 다곽분(多槨墳)들의 대다수, 진주 수정봉·옥봉 고분군 등이 있다.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문화유물로 볼 때, 5세기 이래의 전술한 것과 같은 문화 분포경향은 대체로 큰 변동 없이 지속된다고 보인다. 그러나 가야 지역 6세기 중엽 유적·유물에서 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그리 큰 변화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부 지역의 경우에 백제문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인다는 점이다.
즉, 고령 고아리 벽화고분은 석실의 터널식 천장구조가 공주 송산리 전축분과 유사하다. 그리고 그 곳에 그려진 연화문(蓮花文)의 양식이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과 상통해, 6세기 중엽 시기에 대가야가 백제의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6세기 중엽 시기에 가야 지역은 전시대 이래의 문화 및 세력기반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면서 존속하였다. 하지만 고령·거창·합천·진주·하동 등 주로 대가야문화권 일부에서는, 기존 문화요소의 계승성이 크게 흔들릴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백제의 문화적 영향을 어느 정도 받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후기가야 지역의 고분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함안 말산리 고분군으로서, 거기에는 40m 내지 50m급의 월등하게 큰 봉토분도 섞여 있다. 이러한 유적·유물 출토상황을 종합해 볼 때, 6세기 중엽 가야 지역은 6세기 전반과 같은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가야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백제문화의 영향을 약간 받고 있었다 하겠다.
그리고 그 내부에서 고령 및 함안의 2대 문화중심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와 신라가 각기 가야연맹을 복속시키려고 노리는 가운데, 가야연맹이 남북으로 나뉘어 한쪽은 백제의 문화를 수용하고 한쪽은 그렇지 않은 등 분열상을 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