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에 관한 질문

요한계시록에 관한 질문

작성일 2019.03.20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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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좀할게요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이 요한에게 보여준것을 서술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어떻게 666이라는 숫자를 볼수 있었나요?? 불가능합니다 일단 그 시기에는 아라비아 숫자는 통용되지 않던걸로 알고 있습니다. 13세기 정도 까지는로마숫자를 사용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인류가 멸망하지 않은걸로 봐서는 이 이후 이야기인듯 싶은데... 666이라는 숫자는 알아 볼수 없을거 같습니다.
일각에서는 바코드의 머리 중간 꼬리의 구분을 짓는 666 이진법으론 101 101 101 을 악마의 숫자 666이라는데 그 시절엔 2진법도 없는데 어떻게 바코드를 읽습니까? 바코드 밑의 6도 로마숫자로 쓰여진곳은 없습니다.
요한은 어떻게 666을 읽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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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666은 예수그리스도 초림때부터 재림 전까지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코드666론,666칩등은 개신교에서
만들어 낸 음모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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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히브리어는 단어로 수 , 숫자(number, numeral)를 표시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빌론으로 포로로 유배된 지 얼마 후에, 히브리어 알파벳 문자를 숫자의 기호로 사용하는 습관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용례는 유배 기간 이후에 만들어진 히브리어 성서 사본들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기록물들 가운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견본 중의 하나는 실로암 수로 터널(히스기야의 재위 기간[기원전 745-717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됨)에서 발견된 명문(銘文)인데, 그 글 중에는 치수가 일일이 단어로 쓰여져 있습니다. 

숫자를 단어로 표시하는 것은 여러 차례 필사된 히브리어 성경 사본들의 정확성과 신뢰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대개 숫자는 단어에 비해 필사하면서 잘못 적을 가능성이 큰 편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에서 10 이상의 숫자는 12(2와 10)(창 14:4)의 경우처럼 단어들을 조합하여 표시하는데, 예외가 있다면 20은 10의 복수형, 30은 3에서 파생된 복수형의 단어, 40은 4에서 파생된 복수형의 단어 등입니다. 

100은 별개의 단어이고, 200은 그 쌍수형입니다. 300처럼 다른 “백 단위 숫자”들은 두 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히브리어 단어로 표시되는 최대 숫자는 2만인데, 1만의 쌍수형입니다. 

더 큰 수는 단어들을 조합하여 만듭니다. 예를 들어, 역대기 상 5:18에 나오는 4만 4760은 문자적으로 40과 4의 1000과 7의 100과 60으로 되어 있습니다. 100만은 천의 천으로 적습니다. (대하 14:9) 

리브가의 가족은 리브가를 축복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누이야, 네가 수천만[문자적으로 ‘수만의 수천’]이 되기를 바란다.” (리브가의 후손은 그 수가 실제로 수천만 명이 되었습니다.) (창 24:55, 60) 

다니엘의 환상 가운데서 여호와 앞에 서 있는 자는 “만의 만배[문자적으로 ‘만의 만’]”였습니다.—단 7:10.

때때로 숫자는 어림수로서 대략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시편 필자가 사람의 연령의 한계에 대해 말한 시편 90:10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또한 열왕기 상 19:18(바알에게 몸을 굽히지 않은 7000명)과 역대기 하 14:9(아사가 쳐부순 에티오피아 사람 100만 명)의 경우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신약)에서는 일반적으로 숫자가 단어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나이 사본과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는 “야수”의 숫자가 단어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계 13:18.

성서의 용법은 수점술(數占術)이 아닙니다 성서는 역사의 책이자 예언의 책이므로, 그 안에 나오는 숫자는 문자적인 수일 수도 있고 상징적인 수일 수도 있습니다. 

숫자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가는 대개 문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일부 숫자들은 종종 예시적인, 비유적인 혹은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며, 그런 경우 그 숫자들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성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숫자에 대한 성서의 이런 용법을 수점술과 혼동해서는 안 되는데, 수점술의 경우 신비주의가 숫자, 숫자의 조합, 숫자의 합계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수점술은 그 기원이 고대 바빌론인 것으로 보이며, 다른 형태의 점술과 함께 하느님의 단죄 아래 있습니다.—신 18:10-12.

