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문화재를 통해 알 수 있는 가야 문화의 특징 알려 주세욤!!

가야의 문화재를 통해 알 수 있는 가야 문화의 특징 알려 주세욤!!

작성일 2008.03.14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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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문화재를 통해 알 수 있는 가야 문화의 특징 좀 알려 주세요!!

 

오늘 까지요~~

 

내공 마이 드립니다.

 

'내공 냠냠' 은 신고 합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가야의 문화유적과 문화>

1. 전기가야문화

가야의 문화는 기원전 1세기부터 4세기 이전의 것을 전기가야문화로 구분해 볼 수 있다.

4세기 이전의 가야 지역 중에서 문화적인 선진 지역은 김해를 비롯한 경남 해안지대였다.

이는 그 지역의 독특한 생활유적인 분묘유적[패총(貝塚),목관(木棺) 또는 목곽(木槨)을 내부구조로 가진 토광묘(土壙墓)]속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지역의 패총에는

양산 패총,

부산 조도 패총,

김해 봉황동(구 회현리) 패총,

부원동 패총,

진해 웅천 패총,

창원 성산 패총 등이 있다.

이들은 철기문화요소가 나타나는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시작해 5세기 정도까지 존속되었던 생활유적이다.

패총문화의 기본 요소로서는

굴 껍데기를 비롯한 수많은 패각과,

환원염으로 소성된 적갈색·회색 계통의 와질토기(瓦質土器) 및 고식도질토기(古式陶質土器),

철도자(鐵刀子), 철겸(鐵鎌), 철촉(鐵鏃)등의 철제이기(鐵製利器)를 들 수 있다.

한편 이 지역에는 토광목관묘·목곽묘 등의 분묘유적도 상당히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서

창원 다호리 목관묘,

김해 양동리 목관묘,

김해 지내동 옹관묘,

고성 송천리 석관묘,

밀양 내이동 목관묘,

동래 구서동 목관묘 등이 있다.

그리고 3∼4세기의 것으로서

김해 예안리, 양동리, 칠산동, 퇴래리, 대성동 등의 목곽묘를 비롯해서,

동래 노포동·복천동 토광묘, 부산 화명동 석곽묘, 창원 삼동동 옹관묘 등이 있다.

가야 지역을 포괄하는 전체 영남 지역의 토광묘 유적들을 분석해, 전기가야문화의 발전과정을 단계적으로 추론해 보자. 영남 일대 토광묘문화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정리해 볼 수 있다.

① 후기무문토기문화(세형동검문화) 계열의 토광목관묘 단계,

② 와질토기를 부장하는 토광목관묘 단계,

③ 와질토기를 부장하는 토광목곽묘 단계,

④ 도질토기를 부장하는 토광목곽묘 단계 등이다.

유물 상호간의 상대편년에 따르면,

대체로 1단계는 기원 전 1세기경,

2단계는 기원 후 1세기부터 2세기 전반까지,

3단계는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후반까지,

4단계는 4세기경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1단계 경주 입실리 유적, 조양동 5호분과 창원 다호리 1호분 등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새로이 발굴된 토광묘는 길이 2.7m, 너비 1.3m, 깊이 2m 정도의 토광에 목관이 설치되어 있다.

그 내부에는 전 단계 이래의 흑색 및 갈색 무문토기와 칠기류(漆器類), 그리고 세형동검(細形銅劍)·동모(銅矛)·동탁(銅鐸동경(銅鏡) 및 철단검(鐵短劍)·철부(鐵斧) 등 청동기 위주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 시기의 토기는 후기무문토기 이래의 갈색점토대발(褐色粘土帶鉢)과 흑도장경호(黑陶長頸壺) 등의 기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토기를 제외한 무기·장신구 등은 거의 모두 북한 서부 지역의 세형동검 문화유형을 보이고 있다.

특히 창원 다호리 1호분에서 출토된 철모는 형태상으로 보아 대동강 유역의 단조철기문화와의 연관성이 인정된다. 그러므로 그 새로운 문화가 전래된 계기는 기원전 2세기 말 위만조선의 멸망과 그에 따른 유이민 파급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목관의 규모나 유물의 성격에서 기술이나 부(富)의 축적이 충분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 시기는 영남 지방에 위만조선 계통의 선진문화가 일부 이주민과 함께 파급해 들어옴으로써, 앞으로 가야국과 같은 정치세력이 나타날 수 있는 ‘문화 기반’이 성립된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2단계 경주 조양동 38호분과 김해 양동리 2호분·7호분 및 창원 다호리 11호분 등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길이 3m, 너비 1.3m, 깊이 1∼1.5m 정도의 토광에 목관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내부에는 무문토기가 사라지고, 폐색요(閉塞窯)에서 제작되어 단단하면서도 흡수성이 강한 갈색 및 회색의 와질토기가 보인다. 또한 청동기가 거의 사라지고 철기가 늘어나 동경과 판상철부(板狀鐵斧)·단조철부·따비·철단검·철촉·철도자 등이 출토되었다.

이 시기의 토기문화는 1단계의 흑도장경호와 점토대발이 점진적으로 형태가 변화해, 조합우각형파수부장경호(組合牛角形把手附長頸壺)와 주머니형의 원저단경호(圓底短頸壺)로 발전하고 있다.

