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탐욕을 위한 구절만을 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성경에서 탐욕을 위한 구절만을 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작성일 2008.04.26댓글 5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성경에서 탐욕을 위한 구절만을 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원래 탐욕을 위한 종교이기 때문인가요?

 

예를 들어 십일조에 대해서는 확실한 구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명기]

(어차피 지금은 레위족이 없기때문에 구절대로라면 불쌍한 이들을 배불리 먹이는것이 십일조)

 

개신교인들은 이구절을 제외한 다른 구절들을 짜집기해서

결국 십일조는 불쌍한 이들을 도우는 행위가 아니라 교회에 내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던데

 

그돈을 교회에서 알아서 불쌍한 이들을 위해 쓴다면 또 모르겠지만

달랑 4%이하로 구색만 맞추고 나머지 96%이상을 홀랑 꿀꺽한다는 사실이 다 밝혀진 지금에서도

무조건 반드시 교회에 내야만 한다 안내면 이단이고 지옥간다라고

------------

참고자료: 광주대 노치준교수의 논문

개신교는 헌금의 4%만을 구제비로 쓴다는 내용입니다.

http://blog.naver.com/dnfxndahs?Redirect=Log&logNo=80045627741

(중앙일보에서 검색하면 원문 pdf파일이 나옵니다 유료입니다)

(이분의 자료는 그나마 양반이며 다른단체의 통계자료는 3.11%였습니다)

-------------

 

분명 확실한 구절이 있고 그 구절이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임에도

굳이 다른 구절들을 짜집기해서 결론을 도출하는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개신교는 원래가 탐욕을 채우기 위한 종교이기 때문인가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성경에서 탐욕을 위한 구절만을 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다?는 아니겠지만 일부? 그러한 교회들의 탐욕이 있다면 다음 말씀에 해당되는 사항들이라고 봅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겔 33:31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 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라

시 17:14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 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연보)

마 15:4-9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다시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지 말라 하였으나(하나님 핑계)

렘 23:36 다시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지 말라 각 사람의 말이 자기에게 중벌이 되리니 이는 너희가 사시는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씀이니라 하고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골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부자와 가난한 자 차별)

마 23:23-24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그래도 보기에는 거룩합니다.

마 23:2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십일조나 연보보다 더 귀한 의와 인과 신을 지켜야할 것입니다.

연보 몇 푼으로 생색내지 말고 먼저 교회내의 인간차별부터 없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말세에 세상 것 다 버리고 갈 것, 그리고 주님 오실날이 멀지 않았다고 하는 목자들…

교회를 견고하기가 벙어벽 같고 아름답기가 아방궁 같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거둔 재산 나누어 구제하는데 사용이 되기는 한다고 합니다만 ???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레위직분은 교회에서 모든 직분을 부여받고 봉사하는 직입니다. 예를 들면 성가대나 교사 집사 장로 목사 등등이죠. 지금도 집안이 가난해서 공부도 못하고 낼 돈도 못내고 다리가 부러지거나 아파도 절둑거리면 절뚝거리지 도움없어 병원도 못가는 그런 불상한 사람들이죠.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기독교나 천주교는 죄가 이단이라고 확실히 하셔서

구약적 지론을 예수님과 여호와의 이단이라고 못박으시면 됨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예로 예기해 볼께요..

막달라를 사람들이 돌을 들고 치려할때

구약의 율법은 그것을 가능케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께서는 그것을 막으셨죠

 

첫째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용서의 마음 이셨으며

둘째는 막달라가 그렇게 죽음은 하늘에서 죄를 받게 돼는 것이고

셌째 막달라를 돌로 죽인자들은 살인 이기에 또한

모두 살인죄를 받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죄인이라 해도 내가 인위적으로 죽음을 가하면

나또한 살인자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것

그렇게 그리스도 그분은 시대를 뛰어넘는 진리로 사신 분이 십니다.

또한 그때 그리스도 께서 막달라를 죽음에서 건지셨기에

막달라는 회계하여 옳게 살아 천국에 들수 있음과 같고

돌을 들었던 모든 사람도 살인을 면해 천국에 듬과 같은것...

그것이 그리스도 그분의 깨달음의 본질입니다.

결국 죄짓지 않음이 사람이 죄가없다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말씀그대로 윤리를 지키며 선한 법을 지키며

죄를지면 죄이며, 선행을 행하면 선행인것을 말씀하시는것

 

그러므로 죄를 합리화 하는 모든 지론은 이단입니다.

무슨이유를 대든 죄는 죄다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것이 독생자 말씀을 따름이니 정통이며

가장 선한 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을 따르는것이 이단이며,

신약을 따라도 죄짓는것이 이단자 입니다...

 

종교적 지론이나 역사의 변질을 캐냄보다

 

도적질한 물건을 내가 다시 홈치면 그도 도적질한 놈인 것과같이

법과 그나라의 고귀한 윤리를 지키면 됨니다... 

또한 하나님을 부르며 무슨죄를 지려고 하십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것에 무었을 하였는가 보다

서로 어울려 사는 사람에게 해를 입히고 죄를 짐을 가정 멀리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를 져도 범죄자인것 그것에 하나님이

있었는가 없었는가는 자신이 그렇게 말할뿐인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의 인물은 죄를 지었으며 죄인이며,완벽한 선의 이름으로 사신 예수님과

법을 지키시고,도덕을 지키 며,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서로를 위하여 사시면 됨니다..

 

혹시 그리스도 께서 믿음이 무었이냐고 물으시면 저는 예수님을 버려도

법과 윤리는 못버리겠다고 말하겠습니다.

 

제가 그리스도를 부정해도 그리스도는 천국에 계시는분 나에의해서

해가 없지만 제가 법과 윤리를 버리면 사람은 나에의해서 화를 입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그리스도에 죄책감 느끼는 것보다

죄를 짓고 죄책감 느낌이 맞지 않습니까.

 

더욱이 선행은 선행이니까

이제 동방예의 지국이라는 말을 들었던 대한민국이

민족적우월 주의는 아니라도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며

옳바른 성인을 위인을 대하듯 사랑하며 서로 존중하며 살아갑시다.

 

그분이 말씀 하셨던 진리의 말씀을 살며

예수님은 종교적 이념과 사상으로 서로가 미워하고 벌을 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야할 도리를 지키며 서로를 위하며 죽으면 누구든 피할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로 가서 세상에 지은죄와 선행에 의해서 갈라진다는 말씀 이십니다.

 

종교론은 위정자에 의해서 얼마든지 변질돼고 합리화 될수 있는것....

그러나 법과 윤리는 사람의 살아야할 도리기 때문에 무슨 이유로든

버려서는 않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천국에 계시든 원수를 위해 기도 하셨던 분이

죄가 아니라 종교론으로 사람을 해하시겠습니까...

 

법과 윤리 도덕은 그렇게 사람에게 하지 말것을 가르치는 것이고요

또한 그것을 어긴 사람에게 행해도 똑같은 죄를 짓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눔은 이유없는 선행이죠.

 

구약은 누구든 죽으면 피할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사람이 했고요

신약은 누구든 죽으면 피할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공권력으로 가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이해 돼십니까...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신약에 와서는 십일조는 헌금으로 대체 되었습니다.

롬 10장 4절 "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자들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따라서 신약성경에서 십일조를 반드시 십분의 일로 내었다라는

기록은 없습니다.

 

교회안에서 가난한 자들을 찾아서 헌금으로 줄수도 있고 이웃에 불신자들

중에서 가난한 자들을 찾아 그 헌금을 주는 것도 주님께 바친 구제의

헌금인 줄 오늘날 왜 모를까요? 이것이 바로  교회안에 내는 것만이

 

헌금의 개념이라고 심어 준 것은 바로  목사님들의 탐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사람의 계명입니다. 헌금의 목적은 구제에 있는것이고 헌금 모아지면 그 목적

대로 대부분을 구제에 써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교회안에서 그 헌금의 목적을 이룰수 없다면 가난한자들을 직접 찾아

헌금을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벧후2장 3절에 나온"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옛적 부터~" 이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로 믿는이들을 이(이득)를 삼았다"라는 것은

목사의 물질적인 성공의 탐심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헌금 많이 내면 자녀의

복과 사업의 복과 만사형통한다고 지은 말로 성도들을 이득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벧후2장1절에 나온 "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

입니다 .오늘날 거짓 선지자들이요 거짓 선생들인 목사가 많은 시대입니다.

이것 때문에 성경에 있는 주님의 말씀을 바로 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수탈체제로 이끈 헤롯 성전을 헐라!
   착취를 시스템화 시킨 성전(돌과 콘크리트)을 헐어버린 예수 ………………… (글 : 김강기명 2007. 11. 08)


 

1.
마흔 여섯해나 걸려서 지은 웅장한 성전. 이스라엘 본토, 지중해, 아프리카, 아라비아의 전 지역에서 몰려온 유대인 순례객으로 넘쳐나는 예루살렘, 그들이 그 순례기간 동안 풀어놓는 엄청난 돈과 헌금, 그들에게 제공되는 각종 종교적 서비스. 이런 것들이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유월절 풍경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에 서 있던 성전은 헤롯 대왕이 지은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의 성전은 애초에 허름하게 지어진 성전이었고(스 6:3-4), 그나마 시리아의 셀류쿠스 왕조의 침략으로 훼파되고 불결하게 되어버린 성전이었습니다. 정통 유대인도 아니었던 헤롯 대왕은 이 성전을 무려 46년에 걸쳐 그리스식으로 웅장하고 화려하게 다시 지음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통치를 위한 '국민통합'을 이루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성전에 의해 만들어진 성전체제는 수탈체제였습니다. 민중에게 초월적 하나님을 '서비스'해주는 대가로 이 체제는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까지 탈취했습니다. 민중은 로마제국에 바치는 세금과 함께 성전세를 이중으로 내야 했습니다. 게다가 성전이 완성되면서 각 지방(사마리아, 갈릴리)의 토착적 유대종교는 모두 이단이 되어버리고, 성전종교에 흡수되든지, 아니면 배제되어야 했습니다. 예수의 고향인 갈릴래아 사람들도 '자신들의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예루살렘의 하나님'을 강요받았을 것입니다.

