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의 정의
한복은 한국의 옷이다. 짧은 저고리와 긴치마의 여자 옷, 저고리와 넓은 바지의 남자 옷을 말한다.
특성
그 오랫동안 한복은 시대에 따라 저고리 길이, 소매통 넓이, 치마폭이 약간씩 달라질 뿐, 큰 변화는 없었다. 즉 한복은 둥글고, 조용하고, 한국의 얼을 담고 있다. 실크나 면, 모시로 주로 만들어졌으며, 고름의 색상이나 소매통 색상이 여자의 신분을 나타낸다. 또한 나이와 사회적 지위, 계절에 따라 색상에 변화를 줄뿐 옷의 모양은 안동의 시골아낙이나 대통령부인이나 모두 똑같다. 18m의 원단에도 불구하고 가볍고, 입기 쉬운 점이 한복의 장점이다. 명절과 결혼식 같은 특별한 날 주로 입혀진다. 한국에는 약 오만개의 제작업체가 있으며, 발행부수 만부가 넘는 한복 전문잡지도 다수가 있다.
삼국시대 한복의 특징
고대의 한국이 중국보다 문화적인 측면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한 사실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예 중 하나가 의복문화이다.
중국은 조무령왕(趙武靈王)이 B.C. 307년에 한국의 저고리 고를 기병복으로 채용한 후 당대까지 관리와 서민들에게 계속 입혀졌다.
일본에는 BC 1C AD 7C에 걸쳐 지속적으로 한민족 대집단이 한국 옷을 입고 이주하여 기층문화(基層文化)의 형성(形成)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한민족(韓民族)은 원몽고(原蒙古) 내지 Tungys족과 동계(同系)로 간주되며 중국학자 부사년(傅斯年)은 하(夏)는 서방계(西方系)이며 채도문화(彩陶文化)의 주인이고, 은(殷)은 동이(東夷)의 한 분파이며 흑도문화(黑陶文化)의 주역이라 하였고, 중국의 노고학자 이제는 산동반도가 중국 초보문화의 중심지요, 은왕조(殷王朝)의 발상지(發祥地)인 동시에 은족보다 선주했던 종족이 흑도문화(黑陶文化)를 특징으로 한 동이족(東夷族)이었다고 하였다
통일신라 시대의 한복의 특징
신라는 나라가 부강해짐에 따라 삼국을 통일하여 국력이 강대해지고 문화가 찬란하게 빛났으며 제반제도, 시설의 정비, 경제생활의 안정과 예술도 고도로 발달하여 민족문화의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특히 불교를 신봉하여 불교예술이 극도로 발달하였으나 이 시기의 유물이나 사적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다.
이 시기는 중국에 있어서 당나라가 융성하였던 때였으므로 신라에서는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천당정책을 썼는데, 제28대 진덕여왕은 왕금(王錦)이라는 비단에 수를 놓아 당나라에 보내고 김춘추를 보내어 왕과 조신의 장복(章服)을 청하여 들여왔다. 그 후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 4년에는 부녀자들까지도 중국복식을 따르도록 했는데 이것이 중국의 관복제도를 정식으로 받아들여 입게 된 최초의 일이다. 이것은 궁중이나 특수 유관자층에 한했다 할지라도 우리 복시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으므로 복식사상 일대 변천기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신라에서는 골품제도라는 것이 있어 성골 이하,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평민 등 가문과 혈통에 따른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에 복식의 양상도 계급에 따라 유형을 달리하게 되어 다양하게 발전했다.
흥덕왕대에 이르면 신라문화는 완숙기에 접어들어 복식이 대단히 사치했을 뿐 아니라 외래품을 숭상하고 계급의 복식질서도 문란해졌기 때문에 복식금지제도를 새로 제정하게 되었다. 여기에 의하면 의복재료도 삼국시대에 비하여 현저하게 풍부해져서 견직물(絹織物)로는 금, 사, 나, 능(綾), 주(紬), 시, 세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이 옷감의 종류가 다양함에 따라서 복식양식도 호화찬란하게 발전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과의 외교관계로 당나라의 패션이 유행하여 복두를 비롯해서 단령·반비·배당·표 등의 새로운 복식이 등장하였다.
이와 같이 통일신라의 복식은 호복 계통인 북방계통 복식을 기본으로 중국계 복식이 들어와서 우리 나라 복식구조의 일부가 되어 국속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복식도 주로 귀족계급에 한한 것으로 일반서민과는 관련이 적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라말기에서의 통일신라의 복식은 당제도를 상류계급의 복식으로 하고 하류계급에서는 국제(國制)를 습용하는 이중구조를 볼 수 있다
고려시대 한복의 특징
저고리류
수십기의 분묘 발구 복식을 정리하여 나타난 결과에 따르면 전반기 저고리 종류는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모시로 만든 홑저고리나 일부 소맥 저고리 외에는 거의 모두 깃 섶 끝동 겨드랑이 사이 부분을 짙은 색의 금선단이나 필단으로 장식하였다. 크기가 매우 커서 길이가 50∼80cm에 이르고 품은 70cm를 전후하여 만들어져 있어 마치 현재의 남자 저고리와 유사한 모양이다. 겉깃과 안깃 모두 네모난 목판깃이며 깃이 넓고 여기에 넓은 동정이 목을 싸는 형태로 짧게 달려있다. 이와함께 직선형 배래와 완만한 도련선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편의상 저고리를 길이에 따라 단저고리형, 중저고리형, 장저고리형을 대별하고 부분적 특징을 살펴본다.