이는 영남 지역 토광묘문화가 후기무문토기시대의 문화기반을 근본적으로 제압했다기보다는, 그 기반을 토대로 해서 점진적으로 계승 발전되어 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2단계에는 타날문단경구형호(打捺文短頸球形壺)와 같은 새로운 기형의 토기가 나타나 공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기원전 3세기 말 이래 한반도 서북 지역 고조선 주민들이 사용하던 중국 전국계통(戰國系統)의 제도기술(製陶技術)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판상철부 등의 철기가 다량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 때에 철기 제조기술의 보편화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전반기에 속하는 양동리 2호분은 목관묘에다 농공구(農工具) 계통의 철기유물만 보인다.

이에 비해, 후반기인 양동리 7호분의 단계에는 작기는 해도 목곽이 나타난다. 그리고 철기 구성에서 철검·철모·철촉 등의 무기가 다량 추가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국가권력의 무력독점적 측면에서 전반기보다 한 단계의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로 보아, 전 단계에 나타나기 시작한 토광묘문화가 영남 지역 문화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기를 마련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2단계에 접어들면서 토착화해 발전해 나갔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국가 형성의 맹아를 보인 것이라고 하겠다.

(3) 3단계 부산 노포동 고분군과 김해 양동리 162호분, 경주 조양동 3호분 등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비교적 큰 고분의 경우는 길이 4∼5m, 너비 2∼2.5m, 깊이 0.3∼0.9m 정도이다. 그 외 여러 규모의 토광에 목곽과 목관이 설치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유물의 양이 많고 전 단계보다 약간 경질이면서 기종이 다양한 신식 와질토기가 나타나다. 철기 유물의 종류는 전 단계와 비슷하나 장검·환두대도(環頭大刀)와 보습·쇠스랑 등이 새로이 등장하였다.

이 시기의 토기유형인 화로형토기(火爐形土器), 유개대부장경호(有蓋臺附長頸壺) 및 직구호(直口壺)는 전 단계의 주머니호·조합우각형파수부장경호를 계승하였다. 그러면서도 토기 밑부분에 대족(臺足)이 붙고 뚜껑이 추가되어 낙랑계 토기와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영남 지역의 재래 토기문화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일부 새로운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보인다.

또한 대형 목곽이 설치되어 부장 유물의 양이 많아졌으며, 강한 무력과 권력을 상징하는 환두대도가 나타났다. 김해 양동리 162호분에서는 철기를 대량으로 만들기 위한 중간소재로서, 화폐의 기능을 가진 판상철부형 철정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볼 때, 3단계의 문화는 일부 외래적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재래문화를 토대로 권력 통합을 이룸으로써 각지에 단위 소국들이 나타날 정도로 발전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낙동강 유역에서는 김해 양동리 지방의 문화가 양적·질적 측면에서 가장 발전된 면모를 보였다.

(4) 4단계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 경주 정래동 고분 등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길이 8m 정도의 세장형(細長形) 또는 주부곽식(主副槨式)의 대형 토광목곽묘가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그 내부에서는 화로형토기·단경호·무개무투창고배(無蓋無透窓高杯) 등의 도질토기가 나타난다. 그리고 대형 철모 등 철제무기의 수량이 급증하고 철제단갑(鐵製短甲)과 같은 무구도 출토되었다.

목곽의 대형화 또는 부곽의 설치에 따라 부장 공간이 확대되었다. 그러면서 그 공간에 수납된 토기와 철기 등의 부장품도 그만큼 더 늘어났다. 철제단갑의 출현은 정치권력의 무력적 성격이 강화된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의례적 관습에 따라 부장용(副葬用)으로 선호되었을 와질토기에 대신해 도질토기가 부장되기 시작한 것은, 정치권력의 성격이 보다 실질적인 것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그러므로 4단계는 기존의 소국들이 상호 충돌하면서 내부의 지배권력을 한층 더 실질적으로 강화시켜 나간 시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전반기에 낙동강 유역의 패권이 김해 양동리로부터 대성동으로 옮겨졌는데, 이는 지배 집단의 선택에 의한 이주인 듯하다.

이처럼 경상남도 해안지대의 주민들은 지속적으로 부(富)와 기술을 축적하면서 사회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경제기반으로서는 이 지역의 풍부한 노두철광상(露頭鐵鑛床) 및 양호한 해운 입지조건을 들 수 있다.

우선 철산지라는 면에서 볼 때, 당시 철기 제작의 부산물인 철재(鐵滓)가 나온 곳만 해도 김해 봉황동 패총, 창원 외동 성산 패총, 고성 패총, 김해 부원동 패총 등이 있다. 게다가 성산 패총에서는 야철지도 드러났다.

또한 창원 다호리나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단야도구인 철망치나 철집게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는 다양한 크기의 철정들이 수십 매씩 10의 배수로 출토되었다.

이는 낙동강 하류 지역이 철 공급의 중심지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또한 철 자원 개발 및 철기 제작기술의 보급에 따른 야철 그 자체가 이 지역의 발전 및 그에 따른 패총문화의 형성에 기본 동력으로 작용했음을 반영한다 하겠다.

다음으로 해운의 면에서 볼 때, 3세기 당시 낙랑에서 출발해 서해 및 남해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배가 구야한국(狗邪韓國)에 들렀다가 해협을 건너 왜지로 향했음을 전하는 문헌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아, 김해를 비롯한 경상남도 해안지대 가야제국의 입지적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당시 경상남도 해안지대의 세력들은 ≪위지≫ 한전 변진조에 보이듯이, 철을 매개로 ()·예(濊)·왜(倭)·2군(二郡)과 활발한 교역을 벌여 이익을 얻고 있었다.

