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의도로 올리신 질문인지 알고 있고, 저를 비롯한 ‘개독놈’들의 답변보다는 ‘안티’ 네티즌들의 답변을 더 원하신다는 점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몇 마디 적고 가도록 하죠. ^^
예수라는 인물 자체가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어 왔습니다만, 호교론적이 아닌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는 현대 신학자들이나 종교학자들, 사학자들 대다수의 견해는 예수라는 인물이 실존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만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앙인들이 유지해 왔던 ‘숭배 대상으로서의 신적 존재’인 신앙의 그리스도(Christ of faith)의 표상(表象)과 실제 서기 1세기에 팔레스타인 땅을 걸어다녔던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의 모습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 역시 현대신학과 종교학에서는 상식입니다.
대다수의 근본주의적 신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복음서는 예수의 행적과 예수와 관련하여 벌어졌던 일들을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동영상에 담아 올 수 있는’ 것과 똑같이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의 내용은 각 저자가 자기 나름대로 받아들인 예수의 상(象)을 그려낸, 고백과 증언의 기록입니다. 예수의 탄생에 대한 기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4복음서 중에서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데, 이 두 복음서의 저자는 구약성서 미가 5:2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예수에 대한 것임을 주장하기 위하여 각각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마태복음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해석했을 때 도출되는 결론은,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살면서 예수를 낳은 뒤 애굽(이집트)로 도피했다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 나사렛에 새로 정착했다’라는 것입니다. 반면 누가복음의 내용은 ‘나사렛 사람이었던 요셉과 마리아는 인구조사 때문에 베들레헴에 가서 예수를 낳았다가 다시 나사렛의 본래 집으로 돌아가 살았다’라고 되어 있죠. 복음서의 예수 탄생 기록을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동영상에 담아 올 수 있는 실제 그대로의 사실’로 받아들이려 하는 사람들은 이 두 복음서의 내용이 명백히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인하려 하는데, 이것은 종교적 언어의 특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됩니다.
현대신학에서는,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의 실제 탄생지는 베들레헴이 아니라 나사렛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현대의 신학자와 종교학자들이 복음서의 예수 탄생 이야기를 무가치한 ‘거짓’이나 ‘사기’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종교적 언어의 특성을 감안할 때,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복음서의 내용은 각 저자가 자기 나름대로 받아들인 예수의 상(象)을 각자의 방식대로 그려낸 고백과 증언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동정녀 탄생’ 등의 신화적 표상이 등장한 것 역시, 종교적 언어의 특성을 감안하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기독교에서든 불교나 힌두교에서든, 종교적 언어는 기본적으로 신화적 전승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신화야말로 종교적 언어의 우선적인 표현수단입니다. 신화적 전승은 물론 문자적으로 받아들였을 때 실제 역사와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유로 ‘신화=거짓’으로 생각하고 ‘종교적 전승과 경전의 내용이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종교학의 기본적인 상식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입니다(물론 근본주의적 신자들은 이런 사람들에 포함됩니다).
현대신학에서는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추게 했다’라는 이야기나 예수의 동정녀 탄생, 7일만의 천지창조 등의 이야기가 신화적 전승이며 과학적, 역사적 사실성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기록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노아의 방주 이야기 등이 수메르 신화에 바탕을 둔 것이며 다니엘서와 에스더서 등이 실제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는 점 역시 명백합니다. 그런데 근본주의적 신앙인들은, ‘신화적 전승=가치가 떨어지는 거짓’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경전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성이라는 기준에 무조건 부합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부합하는 기록’으로 간주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근본주의가 개신교계의 다수파인 한국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한국에서는 기독교 비판자를 자처하는 사람들까지도 ‘성서의 내용 중 신화에 바탕을 둔 부분이 있고 성서 각 구절의 내용이 상충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면 성서는 거짓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는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기련’ 등의 사이트에서 ‘성서의 내용 중 어느 부분은 신화에 바탕을 두었다’, ‘어느 구절과 어느 구절은 내용이 상충하고 있다’,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추게 했다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 등의 내용을 열심히 올리는 소위 ‘기독교 비판자’들이, 바로 이러한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죠.
