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 대전
솜강 전투 아래는 백과사전에 올라온 정보 입니다.
① 제1차(1916년 6월 24일∼11월 13일):7월 1일 영국 보병이 돌격전을 감행하였는데 영국군은 역사상 최고 수에 달하는 하루 1만 9000명의 전사자와 4만 1000명의 부상자를 냈다. 13일 영국 기병부대가 유럽 역사 최후의 대규모 돌격을 감행했으나 기관총 사격을 받고 큰 손실을 입었다. 9월 15일에 영국군이 세계 최초로 탱크를 출동시켰으나 독일군 전선을 돌파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4개월간의 전투에서 연합군은 영국군 42만, 프랑스군 19만 50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약 10km밖에 전진하지 못했다. 독일군의 사상자는 65만에 달하였다.
② 제2차(1918년 3월 21일):독일군이 대공세로 나와 연합군 전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고 순식간에 솜강을 건넜다. 연합군은 위기에 빠졌으며 4월 3일에 포슈가 새로 설치한 주(駐)프랑스 연합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5일까지 독일군은 어떤 지점에서는 약 65km까지 진격해 들어오기도 했으나, 곧 저지당하고 공세를 중지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16만 3000명, 프랑스군은 7만 7000명을 포로 또는 사상자로 잃었으며(포로는 양군 합쳐서 7만), 독일군의 사상자는 24만을 헤아렸다.
솜강은 현재 벨기에 영토입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격전지 중 하나 입니다. 이 솜강 전투는 한마디로 비효율적 전투방식에 쐐기를 박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비효율적 방식은 나폴레옹 시대때부터 이온 군사 작전으로 밀집 대형의 병사들이 공격 지점을 향해 맹목적인 돌격을 하는 것을 방식입니다.
이 방식은 나폴레옹 시대에는 통했으나 미국 남북전쟁 시기만 오더라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여전히 이 방식의 전투 방법을 실시 한겁니다.
나폴레옹 시대야 총의 유효 사거리가 기껏 100m 정도 그것도 정밀 사격이란 개념도 없이 집단을 향해 무조건 발사하는 방식이다 보니 100m 정도야 전력 질주하면 20초 이내에 도달하므로 초탄 발사후 20초 이내에 재장전이 불가능 하다 보니 사상자가 얼마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백병전으로 승패가 결정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병에 의한 돌격은 더욱 더 빛을 바랬습니다. 그러나 남북전쟁시기 이미 사거리가 100m를 훌쩍 넘었고 재장전 시간도 예전보다 짧아 졌으니 초탄 날리고 10초 이내에 다시 장전해서 두탄 삼탄을 날릴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밀집 대형의 공격은 한마디로 집단 학살의 결과를 불러 오는 거였습니다. 바로 대표적 예가 게티스버그 전투였습니다. 북군의 결정적 승리를 이끌어낸 이 전투에서 남군은 한마디로 북군의 화망으로 일제히 돌격했다 2개 여단이 몰살 당하므로서 남군의 결정적 패배를 안겨 주웠습니다. 하물며 1916년 분당 600발의 속도로 1만발 이상을 사격할 수 있는 기관총 앞으로 걸어 갔으니 병사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뭉개졌겠습니까. 특히 영국은 갓 징집된 병사들의 훈련 상태가 좋지 않으므로 일제 돌격과 같은 고급 전술을 이해 못할 거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 최후 돌격 지점까지 걸어서 행군하게 하였습니다. 말이 걸어서지 500m 이상을 걸어서 행군하는 집단에게 기관총 사격은 절망적인 결과를 나타냈습니다. 전 사단 병력의 80%를 단 30분만에 잃은 사단이 있는가 하면 90% 이상의 손실을 입은 연대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째튼 이 지긋지긋한 전투로 말미암아 영국군과 독일군은 기동전을 생각해 냈고 프랑스 군은 마지노 선을 생각해 내게 됩니다.
2차 세계 대전
쿠르스크 전
1943년 소련의 쿠르스크에서 벌어진 독일과 소련과의 전투입니다.
치타델레 작전이라 명한 이 작전은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전세를 역전하고자 목적된 작전이였습니다.
56만의 병력과 2700대의 전차로 소련군에 역공을 가하므로서 전세를 뒤집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 앞에 선 소련은 무려 126만의 병력과 3600대의 전차였습니다.
치열한 공방전은 7월 5일 시작해서 7월 24일까지 진행됩니다.
이 전투에서 양측은 엄청난 사상자와 장비를 소모하게 됩니다. 독일측에서는 소련군의 전력을 완파했다고 판단했지만 소련의 저력은 여기가 끝이 아니였습니다.
결국 이 전투를 끝으로 독일군은 소련군에 장비나 병력 모든 면에서 절대 부족한 상태에 빠져 듭니다.
특히 7월 12일 벌어진 전차전은 양측이 모두 1000대씩의 전차를 끌고 나와 전투를 벌이므서 기네스기록(?)을 세웁니다. 세계 최대의 전차전이였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 여름부터 1943년 2월까지 소련의 스탈린그라드에서 벌어진 전투입니다.
