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자서전
학 번 : 0311---
학 과 : 생활과학부
이 름 : 김 00
제 출 일 : 2003.11.3
자서전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든다.
특히 부모님의 자서전이라 그런지 조심스럽게 생각을 해보았다.
비록 레포트를 계기로 쓰게 되지만 사실은 정말, 전부터 내가 본 부모님의 모습과 걸어온 그 길에 대해서 한번쯤 정리를 해보고 싶긴 했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 부모님이라 말했었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내 자신이 자랑스럽고 떳떳했기 때문이다.
자식으로서 부모님을 믿고 존경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개인에게 각자 정도의 차이는 있는 것 같다.
자식에게 있어 부모님이란 이렇게 된다고 한다.
어렸을 때의 부모님은 "뭐든지 할 수 있는 분이야",
10대의 부모님은 "엄마 아빠가 완벽한 것은 아니야. 할 수 없는 일도 있지",
20대에는
"물론 엄마아빠는 훌륭하시지만 세대차이가나, 고리타분해. 내 생각대로 하는 게 더 맞지"
30대가 되어 자식이 생기면 "이건 부모님이 알지도 모르겠군. 나중에 확인하지"
40대가 되고 50대가 되면.."이럴 때 부모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60대가 되어 또 인생의 황혼기가 되었을 때는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정말 훌륭하신 분들이었어,,,,"
분명 , 어렸을 때의 부모님, 청소년기의 부모님, 나이가 들었을 때와 또 내가 늙었을 때의 부모님은 분명히 그 의미가 크게 다를 것이다. 나 역시 중, 고등학교 시절, 지금 보면 사춘기라고 할 수 있을 때에 많은 생각이 있었고, 정신적 방황도 있었다.
물론 그 시간이 지나며 나는 모든 것에 대한 큰 의미는 아니더라도 작지만 분명한 나의 가치관도 성립했고 성숙할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그런 시간들 안에서 부모님과 크게, 작게 갈등도 생겼었다. 하지만 아무리 큰 갈등이 지나가도 가슴, 마음 깊이 있는 부모님에 대한 믿음과 존경심은 흔들리지 않았던 듯싶다.
그 것은 내가 착해서, 속이 깊어서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내 생각일지 모르지만 자식이 부모에게 갖는 존경심과 믿음, 공경하고자 하는 마음은 부모가 만드는 것이고 부모의 능력인 것 같다. 그 능력이란 결코 부모가 해주는 물질적인 도움이나 자식을 불러 앉혀 들려주는 부모공경의 교훈이 아니다.
나는 작은 것에서 큰 의미를 찾고 내가 흡수할 점을 찾는 버릇 때문인지 모르지만 어머니, 아버지의 평소 행동과 평소 내 눈에 보이는 말 한마디에서 영향을 받고 믿음을 갖게 된 것 같다.
부모님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내가 모르던 모습들, 내가 태어나기 전의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들이 필요했지만 나의 부모님은 전남의 장성이라는 군 단위 작은 고장에서 과수원을 가꾸고 계신다. 시기상 가장 바쁜 철이고 이야기를 나눌 여지가 없으신 관계로 나는 부모님에 대한 자서전이라는 것을, 내가 평소에 듣고, 보고 느껴온 나의 부모님에 대해 이야기함으로 채우고자 한다.
이 글의 배경으로 보이는 사진은 전남 장성에 있는 낮은 야산 위의 우리 집이 과수원의 일부와 함께 나온 것이다. 지금 보면 나무들도 크고 푸르지만 내가 어렸을 적, 그리니까 부모님이 이곳에 터를 잡으실 때만 해도 지금의 과수원은 없었다. 풀이 나고 돌만 있는 그저 삭막한 낮은 야산일 뿐이었다고 한다.
머슴까지 부리고 있는 천석꾼이라고 알고 있는 나의 증조 할아버지. 그런 종가 집에서 6남 1녀의 남매중 5번째 손자로 태어나 크게 부족한 것 없이 자라셨지만 조선 시대적인 가풍의 엄격한 교육자 집안에서 마냥 부유하고 편하게 자라신 것은 아니다.
전남 광주에서 대학의 전공에 따라 건설회사의 건축기사로 일하시며 어머니를 만나셨다. 결혼을 하고 안정적인 신혼생활을 시작하려 했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많은 자식들 중에 아버지를 믿고 그 돌밭의 야산을 아버지께 물려주셨다 한다.