성서에서 주로 사용되는 일부 숫자들의 비유적 용법 몇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일) : 비유적으로 사용될 경우 이 숫자는 단일성, 유일성 그리고 목적과 행동에 있어서 연합과 조화라는 사상을 전달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한 분인 여호와”라고 모세는 말하였습니다. (신 6:4) 

그분만이 주권자이십니다. 그분은 유일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이교의 삼위일체 신들과는 달리 자신의 영광을 다른 자와 나누어 갖지 않으십니다. (행 4:24; 계 6:10; 사 42:8) 

여호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목적과 활동에 있어서 하나이시며(요 10:30),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하나님 및 하나님의 아들 사이에 그리고 제자들 서로 간에 완전한 연합이 있어야 하였습니다. (요 17:21; 갈 3:28) 이러한 일치성은 결혼 마련 안에 예시되어 있습니다.—창 2:24; 마 19:6; 엡 5:28-32.

2(이) :  이 수는 흔히 법적인 장면에 나옵니다. 두 증인의 진술이 일치할 경우 증언에 힘이 더해집니다. 재판관 앞에서 문제를 확정하려면 두 증인, 더 나아가 세 증인이 있어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 회중에서도 이 원칙을 따랐습니다. (신 17:6; 19:15; 마 18:16; 고후 13:1; 딤전 5:19; 히 10:28)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인류의 구원자로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실 때에도 이 원칙에 고착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율법에 ‘두 사람의 증언은 참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내가 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는 자이며,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에 대하여 증언하십니다.”—요 8:17, 18.

어떤 일을 두 번 하는 것—예를 들어, 진술이나 환상을 그저 유사한 방법으로 반복하는 것—은 그 문제가 확실하고 참되다고 굳게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암소와 이삭에 관한 파라오의 꿈의 경우가 이에 해당됨; 창 41:32) 

성서의 히브리어 시는 사상의 대구법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것은 언명된 진리를 정신에 더 굳게 새기게 하는 동시에 대구법을 통한 다양한 표현으로 문제를 명확하게 합니다.—시 2, 44편 등 참조.

다니엘의 예언에 나오는 한 짐승이 “두 뿔”을 가지고 있는 것은 메디아·페르시아 제국의 이중 통치권을 상징하였습니다.—단 8:20, 21. 계 13:11 비교.

3 (삼) : 동일한 문제에 대한 두 증인의 증언은 법적 조처를 취하기에 충분한 증거로 성립되지만, 세 증인의 증언은 한층 더 강력한 증언이 됩니다. 그러므로 3이라는 숫자는 때때로 강렬함, 강조 혹은 배가된 힘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전 4:12)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한 후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 연속 질문함으로써 강조를 나타내셨습니다. (마 26:34, 75; 요 21:15-17) 

베드로는 환상 가운데서 율법에 따르면 부정한 짐승을 포함한 온갖 짐승을 먹으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 환상이 그에게 세 번이나 주어진 것은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고넬료와 그의 집안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 이제는 자신의 주의를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던 할례받지 않은 이방 사람들에게 돌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베드로가 이해하기 쉽게 하였을 것입니다.—행 10:1-16, 28-35, 47, 48.

여호와께서 얼마나 거룩하고 정결하신지가 ‘여호와는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라는 하늘 피조물들의 선언을 통해서 강조되어 있습니다. (사 6:3; 계 4:8) 

다윗 계통의 지상의 마지막 왕을 폐위시키기 전에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것을 파괴하고, 파괴하고, 파괴하겠다. 또한 이것에 관해 말하면, 그것은 법적 권리를 가진 자가 올 때까지 결코 누구의 것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오면 내가 반드시 그것을 그에게 주겠다.” 

여기서 하나님은 메시아를 왕국 권능에 세우실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왕좌에 앉아 있을 다윗 계통의 왕들이 아무도 없을 것임을—그 왕좌가 완전히 비어 있을 것임을—알려 주시면서 강조를 사용하셨습니다. (겔 21:27)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닥칠 화가 얼마나 심할 것인지가 “화”라는 말을 세 번 반복해서 선언함으로 예고되었습니다.—계 8:13.