물론 그 사람들이 그러한 착각을 하게 된 것은, 그들 자신보다는 ‘성서의 내용은 역사적 정확성에 부합해야 한다’라는 강박관념을 가진 근본주의적 신앙인들의 무지몽매함에 일차적 원인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근본주의자들이 ‘성서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성이라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무가치한 것이므로 반드시 역사적 사실과 부합해야 한다’라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보니, 기독교 비판자라는 사람들도 ‘성서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증명하면 성서 자체의 가치를 부정할 수 있다’라는 식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질문자님이 그런 착각을 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시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결국 문제의 근원은 근본주의적 신앙인들인 것입니다.
예수 탄생에 관한 복음서 내의 기록은, 불교 전승에서 말하는 붓다의 탄생과 어린 시절 이야기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종교적 전승에서 신화적 표상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이러한 비교를 통해 잘 파악할 수 있죠. 종교학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학자인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저서 내용 중 일부를 인용합니다.
붓다의 참된 정체성 - 깨달은 자 - 이 일단 공개되고 제자들에게 받아들여진 그 시점부터 그의 생애는 변용되어 위대한 구원자에게 어울리는 신화적 차원을 획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신화화’의 과정은 시간과 더불어 확대되었으나, 사실 스승 붓다의 생전에 이미 구체화되기 시작했던 일이다. 따라서 그의 신화화된 생애(본생담本生譚)를 고려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신화화된 생애야말로 불교의 교학과 신화뿐만 아니라 신앙적 문학과 조형예술의 창조적 원천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래의 붓다, 즉 보살Bodhisattva(‘깨달음을 얻는 것이 예정된 존재’)은 자신이 도솔천의 신이었을 때 스스로 부모가 될 사람을 선택했다고 한다. 보살은 코끼리 혹은 6개원 된 아이의 모습으로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를 뚫고 들어갔기 때문에 임신은 순결했을 것이다. (보다 오래된 전승들에 따르면 붓다의 어머니는 코끼리 한 마리가 몸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임신 기간 중에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이유는 보살이 어머니의 자궁 속이 아니라 보석함 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정원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나무를 붙잡자 아기가 오른쪽 옆구리에서 나왔다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보살은 북쪽을 향해 일곱 걸음을 걸었으며, 사자가 ‘포효하는 듯한 우렁찬 목소리’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 가장 위대한 존재, 가장 먼저 태어난 존재이다. 이것은 나의 마지막 탄생이며, 장래에 내가 다시 태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탄생에 관한 신화는 미래의 붓다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우주를 초월한 존재(그는 ‘세계의 정상’에 도달했다)이며, 시간과 공간을 소멸시킨 존재(그는 ‘세계의 최초의 존재’이며 ‘가장 오래된 존재’이다)라고 주장한다. 수많은 기적들이 그러한 사실을 알려준다.