김해 패총에서 출토된 화천(貨泉), 창원 성산 서남구 패총의 패각층에서 나온 오수전(五銖錢), 김해 양동리 토광묘의 후한대(後漢代) 상방경(尙方鏡), 함안 사내리 고분에서 출토된 전한경(前漢鏡)을 모방한 소형 방제경(倣製鏡), 창원 다호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붓 및 칠기류 등은 낙랑과의 교역을 방증해 주는 것들이다.

그리고 김해 지내동 옹관묘에 부장된 대상구연토기(袋狀口緣土器)나 김해 부원동 패총에서 나온 이단구연호형토기(二段口緣壺形土器),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통형동기(筒形銅器)·파형동기(巴形銅器) 및 방추차형석제품(紡錘車形石製品) 등은 왜와의 교역 또는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또한 그 지역의 기층사회를 이루는 주민들은 이미 오곡과 벼를 재배하고 비단을 만들었다는 걸 기록으로 알 수 있다. 김해 부원동 A지구 패총에서 출토된 종류만 보더라도 벼·보리·밀·콩·조 등의 곡물과 굴·털조개 등의 해산물이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경상남도 해안지대의 세력기반은 도작(稻作)을 비롯한 농경문화와 조개 채취를 비롯한 어로문화를 저변으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보다 특징적인 것은 그 저변을 통괄하면서 철산업을 일으키고 있던 토광묘 계통 지배집단들의 해운을 이용한 중개무역이었다고 하겠다.

그렇게 이룩한 사회경제적 축적 및 그에 바탕을 둔 정치체제의 발전은 상당한 수준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 결과 낙랑의 소멸 이후에도 전기가야연맹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후기가야문화

영남 지방 토광묘문화의 4단계 이후,

영남 지방의 고분 유적·유물의 계통은 크게 2개의 문화권으로 양분되기 시작한다.

그러한 현상은 석곽묘 유적에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문화권 양분은 곧 신라·가야 세력권의 분리와 관계가 있다.

이는 고구려의 배경 아래 경주세력의 주도로 일어나는 신라의 영역 팽창과 가야연맹권의 축소에 따른 결과로 파악된다. 그 시기는 문헌사료에서 신라가 고구려의 강한 영향 아래 있었다고 판단되는 신라 나물·실성·눌지 마립간대, 즉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에 걸치는 시기였으리라고 추정된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을 중심으로 해당 시기의 영남 지방 석곽묘관계 유적·유물을 지역적으로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묘제의 측면에서 볼 때, 적석목곽분이 나타나는 경주를 제외한 나머지 영남 지방의 묘제는 거의 모두 내부구조가 수혈식장방형석곽묘(竪穴式長方形石槨墓)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수혈식석곽묘의 발생 원인은 이원적이다.

먼저 원삼국시대의 토광목곽묘가 목곽 외부의 진흙 충전부를 돌로 채워 넣는 과도기를 거쳐 보다 편리한 축조방식인 수혈식석곽묘로 전환한 측면이 있다. 그리고 선사시대 이래의 지석묘 하부 구조 또는 석관묘나 수혈식의 작은 석곽이 계승되어 규모의 확장을 본 측면도 있다.

그러나 낙동강 동안 중심의 의성·안동·경산·대구·칠곡·성주·선산·창녕·울산·양산·부산 등지에서는 일찍부터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와 횡구식석곽묘(橫口式石槨墓)가 수혈식석곽묘와 공존하면서 축조되고 있었다.

그래서 같은 수혈식석곽묘라고 해도, 신라문화권에서는 평면 형태가 너비에 비해 길이가 짧은 장방형(너비 : 길이=1 : 1.3 정도)을 보인다. 이 지역에 일어나고 있던 적석목곽분 및 횡혈식·횡구식석곽묘 등 다양한 묘제의 변화는 기존의 토광목곽묘의 변천 과정에 고구려문화를 흡수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낙동강 서안 중심의 고령·합천·거창·함양·남원·함안·고성·사천·진주·산청·하동·김해·창원 등지에서는, 원삼국시대 이래의 토광목곽묘가 더욱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평면 형태가 너비에 비해 길이가 긴 장방형 즉 세장형(너비 : 길이=1 : 4 이상)을 보이는 할석 축조의 수혈식석곽묘가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다른 묘제는 보이지 않는다.

낙동강 서안 지역의 묘제에 이와 같이 수혈식석곽묘의 내부 구조를 답변확정한 묘제만이 보편적으로 성행한 이유는, 그 사회의 문화가 비교적 오랫동안 외부문화의 동향에 휩쓸리지 않고 수혈식 장제(葬制)만을 고집해 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편 출토유물 중에서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는 토기의 측면에서 볼 때, 영남 지방의 5∼6세기 토기는 고배(高杯)와 장경호(長頸壺)를 기본적인 기종(器種)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같은 기종이라고 하더라도 각 기종의 사이에는 지역에 따라 형태상·조합상에 약간의 차이점이 나타난다.