예수가 무너뜨리려 한 건 단순히 성전 뜰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이 성전체제 자체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성전체제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공중의 새와 들의 풀도 먹이시는 하나님을 그 체제에 충성하는 사람들에게만 팔아왔습니다. 예수는 그 성전체제를 향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일갈하십니다(요 2:16).

2.
오늘도 많은 종교들이,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을 팔고 있습니다.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잔치로 만민을, 특히 고난 받는 이들을 초청하여 먹이는 것이 교회의 사명일진대 교회는 거기에 충성하는 이들에게만 하나님을 팔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죄 용서받고, 복 받고, 부자 되고, 대학 가고, 죽어서 천국 간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예수는 이들을 향해 여전히 소리치고 계십니다.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종교의 지도자들만이 예수의 비난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중들도 예수의 이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그 어떤 지배 체제도 대중의 공모 없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대중은 재미있는 존재입니다. 성전을 짓는다고 세금을 쥐어짜고, 노역에 동원할 때는 힘들어 저항하기도 하고, 대규모 공사에 대한 반감도 드러내지만, 막상 46년이 지어 거대한 건축물이 지어졌을 때 그들은 저항하기를 그치고 성전을 자랑스러워하며 금방 성전체제에 흡수되고 맙니다.

물론, 이건 저의 역사적 상상이지만, 단순히 상상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일이 역사에 반복되어왔기 때문입니다. 가까이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추진한 청계천 복구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일단 지어지고 나면, 그것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피해와 고통을 입었고, 그 결과와 과정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는 더 이상 회자되지 않고, "어쨌든 그는 성공했다"는 신화만 남아 찬사를 합니다. 그리고 대중은 기꺼이 그것이 만든 새로운 풍경 속에 흡수되어 버리지요. 그리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배제된 자들의 아픔은 은폐되고 맙니다.

예루살렘의 대중들도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성전이 세워지고, 이 새로운 성전을 보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에게 환전과 제물을 제공하고, 여행의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이들은 꽤나 돈을 벌었을 것입니다. 이내 성전이 단순히 하나님 계신 곳만이 아니요, 자신들에게 부를 가져다주는 화수분임을 깨닫고 그 체제에 충성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통에, 이전까지는 함께 고통 받던 사람들을 대중들 스스로가 배제하고 성문 밖으로 내어 쫓았을 것입니다(히 13:12). 성전체제의 봉사자인 이들 예루살렘의 대중 역시 예수의 비판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3.
더 나아가 예수는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말합니다. 성전을 허물면 3일 만에 다시 짓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그것을 "자신의 몸을 가리켜 하신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예수에게 성전은 더 이상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성전과 거기에 기생하는 성전체제(왜곡을 통한 착취)는 허물어져야 했습니다. 예수는 몸소 성전이 되었습니다. 예수 자신이 성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성전 안에, 혹은 종교체제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의 몸 안에 계신 것입니다.

성전체제는 이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이지만, 예수는 민중의 몸(신앙의 공동체)으로 부활하십니다. 갈릴리 촌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하고, 성령을 받고, 성전이 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이 온 지중해로 퍼져나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종교체제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성전인 사람들입니다. 종교나 정치의 체제(시스템), 이데올로기 같은 초월적 체제로 도피하여 자신의 안식처를 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세계에 직면하여 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헤롯 성전'으로 도피합니다. 영화 <밀양> 속의 신애라는 캐릭터는 어쩌면 이러한 우리들 모습의 대표격인 캐릭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바람 피다가 사고로 죽은 남편이 자신에게 준 고통을 그대로 직면하지 못하여, '남편을 잊지 못해 남편의 고향에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미망인'이라는 허위의식 속으로 도피합니다. 아들이 유괴당하여 죽자, 그 고통을 직접 대면치 못하고 마약과 같은 즐거움을 주는 초월적 종교 안으로 도피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이웃과의 관계, 아들과의 관계, 그를 흠모하는 종찬(송강호)과의 관계 등 모든 관계에서 피상적인 모습만을 보여줍니다. 헤롯 성전으로 도피하는 이들은 이웃과의 관계 역시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성전인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증언을 필요치 않습니다(요 2:25). 아름다운 미망인 척할 필요도 없고, 땅을 알아보러 다니는 알부자인 척 할 필요도 없고, 위대한 믿음의 일꾼인척 할 필요도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죽는 그날까지 헤롯 성전이 마련해준 자리에서 고통 받으며, 또 고통을 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우리를 몸-성전의 삶으로 초청합니다. 스스로 성전이 되어, 신처럼(요 10:34-35, 시 82:6) 세상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헤롯 성전은 무너져야 합니다. 그것을 무너뜨려야 우리는 성전으로 부활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성전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누구의 증언도 필요치 않는 참 자유인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율법의 십일조, 예수도 안했다.
율법 아래서도 목수는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 …………………………………………………… (글 : 신 완 식 ㆍ. ㆍ. ㆍ.?)

 

1. 목사는 레위 족속이 아니고 제사장도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십일조는 율법시대에 주어진 것인데 지금은 율법이 완성된 복음의 시대요 은혜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왜 십일조만 시행하고 할례는 시행하지 않나요? 여성들은 예배 시간에 왜 머리에 두건을 쓰지 않나요?

2. 교회는 성전이 아니고 예배는 제사가 아니며 헌금은 제물이 아닙니다. 요즘도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 등을 하고 있나요?

3. 아브라함이 드린 것은 자신이 거둔 땅의 소산인 농작물이나 소유한 가축에서 드린 것이 아니고 전리품입니다. 구약시대 성도들이 드린 것은 결코 전리품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반드시 개인의 소유에서 나온 소득에 근거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멜기세덱에게 드린 것은 오직 유일회적인 일이요 정기적으로 행한 구약시대의 십일조와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4. 야곱의 서원은 십일조를 드리기 전에 한 것이고 반드시 ‘If~’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지적하신 대로 그가 실지로 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물론 그 시대에는 성전도 제사장도 율법도 생기기 전이고요.

5. 구약시대에 드린 십일조 품목에 ‘돈’은 절대로 없었습니다. 지금은 돈만 받지요?

6. 구약시대에도 십일조 의무를 면제 받은 직업들이 있습니다. 수확을 위한 바구니를 만든 상인들, 들판에서 일하는 종들이 신는 신발을 만든 사람들, 추수 수확을 위해 마차를 만든 목수들, 들판에서 일하는 종들이 물을 길어 나르도록 물통을 만든 도자기공들, 들판에서 일하는 이들을 위해 외투를 만든 여인들, 임금을 받고 들에서 일한 종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예수님은 목수였기(마 13:55, 막 6:3) 때문에 십일조 뿐 아니라 성전세도 내지 않으셨습니다(마 17:24-27).

7. 헌금은 반드시 자발적이어야 합니다(마 10:8하, 마 5:42, 롬 15:26-27, 눅 6:38 등). 즉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8. 바울, 베드로, 야고보, 요한, 유다가 쓴 성경에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전무 합니다. 즉 초대교회는 이미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요? 유럽 교회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제가 다니는 영국 교회도 공식적으로 십일조는 언급조차 않고 있어요. 물론 아프리카나 스리랑카 인도 등에서 온 이들 중에 하는 분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도 사실은 위의 내용들을 잘 모르고 있지요. 유럽 성도들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십일조를 중심으로 헌금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교회 인건비, 유지비, 구제비 등 실질적인 재정관련 사항들은 ‘십일조’를 강조함으로 해결할 게 아니라 목회자들이 구체적인 재정 필요 사항들을 교인들에게 알려서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동참할 수 있게 해야 하는 데 한국 교회처럼 그렇게 강조하니, 심각한 부작용이 생기는 것이지요. 저희 교회는 십일조 강조 하나도 안하고 저도 지금 십일조 안 해도 할 일은 다하는 교회랍니다. 구제와 선교를 위해 적극적으로 헌금을 하기 때문에 담임목사님은 제 기억으로 지난 5년 동안 꼭 한 차례 그것도 스쳐 지나가는 말로 헌금에 대한 언급을 했습니다. оо님께서 참조하신 성경주석을 쓴 이는 위의 기본적인 사실을 모른 채 의례적인 논리를 따라 쓴 것 같습니다.


한국도 머지않아 십일조 문제를 극복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영국 교회도 100여 년 전까지는 했으나 지금은 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태의연하게 대처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한국 교우들은 유럽 교회는 죽었다고 하는 데 그런 측면도 있으나 영국은 ‘병든 한국 교회’와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살아있는 교회랍니다.