4 (사) :  4라는 수는 때때로 보편성, 혹은 균형과 형태에 있어서 정사각형을 나타냅니다. 이 숫자는 계시록 7:1에 세 차례 나옵니다. 이 구절을 보면 “네 천사”(“네 바람”을 맡고 있는, 즉 완전한 멸망을 가져올 준비가 되어 있는 모든 천사들)가 땅의 “네 모퉁이”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람을 비스듬하게 혹은 대각선 방향으로 불게 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땅의 어느 지역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단 8:8; 사 11:12; 렘 49:36; 슥 2:6; 마 24:31 비교) 

새 예루살렘은 “정사각형”이고 사방으로 치수가 동일하므로, 실제로 정육면체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계 21:16) 4라는 수를 사용한 다른 비유적 표현들은 스가랴 1:18-21과 6:1-3 그리고 계시록 9:14, 15에서 볼 수 있습니다.

6 (육) :  이 숫자는 때때로 불완전함을 나타냅니다. “짐승”의 숫자는 666으로 “인간의 숫자”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이 숫자가 불완전하고 타락한 인간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 숫자는 “짐승”으로 상징되는 것의 불완전함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6이라는 수가 삼 단계(일, 십, 백 단위에 6이 사용됨)로 강조되어 있으므로 짐승으로 상징되거나 표현되는 것의 불완전함과 결함을 뚜렷이 부각합니다.—계 13:18.

7 (칠) : 7은 성경에서 온전함을 나타내는 데 흔히 사용됩니다. 일을 완성시키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이 정하시거나 허용하신 사물의 온전한 주기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창조의 날 6일 동안 땅과 관련된 자신의 일을 완료하고 나서 7일째 되는 날에 쉬심으로써, 7일로 이루어진 주(週)로부터 7년을 7회 반복한 뒤에 오는 희년에 이르기까지 전체 안식 마련을 위한 모형을 세우셨습니다. (출 20:10; 레 25:2, 6, 8) 

무교절 축제와 초막절 축제는 각각 7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출 34:18; 레 23:34) 7은 종종 제물(레 4:6; 16:14, 19; 민 28:11)과 정결하게 하는 일에 대한 레위인의 규정과 관련하여 나옵니다.—레 14:7, 8, 16, 27, 51; 왕하 5:10.

저마다 특징이 있는,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회중”은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중의 상태를 완벽하게 반영합니다.—계 1:20–3:22.

“짐승”의 “일곱 머리”는(계 13:1) 짐승이 발전시키도록 허용된 한계를 나타냅니다. “진홍색 짐승”은 “여덟째” 왕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그 일곱에서 나오며 일곱 머리를 가진 짐승과  별도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계 17:3, 9-11) 

이것은 “짐승”의 “형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계 13:14) 그와 비슷하게 두 뿔 가진 “짐승”도 사실상 원래의 “짐승”과 공존하고 있으며, 또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원래의 짐승의 “표”를 받게 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계 13:11, 16, 17.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해 오래 참으시지만 자신의 징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분을 무시한다면 그들의 죄를 “일곱 배”로, 곧 철저히 징벌하실 것이라고 그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레 26:18, 21, 28.

성경 가운데 역사상의 사건을 다루는 부분들에 나오는 7은 흔히 온전함, 곧 일을 온전하게 행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칠 일 동안 예리코 주위를 행진하고 칠 일째 되는 날에는 일곱 번 포위하여 온전한 믿음과 순종을 나타냈습니다. 그러자 그 도시의 성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수 6:2-4, 15) 

엘리야는 갈멜 산 위에 있는 자기 종에게, 가서 비구름이 보이는지 하늘을 살펴보라고 일곱 번이나 명령함으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자기의 기도의 효력에 대해 온전한 믿음을 나타냈습니다. (왕상 18:42-44) 

나병 환자인 나아만은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목욕해야 하였습니다. 위력 있는 시리아 장군인 나아만이 예언자 엘리사가 권한 이 절차를 따르려면 상당한 겸손을 나타내야 하였으나, 그가 순종적으로 그대로 하자 여호와께서 그를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왕하 5:10, 12) 

시적인 힘 및 강렬함과 어우러진 여호와의 말씀의 순수함, 온전함, 완전함, 고상함은 도가니에서 정련된, 일곱 번 정제된 은에 비하여집니다. (시 12:6) 여호와의 자비가 “의로운 자는 일곱 번 쓰러져도 정녕 일어”날 것이라는 말에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습니다. (잠 24:16) 

시편 필자는 “내가 당신을 하루에 일곱 번 찬양”한다고 선언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찬양을 받아 마땅하심을 나타냈습니다.—시 119:164.