우선 낙동강 동안의 북부 지역인 경주 황남동, 의성 탑리·장림동, 안동 마동·중가구동·조탑동, 경산 북사동·임당동, 대구 내당동·비산동·불로동·구암동, 칠곡 인동·약목, 성주 성산동, 선산 낙산동 고분군과 남부 지역인 울산 양동·화산리, 부산 복천동·당감동·오륜대·덕천동, 양산 북정리, 창녕 교동·계성 고분군 등지에서 출토된 토기유물들은 공통적으로 이단교열투창(二段交列透窓)의 유개고배(有蓋高杯)와 V자형 경부(頸部)의 대부장경호(臺附長頸壺)가 기본 조합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대구·경산·창녕·성주 등의 각 지역별 토기유물상은 경주 적석목곽분 출토 신라전기양식토기와 비슷하면서도 각각 약간의 이질적 요소가 보인다. 이것은 각 토기들이 해당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그 기형의 세부적인 형태까지 경주의 것을 따르고 있는 이상, 경주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또한 여기서 출토되는 유물 중에서 금동관(金銅冠)의 경우에 대구·경산·양산·동래·성주 등지에서 출토된 것은 경주의 적석목곽분들에서 출토된 금관(金冠)과 거의 비숫한 양식을 띠면서도 그 재료면에서 격이 떨어진다.

이는 각 지역 군장간의 신분 차이를 반영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유물상의 격의 차이는 장신구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방의 고분축조세력들은 아직 그 지역 지배층의 자체 기반이 완전히 해체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경주세력에 의한 일정한 규제를 받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라소국’ 또는 ‘신라계열 소국’으로 지칭해야 온당할 것이다. 특히 전기가야연맹에 속해 있다고 거론되던 지역 중에서 부산·창녕·성주·개령 등이 여기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신라의 세력 확장 및 가야연맹권의 축소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낙동강 서안의 북부 지역인 고령 지산리, 합천 옥전·삼가·봉계리·저포리·중반계·반계제, 거창 말흘리, 함양 상백리·백천리, 남원 월산리·건지리 고분군과 남부 지역인 함안 말산리·도항리, 진북 신촌리, 고성 오방리, 사천 예수리·송지리, 진주 가좌동·수정봉, 산청 중촌리, 하동 고리리, 김해 예안리·칠산동, 창원 도계동, 진해 성내동 고분군 등지에서 출토된 토기유물들은 낙동강 동안 지역의 신라양식토기들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여기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단직렬투창(二段直列透窓)의 유개고배(有蓋高杯), 유개장경호(有蓋長頸壺), 개배(蓋杯), 발형기대(鉢形器臺) 등으로서, 전체적인 토기 조합상만 놓고 보더라도 기대류(器臺類)가 그 말기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토기유물들은 낙동강 서안의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번창하였다. 특히 고령 지산리 32·33·34·35호분 및 44·45호분 등의 고분 규모나 유물 출토량은 가야 지역의 다른 고분군과 비교해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그러므로 후기가야문화권을 전기가야시대와 비교해 볼 때, 문화중심은 김해를 비롯한 경남 해안지대에서 고령을 비롯한 경상 내륙 산간 지방으로 옮겨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화중심의 이동과 영역의 축소 현상은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전반 사이에 일어난 것이었다.

이 시기는 고구려의 후원을 받아 신라가 급성장하고 전기가야연맹이 그에 대항하다가 해체되는 시기이다. 가야 지역 중에서 산간 내륙 지방은 5세기에 들어와 점차 많은 고분이 각처에 번성해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런데 그 지역에 성행하던 기대와 장경호 및 고배 등은 그 시원 형태를 창원·김해·부산 등의 4세기대 패총과 분묘유적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후기가야고분 출토 금속기 유물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철촉·철겸·도자·철모·대도(大刀)를 비롯한 철제무기이다. 그리고 마구·갑주·장신구 등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

이 중에서 철기의 제작기술이 당시 백제의 발전된 기법인 초강법(炒鋼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4세기 이전 경남 해안지대에서 출토된 철기유물들의 제조법인 괴련강(塊鍊鋼)과 같다는 점은 주목된다.

그러므로 5세기 이후에 고령·함양 등의 내륙 산간 지역이 급속히 개발되기 시작한 계기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경남 해안 지방의 몰락과 그로 인한 이주민 파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상 내륙 산간 지방에서 안정적인 농업기반을 유지하던 토착 세력들은 이들의 기술과 문화를 수용하면서 발전해, 늦어도 5세기 후반까지는 가야 전체의 문화 중심으로 대두하게 된 것이다.

한편 당시의 가야 남부 지역은 지역별로 서로 다른 문화를 영위하고 있었다. 따라서 유물상으로 보아 진주·사천·고성·함안 등의 서남부 지역과 창원·진해·김해 등의 동남부 지역으로 구분된다.

고성·함안 등의 서남부 지역에서는 이 지방의 독특한 토기형식으로서 수평구연호(水平口緣壺=廣口長頸壺), 1단세장형투창유개고배(一段細長形透窓有蓋高杯), 삼각형투창무개고배(三角形透窓無蓋高杯) 등이 나타났다.

그와 비슷한 형식을 띤 화염형투창무개고배(火炎形透窓無蓋高杯)는 지금까지의 출토 예로 보아 함안의 독자형식인 듯하다. 이러한 토기들의 분포상황은 5∼6세기에 걸쳐 이 지역이 급격한 문화 발전을 이루지는 못했어도, 백제·신라 등의 외부세력에 대해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지역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고령을 비롯한 가야 북부 지역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고령 지산리 계통의 토기 형식들인 2단직렬투창유개고배·유개장경호·기대·단추형꼭지뚜껑 등이 나타난다.