독일은 1942년 소련의 남부를 공략해서 원유와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남쪽으로 진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있던 도시가 바로 스탈린그라드였습니다. 1942년 여름까지만 해도 파울러스의 6군은 이 작은 도시를 점령하는데 한달 이상 걸리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치열한 전투는 여름을 지나 가을로 가을을 지나 겨울까지 이어 집니다. 결국 1942년 11월 소련군은 6군의 측면을 맡고 있던 루마니아 군을 격퇴한뒤 6군을 스탈린그라드로 묶어 놓습니다. 포위된 상태에서 히틀러의 스탈린그라드 사수 명령으로 6군은 스탈린그라디에서 보급이 끊긴채 처절하게 방어전을 벌이나 1943년 2월 6군 사령관 파울러스는 남은 91천명의 병사들과 항복을 하게 됩니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소련군은 전세에 승기를 잡게 되고 독일군은 수세에 몰리게 됩니다.
이 전투로 소련군 피해는 알 수 없으나 수십만에서 수백만에 이를것으로 예상됩니다. 독일군 역시 22만의 병력을 잃습니다.
토브록 전투
아프리카 전선에서 가장 치열했던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롬멜의 공세를 꺾은 최초의 전투 입니다.
토브록은 원래 이탈리아 영토였습니다. 하지만 무솔리니의 무모한 도전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허무하게 뺏긴 요지였습니다. 이탈리아는 이집트를 공격하나 곧 영국 8군의 공격으로 밀리고 밀립니다. 토브록은 이탈리아군이 구축한 강력한 요새가 있었지만 이마저도 허무하게 무너지며 트리폴리마져 위험하게 됩니다. 이때 등장한 것은 프랑스와 전쟁에서 일약 스타가 된 롬멜이였습니다. 롬멜은 영국군의 동태를 파악합니다. 당시 영국은 상당수 병력과 장비를 발칸에 있는 그리스로 보내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전력은 형편없었습니다. 이를 안 롬멜은 바로 공격을 개시합니다. 영국군은 롬멜의 반격에 허겁지겁 반격을 가하나 허망하게 무너집니다. 그리고 다시 토브록까지 철군하게 됩니다. 토브록에 이르러서는 롬멜의 독일군도 15기갑사단이 합류한 상태라 제법 막강했습니다. 하지만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놓은 이탈리아 덕분에 토브록에서의 전투는 결국 독일군의 패배를 안깁니다.
하지만 몇차례의 공격으로 1942년 결국 토브록은 독일군이 점령하게 되지만 1941년부터 근 1년이상을 포위된체 끝까지 버텼던 영국군과 영연방군 그리고 프랑스 외인부대는 바다를 통해 탈출하여 훗날 엘알라메인 전투때 독일군을 무찌릅니다.
엘알라메인 전투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의 마지막 이집트 도전기 입니다.
몽고메리의 8군의 매복에 걸린 독일 아프리카 군단은 괴멸적 피해를 입습니다. 결국 독일은 리비아 영내로 철수하고 두번 다시는 이집트로 진격하지 못합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지상 최대의 작전이라 불리는 이 작전은 1944년 6월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프랑스를 해방시키기 위한 작전이였습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유럽 진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발지 전투
1944년 독일의 반격 작전으로 마지막으로 안간힘을 짜내 만든 작전입니다. 겨울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 독일은 상당한 병력과 장비를 잃음으로서 1945년 패전으로 달려 갑니다. 이때 스타가 된 부대는 101 공수 사단입니다.
마켓가든 작전
미군 2개 공수 사단, 영국군 1개 공수 사단, 폴란드 1개 공수 여단이 참가한 사상 최대의 공수 작전입니다.
네덜란드를 관통하여 독일 코앞까지 공수사단에 의해 길을 확보하고 그 길로 영국군 기갑사단이 뚫고 들어가 독일 영내까지 진격한다는 골자의 작전이였습니다. 그러나 막강한 독일의 공격과 부족한 작전 준비는 결국 영국군 공수사단과 폴란드 공수 여단을 전멸에 가까운 손해를 입게 됩니다. 역시 밴드오브 브라더스를 보면 나옵니다.
크레타 공수 작전
이건 독일군 공수 작전입니다. 노르웨이, 네덜란드등에서 보여준 공수부대의 활약상에 반한 히틀러가 크레타에 있는 영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벌인 작전이였습니다. 작전은 성공하지만 옥이야 금이야 키운 공수부대가 반토막 나므로서 더 이상의 대규모 공수작전을 수행할수 없게 됩니다.
노르웨이 해전
독일군은 1940년 노르웨이를 침공합니다. 이에 맞춰 영국은 북해를 봉쇄하기 위한 기뢰 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북해에서 영국해군과 독일 해군이 딱 마주친겁니다. 치열한 해전이 벌어지고 결국은 노르웨이 침공에 동원되었던 독일 해군의 반이 쑥대밭이 됩니다. 결국 이 해전으로 독일은 영국을 공격하기 위한 바다사자 작전을 벌일 수 없게 됩니다. 반면 노르웨이에 상륙한 독일군은 영국군과 노르웨이군을 박살을 내버립니다.
영국 항공전
영국과 독일간의 공중전으로 양측 공군이 치열한 공중전을 벌입니다. 독일은 영국의 항공력을 무력화 하여 지상군 상륙을 시키기 위해 영국은 독일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벌어진 이 전투는 수개월간 계속 됩니다. 결국 독일군의 패배로 끝나버린 이 전투 결과 영국은 유럽에서 독일과 유일하게 맞설수 있는 국가가 되고 독일은 항공전력이 크게 약화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뭐 다소 많은 전투가 있지만 기억 나는거 몇가지만 정리해서 올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