십일조는 무조건 소득의 십 분을 내는 것이 아니랍니다. 구약 시대에서는 반드시 소출과 가축에서 드렸고, 직업에 따라서 면제되는 것도 많았습니다. 어부와 목수가 그 대표적인 예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베드로도 십일조를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십일조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고 제사장이 있으며 성전 제사가 있을 때 유효했던 제도로서 초대교회 때는 시행하지 않다가 중세에 들어 교회가 제도화 되면서 다시 시행된 제도입니다. 영국과 서구 교회는 더 이상 십일조에 대한 의무를 지지 않습니다. 이는 믿음의 부족 문제가 아니라 성서적인 근거 문제 때문입니다. 대신 그들은 십일조의 근본 취지인 극빈자, 장애인, 노인, 어린이, 여성 그리고 사회보장 및 복지에 대해 깊은 관심과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는 한국 교회와 성도들도 맹목적으로 십일조를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그 근본 취지와 뜻을 밝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십일조 한다고 복이 굴러 온다거나 하지 않으면 저주 받는 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감언이설에 불과 합니다. 저는 기득권의 욕심과 이익을 대변하는 왜곡된 성경해석이나 잘못된 설교를 지적하고 성경이 적시하고 있는 정확한 내용을 알려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참된 목회요, 진리말씀으로 영혼을 자유케하는 고귀한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사제중심의 브로커 종교체제나 사제만 행세하고 공공연히 착취하는 노예종교에서 벗어나 진리 안에서 자유롭고, 평등하며, 거룩하게 개혁되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만약 십일조를 강조한다면 초대교회(초대교회는 십일조가 없었음)의 연보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투명하고 공정하게 집행되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합니다. 불완전한 사람이나.. 혹은 사제나 교주에게 무조건 ‘아멘’하는 것이나, 덮어놓고 맹종하는 일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뱀같이 지혜로와야 합니다. 무엇이 자유케하는 성경적 참 진리인지 무엇이 율법과 제도와 사람에게 종노릇하게 하는 사람의 계명인지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 농경 목축 사회에서 토지 소산과 가축이 '모든' 소득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따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이미 화폐가 유통되고 있었고(참고 - 농경 목축 시대였던 아브라함 시대와 전통적인 십일조가 처음으로 시행되던 모세 여호수아 시대에도 화폐가 중요한 교환 수단으로 유통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돈이 아닌 토지 소산과 가축의 십일조만을 오직 원하셨음, 창23:12-16, 신14:24-26) 다른 일거리나 매매 행위 등을 통해 여러 형태의 소득들이 있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왕정시대로 넘어갈수록 다른 종류의 소득들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성전세나 헌금, 다른 세금들은 돈으로 냈으나 십일조는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돈으로 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양식의 형태로 성전 곳간에 들여야 한다는 사실은, 십일조의 대상이 '모든' 소득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가나안 땅에서 토지 분배가 있은 연후의 토지 소산과 가축의 개념은 소득이나 부의 축적 수단이라기보다 양식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십일조는 레위인, 또는 가난한 자들과 양식을 나눠 먹는 구제의 정신 가운데서 행해졌다. 한 가족이 1년 동안 먹는 양식의 10분 1을 내어놓아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양식의 10분 1은 될지언정 '모든' 소득의 10분 1은 아닌 것이다. 적어도 말라기와 느헤미야 시대까지는 십일조가 토지 소산의 10분 1로 양식에 국한되었다는 것은 성경이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그러다가 바리새인과 랍비들이 더 많은 성전 수입을 위해 제사장들과 함께 십일조의 대상을 확대시키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토지 소산 이외에 박하, 회향 같은 특수(양념) 작물들도 십일조의 대상이 되도록 하였다.

무엇보다 십일조가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화폐 소득을 십일조에 포함시키고부터였다. 화폐 소득을 포함시키자 자연히 십일조의 대상이 '모든' 소득으로 확장되었다. 화폐와 박하와 및 향료의 십일조는 탈무드의 랍비들이 주문하는 내용이었으나 이는 성경의 의도를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성서 대백과》 제4권, p.752, 기독지혜사)

중세 교회에서도 4세기 무렵 십일조를 답변확정하고 나서 근 1000년 가까이 지난 13세기 무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십일조의 대상을 토지 소산에서 '모든' 소득으로 확대시켰다는 사실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거의 독점 체제에 가까웠던 중세 교회가 왜 십일조의 대상을 토지 소산에서 '모든' 소득으로 확장시키는 데 1000년이나 걸렸을까. 그것은 중세 교회에서도 전통적인 십일조의 대상은 '모든' 소득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화폐 소득을 중심한 '모든' 소득이 십일조의 대상이 됨으로써 십일조가 변질되고, 그것이 전통적인 십일조 정신을 흐리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십일조가 나눔의 양식이 아니라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의 치부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 (십일조를 넘어서 中..)

 

 

°(롬 3:30-31)“때문에 한분 그 하나님이 이 의롭다고 간주하심이 할례 받아도 믿음으로 부터요 할례 받지 않아도 그 믿음에 의해서라. 따라서 그 믿음 때문에 율법을 무익케 함이니, 율법을 세우지도 않고 |(율법의 고안품을)| 만들지도 아니하노라.”


‘(율법의 고안품을)’은 문맥의 의미에 맞게 첨가 한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의 율법적 흉내내기 장치(裝置)들론 ‘주일성수’, ‘십일조’, ‘성전건축(?)’..등등이 있을 겁니다.


하여, 주와 함께 걷는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또한 그런 믿음 안에서, 오늘날의 의식률(儀式律 : 주일성수, 십일조..등등)을 잘 지켜야만 신실한 크리스찬 이라고 평(評)하는 자들의 변은(딤전 6:5),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온 무지의 소치(所致)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성전(성전되신 예수- 요 2:19-21, 행 6:14, 마 26:61, 막 14:58, 마 18:20) 안에서 안식일에도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마 12:5】, 주의 백성은 공동체 안에서(교회를 이룬 각 지체- 엡 2:19-22, 고전 12:27, 롬 12:4-5, 엡 1:22-23) 그들의 자손에게 할례를 베풀었으며【요 7:23】, 주와 함께한(성령이 내주하시는 성도의 몸- 고전 3:16, 고전 6:19, 고후 6:16, 히 3:6) 다윗은 그 종자들과 안식일에 성막(혹은 산당)의 진설병을 먹었습니다【삼상 21:1-6 / 레 24:8-9】.


따라서, 우리 유일하신 성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조항들은 이미 채워진(πληροω 플레로오 | 가득하게 하다, 채우다, 풍성하게 하다, 완성하다, 끝까지 채우다, 완벽하게 하다, 실재가 되게 하다, 수행하다 / 마 5:17) 하찮은 보조수단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참된 말씀을 따르고, 배워서 주께로 활발히 자라가는 것이지, 사람들의 손으로 지어낸 그런 고안품(εργον 엘곤 | 사업, 고용, 생산된 것, 손으로 만들어진 것, 예술, 제조업, 행동, 행위 / 딛 3:5)들로 자라나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적 사고로 믿음의 크기를 잰다거나, 칭송한다거나, 자랑해 대는 것은 그들의 무지만을 더더욱 크게 알리는 허망한 노래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이 폐지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실상이시므로 그가 계시는 곳에서는 모든 상징이 사라지며, 그가 본체이시므로, 그가 나타나실 때에 그림자는 버려지기 때문이다. 즉, 그는 안식의 진정한 실현이시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으며, 그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에 참여한 목적은 그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살려는 것이다(롬 6 : 4-5).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다른 곳에서 안식일은(골 2 : 16)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한다(골 2 : 17).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는 실상의 바로 본체시며,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이 구절에서 잘 설명했다. 이 일은 어느 하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할 때까지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있을 일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날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것을 철저히 피해야 한다.

.

.

.

이리하여 거짓 선지자들의 너절한 이야기는 사라진다. 그들은 수 백년 전에 유대교적 견해를 사람들에게 감염시켰다.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만이(그들의 소위 제 칠일의 "정"만이) 지폐지된 것이고 도덕적 부분은-즉, 이레 가운데서 하루를 정하는 것은-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의미로 날을 변경했을 뿐이고, 그 날을 거룩하다고 하는 생각은 여전하다.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과 같이, 그날의 신비성에 중요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이런 사상을 가르침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자기들의 교회 규정을 고집하는 자들의 미신은 유대인 이상이요 세 갑절이나 더 유치하고 육적인 안식일 미신이다. 따라서 이사야가 당시의 사람들을 책망한 말은 현대의 그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된다(사 1 : 13-15, 58 : 13). 그러나 우리가 특히 견지해야 하는 일반적 교훈은 이것이다. 즉, 우리들 사이에서 경건이 소멸하거나 쇠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성회에 부지런히 출석하며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도을 수 있는 외면적 보조수단들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Ⅱ, 8장 28 - 34 中 에서..

 

 

이스라엘에 왕정이 시작된 후 십일조는 어딧다가 냈나?

구약에 보면, 십일조의 쓰임새가 다양했습니다. 그 첫 번째로 이스라엘 모든 처음 난 자를 대속해【민 8:14-19, 민 3:12-13 / 출 13:13, 출 22:29, 출 34:20, 레 27:26-27, 민 18:15-16】 성막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의 분깃으로 주어졌으며【민 18:21-32】, 혹 얼마는 정성 드린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먹기도 했고【신 14:22-27】, 또 그 ⅓은 구제(救濟)에 쓰였습니다【신 14:28-29, 신 26:12-15 / 레 25:1-7】.

그로부터 한참 후 이스라엘 민족이 왕을 세울 때부터 십일조는 왕한테 내라
【삼상 8:15, 17】한 성구도 있고, 실제로 왕이 걷어들인 기사도【왕상 4:7-19】 있습니다. 어떤 자들은 앞에서 말한 십일조를 ‘십삼조’{?}라 우기고는 소득에 십분의 삼을내라 하는데, 이는 자기 아는 것으로만 둘러대는 거짓말입니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이 왕한테 내는 십일조까지 합해서 십의 사를 내야한다는 말도 되기 때문입니다.

왕도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로써 이스라엘 각지파의 십일조를 걷어, 그 신하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인 성전의 문지기, 창고지기, 찬양대, 수종자, 유사들에게도
【대상 24:20-26:32, 대하 19:11】 나눠줬습니다【대상 25:6, 느 11:22-24】. 분명 대제사장이나 제사장들도 왕의 신하라고 성경에는 씌여있습니다【왕상 2:35, 왕상 4:2-4】.