아버지는 그 야산을 개간하시고자 결심하신다. 어머니 역시 외가 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믿고 새로운 시작을 함께 하실 결심을 갖게 된다.
그 당시 주위 사람들로부터 아무 도움도 주지 않으면서 나오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비판과 안쓰러움을 받았다고 한다.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전공과도 관련 없는 시작을 하려고 하니 당연한 시선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광주에서 장성군이라는 작은 고장으로 힘들지만 새로운 시작을 함께 하신다. 그 야산을 가꾸어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앞서 말했지만 아버지는 그 근방에서 가장 가풍 있고 부유한 집안의 7남매중의 5번째 아들이셨는데 5번째 자식이라는, 위치는 쉽게 말해 혜택을 받기 어려운 위치였다. 위로는 형4명과 누나, 밑으로 막내 한 명이 있어, 항상 물려받는 것은 중간에 있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항상 위로 잘하고 밑으로 챙겨 줘야하는 위치이기도 했다. 내가 어렸을 때 초등학교에서 소풍가기 전날 아버지에게 웃으면서 들은 기억이 있는 이야기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막내)가 같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 소풍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둘에게 똑같이 100원씩 주셨고 소풍날 아버지는 동생을 챙기며 보고 있었는데 작은 아버지가 그 100원을 군것질을 금방 하고 남들이 사먹는걸 처다 보고 있었다고 한다. 같이 어린 나이에 아버지는 형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에게 있는 100원을 동생에게 주었고. 작은 아버지는 그 돈으로 또 금방 과자를 사와서 먹으며 아버지에게 하나도 안주고 다 먹어버렸다는 이야기였다. 어린 나이에 작은아버지를 야속하게 생각하며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런, 아버지의 어릴 적부터의 위치와 엄격한 가정 안에서 형성된 성격 탓인지 아버지는 형제애나 혈육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 팔이 굽는 정도가 남다르시다.
가끔 사촌 언니나 오빠들을 만나 이야기 해보면 아버지의 친척, 내 혈육을 감싸는 것, 챙기는 것이 남다름을 인정하고 따뜻하게 느낀다고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것은 아버지가 마냥 다 해주거나 챙기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람을 사귐에 항상 진심으로 대함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에선지 늘 사촌언니나 오빠들에게 안부전화가 오고 고민상담을 들어주는 가장 인기가 많은 친척 어른이시기도 하다^^..
아버지는 공부를 장성군 안에서 1~2등을 하셨고 할아버지와 큰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셨다고 한다. 그 당시 광주에서는 "서 중"이라는 중학교가 있었는데 지금의 수능제도처럼 시험을 쳐서 들어가야 했다고 한다. 그 학교에 가면 또 일류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고 대학까지 일류로 이어지는, 지금보다 학벌이 더 중요시되고 의미가 컸던 때이니 만큼 앞길이 보장되다 시피 하던 분위기였다. 때문에 장성 안에서 10명의 학생들이 그곳에 가기 위해 모여서 과외를 했다고 한다. 그 10명중에 아버지는 항상 1~2등을 다투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그 당시 선생님이 나의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확인이 가능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서중에 떨어지셨다고 한다. 10명중 2명이 붙었는데 당시 200점 만점에 200점을 맞거나 198점 만 합격되고, 한 두 문제 차이로 196점을 맞아떨어지신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듯싶었다.
그 당시 나는 중학교에 들어가 영재반 시험에 떨어졌을 때 아버지가 씁쓸하게 이야기 해주신 걸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결국 큰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기대로 다시 공부를 하셨지만 서중에 가지 못하시고 그 다음 학교에 진학하시게 된다.
또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의지가 약하다며 끈기가 없다고 충고하시며 해주신 아버지의 고등학교 생활과, 직접들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버지가 친구들을 만나 오가는 대화 속에서 알게된 이야기들을 해볼까 한다.
쉽게 말하면 아버지는 고등학교 생활을 즐기신 것 같다. 낚시와 등산에 취미를 두셔서 늘 주말이면 친구들과 또는 학교 선생님들과 전국의 산을 등산하신 것 같다.