계시록에는 하나님과 그분의 회중에 대한 일, 또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반대하여 총력전을 벌이고 있는 하나님의 적대자 사탄 마귀에 대한 일과 관련하여 7이라는 수를 여러 곳에서 상징적으로 사용합니다.—계 1:4, 12, 16; 5:1, 6; 8:2; 10:3; 12:3; 13:1; 15:1, 7; 17:3, 10; 그리고 그 밖의 구절들.

7의 배수도 마찬가지로 온전함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70(7의 10배)은 메시아의 도래를 다루는 다니엘의 “칠십 주” 예언에서 예언적으로 사용됩니다. (단 9:24-27) 

예루살렘과 유다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70년 동안 황폐되어, “마침내 땅이 그 안식을 다[온전히] 갚게 하[였습니다].”—대하 36:21; 렘 25:11; 29:10; 단 9:2; 슥 1:12; 7:5.

하나의 숫자 안에 7이 반복되어 있는 77은 “한정 없이” 혹은 “제한 없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형제들을 그 정도까지 용서해야 한다고 교훈하십니다. (마 18:21, 22) 

살인자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정녕 “일곱 배로 보복을 당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 있었으므로, 자기 방어를 하다가 한 사람을 죽인 것으로 보이는 라멕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카인을 위하여 일곱 배의 보복이 있다면, 라멕을 위하여는 일흔일곱 배가 있을 것이오.”—창 4:15, 23, 24.

8 (팔) : 8이라는 수도 어떤 것의 온전함을 더욱 강조하는 데 사용되었으며(일반적으로 온전함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숫자인 7보다 하나 더 큰 수이므로), 따라서 때때로 풍부함을 나타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아시리아의 위협에서 구출해 주시겠다고 자신의 백성에게 보증하시면서, 아시리아에 맞서 “일곱 목자, 아니, [단지 일곱이 아니라] 인간 중의 여덟 대공”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 5:5) 

종교년의 마지막 축제인 초막절 축제의 절정에 어울리도록, 팔 일째 되는 날은 거룩한 대회, 장엄한 모임, 온전한 쉼의 날이 되어야 하였습니다.—레 23:36, 39; 민 29:35.

10 (십) : 10은 충만함, 전체, 총계, 존재하는 어떤 것의 합계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또한 7과 10이라는 숫자가 함께 사용될 경우, 7은 더 높은 것 혹은 상위의 것을 나타내고 10은 하위의 것을 나타낸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 쏟아진 10 가지 재앙은 이집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온전히 표현하였는데, 이 모든 재앙은 이집트의 거짓 신들이 철저히 굴욕을 당하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이집트의 속박을 끊는 데 필요하였습니다. 

“열 가지 말씀”은 율법 계약의 기본법을 구성하였으며, 대략 600가지의 다른 법들은 단지 이것들을 확대하고, 명확히 하고, 그 적용점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출 20:3-17; 34:28) 

예수께서는 친히 말씀하신 몇 가지 예 중에서 어떤 것의 전체 혹은 온전한 수를 가리키는 데 10이라는 숫자를 사용하셨습니다.—마 25:1; 눅 15:8; 19:13, 16, 17.

다니엘의 환상에 나오는 짐승들 중 하나와 계시록에 묘사되어 있는 일부 짐승들은 열 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열 뿔은 짐승 같은 조직을 구성하는 지상의 모든 권력 곧 “왕”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단 7:7, 20, 24; 계 12:3; 13:1; 17:3, 7, 12)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들을 위해 정하시거나 그들이 당하도록 허락하신 온전한 시험 혹은 시험의 기간이 계시록 2:10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네가 곧 겪게 될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마귀가 계속해서 너희 중 몇을 감옥에 집어넣어 너희를 온전히 시험하리니, 너희가 열흘 동안 환난을 겪을 것이다.”

12  : 족장 야곱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자손을 율법 계약 아래서 하나님의 나라로 조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12는 하느님이 제정하신 온전하고 균형 잡힌 마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창 35:22; 49:28) 여호와께서는 열두 사도를 택하셨는데,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새 예루살렘의 이차적인 기초를 형성합니다. (마 10:2-4; 계 21:14) 

“[영적]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도 있으며, 이 지파들은 각각 1만 2000명의 성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계 7:4-8.