따라서,‘사회보장기금’과 ‘세금’에 성격이 강한 십일조두고 그 수납처(收納處)를 교회당으로만 한정시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또, 자기들 눈에 보이는 곳에다 십일조를 내지 않았다해서
【말 3:8-10】에 말씀을 들어 도둑으로 몰아붙이는 것 또한 결코 옳지 못한 행태(行態)입니다〈어찌 ‘하나님이 교회당 안에만 계시다’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마 6:2-4, 마 25:34-40, 눅 14:12-14】 하셨으며, 걷둬드린 십일조 가운데 ⅓【신 14:28-29, 신 26:12-15 / 레 25:1-7】 은 구제(救濟)에 쓰여져야 한다는 율을 어기고 백분의 삼(3%)만으로 생색내는 자들이 더더욱 큰 도둑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 3:9】 여기서 ‘온 나라’라 했으니, 어찌 레위인들이라고 피해갈 수 있겠습니까?【느 13:4-14】 큰 도둑이 좀 도둑 정죄하는 짓(초등한 자가 범하는 우, 딤전 3:6)을 이젠 그만 그칩시다.

“사도들과 원로들이 안티오키아와 시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다른 민족 출신 형제들에게 인사합니다.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에게서 지시를 받지도 않고 가서, 여러 가지 말로 여러분을 놀라게 하고 정신을 혼란하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뽑아 우리가 사랑하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뜻을 모아 결정하였습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또 유다와 실라를 보냅니다. 이들이 이 글의 내용을 말로도 전할 것입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의 제물과 피와 (피를 빼지 않고)목졸라 죽인 것과 음행에서 떠나 멀리하는 것입니다. 이것들만 삼가면 스스로 잘 해내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행 15:23-29】

또한,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졸라 죽인 것과 음행에서 떠나 멀리하는 것”말고는 다른 짐【계 2:24】으로 성도를 괴롭히지 않으려했던 ‘사도와 장로의 규정(δογμα)’에 따르지 않고, 사도로 부터 보냄 받은 바(사도적 계승) 없이 지식의 열쇠【눅 11:52】만을 갖고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성도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마 11:28) φορτιζω 프홀티조 G5412, 짐을 얹다, 짐을 싣다, (관습과 부당한 교훈의)짐을 지우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위에 군림하려는 자의 계략을 간파하여 속지맙시다. 주의 이름으로 구제(救濟)하기 보단, 자기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사치하고 치장하길 더 좋아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을 탐하며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데에【마 23:1-7, 막 12:38-40, 눅 20:45-47】 여념 없는 자들이 지운 짐을 이제는 벗어 던져버립시다.

 

 

과부의 두 렙돈 기사는 헌금강조용인가
'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눅 21: 1- 4)………………………………………………………… (글 : 오세용 2007. 09. 26)



누가복음 21장 1- 4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과연 이 본문이 헌금에 관한 것일까, 헌금을 강조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래 들어온 설교들이 모두 그랬기에 그렇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본문을 들어 말씀하시기를 이 과부처럼 정성껏 혹은 가진 것 전부를 헌금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연보궤에 연보 넣는 것을 보시고 다른 사람들이 많이 넣는 것 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크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 공개적으로 칭찬하신 일이 이것이니 우리가 헌금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칭찬해도 되지 않는가?”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진 소유의 비율을 볼 때 과부가 바친 헌금은 전부입니다. 다른 부자들은 많이 바쳤습니다. 과부가 바친 돈에 비하면 엄청난 액수의 거액입니다. 그런데 부자들의 바친 많은 금액은 한마디도 칭찬하지 않고, 이 과부가 바친 적은 것은 왜 칭찬하셨을까요? 우리 인간들은 단순히 액수의 많고 적음만 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비율적으로 헌금액수로 보신 것입니다.”

그런 해석이 내리는 결론은 다음과 같이 명쾌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하신 이 헌금 평가의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 말씀은 또한 오늘 우리의 헌금 생활을 반성하라는 뜻이 있지 않겠는가? 저 가난한 과부를 본받자. 하나님을 우리 영혼의 구주로 참으로 믿고 그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을 그에게, 그를 위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저 가난한 과부처럼 정성의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들이 되자.”


이 본문이 과연 그러한 말씀인가 생각해보려고, 몇가지를 관찰하여 보았습니다. 본문 3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두렙돈 헌금하는 과부를 본 후에 그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하신 대상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본문이 마가복음(막 12: 41-44)에도 기록이 되어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 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막 12 :43)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자, 얘들아 내가 오늘은 너희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마…. 내가 오늘 성전에 갔더니…’  하면서  제자들에게 헌금은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셨을까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사람들입니다. 정말 그들은 금과 은도 없거니와 두벌 옷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헌금을 할래야 헌금을 할 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앞으로 너희들이 성도들을 관리할 때에 그들에게 이렇게 헌금을 하도록  가르치라고 하실리도 없습니다.

또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당시로 돌아가 봅시다. 듣는 사람이 제자들이건, 아니면 다른 사람이든 유대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저 사람들은 다 넉넉한 가운데서 자기들의 헌금을 넣었지만, 이 여자는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그런 말을 들었다면, 예수님 앞에서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먼저 했을까요? ‘아하, 저 여자가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으니 나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떠오를까요? 아니면 ‘아니, 그렇게 생활비 전부를 헌금해버리면 그 여자는 무얼 먹고 산다는 말인가?’ 라는 생각이 떠오를까요? 아마 유대사람이라면 당연히 첫 번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알고 있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고아와 과부는 특별 보호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과부를 돌보라고 말씀하신 것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 그 과부가 가진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잘했다, 나도 그 여자를 본받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당시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가 ‘도대체, 그렇게 헌금을 해버리면 그 여자는 무엇을 먹고 산단 말입니까? 그 여자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도와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이런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서기관들은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어떻게 가르쳤길래, 그 여자가 자기 생활비 전부를 헌금을 한단 말입니까? 서기관들과 부자들은 과부가 그렇게 헌금을 하는 것을 보고도 가만 있었습니까?

따라서 본문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헌금을 중요시 여겨 사람들에게 헌금을 가르친 말씀이라고 가르친 것이라 한다면, 예수님을 이상한 분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어버립니다. 이 본문은 결코 헌금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그런 용도로 사용한다면, 한마디로 예수님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럼 오늘 본문의 앞뒤 문맥을 한번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21장은 20장에 이어서 나오고 있으니 20장 마지막 구절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20장 45절-47절입니다. 47절, 그들(서기관)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원래 성경이 쓰여질 때에는 장, 절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장을 나누고 절로 구분하여, 성경을 찾고 읽는데 편리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장에 기록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 경우 본문의 말씀은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참고로,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가복음에서는 과부의 두 렙돈 기사가 12:41-44에 나오고, 그 다음 장인 13장 1- 3절까지는 성전이 무너진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0장 45절부터 예수님은 다가올 심판, 예루살렘의 멸망, 말세의 징조 등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맨 먼저 46절에서 율법학자들인 서기관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바로 뒤(눅 21:5—6)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 개의 구절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서로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20장 45- 47 서기관 …과부
21장 1- 4절  과부 …두 렙돈 헌금
21장 5절  성전 ..미석과 헌물
21잘 6절 성전 ….무너짐

그러니 이렇게 말을 이어가며 뜻을 해석해야 합니다.
20장 47절 율법학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21장 4절 (가산을 뺏긴) 과부들은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헌금을 하고….. ..
21장 5절 (그러한 과부들은 돌보지 않고) 성전은 과부가 헌금한 헌물로 호사스럽게 꾸며지고 ….
21장 6절 그러한 성전이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

이렇게 연결이 되어, 과부들의 가산을 삼킨 율법학자들에게 경고하심으로 시작하여 성전이 무너질 것이다, 라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중인데 중간에 본문을 뚝 떼어내어 헌금을 잘 하라는 것이다, 라고 해석한다면 이 얼마나 엉뚱한 해석입니까?

그러니 오늘 본문 과부의 두 렙돈 헌금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과부 즉 사회적 약자를 돌보지 않고, 또한 교회가 정작 해야 할 일은 제쳐두고 성전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등 하지 말아야 할 일에 골몰하여 정신차리지 못하고 있는 교회를 향하여 경고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을 돌아보면,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특별히 본문 말씀이 교회 개혁을 위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교훈을 찾기는커녕 이 본문을 거두절미하고 뚝 떼어 내어 성도들에게 헌금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오용하고 있으니, 정말로 한국교회가 얼마나 매(?)를 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사장들을 향한 말라기 선지자의 책망

말라기 3:8-10 은 술사(術士)의 주문이 될 수 있는가?…………………………………… (글 : ?  )


앞에서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었던 것을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부산의 C목사님은 누구나 흔히 그러는 것처럼 말라기서를 가지고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하셨는데 과연 말라기 선지자가 그런 뜻에서 말했을까요? 여기에서 그의 진정한 속 뜻을 알아보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말 한마디로 인하여 한국의 목회자들이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3:7-12절을 우선 읽어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우리는 항상 성경을 읽을 때 읽고 있는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과 문맥을 조심스럽게 먼저 살펴보고 읽는 습성을 길러야 합니다. 전체의 내용과 문맥을 무시하고 어느 한 구절을 인용하여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은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위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말라기 전체의 흐름을 파악해야 합니다.