당시 광주 상고에는 지금 뉴스에도 이름이 나오는 조직의 일원들이 있는 걸로 안다. 아버지와 동기인걸로 아는데 유도와 태권도로 다져진 말하자면 학교의 문제아들이 항상 괴롭히는 학생들을 아버지는 중재자로서의 역할도 많이 하신 듯 하다.
그렇게 싸움도 맣이 하시고 칼에 맞아 크게 위험할 뻔도 있으셨다고 한다. 어울리는 친구 층이 두루 두루 있었지만 항상 교복이 깔끔하게 다려져 있었고 성적 역시 상위권에 결석 한번 없었기 때문에, 늘 선생님과 1:1로 등산을 다닐 정도로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터치를 안하고 예뻐라 하셨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는 학창시절을 즐기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어찌 말하면 풍류적인 생활, 등산과 낚시에 시간을 많이 보내신 듯 하다. 많은 사람이 내 사람으로 주위에 남고 지금도 사회에 각층에 있는 그 사람들이 아버지를 찾아오지만, 결국엔 자신이 사회에 나왔을 때 지난 시간 속에서 잊혀진 자신의 가능성과 한 두 문제로 인해 서중을 못 가서 바뀐 인생 등이 가슴에 남으신 듯 하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사회적 출세나 지위를, 쉽게 말해 관모가 없는 것을 한번도 아쉬워한 적이 없다. 어쩌면 내가 부모님의 피땀 안에서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자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그 보다 나는 아버지가 이루어낸 지금의 모습과 자부심, 누구 앞에서나 당당하시고 정직한 모습.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진심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사귐에서, 항상 존경하고 닮고자 했던 것 같다.
만 오천 평 가량의 돌뿐인 야산을 가꾸어 지금의 과수원을 이루어 내신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피땀이다. 땅은 정직하다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노력을 지금의 과수원이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하다.
아버지는 과일의 새로운 품종도 개발하시고 수출도 하신다. 5년 전부터 국립 연구소의 품질인증을 받아 우리 과수원에서 나오는 품질인증 마크를 단 과일은 일반 시중에서는 구할 수가 없다. 서울에 있는 신셰계 본점과 신라호텔에만 출납이 되고 있는데 전남에서는 최고의 가격대와 함께 최고의 품질로 인증을 받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전공과 먼일을 하시며 이만큼 가꾸어온 것이기 때문에 더 관심을 받고 티비에 몇 번 소개되기도 했었다.
처음 풀과 돌뿐인 야산에서 14K의 결혼반지까지 팔아 가시며
그 누구의 '도움 없는 비판'만을 안고 무엇하나 없이 희망만을 안고 시작하신 과수원에서,
또 광주에서만 생활하신 두 분이 이 고장의 유지가 되시기까지, 이만큼 되기까지는 정직한 땅이 말해주듯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 그대로 "피땀" 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더, 오늘날이 되기까지는 어머니의 역할은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피땀 안에 더 진하게 베어 나왔을 것이다.
첫 신혼생활은 어머니에게는 너무도 힘든 하루하루 였을 것이다.
결국 어머니 스스로가 원해서 외할아버지, 할머니를 이기고한 결혼이라 아무 불평도 하지 못한 체 큰집 뒷마루에서 우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 큰집에는 가스렌지는 물론이고 난로조차 제대로 없어서, 불을 때서 하루 세끼 밥을 해먹어야했고 아빠는 날마다 뭐가 바쁜지 너무도 야속했었다고....
광주에서만 살던 어머니로서는 시집 생활에 적응하는 한편 이런 시골 생활에도 적응 하셨어야 했을 것이다. 겨울이면 어찌나 추운지, 친구도 만나러 갈 수 없고, 외출을 하려면 할머니부터 큰 엄마, 큰 아빠 눈치까지 정말 어떻게 견뎠는지 어머니도 모르겠다고 하신다.
나를 낳아 큰집에서 10분 거리의 농장(지금의 과수원, 돌뿐인 야산)으로 이사를 나오는데 세상이 온통 당신의 것인 듯 싶고,너무나 홀가분했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나이에 시집 오셔서 열 여섯 식구의 의식주에서 벗어나 아버지와 나와 엄마, 셋이 산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좋으셨을까. 이 농장에 못 할 것이 없을 것 같았다고 말씀하신다.
그 때 그 풀밭과 돌뿐인 농장을 보고서도 저런 생각이 드신걸 보면 큰집에서의 생활이 그만큼 힘겨우셨나 보다.