12의 배수도 때때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은 후에 솔로몬이 세울 성전에서 교대로 봉사하도록 제사직을 24개 조로 구성하였습니다. (대상 24:1-18) 

이것은 흰 겉옷을 입고 면류관을 쓰고 하나님의 왕좌 둘레에 앉아 있던 “스물네 장로”의 신분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됩니다. (계 4:4)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추종자들, 곧 그리스도의 영적 형제들은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권과 제사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 장로들은 그 수가 단지 12명밖에 안 되는 사도들만을 가리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왕 겸 제사장”의 전체 무리, 즉 면류관을 쓴 왕 겸 제사장으로서 하늘에 자기들의 자리가 있는 14만 4000명(성전에서 봉사하는 24개 조의 제사직으로 표현됨) 전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벧전 2:9; 계 7:4-8; 20:6.

40 (사십) : 몇몇 경우에 심판 혹은 처벌의 기간은 40이라는 수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창 7:4; 겔 29:11, 12) 니네베가 회개하도록 40일의 기간이 주어졌습니다. (욘 3:4) 

40이라는 수의 다른 용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모세의 생애 사이의 유사점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40일간 단식을 하였습니다.—출 24:18; 34:28; 신 9:9, 11; 마 4:1, 2.

이상의 성경의 용례를 살펴볼 때 사도 요한이 환상을 통해 본 "666" 이라는 수는 아라비아 숫자로가 아니라 당시 통용되던 방식(백의 여섯배 + 열의 여섯배 + 여섯)으로 주어졌을 것이며 현대 번역판에서는 모두 이해하기 쉬운 아라비아 숫자 "666"으로 번역했습니다.


성경 계시록에 나오는 "666"이라는 숫자는 짐승의 표 곧 "이름"이라고 기록합니다. 6 이라는 숫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적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블레셋의 한 르바임 사람은 “거구”였는데, ‘손가락과 발가락이 여섯 개씩’ 달려 있었습니다. (역대 상 20:6)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의 정치 관리들을 하나의 숭배로 연합시키기 위해서 너비가 6큐빗에 높이가 60큐빗인 금 형상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금 형상을 숭배하기를 거절하자, 왕은 그들을 불타는 가마 속에 던져 넣게 하였습니다. (다니엘 3:1-23) 여섯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온전함을 상징하는 숫자인 일곱에 못 미치는 숫자입니다. 그러므로 여섯이 세 번 겹친 것은 심각한 불완전성을 나타냅니다.

이름은 신분을 밝혀 주는데 그렇다면 이 숫자는 짐승의 정체가 무엇임을 밝혀 줍니까? 요한은 그 숫자가 영적 인격체의 숫자가 아니라 “인간의 숫자”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 이름은 짐승이 땅에 속한 것 곧 인간 정부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여섯이 일곱에 못 미치는 숫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666 곧 여섯이 세 번 겹친 숫자는 비참할 정도로 하나님의 완전한 표준에 달하지 못하는 세상의 거대한 정치 제도에 적합한 이름입니다. 

세상의 정치적 짐승이 666이라는 숫자의 이름 아래 최고의 위치에서 통치하며, 한편 거대한 정치, 거대한 종교 및 거대한 기업은 그 짐승이 인류를 압제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는 일을 계속하도록 지원해 줍니다.

이마에나 오른손에 짐승의 이름으로 표를 받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 율법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나의 이 말을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에 간직하고 여러분의 손에 매어 표로 삼아야 하며, 그것이 여러분의 두 눈 사이에 이마띠가 되게 해야 합니다.” (신명 11:18)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계속 자신들 앞에 둠으로써, 율법이 자신들의 행동과 생각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해야 함을 의미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14만 4000명의 기름부음받은 자들의 이마에는 아버지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식별케 해 줍니다. (계시 14:1) 

이를 본떠서, 사탄은 짐승의 악귀적인 표를 이용합니다. 사고파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를테면 경축일을 기념하는 일에서와 같이, 짐승이 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압력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짐승의 표를 받으려면, 짐승을 숭배하고, 짐승의 지배를 받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짐승의 표를 받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문제를 겪어야 합니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사고파는 일을 할 수도, 재산을 소유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성폭행이나 살해를 당하거나 모국에서 쫓겨나는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요한 17:16.