말라기서가 기록된 시기는 스룹바벨 성전과 제사장들의 부패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성전재건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전 539 년경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고대 근동지역을 지배했던 나라였습니다. 포로지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은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성전을 재건하기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재건하고 수 십년이 지나도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큰 영광이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거기에다 흉년과 기근이 들어 고통의 나날이 연속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의 형통을 부러워 하였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의 의심과 불순종은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잘 모르는데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그들이 신실했는데도 불구하고 재앙이 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부패한 제사를 드리고 있었으며, 형식적으로 제사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것은 흠 없는 것이어야 했는데도 제사장들은 좋은 것은 자기들이 차지하고 흠있는 것을 골라서 희생제사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그렇게 해도 괜챦다고 가르쳤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촉구했으며, 율법을 온전히 준행하면 율법에 명한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말라기서는 주전 약 430 년경 부패한 제사를 드리고 있던 제사장들에 대한 책망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1장 6절을 보세요.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2장1절에도 "너희 제사장들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2장10절에 가면 "우리는"이란 말이 나옴으로써 유대 백성들을 향한 책망이라고 보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3장 8절로 가면 헌물을 도적질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헌물은 이미 백성들이 성전에 바친 것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제사장들을 향한 책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헌물
(תּרמה ㆍ תּרוּמה 테루마 | 기부금, 조세, 제물, 거제)이란 유대인들의 3대 절기에 바치던 것입니다. 헌물은 원래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헌물을 잘못 냈다고 해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백성들이 바쳐 하나님의 것이 된 것을 제사장들이 도적질했다고 보아야 맞습니다. 그러한 도적질에 대한 구체적인 행위가 1장에 나타나 있음이 그 증거입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너를 가납하겠느냐”(말라기 1:7-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3-14)

위에 나오는 더러운 떡이나 눈먼 희생, 저는 것과 병든 것, 토색한 물건.. 등등은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가지고 온 것들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은 제사에 쓰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15:21). 그러나 제사장의 입에는 율법이 있어 그러한 행위를 막는 것이 당연했지만 제사장들은 부패하여 대강 제사를 드리고 자기에게 돌아올 양식이나 돈만을 챙겼던 것입니다. 말라기 본문에 나타나는 '희생을 드린다'는 말은 백성들과는 상관이 없는 제사장들과 관련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제사장들의 부패상입니다. 하나님의 것에 대한 도적질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을 백성들이 아니라 제사장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말라기3장8절에 나오는 '너희'라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그들은 일반 백성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를 알면 본문의 의미가 뚜럿하게 나타납니다. 말라기 3잘8절에서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라는 반문을 할 수 있는 자들은 결코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말라기 1:10과 2:3을 보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우리말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것' 또는 '나의 것' 또는 '주의 것'이란 단어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번역을 해놓는 바람에 십일조에 대한 오해가 가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도적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바
(קבע 카바 | 강탈하다, (덮어)속여 빼앗다)'라는 단어는 영어의 Cover와 같이 '덮다' 또는 '속이다' 또는 '속여 빼앗다'라는 의미로써 백성들이 가져온 희생제물을 제사장들이 속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십일조에 대한 도적질은 굳이 말라기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라기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느헤미야도 여기에 대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13:4-14까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를 보면 백성들이 레위인들에게 주라고 바친 십일조를 제사장들이 중간에서 빼돌리고 성전 창고를 다른 곳에 사용한 예가 나오고 있습니다. 자연히 성전의 일을 돌보던 레위인들은 자기들에게 돌아오는 십일조를 중간에서 도적질하는 자들 때문에 받지 못해서 성전에 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렸으므로 성전은 피폐되었기 때문에 말라기 선지자가 이때 나타났던 것입니다.

느헤미야 총독은 급기야 십일조를 조직적으로 거두기 위하여 전국적인 감독체제를 갖추고 철저하게 십일조를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 10:38과 12:44에 나옵니다. 느헤미야는 감독들을 시켜 타작마다에 직접 가서 십일조를 거두게 했습니다. 백성들은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십일조를 바쳤습니다(느12:47).

그러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없는 동안에 모든 것이 변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알고 도비야의 세간들을 모두 끄집어내서 밖에 내던지고 원래 있어야 할 것들을 있게 하여 성전을 회복했던 것입니다(느13;12).
느헤미야는 십일조를 중간에서 빼돌리는 제사장들을 모두 갈아 치우고 사람을 세워 십일조를 관리하도록 했습니다(느13:13).

이렇게 말라기서는 십일조를 빼돌린 제사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입니다.
이런 책망의 말씀을 가지고 부요의 원칙이니 뭐니 하면서 하나님의 심정을 곡해하는 행위를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그저 난감할 따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부터 배우라
그분의 말씀을 알고 믿으라 ………………………………………………………………………………………… (글 : e-GOT 2007. 11. 11)



「작성자: lovesbabo (2007. 11 .10) ::: 마5:19  -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문 : 1. 이를 = 율법이 아닌지요? 2.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 - 율법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라는 뜻이 아닌지요?」


앞뒤 성구는 무시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성구만 쏙~뽑아다가 자신의 논리에 맞춰 끼우는 문자적 도구화는 결코 좋지 못합니다. 그 구절이 뭔가를 설명하기 위한 부분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이는 곧 오류와 왜곡을 낳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 마다 읽었던(행 15:21, 행 13:27) 율법과 선지자의 글들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분(요 1:14),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분(눅 6:5, 막 3:28, 마 12:8), 참 성전 되신 그분(요 2:21)”인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가리키는 손과 같습니다(요 1:36, 마 3:13-17, 막 1:9-11). 즉 점 없고 흠 없는 자가되라는 율법의 결국도(눅 16:29.31) 주를 만나 죄사함 받고 두 번째 나타나실 때에 주께로 진정한 의인이라 인정받아 영생을 얻기 위한 것이기(신 4:29, 신 30:6) 때문입니다(요 11:25-26, 요 17:3). 오늘날의 신학의 역활도 결코 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딤전 4:5). “……그는(칼 바르트) 항상 복음을 새로이 가리키는 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세례요한의 손 이상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하나님과 이웃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나름대로 노력한 것을(신학) 나중의 사람들이 훨씬 더 잘해 주길 바랬다.……” ― 이신건


율법과 선지자의 말한 것을 채워서(마 5:17) 다 이루실(마 5:18) 그분이야 말로,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는 바리사이 해석자와 서기들(마 23:4, 눅 11:46)과는 달리 진정한 선생님이요 진정한 지도자요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이기(마 23:8-10) 때문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은 그분을 증언하고 지향(志向)하며 그분의 모습을 묘사하고 표현하고 알리려했던 것일 뿐 실체는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율법과 선지자가 사소하고 작게 언급한 것도 본체인 그분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버려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거기계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부터 배우라는 것입니다(마 5:19). 이렇게 말씀하신 후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문자적 해석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해석을 내보이신 겁니다(마 5:21-48, 마 7:29, 막 1:22, 눅 4:22).


믿음이 더욱더 자라서 장성하고 싶으십니까? 그럼 믿음을 자라나게 못할 겉만 번지르르한 거짓 해석과 율법적 흉내내기인 ‘십일조, 주일성수, 새벽기도, 일천번제, 성전건축?…’등등에 하찮은 보조수단들을 떠나 하나님 말씀을 읽고 거기서 말씀하시고 계신 그분을 발견하여 그분께로 부터 배워 나가십시오.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이는 바로 그 하나님뿐입니다(고전 3:6-7).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번제물을 희생제물에 섞어 그 고기를 먹어치워라. 내가 너희 조상을 에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올 때 그들에게 번제물과 희생제물에 대하여 이야기하거나 명령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명령을 그들에게 내렸다. “내 목소리에 순종하여라.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길만을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되리라.”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너희 조상들이 에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그들에게 보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목덜미를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씀을 전하더라도 그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요, 그들을 부르더라도 응답하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나님 목소리에 순종치 않고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은 민족이다. 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 ’ (렘 7:21-26)


당신께서는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시리이다.” (시 51:16)

내 백성아, 듣거라. 내가 말하노라. 이스라엘아, 나 너를 거슬러 증언하노라. 나는 하나님, 너의 하나님이로다. 너의 제사 때문에 너를 벌하려는 것이 아니니 너의 번제야 늘 내 앞에 있도다. 나는 네 집에 있는 수소도, 네 우리에 있는 숫염소도 받지 않노라. 숲속의 모든 동물들이며 수천 산들의 짐승들이 내 것이기 때문이니라. 나는 산의 새들을 모두 알며 들에서 움직이는 생물들도 내게 속한 것들이로다. 내 비록 배고프다 하여도 네게 말하지 않으리니 누리와 그를 채운 것들이 나의 것이기 때문이니라. 내가 황소의 고기를 먹고 숫염소의 피를 마시기라도 한단 말이냐? 하나님께 찬미로 제사를 드리고 지존께 네 서원을 채워드려라. 그리고 불행의 날에 나를 불러라. 나 너를 구하여주고 너는 나를 공경하리라.” (시 50:7-15)

“저는 가련하고 고통 중에 있나이다. 하나님, 저를 도우시어 보호하소서.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라. 송가로 그분을 칭송하리라. 이것이 주님께는 더 좋도다, 수소들보다 뿔 달리고 굽 갈라진 황소들보다. 가난한 이들이 이를 보고 즐거워하리라.” (시 69:29-31)


