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7월 5일, 쿠르스크 전투
쿠르스크 전투(Battle of Kursk)
성채 작전(독일어: Unternehmen Zitadelle)이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동부 전선에서 일어난 가장 주목할 만한 전투 중 하나이다. 이 전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갑전이었으며 하루 동안 벌어진 공중전으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도 꼽히고 있다. 독일군은 오랫동안 이 전투를 준비하여 선제공격을 가했지만, 소련군은 프로호로프카 전투에서 독일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 곧 반격을 개시하여 오룔(오렐이라고도 한다), 벨고로트, 하르코프를 재탈환하였다. 이 전투는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여름에 승리한 전투로는 최초였으며 이 전투에서 독일군 전력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어 회복에 시일이 걸렸으며, 이후로 독일군은 두번 다시 공세로 전환하지 못하고, 소련의 파상공세에 동부 전선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력 비교
독일군은 2개의 집단군으로 나눠 공격을 준비.
※남부집단군 = 2개군(제4기갑군과 캠프작전단)
- 병력 : 보병 5개사단, 기갑 8개사단, 기계화보병 1개사단(병사 28만, 화포 2,500문, 전차-자주포 1,500대)
※중부집단군 = 제9군
- 병력 : 보병 8개사단, 기갑 6개사단, 기계화보병 1개사단(병사 27만, 화포 3,500문, 전차-자주포 1,200대)
총합계 = 병사 90만, 화포-박격포 1만문, 전차-자주포 2,700대
소련군도 마찬가지로 2개 방면군으로 나눠 방어.
※보로네츠 방면군(적의 주공격이 예상되는 베르고로드지구)
- 제6친위군, 제7친위군을 제1선, 제1전차군(제6, 제31전차군단, 제3기계화군단)을 제2선
- 제69군을 코로챠 정면. 방면군예비, 제35친위저격군단, 제2, 제5친위전차군단
방면군 정면 114km 지대을 제6, 제7친위군이 담당. 남은 130km 정면을 제38, 제40군이 담당. 제2항공군이 작전을 지원한다.
※중앙방면군(포느이리방면을 중심으로 주 공격이 예상됨) 그 정면 95km에 집중적으로 배치한다.
- 제1선을 제48,제13,제70군. 그 후방 제2선에 제2전차군(제3, 제16전차군단) 연장 200km의 정면에 해당하는 전선에 제65,제60군이 담당. 방면군예비,1개기병군단,2개전차군단(제9,제19). 제16항공군이 작전지원을 한다.
※총예비(스탭방면군) 전선후방 리브느이,스타-루이-오스콜의 선에 집결
- 제5친위군, 제27, 제47, 제53군, 제1기계화군단, 제4친위전차군단, 제10전차군단, 3개친위기병군단. 제5항공군이 작전지원
병력-인원 57만, 화포 7,400문, 전차-자주포 1,500대(이 방면군의 전력은 통상의 예비개념이 아닌 총공격으로 전환시 제1선에 진출하여 공격의 주역을 담당할 전력으로 쓰이는것이 특색이다.)
총합계 = 병사 133만, 화포 2만문, 전차-자주포 3,600대, 항공기 3130기
중앙 러시아 세임강 상류에 위치한 古都 쿠르스크, 11세기에 원래 모스크바를 방어하는 국경 요새로 건설되었던 이 도시는 13세기 중반 타타르인 들에게 점령된 이후 러시아의 역사에서 사라진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1943년 7월, 쿠르스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뜨거운 용광로로 변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거대한 흐름이 뒤바뀌고 있던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실패로 수세에 몰린 독일군은 전략적인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애초에는 밀물같이 밀려오는 소련군의 거대한 흐름을 저지할 방어선을 후방에 구축하는 사이에 전선에서는 제한적인 공격으로 소련군의 전면 공세를 예방하겠다는 구상이었습니다. 그 후보지로 선택된 곳이 쿠르스크.
당시 동부전선의 상황을 보면 유일하게 이 지역만 소련군이 독일군 진영 안쪽으로 불쑥 들어와 있는 상태였는데, 독일군 총사령부는 35개 사단 53만의 병력을 동원, 이 돌출부의 남쪽과 북쪽에서 공세를 개시하여 돌출부를 잘라내고 전진하여 전방의 아군과 합류한다는 작전계획을 세웁니다. 돌출부 북쪽에서 모델 원수의 제 9군이, 남쪽에서 호트 대장의 제 4군과 캠프 대장의 캠프 전투단이 협동해 단시일 내에 이를 제거하고자 했습니다만 당초 의도와 달리 목표를 너무 거대하게 잡으면서 작전은 독일군의 바람과 다르게 진행 되었습니다.
독일어로 “치타델레(Zitadelle, 성채)” 작전으로 이름 붙어진 이 공격은 당초 5월초 개시될 예정이었지만 병력과 장비 부족을 호소하는 전선 지휘관들의 요청으로 두 달이나 연기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전 개시일에 맞춰 독일군은 56만의 병력과 2700여대의 전차를 겨우 긁어모았지만, 소련군 역시 127만명의 병력과 3600여 대의 전차로 방어선을 굳히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7월 5일 새벽 쿠르스크 전투-치타델레 작전의 막이 오릅니다. 공격 첫날 독일군은 대부분 예정된 목표지점을 점령하지 못하고 곳곳에서 엄청나게 매설된 지뢰와 대전차포로 촘촘히 짜여진 소련군의 방어망에 막혀 고전 합니다. 북부에서의 공격은 일주일 동안 10km를 전진하고 고착되었고, 강력한 기갑군단들을 앞세운 남쪽에서는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했으나 소련군이 대규모 기갑부대를 투입하면서 대격전이 벌어졌습니다.
7월12일 쿠르스크 남부 프로호롭카에서 독일 제4기갑군 소속 전차 1천대와 소련 제5근위전차군 소속 전차 1천대가 중세의 기병들처럼 맞붙었습니다. 좁은 곳에 워낙 많은 전차들이 몰려 부대끼며 싸우는 바람에 포탄이 아예 전차를 뚫고 나가버리거나, 부딪혀 휘어진 포신으로 쏘다 전차 자신이 폭발했다는 기록까지 있을 정도니 당시 전투의 치열함을 알 수 있습니다.
프로호롭카에서 독일군은 전술적인 승리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공세를 지속시킬 탄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설상가상 병력과 장비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던 소련군이 전면적인 역공에 돌입해 독일군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결국 다른 전선의 붕괴 위험 때문에 치타델레 작전은 취소됐고 독일군은 7월24일 공격을 개시했던 출발선으로 되돌아와야 했습니다.
쿠르스크 전투는 2차대전을 통틀어 가장 큰 규모였을 뿐 아니라, 독일군이 본격적으로 패퇴하기 시작한 전투입니다. 동부전선뿐만 아니라 2차 대전의 전세를 실질적으로 바꾼 전투라고 할 수 있죠. 전투에서 수세에 몰릴수록 전환점을 만들어야 한다는 욕심에 사로잡히기 쉽지만 그럴 때일수록 현실을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물러서야 할 때 물러서는 것을 결단하는 것도 지휘관의 중요한 덕목임을 쿠르스크 전투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쿠르스크 전투 상황도
전차에 올라타고 웃어 보이는 독일 친위대원들
소련군의 T 34 전차, 쿠르스크 전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차전이었습니다
포연을 뚫고 전진하는 소련군 전차와 보병들.
초췌하고 지친 모습의 독일군 병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