이러한 유물 출토상황은 5세기 후반 이후로 고령 대가야의 세력 및 문화가 가야 북부 지역에만 보급되는데 그치지 않고, 가야 서남부 지역의 일부까지 미쳤던 흔적을 보이는 증거로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가야 동남부 지역인 김해·창원 등지의 유물상은 서남부 지역의 그것과 상당히 구분되는 모습을 보인다. 창원·김해 지역은 4세기에는 부산 지역과 아울러 대형 목곽묘와 외반구연무투창고배(外反口緣無透窓高杯)의 중심 지역으로 융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5세기 이후로는 규모가 소형 석곽분 정도로 위축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낙동강 동안 양식 토기가 보편적으로 출현하고 있다. 그나마 5세기 전반에 속하는 유적·유물은 많지 않다.

김해·창원 지역의 이러한 문화유물상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전기가야의 주체세력이 큰 타격을 입고 괴멸된 후, 그 지역에 잔존한 소규모 집단들이 정신적 기준을 잃고 신라문화로 편향되는 경향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김해 예안리 고분군과 창원 도계동 고분군 등에서 고령계의 토기들이 출현하면서 유물의 양이 증대되고 있음을 보아, 5세기 후반에 이르러 고령 대가야의 문화적 영향 아래 다시 복구의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유적들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전부 대가야계통의 것으로 교체된 것은 아니다. 5세기 전반 이래의 신라토기들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가야 동남부 지역의 세력들이 대가야에 완전히 경도되었던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530년대에 신라·백제의 공세에 의해 가야연맹의 결속이 위기에 처하자, 김해와 창원의 세력들은 가장 먼저 신라에 자진해서 투항하게 되었던 듯하다.

그 뒤 6세기 중엽으로 편년되는 가야 고분유적으로는 고령 지방에서 발견된 5기의 횡혈식석실분과 합천 삼가 1호분 B·G유구 및 2호분 A·B유구, 합천 창리 A지구에서 내부구조가 장방형 수혈식석곽으로 이루어진 다곽분(多槨墳)들의 대다수, 진주 수정봉·옥봉 고분군 등이 있다.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문화유물로 볼 때, 5세기 이래의 전술한 것과 같은 문화 분포경향은 대체로 큰 변동 없이 지속된다고 보인다. 그러나 가야 지역 6세기 중엽 유적·유물에서 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그리 큰 변화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부 지역의 경우에 백제문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인다는 점이다.

즉, 고령 고아리 벽화고분은 석실의 터널식 천장구조가 공주 송산리 전축분과 유사하다. 그리고 그 곳에 그려진 연화문(蓮花文)의 양식이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과 상통해, 6세기 중엽 시기에 대가야가 백제의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6세기 중엽 시기에 가야 지역은 전시대 이래의 문화 및 세력기반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면서 존속하였다. 하지만 고령·거창·합천·진주·하동 등 주로 대가야문화권 일부에서는, 기존 문화요소의 계승성이 크게 흔들릴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백제의 문화적 영향을 어느 정도 받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후기가야 지역의 고분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함안 말산리 고분군으로서, 거기에는 40m 내지 50m급의 월등하게 큰 봉토분도 섞여 있다. 이러한 유적·유물 출토상황을 종합해 볼 때, 6세기 중엽 가야 지역은 6세기 전반과 같은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가야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백제문화의 영향을 약간 받고 있었다 하겠다.

그리고 그 내부에서 고령 및 함안의 2대 문화중심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와 신라가 각기 가야연맹을 복속시키려고 노리는 가운데, 가야연맹이 남북으로 나뉘어 한쪽은 백제의 문화를 수용하고 한쪽은 그렇지 않은 등 분열상을 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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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에는 철이 아주 풍부하여

철로만든 무기 농기구등이 아주많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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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평저주형토기

 

종 목 보물 제555호

지 정 일 1971.12.21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한남동 748-18

시 대 가야

 

 배 모양을 본 뜬 토기로 높이 9.1㎝, 길이 27.9㎝의 크기이다. 지금까지 출토된 다른 것들에 비하면 긴 편이고 바닥 또한 수평으로 길다.

 

전체의 모양은 거의 좌우 대칭을 이루었고 양쪽 배 끝 부분은 길게 연장되다가 끝이 높게 들려서 반원형을 이루었다. 이 반원형 부분에는 구멍이 2개씩 있으며, 배 끝 부분에는 거의 다 부러졌지만 노를 걸었던 꼭지가 여러 개 달려있다. 배 안에는 좌우로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3곳에 칸막이가 있어서 사공이 이곳에 앉아 노를 젓게 되어 있다. 배 좌우 바깥 측면에는 지그재그형으로 점선이 반복되어 전체에 새겨져 있다. 어두운 녹갈색의 자연 유약이 선체의 양면에 일부 씌워져 있다.

 

이 배 모양의 토기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운반하는 신앙의 표현으로, 무덤 속에 묻었던 의식용 그릇의 하나이다.

 

5∼6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출토지를 알 수 없으나, 고대 선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2.토이

 

종 목 보물 제556호

지 정 일 1971.12.21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한남동 748-18

시 대 가야

 

 신발 모양을 한 길이 23.5㎝, 너비 6.8∼7.2㎝의 토기이다. 삼국시대 무덤에서 발견되는 금속제의 장식용 신발과 같은 성격을 띤 껴묻거리(부장) 토기이지만 형태는 전혀 다르다.