미래의 붓다가 브라만교의 사원에 도착했을 때, 여러 신상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보살의 발 아래 꿇어 엎드려”, “(그를 찬양하는)찬가를 불렀다”라고도 한다. 아이는 아버지로부터 싯다르타Siddhārtha(‘완성된 목표’)라는 이름을 얻었다. 아이의 몸을 살펴본 예언자들은 ‘위대한 인간Mahapurusha’이 지니는 32개의 근본적 표지와 80개의 부차적 표지를 발견했고, 마침내 그가 전 세계의 지배자(Cakra-vartin; 「轉輪聖王」) 혹은 붓다가 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연로한 리쉬rishi 아시타는 히말라야에서 카필라바스투로 날아와 새로 태어난 아기를 만나보고, 그 아이가 장래에 붓다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그때까지 살아서 붓다를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Eliade, Mircea, 최종성 譯,『세계종교사상사 2 : 고타마 붓다에서부터 기독교의 승리까지』(서울 : 이학사, 2005.) pp. 101~103. 에서 발췌
‘석가모니’ 또는 ‘붓다’라는 칭호로 불리게 된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인물이 실존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심할 것은 없습니다만, 그의 탄생과 어린 시절에 대한 이러한 신화적 전승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서 사진으로 찍어 올 수 있는 성격의 사실’과 일치할 리가 없음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신화적 표상을 기반으로 한 본생담(本生譚)을 ‘무가치한 거짓’으로 보고, 불교인들이 이 본생담을 귀중한 전승으로 유지해 온 것을 ‘쓸데없는 짓’으로 본다면, 그것이야말로 종교적 언어의 특성을 완전히 잘못 파악한 우매한 짓입니다. 이러한 신화화된 붓다의 탄생 이야기를 ‘불교인들의 신앙고백의 증언’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신앙을 인도하는 성스러운 언어와 모델로 본다면, 그 가치를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고 그러한 전승을 보존해 온 불교인들의 신앙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물론 이러한 전승의 내용을 문자적 차원의 진술로 받아들여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서 이러한 일들이 실제 발생하는 것을 동영상에 담아 오겠다’라고 말하는 불교인이 있다면, 저도 그런 사람은 왜곡된 신앙관을 가진 무지한 사람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지성적인 불교인들은 본생담의 내용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듯합니다.
그런데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에 이에 대한 의견을 묻는다면, 아마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문자적 차원에서 정확한 역사적 사실만을 담은 것이고 타종교의 신화적 전승은 완전한 거짓이다’라는 식으로밖에 대답하지 못할 듯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적 언어로서의 신화에 대한 무지의 소산인 것이죠.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유아 학살’의 기록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이 기록은 분명 실제 역사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저자는 구약성서의 여러 구절을 인용한 것이나 몇몇 구절에서 유대인을 우선시하는 사고방식을 드러낸 점에서 알 수 있듯, 기본적으로 히브리인들의 전통을 중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를 ‘제2의 모세’이자 ‘모세를 뛰어넘은 위대한 자’로 그려내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출애굽기 1장의 내용, 즉 이집트 내의 이스라엘인 아기들이 학살당했는데 모세만이 살아남은 것이 예수를 통하여 그대로 재현된 것으로 그렸으며, 또한 예수가 이집트에 가서 머물다 돌아온 것은 이스라엘인들이 400여년간 이집트에서 머물다 팔레스타인으로 온 사실이 예수에게서 압축적으로 재현되었다는 뜻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 마태복음의 유아학살 이야기는 역사적 정확성이라는 기준에 부합하는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마태복음 저자 나름대로의 예수의 상(象)을 그려내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정확한 사실의 기록’이라고 고집하는 근본주의자들의 관점은 애당초 설득력이 없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안티’ 네티즌들도 잘 몰라서 언급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듯해서 한 가지 말씀드립니다. 마태복음 2장 17~18절에서는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31장 15절의 내용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의 이 구절은 본래 북왕국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시리아(앗수르)군에 끌려간 것에 대해 탄식하는 내용이며, ‘라헬’은 창세기 기록상 북왕국 부족들의 조상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학살이 일어난 것으로 그려진 베들레헴 지역의 아이들은, 유다 지파이므로 창세기 기록이나 유대인들의 전승에 따르면 라헬이 아닌 레아의 자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안티’ 네티즌들께서도 몰라서 지적하지 못하시는 듯하더군요.
그리고 혹시라도 저의 답변 내용을 불쾌하게 느끼시거나 답변 내용이 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질문자님의 마음에 드는 답변을 답변확정하시기 하루쯤 전에 쪽지를 보내 주시면 알아서 삭제하겠습니다(완료된 질문에서는 답변을 삭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