‘주 저의 하나님 당신께서는 저희를 위하여 기적과 계획 들을 많이도 행하셨으니 그 누구도 당신께 견줄 수 없나이다. 제가 알리고 말하려 해도 헤아리기에는 그것들이 너무나 많사옵니다. 당신께서는 희생과 제물을 즐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의 귀를 열어주셨나이다. 번제와 속죄제를 당신께서는 바라지 않으셨나이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나이다. “보소서, 제가 왔나이다. 두루마리에 저에 대하여 쓰여있나이다. 저의 하나님, 저는 당신의 뜻 행하기를 즐기며 제 가슴속에는 당신의 가르침이 새겨져있나이다.” 저는 큰 모임에서 정의를 선포하나이다. 보소서, 제 입술 다물지 않음을, 주님, 당신께서는 알고 계시나이다. 당신 정의를 제 마음속에 감추어두지 아니하고 당신 성실과 당신 구원을 이야기하며 당신 자애와 당신 진실을 큰 모임에서 숨기지 않나이다. 주님, 당신께서는 제게 당신의 자비를 거절하지 않으시니 당신 자애와 당신 진실이 항상 저를 지켜주리이다.’ (시 40:6-10)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두루마리 책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번제물과 속죄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히 10:5-10)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찍어 넘어뜨리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로 그들을 죽여 나의 심판이 빛처럼 솟아오르게 하였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이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예지이다.’ (호 6:1-6)

이스라엘아! 주 너의 하나님께 돌아오너라. 너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않으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나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게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 (호 14:1-3)


내가 무엇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고 무엇을 가지고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 합니까? 번제물을 가지고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까? 수천 마리 숫양이면, 만 개의 기름 강이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죄를 벗으려면 내 맏아들을, 내 죄악을 갚으려면 이 몸의 소생을 내놓아야 합니까?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미 6:6-8)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찐 짐승의 기름기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악을 저지르기를 그만두고 선을 행하기를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주고 과부를 두둔해주어라.” (사 1:10-17)

“너희는 베델로 오너라. 그리고 죄를 지어라. 길갈로 오너라(거짓 산당 거짓 성당 거짓 교회당). 그리고 더욱더 죄를 지어라. 아침에 희생제물을 바치고 셋째 날에 십일조를 바쳐라. 누룩 든 빵을 감사 예물로 살라 바치고 큰 소리로 자원 예물을 공포하여라. 이스라엘의 자손들아 이런 것들이 너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 주 하나님의 말씀이다.” (암 4:4-5)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제물 바치는 것을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삼상 15:22-23)


‘예수님께서 그 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 9:9-13)

註) ― 근동 특히 팔레스티나에서 식사는 사람들 사이의 일치가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때라고 생각하였다. 율법 준수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알지도 지키지도 못하는 “세리와 죄인”을 멸시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상종하는 것조차 피하였다. 더구나 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인 곧 부정(不淨)한 자의 초청을 받아들이시어, 다른 많은 죄인과 함께 식사를 하신다. 이로써 그분께서는 유다교 랍비들의 중요한 거짓 규정을 의도적으로 깨뜨리신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들이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범하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마 12:1-7)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
한국교회가 설교 홍수 속에 있지만 말씀은 기근 ……………………………………………………… (글 : 정 병 선 2007. 11. 09)



본문: 마가복음 11장 12~25절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제일 먼저 성전에 들어가셨다.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인 성전에 들어가셔서 구석구석을 둘러보셨다. 어떤 제자는 성전의 외형을 보고 그 규모와 위용에 놀란 나머지 ‘얼마나 굉장한 돌이며 건물이냐’고 감탄을 하였는데(막 13:1), 예수님은 성전의 외형을 보지 않고 내부와 구석을 살폈다. 겉을 보지 않고 속을 보았다. 그리고 날이 저물어 더 이상 성전에 있을 수 없게 되자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내려가 밤을 보냈다. 


이튿날 다시 예루살렘에 가려고 베다니를 떠나는 길에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찾던 예수님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멀리 있는 것을 보시고, 혹시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갔다. 가보니 잎사귀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었다. 아직은 열매 맺을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열매 없는 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막 11:14)며 저주를 퍼부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아직 무화과 철이 아니라는 거야 예수님도 아실 터. 그런데 어찌하자고 저주를 퍼붓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 그렇다. ‘철’을 ‘계절’로 이해하면 혼란이 생긴다. 하지만 여기서 사용된 ‘철’은 무화과 철을 가리키는 계절상의 용어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때를 나타내는 종교적인 용어, 마가가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막 1:14~15)고 말할 때 사용했던 바로 그 용어(kairos)라는 사실을 알면 더 이상 헷갈리지 않는다.


마가는 본문을 구성할 때 치밀하게도 ‘하나님의 때’를 의미하는 종교적 용어를 무화과나무 이야기에 도입함으로써 무화과나무 이야기에 종교적 차원을 부여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곧바로 이어지는 성전 이야기와의 연결 고리를 맺어준다. 다시 말하면, 본문은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통해 성전 이야기를 읽어야 성전 이야기가 제대로 읽히고, 또 무화과나무 이야기도 성전 이야기를 통해 읽어야 제대로 읽히도록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강도의 굴혈이 된 성전


이튿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다시 성전에 들어가셨다. 성전에 들어가자 성전 안에는 사람들이 붐볐다. 성전 뜰에는 희생 제사로 드릴 소·양·비둘기 등을 판매하는 자들과 각지에서 온 순례자들에게 성전세로 사용되는 세겔을 교환해주는 환전상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야말로 종교적인 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희생 제사에 쓰는 기구를 가지고 아무나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는 등 성전은 말할 수 없이 무질서했다. 예수님은 그런 성전의 모습을 보시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환전상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었다. 성전이 상업적으로 운용되고, 종교적으로 기능화 되어버린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은 가차 없이 상업상의 거래를 중단시키고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내쫓았다. 그리고 성전을 가로질러 종교의식에 필요한 물건 운반하는 것을 금지시킴으로써 성전의 종교의식도 중지시켰다. 


그리고는 여느 때와 똑같이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이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치는 가운데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불릴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막 11:17)며 정곡을 찌르는 말씀도 서슴지 않았다. 아! 강도의 소굴이라!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소굴’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아스럽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하다. 요즘 네티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노골적이고 신성모독적인 언사가 아닐 수 없다. 이 행동이 예수님의 행동이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받아들이는데 익숙해 있지만, 세속화되었다고 하는 현대 교회에서조차도 누군가가 교회를 향해 ‘강도의 소굴’이라고 한다면 분명히 교회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팔매질을 당할 언사를 내뱉었다. 왜 그러셨을까? 예수님은 여간해서 중심을 잃지 않으시는 분이신데 왜 이처럼 중심을 잃은 듯한 언행을 하셨을까? 


그 당시 유대 종교의 실상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성전은 특정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고 있었다.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환전상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자기들만의 상호 이익을 보장하는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고, 모든 이익은 그들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본래 성전은 만민이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는 곳으로 만민에게 개방되어야 한다. 만민이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소통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본 성전의 비전이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성전의 비전을 저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물론 유대 종교의 외피를 보면 결코 피폐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성전을 떠날 때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성전을 보고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막 13:1)라며 감탄할 정도로 위용이 대단했다. 또 성전 마당이 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종교적인 활동도 활발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성전세를 바치고, 희생 제사를 드리며, 말씀과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결코 말라비틀어진 죽은 종교가 아니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성전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오래 전에 말한 것 그대로였다.


“너희는 이처럼 내가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우리는 안전하다’라고 말한다. 너희는 그런 역겨운 모든 일들을 또 되풀이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다.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보았다.”(렘 7:10~11).


그랬다. 예레미야가 지적한 대로 성전은 도둑들이 자기들의 정체를 숨기는 곳이 되어버렸다. 온갖 죄악을 범하고, 탐욕에 이끌려 과부의 가산을 강탈하고도 성전에 들어가기만 하면 숨길 수 있었고 포장할 수 있었다. 성전은 온갖 죄악을 저지를 수 있는 방패막이였다. 당시의 유대 종교는 잎은 무성한데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 바로 그것이었다.


이익에 눈먼 종교지도자들과 진리 들을 줄 아는 백성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의 진리를 가감 없이 말씀하고, 성전 중심의 종교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말하며 비참하게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을 예고하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주변부를 건드릴 때는 적의를 표출하지 않았지만 저들의 체제와 이익의 중심부를 뒤흔들고 위협한다고 생각될 때는 여지없이 사나운 발톱을 드러내며 죽일 방도를 찾는 것이 저들이었다.


저들의 관심사는 처음부터 백성들을 진리로 자유케 하거나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향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저들의 관심사는 언제나 자기들의 이익이었다. 저들이 좇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이익이었다. 그런데 진리는 언제나 현실적 이익에 반한다. 진리가 이익을 동반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때문에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가려야 했다. 진리를 가리지 않으면 이익을 도모할 수 없기 때문에 이익을 쫓는 자는 진리를 쫓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진리를 가로막고 억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반면에 백성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다. 갈릴리와 이방에 살던 주변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던 것처럼 예루살렘의 군중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그렇다. 백성들은 우둔한 것 같지만 진리를 들으면 깨우친다. 백성들이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는 것은 듣지 못해서다. 이익에 집착한 종교지도자들이 포장된 진리, 왜곡된 진리, 자기들 이익에 부합되는 거짓 진리만을 말하기 때문에 진리를 듣지 못해서 깨우치지 못하는 것이지 진리를 정직하게 들려주면 백성의 귀는 열린다.