 

앞쪽은 코가 우뚝 들려있고, 양 옆과 뒤는 수직으로 서 있다. 바닥은 뒷굽 이 없이 편평하며, 뒤쪽 위에는 턱을 만들어 벗겨지지 않도록 하였다. 코 뒤에 작은 구멍이 하나씩 있고 좌우에도 한 짝은 4개, 다른 짝은 5개의 구멍이 나 있어서 끈을 매달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좌우 구멍 위에서 코에 걸쳐 점선으로 한 쪽에는 사선, 다른 한 쪽에는 물고기 뼈와 비슷한 무늬를 얕게 새겼다.

 

이 신발은 무녕왕릉에서 나온 금속제 신발과 달리, 당시에 실제로 사용했던 신발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출토지가 분명하지 않지만 흙으로 만든 신으로는 상당히 우수한 작품이어서, 고대 껴묻거리 양상을 밝혀준 점에서 중요한 유물이다.

 

3.전고령출토일괄유물

 

종 목 보물 제570호

지 정 일 1973.03.19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한남동 748-18

시 대 가야

 

 경상북도 고령지방 고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2종류의 일괄유물이다. 고령지방은 삼국시대에 있어서 대가야국의 근거지였으며, 신라 진흥왕 23년(562) 신라의 침입에 의해 정복되기까지 화려한 가야문화를 꽃피웠던 곳이다. 오늘날 고령읍 지산동을 비롯하여 주변 지역에 가야의 무덤이 많이 모여있다. 이 일괄유물은 당시 가야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유품이라 하겠다.

 

1. 유물 Ⅰ

 

1)주옥:둥근 남색 유리 구슬로서 구멍이 뚫려 있다.

 

2)등자 :말을 탈 때 사용하던 발걸이이다. 발을 디디는 부분은 둥근고리로 되어 있고, 윗부분이 수직으로 붙어 있는 타원형 발걸이로서 길이 24㎝, 지름 18㎝이다.

 

3)지:단면이 장방형인 숫돌로서 머리부분에 은관을 장식한 것으로 길이 30㎝이다.

 

4)검병:검의 손잡이 부분으로 손잡이 끝부분에 용장식을 하였고, 손잡이에 물고기 비늘 모양을 한 것으로 현재 길이 33㎝이다.

 

5)검구:은으로 되어 있으며 전체적인 형태가 큰 칼과 같다. 칼집 아래쪽 측면에 부착되는 것으로 중앙부분이 고리형을 이루고 있다.

 

6)검병:은으로 된 손잡이 끝부분에 ‘D’자 모양의 고리가 있고, 그 안 에 3장의 나뭇잎이 있는 고리자루칼(은장삼엽환두대도)로 현재 길이 26㎝이다.

 

7)검병:은으로 된 손잡이 끝부분에 민고리를 삼각형으로 연결한 고리자루칼(은장삼환두대도)이다.

 

8)행엽:말 엉덩이 부분이 가죽끈 등에 달아 놓은 장식으로 살구잎 모양을 하며, 그 테두리 안에는 나무가지 모양을 새기고 은못으로 고정시켰다. 길이 10.5㎝, 지름 7.5㎝

 

9)마탁:납작한 원통형의 말 방울로서, 아래부분은 활과 같이 휘어 진 모양을 한 장식품이다. 높이 약 4.5㎝

 

2.유물 Ⅱ

 

1)행엽 :테두리 안에 나무가지 모양을 새겼다. 길이 21㎝, 지름 12㎝

 

2)운주:운주는 끈 위나 끈이 교차되는 지점에 부착하는 장식품으로, 이 운주는 반원형의 중앙에 꽃무늬를 새기고, 주위에 6개의 네모판을 붙인 것이다. 지름10.2㎝

 

3)운주:중앙에 꽃무늬가 새겨진 반원형의 금동제 운주로 네모판이 4개가 달려 있다. 지름 7.2㎝

 

4)안구:안장으로서 은으로 된 반원형 판에 구름무늬를 배치하고, 금도금 띠를 가장 자리에 돌린 후 못을 한 줄로 박았다. 중앙에는 가슴걸이를 이어 매기 위한 띠고리가 달려 있다. 길이 18㎝, 지름 6㎝

 

5)운주 및 병형:반원형 자리의 중앙에 나뭇잎 모양의 몽둥이를 세운, 금도금 한 운주로서 반원형 자리의 지름은 약 2㎝이다.

 

6)반구형 운주:금도금 운주로 무늬가 없는 반구형판 주위에 네모판이 달렸던 것으로 추측되나 지금은 없다.

 

7)십이수 운주:금도금 운주로 중앙에 꽃무늬를 새기도, 반원형판 주위에 12개의 네모판을 붙인 것으로 지름 10.5㎝이다.

 

8)행엽:금도금 돋을 새김 꽃무늬 행엽으로 테두리 안에 3장의 잎사귀를 장식한 무늬가 있으며, 상단 중앙에 장방형이 있는 정사각형 돌기가 있다. 지름 10.2㎝

 

9) 화문각행엽:금도금 행엽으로 테두리 안에 꽃잎모양이 새 겨져 있고, 지름은 10.2㎝이다.

 

4.수로왕릉

 

종 목 사적 제7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남 김해시 서상동 312

시 대 가야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재위 42∼199)의 무덤으로, 납릉이라고 부른다.