내가 아는 어머니는 어쩌면 나보다 더 순진하신 분이다. 일 계산도 빠르시고 야무지시지만 사람을 대함에 거짓이 없고 계산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늘 나보다 더 소녀 같은 모습으로 기뻐하고 사람 대함에 솔직하시다 그래서인지 나의 중, 고등학교 적 우리 집에 다녀간 친구들은 그때나의 친구들을 대하던 우리 어머니 아버지 모습을 기억하고 아직도 나보다 나의 부모님에 대해 안부를 묻곤 한다.
어머니의 어린 시절은 그 시대에 참으로 서민적인 보통 가정이었다고 한다. 어머니 어릴적엔 외할아버지께서 단칸방에 학원강사이셨기 때문에 외 증조할머니의 대식구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전학을 와서도 졸업때 우등상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공부는 했엇고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항상 상위권에서 밀리지는 않으셨다.
어머니의의 꿈은 오로지 대학에 진학하여 영어 선생님이 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이 꿈도 아들선호 사상이 짙은 외가 집의 분위기에서 외교관의 꿈을 접고 택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고등학교진학시기가 되자 외할아버지께서는 큰딸은 대학에 가지 말고 실업계로 진학하여 취직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 당시는 외할아버지의 말씀은 곧 법이요 진리였었고 거역이란 있을 수도, 입밖에 꺼낼 수도 없었다고 한다.
외할머니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체로 큰딸의 꿈을 그렇게 접게 하신 것이 지금에 와서도 한이라고 나에게 말씀하시곤 한다. 사실 외가에 이모나 삼촌들 중에서 큰딸이 제일 공부도 잘하고 똑똑했다고 이모들도 말하곤 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어머니도 그때에 한을 품었다고 하시는데 지금은, 그때 광주 외가 집에는 결혼하지 않은 어머니의 삼촌, 고모들도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고, 외할아버지는 팔 남매의 장남으로 그 월급으로 언제나 빠듯한 대가족 살림을 꾸리셔야만 하셨으니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너무나 힘들고 고단했던 할아버지의 삶이셨던 것 같다고 말씀하신다.
실업계로 진학한 어머니는 너무나 싫고 답답한 여고3년을 보내야만 하셨다고 한다 .
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다. 나 역시 맘에 들지 않는 학교에서 02학번을 다녔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말처럼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나 역시 부모님 몰래 수능을 다시 보는 선택을 했고 나의 그 선택이 지금의 이 자리에 있게 하기 때문에 어머니의 말씀을 백 번 이해하고 수긍한다.
그렇게 어머니는 어머니의 욕심으로 성적을 항상 상위권을 유지하며 모든 기능 시험도 치뤄 자격증도 획득했었지만 너무도 무의미한 날들이었다고 말씀하신다. 어째든 성적순으로 취업을 나가게되어 어머니도 고3 졸업 전에 건설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건축기사로 취업한 아버지를 만나게 되신 것이다. 어머니는 당시 19살. 모쪼록 자기 임무에 충실한 그런, 맡은 일은 완벽하게 해내려고 하는 성실한 여경리 사원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아빠의 첫인상은 뭐라고 할지 잘 모르시겠다고 한다.
아무래도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셨으니 좋으셨을 거라 생각된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는 27, 8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분은 잘 맞으시는 것 같다. 어떻게 서로 알게 되고 사귀게 되었느냐고 고등학교 때부터 몇 번 물은 적은 있지만 말씀을 잘 안 하시니 그저 서로 좋았을 거로만 생각하고 있다. 이모의 말을 들어보면 당시 일 끝난 후에 집에 와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어린 동생들을 앉혀놓고 이야기했다고 웃곤 한다.
고된 과수원의 일, 그것도 아무것도 없는 땅을 아무것도 없이 가꾸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고되고 힘든 시간 속에서도 어머니는 그 시간 안에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의 역할에 최선을 다 하신 것 같다.
그 마을 , 동네 사람들에 비해 조금 더 앞선 생각을 가진 어머니 덕분에 나와 내 동생은 그 부근(시골마을)에서는 누구도 하지 않는 학습지라든가 책들을 말 그대로 정말 쌓아놓고 살았던 것 같다. 바로 장성 아래 광주 같은 도시만 되도 그런 것은 흔했을지 모르나 내가 사는 장성이라는 군 단위 고장은 아주 시골도 도시도 아닌 근교촌 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보기 힘들었다.