중저고리형은 길이만 길뿐 단저고리형과 유사하다. 따라서 이를 모방하여 직금단 대신, 필단으로 장식하여 만든 것으로 보여지며 문현 중 곁마기로 추정된다. 양 옆이 트인 장저고리와 구분하고 옆이 막혔다는 의미의 곁마기는 출도복식 저고리와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겨드랑이 사이를 별도의 옷감을 사용하여 봉재한 것은 대형이었던 당시 저고리 구성상 필수적인 것이었으며, 점차 여기에 장식성이 추가되어 화려하게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칼깃 형태의 남자 저고리가 중저고리형에 포함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이것은 당시 장의를 제외한 남자 직령포류의 깃 모양이 모두 칼깃인 것과 무관하지 않는다.
장저고리형은 모두 옆트임이 있다. 이 가운데 고급 필단이나 금선단으로 화려하게 만들어진 것은 당시의 당의임이 분명한 것 같다.
치마류
전반기의 치마류는 의래용과 평상용의 구분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전반기 저고리류가 모두 허리를 감추는 길이가 긴 형태이므로 당시의 모든 치마는 허리에 맞추어 입었다. 따라서 치마 허리라는 명칭도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 아닌가 싶다. 때문에 당시의 평상용 치마 길이는 100cm전후 길이로 되어있다. 그러나 치마 폭은 현재에 비해 상당히 넒다. 이들 평상용 치마류는 모시 홑치마, 비단이나 명주로 된 겹치마, 누비치마, 솜치마 등 4계절용이 골고류 포함되어 있다.
조선시대
남자는 바지, 저고리에 두루마기. 여자는 치마, 저고리의 기본형이 서민복으로 이어져 왔다. 저고리의 길이가 길고 여유있는 형태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작고 짧은 저고리에 풍성한 치마, 웅장한 머리모양 등 하후상박의 전통 한복미가 나타났다.
신분과 권력에 따른 복식이 특색있게 발달하는 등 많은 변화를 겪은 복식발전기이다
여름
여름철 농사를 할 때 : 남자들은 간편한 저고리와 가랑이가 짧은 잠방이를 입었습니다.
여름철 한복의 특징은?????
1.바람이 잘 통하는 삼베오ㅏ 모시로 한복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2.삼베옷고 ㅏ모시옷은 땀이 나도 몸에 달라붙지 않고 쾌적한 느낌을 줍니다.
3.몸고 ㅏ옷 사이를 헐렁하게 하여 바람ㅇㅣ 잘 통하도록 하였습니다.
4.저고리는 고름없이 매듭을 지었고, 바지는 잠방이를 입었습니다.
5.윗옷과 아래옷이 분리되어있어 윗옷 안에 등등거리를 입어 옷이 몸에 달라붙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저도 5학년이라서,,오늘 이게 숙제였어요~^^고맙습니다~<!--// 질문자평 -->
|
여름에는 모시, 삼베가 주소재로 시원한 소재가 역시 인기이다. 초여름에는 무명이나 다듬이한 모시로, 흰색이나 푸른색과 청색 염색 을 하는데, 자연소재가 갖고 있는 미색 그대로의 빛깔로 만들어 입어도 멋스럽다. 또 명주하면 의례 더운 옷감으로 알고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상식이다. 예전부터 생명주, 모시, 항라 등을 여름철 옷감으로 사용했으며,익히지 않은 명주도 여름철 옷감 |
|
으로 사용해 왔다. 한여름에는 베나 쟁친 모시(다듬이질 하지 않은 모시)로 적삼을 즐겨 입었고, 반저모시 로는 흰 치마저고리를 즐겨 입었다.
|
|
|
겨울에는 양단과 공단, 실크 등으로 치마저고리를 지어 입고, 겉옷으로 두루마기를 지어 입으면 좋다. 겨울 한복은 물겹바느질을 하는 천으로 지어 입는 것이 제격인데 수직실, 명주, 위사수직, |
|
자미사 등이 그나마 요즘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겨울용 옷감이다. 겨울 한복은 방한용으로, 외출시엔 두루마기나 반두루마기, 갖 저고리를 걸치고 가벼운 외출시에는 배자를 걸치면 추위를 막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