 

수로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전하고 있으나, 무덤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무덤의 높이는 5m의 원형 봉토무덤인데, 주위 18,000여 평이 왕릉공원으로 되어 있다. 왕릉 구역 안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과 안향각·전사청·제기고·납릉정문·숭재·동재·서재·신도비각·홍살문·숭화문 등의 건물들과 신도비·문무인석·마양호석·공적비 등의 석조물들이 있다.

 

고려 문종대까지는 비교적 능의 보존상태가 좋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많이 황폐했던 듯하다. 『세종실록』을 보면,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에 대해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보호구역을 표시하기 위한 돌을 세우고, 다시 세종 28년(1446)에는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힌 것으로 나타난다.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선조 13년(1580) 수로왕의 후손인 허엽이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크게 정비작업을 마친 후이다.

 

『지봉유설』기록에 따른다면 능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석실묘)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에 의해 능이 도굴을 당했는데, 당시에 왕이 죽으면 주위에서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을 같이 묻는 순장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5.수로왕비릉

 

종 목 사적 제7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남 김해시 구산동 120

시 대 가야

 

가야의 시조 수로왕의 왕비무덤이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의하면, 왕비는 성이 허, 이름은 황옥으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 인도 아유타의 공주로 16세에 배를 타고 와서 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9명의 왕자를 낳았는데, 그 중 2명에게 왕비의 성인 허씨 성을 주어 지금도 그 후손이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높이 5m 정도의 원형 봉토무덤으로서, 무덤의 밑부분에 특별한 시설은 없다. 무덤 주위에는 얕은 돌담을 4각형으로 둘러 무덤을 보호하고 있으며, 앞 쪽에는 긴 돌을 사용하여 축대를 쌓았다. 중앙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지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之陵)’이라는 글이 2줄로 새겨져 있다.

 

무덤에 딸린 부속건물로는 숭보제·외삼문·내삼문·홍살문이 있으며, 보통 평지에 있는 무덤과는 다르게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무덤 앞에는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전하는 파사석탁의 석재가 남아 있다. 세종 28년(1446)에 수로왕릉과 함께 보호구역이 넓혀졌으며, 임진왜란 때 도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비석과 상석 등은 인조 25년(1641)에 다시 정비하면서 설치하였다고 한다.

 

왕릉에 비해서는 시설이 소박한 편이고 수로왕비릉이라고 오래전부터 전해져 왔으므로 수로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본다면, 내부의 구조는 널무덤(토광묘) 또는 돌덧널무덤(석곽묘)일 가능성이 높다.

 

5.김해 구지봉

 

종 목 사적 제429호

지 정 일 2001.03.07

소 재 지 경남 김해시 구산동 산81-2번지 일원

시 대 가야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 산81-2번지에 위치한 김해 구지봉은 『삼국유사』「가락국기」편 기록에 의하면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하늘에서 탄강하였고, 아도간, 유천간 등 9간과 백성들의 추대에 의해 가락국의 왕이 되었다는 가야의 건국설화를 간직한 곳이다.

 

또한, 구지봉에서 구간과 백성들이 수로왕을 맞이하기 위해 춤을 추며 불렀다는 구지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로 고대 국문학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정상부에는 B.C 4세기경 남방식 지석묘가 있어 그 역사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지석묘 상석에는 '구지봉석'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한석봉의 글씨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구지봉은 이처럼 가야 건국설화와 관련되는 유적으로 우리나라 고대국가 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곳이다.

 

6.고령 고아동벽화고분

 

종 목 사적 제165호

지 정 일 1968.12.19

소 재 지 경북 고령군 고령읍 고아리 산13

시 대 가야

 

고령 주산 근처 구릉 끝에 있는 10여 기의 무덤 중 하나로 벽화의 흔적이 남아있는 무덤이다.

 

동서길이 약 25m, 남북길이 약 20m의 봉분으로 된 활천장(궁륭식천장)을 가진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다. 유물은 도굴되어 없고, 널방(현실)에는 동쪽에 부인의 관, 서쪽에는 남편의 관이 놓여있고, 바닥에 도랑을 설치하였다. 널방에는 벽화의 흔적이 약간 남아 있으나 알 수 없고, 천장돌에 분홍색·백색·녹색·갈색 물감을 이용하여 연꽃장식을 그렸다.

 

천장의 축조방법이나 바닥의 도랑 등이 백제지방 무덤 방식과 비슷하여 가야지방에 백제문화의 영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7.고성 내산리고분군

 

종 목 사적 제12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남 고성군 동해면 내산리 188-10

시 대 가야

 

 고성군 내산면의 성산을 배경으로 해안을 바라보는 낮은 언덕과 평지에 모여있는 가야 무덤들이다.

 

이곳에는 100여 기의 무덤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 60여 기만 남아있다. 봉토의 지름이 10m 안팎인 것이 40여 기이며, 15m 이상의 것도 20기정도 있다.

 

내부시설은 구덩이식돌널무덤(수혈식석곽묘)으로 가야지역의 일반적 형식을 따르고 있다. 경질토기와 철기류가 출토되었고 부근에서 회청색 경질토기편이 채집되어 대략 6세기경 유적지로 추측된다.『삼국사기』에 보이는 고자국과 소가야의 관문을 지키는 역할을 한 세력이 있었던 곳으로 보고 있다.