어머니가 입는 것은 나와 내 동생 입는 것과 비교가 될 수 없었던 걸로 기억된다. 광주에 있는 이모들을 시켜 항상 깔끔하고 좋은 것만 입히고 신기셨던 것 같다.
또 사진 찍는걸 좋아하셔서 그렇게 나와 내 동생을 꾸며서 과수원 꽃밭에서 찍은 사진들은 지금 보아도 참 보기가 좋다.
한번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 많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집에서 좀 떨어진 과수원까지 갈려면 한참 걸리는데 내가 돌이지난 봄에 그 과수원에 인부들이 있어 먹을 것을 갖다주러 가야했는데 나를 데리고 갈 수가 없으셨던 어머니는 보행기에 나를 태워 문손잡이에 그 보행기에 끈을 2미터정도 달아 묶어놓고 과수원에 가셨다고 한다. 갔다 오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엄마를 부르며 발버둥을 쳤던지 그 끈이 풀어져 마루에서 보행기와 함께 떨어져 얼굴이 땅에 박혀 있었다고..
그때 어머니의 놀라움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으며 많이 웃었던 기억이 나지만 그때 어머니께서 얼마나 놀라셨을까 생각하니 한편으로 그만큼 어머니가 나를 애지중지 하셨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원래 부모는 자신이 힘든 만큼 자식에게 공부를 시키고 뒷바라지를 하여 자기 같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나는 그것을 우리 부모님을 보면서 똑바로 느낀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내 친구들이 하는 시골의 일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 일을 할 시간에 조금 더 공부하라는 아버지 어머니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가끔 아버지가 온실 속의 화초라고 나와 동생에게 화가 나실 때면 그런 말씀을 하시곤 한다. 너무 힘든 것 없이 아무것도 모르고 안일하게 키웠다는 말씀이시다. 그때야 뭣 모르고 반발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이 맞는 말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못되게 대들었던 듯 싶고 너무 후회가 된다.
또 부모님은 나와 동생에게 거짓말에 대해서 아주 엄하게 다루셨다. 처음부터 거짓말이란 것은 제일 나쁜 짓이고 못된 것이라고 엄마 아빠에게 제일 나쁜 짓을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아주 작은 거짓말이라도 들키면 그 날은 어머니에게 파리채든 빗자루든 엉덩이를 사정없이 맞곤 했었다. 어머니 또한 할아버지에게 그렇게 배우셨음 일 것이다.
지난 얘기지만 어머니가 전에 해주셨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중학교시절 그때는 고등학교진학 연합고사라는 것이 있어서 밤늦게까지 학교에서는 자율학습을 했었는데 어머니는 40분 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서 다니셨다. 중3 어느 날은 외할아버지께서 학교까지 마중을 오셨는데 그만 어머니는 그 약속을 잊어버리고 혼자서 친구들과 함께 길이 엇갈리어 집에까지 걸어 오셨다고 한다.
그 날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잊어버린 대가로 할아버지께 종아리를 그야말로 피가 터지게 맞은 적이 있다고 하신다. 할아버지께서는 거짓말하는 것과 약속 안 지키는 것을 제일 싫어하신다고 한다.
나 역시 어렸을 적 방학 때마다 외갓집에서 지내면서 손녀여서 그런지 크게 혼난 적은 없었지만 그런 말씀을 듣곤 했던 기억이 난다. (외가 쪽에서 나는 큰 손녀였고 또 할아버지를 잘 따라서 인지 혹은 할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셨던 것인지 할아버지는 나를 예뻐라 하셨던 것 같다. ^^ )
어쨌든 비록 부모님의 기대에 못 미치는 딸이지만 어머니는
"그래도 너희 둘은 자연의 모든 혜택을 누리며 건강하고 착하게 자라주어서 엄마, 아빤 그게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선물이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환경 속에서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행복한 가정상'도 받은 거라 생각한단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럴 때마다 괜시리 죄송하고 눈물이 날것 같은 건 참 부끄러운 일이다.
이렇게 나와 동생이 잘 자라 준 것이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하시는 나의 부모님은 과수원을 일구신 지난 수 년동안 이 고장에서 농가 소득을 위해 힘쓰시고 자기가 한만큼 이득이 돌아가도록 노력하신 것 같다.