그러기 때문에 이익에 눈먼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귀가 열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백성들의 귀가 열리면 자기들의 거짓이 통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하여, 저들은 할 수만 있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의 귀를 열어주는 자를 제거하려 한다. 참 진리를 듣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제도와 권력으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들에게 그랬고,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에게 그랬으며, 오늘의 교회도 할 수만 있으면 성도들의 귀를 막으려 한다. 진리를 가르치는 자들의 입을 막으려 한다. 그것도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또한 진리의 이름으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


바로 이것이 교회의 역사요, 종교의 역사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귀를 틀어막고 입을 틀어막는 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이스라엘 종교의 역사요, 교회의 역사였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막으려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을 들려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듣는 자가 있게 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희망이 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시피 하나님나라는 만민에게 개방되어 있다. 듣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은혜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하나님께 나와 듣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그렇다면 기도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기도는 소통이다. 기도는 소통의 종교적 표현이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전부이며, 알파요, 오메가다. 더 이상 무언가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면 충분하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부활하신 것도,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을 만드실 때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것도 피차 소통하기 위해서다. 하나님나라도 하나님과 만물이 소통하는 나라일 뿐 다른 무엇도 아니다. 때문에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은, ‘만민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집’이라는 말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소통은 조직이나 제도로 되지 않는다. 훈련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성경 공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이 소통을 돕는 하나의 방편일 수는 있지만, 그런 것들로 소통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소통의 길은 오직 하늘로부터 시작된다. 소통은 은혜요, 선물로만 존재한다. 그러기 때문에 소통인 기도는 자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업적이 될 수도 없으며, 축복을 받는 도구로 동원될 수도 없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해 주어진 은혜의 선물일 뿐이다. 기도-소통은 진실로 신앙의 본질이요,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본질이다.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이야기는 비유이지만 단순히 비유만은 아니다. 비유이면서 동시에 사실이요, 사실이면서 동시에 예언이다. 실제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다음날 아침에 보니 저주를 받은 무화과나무가 정말 뿌리 채 말라 죽어 있었다. 베드로는 전날 일이 생각나 예수님께 말했다. “선생님, 저것 좀 보십시오. 선생님이 저주하신 저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막 11:21) 이 말을 할 때 베드로의 가슴이 어땠을까? 아마 놀라는 정도를 넘어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두려움 같은 걸 느꼈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와 능력이 어떠함을 보고 놀라기도 했겠지만,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가 뭔가를 암시하는 것 같다는 직감 때문에 더 놀라고 두려웠을 것이다. 


그렇다.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것은 이스라엘의 미래, 성전 신앙의 미래를 보여주는 예언이었다. 무화과나무가 죽은 것처럼 이스라엘의 미래, 성전 신앙의 미래 또한 그러할 것임을 암시하는 예언이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호하며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막 11:11)라고 외쳤지만, 실제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다윗의 나라가 아니라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와 같은 운명이 될 것임을 예언적으로 보여주었다.   


기도하는 집의 위력


성전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 성전 신앙의 운명이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처럼 될 것임에 반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은 진정한 능력을 행사하는 참 자유의 집이 될 것임을 말씀하신다. 베드로가 말라 죽어버린 무화과나무를 보고 “선생님, 저것 좀 보십시오. 선생님이 저주하신 저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라고 충격적인 말을 하자, 예수님이 곧바로 기도 이야기를 하신다. 나는 이게 조금은 생뚱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곰곰이 묵상해보니 뜻이 통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말을 듣고 대뜸 하신 말씀이 “하나님을 믿어라”(막 11:22)였다. 그리고 곧바로 “누구든지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말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말한 대로 될 것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막 11:23)고 했다. 연이어 용서를 말씀하셨다(막 11:25).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는 믿음·기도·용서다. 그런데 믿음·기도·용서는 이미 도래한 새로운 공동체의 본질과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증하는 요소다. 예수와 함께 시작된 새로운 공동체는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방편이나 방어막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될 것이고, 기도하는 공동체로서 하나님과 막힘없는 소통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피차 용서하고 용서받는 공동체로서 허물과 죄악과 비난이 더 이상 기를 쓰지 못하는 공동체, 그래서 지금의 성전 공동체와는 질적으로 다른 공동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이사야 선지자의 비전이 결코 헛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말씀하셨다. 


특히 믿음의 기도는 산을 옮긴다고 말한다. 당신의 말씀이 무화과나무를 말라 죽게 한 것처럼 믿음의 기도는 산을 바다에 빠뜨릴 수 있다고, 믿음의 기도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과 소통하는 바로 거기에 기도가 있다. 기도는 단지 내가 믿는 것도 아니고, 내가 확신하는 것도 아니며, 원하는 것을 얻는 방편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럴 때 기도는 산을 바다에 빠뜨릴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산을 단지 눈에 보이는 산으로만 보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 산은 단지 산이 아니다. 산은 세상의 높아진 것들을 통칭한다. 온 세상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세상의 우상들을 통칭한다. 모든 사람들이 오르기 원하는 욕망과 성공을 의미한다. 산처럼 견고하여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돈과 명예와 세상적 가치를 의미한다. 이 높고 견고한 산을 어느 누가 어떻게 바다에 빠뜨릴 수 있겠는가? 정말 정복할 수 없는 요새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한다. 높은 산을 바다에 빠뜨려버릴 수 있다고.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는 산을 허물어버릴 수 있다고. 하나님과 소통함으로서 하나님의 세계를 알고,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아는 자는 세상의 우상들을 발로 찰 수 있다고. 세상의 우상들로부터 넉넉히 자유할 수 있다고. 그렇다. 나는 바로 이것이 기도의 진정한 능력이라고 믿는다. 세상의 우상들 앞에 절절매지 않는 능력, 세상이 우러러 보는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길 수 있는 능력, 그런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기도의 저력이라고 믿는다.


기도의 홍수 속에 기도의 빈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돈이나 권세나 외적인 거룩함에 있지 않다. 오직 기도에 있다. 아니다. ‘기도’조차도 많이 왜곡되고 오염되어서 ‘기도’라고 하면 자칫 뜻이 와전되어버릴 수 있다. 하여, ‘기도’보다는 ‘하나님과의 소통’이라고 하는 것이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과의 소통,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요, 교회의 근본이며, 능력의 근원이다.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은 채로 종교적인 활동만 무성하고, 종교를 빙자한 상거래의 장이 되어버린 성전은 더 이상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담아낼 수 없다. 그런 성전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뿌리째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처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막 13:2).


하지만 기도하는 집이 되면, 하나님을 움직이는 종교적 수단으로써의 기도가 아니라 소통으로서의 기도하는 집이 되면 비록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 할지라도 높은 산을 바다에 던져버릴 수 있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 역사의 중심-하나님나라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주님은 교회를 향하여 한 가지 기대를 갖고 계신다. 교회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기를. 그래서 세상의 높아진 것들을 허물어뜨리기를.


그런데 한국교회의 기도소리는 크고 높으나 세상의 높아진 것들을 허물어뜨리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의 높아진 것들을 우러러보며, 그 앞에 무릎 꿇고 있다. 기도로 열심히 세상의 우상들을 손에 넣게 해달라고 조른다.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기도하는 교회라고 소문은 자자한데 산을 바다에 빠뜨리지 못하고 산으로 기어오르기 바쁘다. 무엇 때문일까? 진정으로 기도하는 집이라면 그러지 않을 텐데…. 사랑하는 한국교회가 설교의 홍수 속에 있지만 말씀의 기근이듯이, 기도의 홍수 속에 있지만 기도가 빈곤한 건 아닌지….

 

이것들 중 만들어진 것과 버리지 말아야할 것은 과연 무엇?
버릴 것과 버리지 말 것을 옳게 분별하라(마 23:23-24, 눅 11:42)………………………………………………… (글 :  e-GOT 2007. 10. 12)



¤【마 23:23-24】°화로다 바리사이 해석자들과 너희 서기들아, 박하와 양념과 회향의 십일조로 인해서 율법의 중요한 판정과 긍휼과 믿음은 내어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들을 만들어서할 의무가 있는 것도 내버릴 것도 아니다. 눈먼 인도자들이 날벌레는 걸러내나 낙타는 단숨에 삼키도다.

{° ουαι  υμιν  γραμματεις  και  φαρισαιοι  υποκριται  οτι  αποδεκατουτε  το  ηδυοσμον  και  το  ανηθον  και  το  κυμινον  και  αφηκατε  τα  βαρυτερα  του  νομου  την  κρισιν  και  το  ελεος  και  την  πιστιν (우아이 휘민 그람마테이스 카이 화리사이오이 휘포크리타이 호티 아포데카투테 토 헤뒤오스몬 카이 토 아네똔 카이 토 퀴미논 카이 압헤카테 타 바뤼테라 투 노무 텐 크리신 카이 토 엘레오스 카이 텐 피스틴, 화로다 바리사이 해석자들과 너희 서기들아, 그 박하와 그 양념과 그 회향의 십일조로 인해서 율법의 중요한 그 판정과 그 긍휼과 그 믿음은 내어버렸도다) ταυτα  | δε | [δε] | εδει  ποιησαι  κακεινα  μη | αφειναι | αφιεναι | (타우타 | 데 | [데] |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 압헤이나이 | 압히에나이 |, | 그러나 | 이것들을 만들어서할 의무가 있는 것도 | 내버릴 | 내버릴 | 것도 아니다) ° οδηγοι  τυφλοι | | οι | διυλιζοντες  τον  κωνωπα  την  δε  καμηλον  καταπινοντες (호데고이 튑흘로이 | | 호이 | 디윌리존테스 톤 코노파 텐 데 카멜론 카타피논테스, 눈먼 인도자들이 그 날벌레는 | | 그 | 걸러내나 그 낙타는 단숨에 삼키도다)}



¤【눅 11:42】°또한 화로다 너희 그 바리사이들아,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로 인해서 판정과 하나님의 사랑은 지나쳐버렸다. 그러나 이것들을 만들어서할 의무가 있는 것도 지나쳐버릴 것도 아니다.