 

8.김해 양동리고분군

 

종 목 사적 제454호

지 정 일 2004.07.24

소 재 지 경남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산3번지 등

시 대 가야

 

김해 양동리 고분군은 기원전 2세기대로부터 기원 5세기대에 걸쳐 형성된 고분군으로서, 발굴조사 결과 다양한 묘제와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가야 국가 형성기로부터 발전기의 역사적 사실을 한 눈에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유적은 일찍부터 김해지역 중심고분유적의 하나로 주목받은 곳으로서 1984년 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처음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이래 1990∼1996년간 동의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4차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목관묘, 목곽묘, 석곽묘, 옹관묘 등 548기의 유구와 토기와 청동기, 철기 등 5,100여점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확인된 유구는 묘제의 변천과정과 연대 규명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료이며, 출토된 각종 유물은 시기별 가야문화의 실상과 변화상을 한 눈에 보여줄 뿐만 아니라 종래의 연구에서 부족했던 많은 자료를 보완하여 국제성을 띤 가야문화의 세련된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러한 발굴성과를 통하여 가야사회의 문화와 국가·사회적 성격을 보다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어 구야국 또는 본가야가 활발한 해상활동을 통하여 번성한 해양왕국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2세기 후반에서 4세기까지가 가야철의 전성기로서 해상활동도 가장 활발하여 외래문물도 해로를 통해 직접 유입되었던 가야시대의 번성기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철생산이 가야발전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사실은 동시에 철시장의 상실로 인한 가치 하락이 가야쇠퇴의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으며, 새롭게 부상한 신라나 백제의 압박으로 점차 쇠망하였다는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이와 같이 김해양동리고분군은 그 발굴성과를 통해 각 시기별 가야문물의 진수를 보여줄 뿐 아니라 낙동강 하류지역 가야사회의 성장과 그 국가적 성격을 밝히는 귀중한 유적이라 할 것이다.

 

9.김해 은하사 대웅전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8호

지 정 일 1983.07.20

소 재 지 경남 김해시 삼방동 882

시 대 가야

 

이곳은 당초에는 서림사가 있었으나 가락국 수로왕때 장유화상이 중건하고 은하사라 하였다고 전하며, 임진왜란때 절 건물 전부가 불에 타 소실되어 그후에 재건하였다 한다. 구전에는 지금부터 약 380년전에 세웠다고 하지만 확실치 않으며 조선시대 후기 건물이다. 이 불전은 다포계 양식의 맞배집으로 공사는 내외삼출목으로 되어있는데 외부쇠서의 윗몸에는 연꽃을 조각하였고 내외살미 위로는 용두와 봉두를 새겨놓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내부는 불상위에 구개(보함)를 설치하고 중앙에만 우물천장을 가설하였으며 단청과 벽화가잘 남아있다. 현재의 건물은 이들 조각과 구조수법으로 보아 조선조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0.창원 내동 패총

 

종 목 경상남도도 기념물 제44호

지 정 일 1979.05.02

소 재 지 경남 창원시 내동 261-1

시 대 가야

 

 패총이란 수렵·어로·채집에 의하여 살아온 옛 사람들이 조개를 먹은 뒤 버린 조개껍데기와 생활쓰레기가 함께 쌓여 이루어진 유적으로 조개더미라고도 한다.

 

창원 내동패총은 창원 대로변에 있는 해발 20∼25m의 야산에 위치한다. 아직 정식 발굴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정확한 성격을 알 수 없으나 채집되는 유물로 보아 근처의 성산패총, 가음정동패총과 같은 시기인 기원전후 초기철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내동패총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이러한 패총에서는 다양한 토기, 골각기, 철제품이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유적이 되므로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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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문화제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섬세합니다

그리고 대표적인 문화제는 금동관 철기 투구와 갑옷 토기 등이있읍니다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했구요

유리나 옥을 많이 사용하였어여

 

 

 

 

점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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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면적으로 볼 때도 가야는 경상남·북도의 낙동강 유역과 그 서쪽 일대를 점유했다.최전성기엔 전라남·북도동부지역까지 지배했다.

이는 전성기의 고구려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백제나 신라에 비하면 손색이 없다.
요컨대 가야는 신라.백제에 버금가는 존재였다는 뜻이다.

가야가 소국 연맹체제에 머무른 채 고대국가를 완성하지못해 하나의 국가로 취급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그러나 가야연맹은 고구려·백제·신라와 관계를 맺을 때 하나의 정치체제로서 역할을 하였다.

또 출토 유물 등으로 미루어 개별 소국들의 생산력이나 기술수준도 매우 높았다.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기원전 1세기부터 700년 가까이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독자적인 역사를 유지했다.

세계 최초로 고대 철제 말(馬)갑옷의 실물이 발견된 곳은 다름아닌 한반도 남단의 가야다. 경남 함안의 마갑총에서 발견된 말의 갑옷과 투구는 가야시대 맹주국의 하나였던 5세기 초 안라국의 발전된 사회기반과 강력한 무력을 상징한다. 가야는 이미 1세기에 철기를 기반으로 성장했고 당시의 하이테크였던 철 제련 능력과 토기 생산기술은 일본보다 500년이나 앞섰다.점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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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의 문화재를 통해 알수있는 가야특징이 무엇있가요???? 제발 좀 알켜주세요 가야의 문화재를 통해 알수있는 가야특징은 아마...소박하며 섬세하다 일꺼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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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문화재를 통해 알수 있는

급해서 그러는데요 "가야의 문화재를 통해 알수 있는 특징" 좀 알려 주세요 4줄 3불 정도면 되구요 중요한것만 해주시면 감사드리겟습니다 지배면적으로 볼 때도 가야는 경상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