영농조합법인을 설립하여 국가 지원금을 받아내셔서 자기상표가 없는 농가들에게 브랜드화를 추진시키고 법인 공동 사업으로 선과장과 저장 창고 등을 지어 수출도 하신 걸로 들은 것 같다.
대형 유통단체에 대항하여 소농이 살아남기 위해 직매장을 만들도록 하시고 개개인의 농가소득을 위해 앞장서 열심히 하신 걸로 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작은 부분뿐이지만 이런 노력들이 인정을 받아 '도지사 상'과 '제향 중앙 회장상' 등을 받으신 것 같다.
또 재배법과 유통에 관하여 초청강의를 하신 적도 있으시다. 요즘 어머니 아버지에게 있어 또 다른 자식과 같은 과수원에 또 새로운 시도를 하고 계신다.
아버지가 지난 시간동안 이렇게 한 일에 이어 요즘은 과일에 기능성 상품을 연구하고 계신 듯 하다. 늘 최선을 다하시고, 또 그 결과가 정직하게 나타나는 땅이니 만큼 이번에도 역시 어머니 아버지가 노력하시고 연구하신 만큼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믿는다.
여기 까지 부모님의 자서전을 쓰면서 드는 생각이
난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좋은 부모님을 만나 그 부모님을 존경하는 것.....
어쩌면 지극히 평범하고 모든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 수 있지만
이만큼 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 또한 행운이며, 내가 착해서 이해심이 깊어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이 자식이 부모에 대해 갖는 마음은 부모가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난 2년 동안 큰집에 할머니께서 중풍으로 쓰러지신 후
큰집에, 아버지를 비롯한 7남매의 어른들은 2년 내내 한 분도 빠짐없이 돌아가며 할머니를 모셔, 형제간에 우애가 더 깊어지신 듯 하다. 병들고 늙은 부모님에게 밥을 떠 드리고, 대 소변을 갈아드리며 목욕을 시키는 것이라고 나에게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나는 그것을 보며 나도 부모님을 모실 나이가 되어서 저렇게 해야지 하고 다짐을 하곤 했다.
그렇게 하는 것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실제로 부모님은 나와 동생에게 그렇게 말로 가르치신 것 보다 행동으로 보여 나에게 자연스럽게 베어들게 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 그렇고, 형제간, 사촌간에 지내는 것에 있어서 그렇다.
부모님의 지금까지 살아오신 시간의 결과는 우리 과수원과 나와 동생일 것이다.
과수원 농장 위에 부모님의 꿈을 담은 집을 짓고 농장을 가꾸시며 앞뒤 정원과 잔디밭이 있는 집에서 사는 모습은, 도시에서 일하는 아버지의 친구 분들이나 도시에 젖어 사는 남들이 보기에
그저 풍요롭고 한가롭다고, 신선놀음을 한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또 그것을 부러워하곤 한다.
하지만 그 뒤에 나의 부모님의 인생이 피땀과 함께 베어든 것이고 이만큼 유지하기가 어떤 것인지를 모르기에 하는 말들 같다.
앞선 생각을 갖고 앞서서 연구하고, 같은 일을 하는 힘든 사람들을 위해 여러 일을 하시는 아버지에겐 또 남모르는 갈등과 고민이 없을 리가 없다.
현재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지금까지 살아오신 시간..그리고 앞으로 살아가실 시간의 어떤 전환점에 오신 것 같다.
이제 곧 대학을 가게될 고3이 되는 동생, 그리고 서울에서 하숙하며 학교를 다니는 나,
이런 변화와 또 쓰러져 가는 안타까운 농촌의 현실 속에서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아버지를 위하며, 가족을 위하고,또 크게는 이런 서민의 현실을 위해 준비 하신게 있으신 듯 하다.
처음 돌밭이던 야산을 아무런 농기계도 없이 맨손으로 가꾸어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 오신 것처럼 그 과정에서 느끼신 것, 또 누구보다 많이 쌓아 오신 그 인덕으로 두 번째 꿈을 준비하시는 듯 하다.
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생에 힘을 드리고 싶고 박수를 드린다.
앞으로 부모님에게 의지할 시간,
또 내가 부모님을 돌보아 드릴 시간.
이렇게 함께 할 남은 시간들에서 좋은 향기가 나는 그런 발자취가 남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