그렇습니다.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 사람에게 세상은 살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666"에 관하여 "적그리스도의 표", "몸에 새기는 문신이나 디지털 코드가 찍힌 인체 이식용 마이크로 칩과 같은 일종의 강제 신분증, 바코드"  또는 "가톨릭 교황권의 표" 라는 등의 해석들은 성경의 용례를 고려하지 않은 억지 주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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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서는.... (666 의미)

그리스 정교회 측에게 문의하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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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어떻게 666을 읽었는지 궁금합니다. ///


=========== 요한은 영의 눈으써 666형태를 본 것입니다

그러니 이 계시록에서 666은 이땅에서의 숫자 666이 아니라

영의 세상 속의 666표식입니다


왜냐면


요한 계시록에서의 이 계시는

오직 영의 눈으로써만이 볼수 있는 영의 현상을 보는  기능이기 때입니다


그래서 계시를 받던 요한은 그냥 육체의 눈으로써 본 게 아니라

영의 눈으로써 본 것이지요


왜냐면 계시록을 쓴 요한은 이 계시를 받기 위해선  영의 눈은 필수이기 때문에

이미 계시라고  전제된 때문에


계시록을 쓴 요한은 이미 영의 눈이 열렸다는 증거가 됩니다


왜냐면 계시 자체가 영의 세상을 보는 능력이고

영의 세상을 보는 눈은 이 육체의 눈이나 혼의 눈으로써는  절대로 볼수 없는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시를 받던 요한은 영의 눈으로써  

이 땅에 환란 중에 나타난 그 적그리스도마귀인간을 본 때문에 이 계시록에서의

적그리스도마귀인간의 몸을


 본 그  666은

영의 숫자표식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영의 눈이 열린 때문에

이 땅에 환란중에 나타난 그  666적그리스도 마귀 사람의 몸의 그 본질을 볼 수 있었으며


몸에 그 본질을 본다는 뜻은

그 대상의 원천적인  근원을  보는 영의 현상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본   666은

이 땅에서 누구나 다 볼수 있는 그저 이땅에  숫자 666이 아니라


그 적그리스도마귀 인간의 몸의  본질을 본 결과의 수가 666이기에

그 666은   영의 수입니다




그래서

환란중에 이 땅에 사람의 육체 몸으로써 나타났지만 그 적그리스도 마귀사람의 몸을


요한이 영의 눈으로써 보니

그 자의  몸의 본질에 있는 영의 표식이 666이기에

이 666은 영의 숫자입니다


계시로써(영의 눈으로써 ) 본 요한은 666을 볼수 있지만

 


일반 다른 사람들은 그 적그리스도마귀에게 있는 666을 볼수 없는 건

요한은 육체의 눈으로써 본 게 아니라 영의 현상을 보는 영의 눈으로써 본 것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영의 세상의  사탄의 몸에 있는 숫자 666을 동시에 보면서

 이 땅에 나타난 적그리스도 마귀 인간의 몸의 666표식을

영의 세상속의 그 사탄과 같이 표식이 된 같은 666을  공유한 것은

그들은  같은 본질임을

요한이  본 것이지요


그러니 요한은 영의 눈으로써 본질이 되는 영의 모습을  볼수 있었던 때문에

 666숫자가 된 그  적그리스도 마귀 사람의 몸에 있는 본질적 표식은


사탄에게 있던 666숫자와  같은 때문에


666이 바로 사탄의 마크임을 알았고


 그 사탄의 666을 볼수 있었던 요한이


그  적그리스도마귀 사람에게도 666수가

같이 있는 것을 본 것은


 바로


666적그리스도 마귀는 바로 사탄의 화신이라고 볼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요한은  이 땅에 나타난 적그리스도마귀 몸에서 사탄의 수, 666을  본 것이지요


그러잖아도


계시록 앞장에서도

이미 요한은 그 적그리스도마귀가 오는 길이 

이 땅에선 부모가 없는 ,

바다에서 나오는

괴상한 뿔 달린 짐승이라는 것을 본


그 자체가


요한은   육체의 눈으로써 그 짐승들을 보는 게 아니라


  요한의  영의 눈으로써

 바다에서 출몰하는 괴물을 본 것입니다


물론 괴물은 영의 눈에 보인 형상이지만

그 괴물들은  영의 모습이기에

이 땅에 사람들에게는 그저 사람 형상으로만 보여서


이 땅에 환란중에 그 자가 이땅을 통치하게 된 것이고 

그 본질이 사탄이기에 그이름인 666표식을

사람들에게

찍는 것은 그 사람들을 사탄의 종으로 삼은 적을  본 것입니다


그러니 666이 찍힌 자는 바로 사탄에게 속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환란중에  적그리스도마귀사람에게서 받는 표식은