{° αλλα  ουαι  υμιν  τοις  φαρισαιοις  οτι  αποδεκατουτε  το  ηδυοσμον  και  το  πηγανον  και  παν  λαχανον  και  παρερχεσθε  την  κρισιν  και  την  αγαπην  του  θεου (알라 우아이 휘민 토이스 화리사이오이스 호티 아포데카투테 토 헤뒤오스몬 카이 토 페가논 카이 판 라카논 카이 파렐케스떼 텐 크리신 카이 텐 아가펜 투 데우, 또한 화로다 너희 그 바리사이들아, 그 박하와 그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 로 인해서 그 판정과 그 하나님의 사랑은 지나쳐버렸다) ταυτα  δε  εδει  ποιησαι  κακεινα  μη  παρειναι (타우타 데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파레이나이, 그러나 이것들을 만들어서할 의무가 있는 것도 지나쳐버릴 것도 아니다)}



앞의 두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과연 율법에선 십일조를 누가 무얼 드렸는지와 또 십일조의 진정한 의미가 판정 긍휼 확신 하나님의 사랑임을 믿어야한다.


율법에서 말하는 십일조는, 하나님께 땅을 대여 받은 자들(레 25:23)과 십일조의 수혜자인 레위인들이(민 18:25-29) 내는 것이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이 농경과 목축 사회였음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따라서 땅을 대여 받지 못한 노예, 어부, 물건을 만들어 파는 장인들.. 등은 십일조라는 율법의 의무에서 빠져있는 자들이다. 땅이 있어야 희년에(레 25:8-22) 맨 처음 대여 받았던 자의 자손이에게 땅을 되돌려주는 것이 가능해 지고(레 25:23-28, 민 27:6-11, 롯 4:1-12, 렘 32:8), 땅이 있어야 안식년(레 25:1-7)도 지킬 것이 아닌가? 또 땅이 있어야 그 소산물인 곡물과 과실과 굽이 갈리고 되새김질 하는 정결한 가축을 바칠게(레 25:30-33) 아니겠는가?


이런 이유로 한참 후대의 바리사이 해석자들은(υποκριτης 휘포크리테스 | 대답하는 사람, 해석자, 통역자, 배우, 연극배우, 위선자) 율법에서 빠진 이들 중 누구까지 십일조를 내야 되는지, 율법에서 빠져있는 이들 작물 중 어디까지 십일조를 해야 되는지 신학적으로 정립(Mishnah, 미쉬나 : 미쉬나는 대부분 기원 70-220년경에 생존한 랍비들의 토론에서 성립되어 있다. 이들의 율법적 토론은 점차로 집성되고, 탄나임으로서 알려지는 학자의계속적 노력에 의해 성문(成文)으로 되었다)하는데 논쟁하고 답하는 걸로 소일할 만큼 온 종일을 매진했다. 이런 해석자들의 연구를 모으고 편집하는 자가 바로 서기관들이다(γραμματευς 그람마튜스 | 서기, 필사자, 비서, 기록자, 성경에서는 모세의 율법과 성경을 배운 자, 해석자, 교사). 이들 모두에겐, 십일조의 본질을 이해하기 보다는 ‘십일조 할 것과 안할 것’을 결정짓는 세부조항의 확장이 더 중요했다. 연구하고 논의하며 가르치고 기록할 방향이 틀린 것이다.


~ ταυτα  | δε | [δε] | εδει  ποιησαι  κακεινα  μη | αφειναι | αφιεναι | (타우타 | 데 | [데] |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 압헤이나이 | 압히에나이 |, | 그러나 | 이것들을 만들어서 할 의무가 있는 것도 | 내버릴 | 내버릴 | 것도 아니다)’, ~ ταυτα  δε  εδει  ποιησαι  κακεινα  μη  παρειναι (타우타 데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파레이나이, 그러나 이것들을 만들어서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지나쳐버릴 것도 아니다)(이것들은 만들어서 할 필요가 없고 이것들은 지나쳐버려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 지적하신 것이 바로 이것들에 관해서 이다.


박하(ηδυοσμον 헤뒤오스몬 | 달콤한 냄새, 박하), 양념(ανηθον 아네돈 | 아니스, 딜(향신료나 약재로 사용되는 식물)), 화향(κυμινον 퀴미논 | 회향, 쓰고 강한 맛과 향기로운 맛을 가진 씨를 가진 팔레스타인에서 재배되는 식물), 운향(πηγανον 페가논 | 운향풀, 약효를 지닌 약 60 cm(2 피트)정도의 관목), 모든 채소(παν  λαχανον 판 라카논 ; λαχανον 라카논 | 풀, 채소). . . . . . (και) 판정(κρισις 크리시스 | 분리, 절단, 분할, 선택, 판정, 판결, 재판관의 단체, 정의) 긍휼(ελεος 엘레오스 | 자비, 긍휼) 확신(πιστις 피스티스 | 진리에 대한 확신, 믿음, 충성, 충실, 성실) 하나님의 사랑(την  αγαπην  του  θεου 텐 아가펜 투 데우 ; αγαπη 아가페 | 형제의 사랑, 애정, 선의, 사랑, 자비, 사랑의 제사) 이러한 것들(ταυτα 타우타 | 이것들, 이러한 것들) 중에서 ‘필요 없이 만들어서하고 있는 것과 무심히 지나치지 말아야할 것’을 구분하라는 것이다.


너희들이 만든 세부 조항(유전, 의문)으로 걸러낸(διυλιζω 디윌리조 | 여과하다, 거르다, 여과기를 통해 쏟다, 물기를 빼다) 티끌만한 날파리를(κωνωψ 코놉스 | 포도주를 발효시켜 증발시키는 포도주 각다귀 또는 모기붙이) 가지고(레 11:20-23, 신 14:19) 의미 없이 말장난할 필요(εδει 에데이 | 필요하다, 의무가 있다, 옳고 적합하다)도 없고(κακεινα  μη 카케이나 메 ; κακεινος 카케이노스 | 그리고 그는, 그 역시 ; μη 메 | 아니다, 하지 않도록, ~도 아니다), 율법의 의미(본질)로 더 훨씬 무겁고 중한(βαρυς 바뤼스 | 무게가 무거운, (비유) 짐스러운, 엄한, 대단히 중요한, 잔인한) 낙타를(καμηλος 카멜로스 | 낙타) 너희는 잡아내지도 않았다(κακεινα  μη 카케이나 메 ; κακεινος 카케이노스 | 그리고 그는, 그 역시 ; μη 메 | 아니다, 하지 않도록, ~도 아니다)함이니, 바리사이 해석자와 서기들의 재앙이다(ουαι 우아이 | 아아, 슬프도다, 화로다). 하찮은 양념들의 십일조에 대해 훈계당하는 사람들의 잘못이 아닌, 무지와 무감각과 어둠에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너희 소경된 인도자의(οδηγοι  τυφλοι 호데고이 튑흘로이) 잘못을 혹독하게 질타하시니(마 7:3-5, 눅 6:39-42), 그렇게 박식하다 들먹거리던 율법사들이(νομικος 노미코스 | 법과 관련된 사람, 법에 정통한 사람, 신약에서는 모세의 율법 해석자나 교사) 욕으로(υβριζω 휘브리조 | 거만하다, 오만하게, 무례하게 행동하다, 거만하며 수치스럽게 행동하다, 나쁜 말로 상처를 입히다) 밖에 듣질 못한 것 아니겠는가(눅 11:45)?


십일조를 강요하면서도, 정작 옳은 선택(정의)과 올바른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하신 사랑을 내보일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베품과 나눔을 무시해버린 저기 유대 바리사이들 보다 더 악랄하게 장성치 못한 코흘리개에게 조차도 십일조의 짐을 지우는(φορτιζω 프홀티조 | 짐을 얹다, 짐을 싣다, (관습과 부당한 교훈의)짐을 지우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결국 오늘날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대부분의 교인들에게 문자적 해석을 내놓고, 율법적 흉내 내기 조항을 들이댄 눈먼 인도자들의 날파리식 십일조는, 과거 농경사회였던 유대공동체를 삼켜버린(καταπινω 카타피노 | 단숨에 들이키다, 삼키다, 게걸스레 먹다, 몽땅 없애다, 파괴하다) 것처럼 여기서도 그 위력을 떨칠 허상들 중 하나란 말인가? 미개한 이천년 전 바리사이보다 못한 지금을 어찌해야하나..

탐욕을 위한 구절만을 취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탐욕을 위한 구절만을 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원래 탐욕을 위한 종교이기 때문인가요? 예를 들어 십일조에 대해서는 확실한 구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 삼...

없는것도 받으신다는 성경구절이 있나요

... 관련된 성경구절이 있나요 음식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죄값을 위한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죄가 무엇인가 ? → 우주 만물의 창조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성경책에 문신을 하지말라는 구절이...

... 보고 성경구절만으로 정리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직접... 그러한 처벌을 받은 이유는 이씨조선의 이웃사랑과는... 사함을 위한 동물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아니다와 관련된 성경구절이 있나요?

... 관련된 성경구절이 있나요? 영혼, 마음에 생명이... 죄값을 위한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죄가 무엇인가 ? → 우주 만물의 창조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성경구절 질문(내공 150)

... 말한 이유무엇인가요? 2.이 구절들은 이사야 53장과 어떤... 종교경전"이므로, 성경은 "천동설의 가짜 하나님"인, 숫자 "하나"신을 위한 사탄마귀의 경전. 천동설로 우주를...

십일조 관련 성경구절을 찾다가....

십일조 관련 성경구절을 찾아보고 싶어 찾다가 님의 길을...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다름아니라.. 두가지의 질문을...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도...

성경에 나오는 헌금에대한 구절들을...

성경에 나오는 헌금에대한 구절들을 최대한 많이... 복음전도를 위한 당신의 계획을 성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인가? 요 3:16; 엡 2:4~7. “천연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