666사탄의 종이 되어 지옥에 간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환란은 구원을 위한 시기가 아니라 심판 받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괴상한 짐승이 나오는 계시록의   바다에서 나오는 것은

요한이 영의 눈이 열린  증거입니다


이런 점은 다른 사람은

볼수 없기에 특별한 영의  내용입니다


때문에   요한은 본질을 볼수 있는 영의 눈으로써  계시를 받은 상태 중,

적그리스도마귀 인간의 몸에 있는 666을 본 것이고

그 666은 바로 영의 존재 ,사탄의 몸의 표식 그 이름과 같은 666이 같이 있음을 보고


영의 세상속의 그 사탄이나   이땅에 출현한 그 적그리스도마귀 사람은

그들은 동일한 본질인 666으로써  표시가  된 때문에

그들은 같은 본질적 존재임을 안 것입니다


즉 사탄의 화신이 바로 666적그리스도 마귀 인간이라는 증거는


그 둘은 같은 666의 표식으로써 그들의 몸에 같이 표식이 된 그들의

 본질은

같은 사탄의 666임을  요한이 계시로써(영의 눈) 본 것입니다


그리고


님의 이 질문은 매우 유익하고 좋은 참신한 질문입니다


 이


땅에서 사용하는 숫자표기
666이라는 숫자는


영의 세상에서도 같은 형태의  기호로 666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영의 세상에서 사용하는 숫자 666이 이 물리땅에도 같이

통용이 된다는 점이 매우 신비하고 이상한 점이라 봅니다


그러니 같은 형태의 666이 물리땅과   영의 세상과 같이 통용이 된다는 건

이 물리땅은 영의 세상의 연장된 , 연계된 증거이다고  보입니다


그 근거의 하나로써



영의 세상과 물리 세상에 같은 숫자 666표식이  같이 통용이 되는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옥이나 사탄에게는 이 666이 매우 많이  낙인이 찍혀 있는 것을 영의 세상에서 볼수 있는데요

그 사탄의 몸에 찍힌 그 숫자 666이 이 땅에서도 666표식 기호 모양이 같습니다


물론 이 666수가 갖는 의미는  영의 세상과 물리 세상에서는 서로 다릅니다


즉 영의 세상에서 666은 사탄의 표식이지만

이 물리 땅에서 666은 그저 숫자 일뿐이지


이 땅에 666은 그저 수를 세는 물리적 개념의 수일뿐 의미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물리땅에서의 숫자 표기와 영의 세상에서의 숫자 표기가 같은 형태의

기호 표식이 666으로써   사용한다는 건 참으로  신비하고 궁금한데요



영의 세상에서도 666이라는 그 숫자의 모습이 이 물리땅에서도

똑 같은 형상의 666으로써 같은 형태로 표기 되는 것이 매우 신기하고 이상할 정도인데요


 그래서

이 땅에서 이 숫자의 표기를 누가 제일 먼저 표식을 시작한 것인지는 몰라도


이 666숫자를 이땅에서  처음 그 표기를 도입한 자는

아마도 영의 눈으로써 영의 세상에서의 666을 본자가


 그 666을  이땅에  숫자형태에 도입한 자가 아닐까도 생각해 볼 정도로


이 땅에서 666숫자 표기를 처음 한자가 누군지


매우 궁금합니다


그 666을 이땅에 사용한 자는 분명히 영의 세상에서 666을 본 확률이 매우 많다고

 생각해 봅니다


아니고선 영의 세상의 형태인 666을 이땅에 숫자에다가 같은 모습의  기호로 도입한

 근거는

어떤  무엇이었을까요 ?


아니라면,,,


 혹시 그 분이 어쩌면 꿈에서 ,,

그 6이라는 숫자의 형태를 본 것을

이땅 현실에 사용한 것일까요 ?


결과 적으로 이 땅에서의  숫자표기가 영의 세상과 연계된 모양이기 때문에


이 땅에 수 기호와    영의 수기호는   같은 모양으로

 

이 땅에 물리적 


 수의 표기는 매우 신비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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