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세계대전..독일의장비(내공100)

제2차세계대전..독일의장비(내공100)

작성일 2008.06.02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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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요.. 전쟁에 굉장히! 관심이 많거든요..ㅋㅋ

 

물론 그중 2차대전도 빼놓을수 없구요..ㅋ 저는 그많큼 많은 지식을.. (퍽! 그만좀해!)

 

흠.. 그냥 본론으로 들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전 일단 초6이구요(뭔 상관? ㅡㅡ;)

 

제가 우연히 1차대전책을 봤는데 거기에 나오는 포 구경이 보통 100mm가 넘뜨라구요;

2차대전때는 탱크에 탑재된 포 말고는 .. (대표적으로 독일의 88mm대공포) 100mm가 넘는게 없더라구요..

있으면 좀 알려주시구요..

 

그리고 또 알고 싶은게 있는데 2차대전은 1차대전보다 큰 전쟁인데 대포구경이 오히려 작아졌죠? 많이 생산 하려고?..

 

그리구영 제가 특히 독일 장비에 관심이 많은데 (특히 5호전차 판터와 6호 킹타이거)

 

독일 탱크 (타이거,쾨니히스타이거 판터에대해서) 에대해서 알려주세요

1.타이거 킹타이거 판터는 각각 몇호 전차죠? (0호0형 이런식으로)

2.제가 알고있는 3개전차중 실전에서 가장 활약한 전차는요?.

3.위전차들 사진좀 부탁해요(부서진거 사절이구용..좀 깨끗하게 나온거)

4.각 전차의 특징(탑재포의 구경이나.. 승무원수 탑재무기 중량 전차가활약한 전투)

5.2차대전 최고의 전차는여?(미국 셔먼은 독일탱크에의해 학살되었다고.. 해서 별로 관심없고요)

6.소련의 T34/85를 독일탱크에 비교하자면 무슨탱크에 비교할수있쪄?

 

독일 공중 무기(수투카 같은거?? 사진도여)

독일 지상군 무기(KAR98K?ㅋㅋ)

보통 알려진 대전투를 보면 다 연합군이 승리한건데 ㅡㅡ;; 독일군이 크게 승리한 전투..

추축군위주에서..

이정도많하고요(넘마니썼나?ㅋㅋ) 여러분을 믿쓰미다내공 100걸겠쓰미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독일전차 종류

 

1호 전차 | 2호 전차 | 3호 전차 | 4호 전차 | 5호 전차 판터 | 6호 전차 티거1티거2 | 35(t)전차 | 38(t) 전차

1호 전차
종류 경전차
형식 명 SdKfz 101 PzKpfw I
용도 및 목적
개발국가 독일
생산회사 크루프 사
역사
개발년도 1932년
생산기간 1934년 ~ 1943년
사용국가 나치 독일
스페인
중화민국
불가리아
사용된 전쟁
개량형
계열 차량
생산량 1,563대 (파생형 제외)
일반 제원
승무원 2명
길이 4.02m (A형) / 4.42m (B형)
높이 1.72m
2.06m
중량 6톤
공격력
주무장 MG-13 기관총 2정
개발사 크루프 사
사용 포탄 7.92mm 소총탄
탑재량 2,250발
장전 방식
사통 장비 TZF2 광학조준경
부무장
탑재량
기동력
엔진
  • 크룹사 M305 4실린더 57마력 엔진 (A형)
  • 마이바흐 NL38TR 6실린더 100마력(B형)
중량 대비 출력 17마력 / 1톤
서스펜션
노상 속도 시속 37km (A형) / 시속 40Km (B형)
항속 거리
  • A형: 100 (야지) ~ 145km (도로)
  • B형: 115 (야지) ~ 170Km (도로)
연료 탑재량 144리터 (A형) / 146리터 (B형)

 

1호전차(SdKfz 101 PzKpfw I)은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독일이 개발한 최초의 전차다. 7.92mm 기관총 2정 등으로 인해 훈련용 전차(대규모 기갑부대 전술 숙달용) 정도였지만, 에스퍄냐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의 폴란드 전역 프랑스 전역때까지 주력 전차로 활약했다. 그러나 1940년 프랑스 전역 이후 1호전차는 일선에서 물러나 후방 경비, 훈련용으로 사용되거나 자주포나 대전차자주포 등의 파생형의 차체로 사용되었다.

1호 전차는 많은 이름과 설계안을 거쳤는데, 대부분 기록에 나오는 공식 명칭은 Panzerkampfwagen I(약칭 PzKpfw I)였다. 공식 형식명은 Sonderkraftfahrzeug 101(약칭 SdKfz 101)이었다. 한국어로 직역하면 "특수군대용차량"이란 의미다. 개발 기간 중에는 산업용 트랙터라는 의미인 Landwirtschaftlicher Schlepper(약칭 L-S)로 불렸다. 이는 독일의 전차 개발 시도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개발이 시작된 1932년 당시에는 베르사이유 조약의 눈치를 살폈기 때문이다. 종종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Traktor' 등의 명칭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1호 전차는 많은 수가 특수 목적이나 자주포로 개수되었다.

 

독일 전차박물관에 전시 중인 1호 전차 A형

 

 

 

 

 

 

 

 

 

 

 

 

 

 

 

 

 

 

 

 

 

 

 

 

 

 

 

 

 

 

 

 

 

 

 

 

 

 

 

 

5호 전차 판터

5호 전차 판터

위장색이 칠해진 판터 사진
종류 중전차(中)
개발국가 나치 독일
개발사 MAN AG
역사
개발년도 1942년
생산기간 1942년 ~ 1945년
사용국가 나치 독일
사용된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생산 대수 대략 6,000대
일반 제원
승무원 5명 (지휘관, 포수, 장전수, 통신병, 조종수)
길이 6.87 m, 8.66 m(주포 포함)
높이 2.99m
3.42m
중량 44.8톤
공격력
주무장 7.5 cm KwK 42 L/70
주포개발사 크루프(Krupp)
부무장 7.92 mm MG-34
탄약수 5,100발
기동력
엔진 V-12 마이바흐 HL 230 P30 700 PS
마력 690 마력, 515 kW
출력/중량 10 PS/t
노상 속도 55 km/h (초기형), 46 km/h (후기형)
항속 거리 250 km
방어력

 

 

5호 전차 판터 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군이 사용한 중전차(中戰車)이다. 1941년 6월 발발한 독소전쟁에서 독일 기갑부대에 큰 충격을 준 소비에트 연방 T-34에 대항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1943년 중반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티거 전차와 함께 독일 기갑부대의 주력으로 활약하였다. 제식 이름은 PzKpfw(PanzerKampfwagen) Ⅴ Panther, 즉 5호 전차 판터(표범)이다.

1943년 5월 12일 MAN AG사(社)에서 개발한 VK. 30.02(M)가 5호 전차 판터D형으로 선정되면서 양산을 시작하였다. 1943년 9월까지 842대가 생산된 판터D형은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차전에 처음 투입되었지만 기계고장이 잦았기 때문에 실전평가가 나빴다. 이후 판터A형, G형, F형, 판터2 등의 개량형이 개발되었다.

판터D형의 엔진과 포탑을 개선한 A형은 2,200대, 판터2의 양산형인 판터G형은 2,953대가 생산되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일 기갑부대의 주력전차로 활약하였다. 판터2는 방어력 강화와 생산성 향상을 꾀한 전차로 1대만 제작되었고 판터 시리즈의 마지막 개량형인 F형은 1대도 완성되지 못하였다.

모두 5,995대가 생산된 판터 시리즈는 70구경 75㎜ 전차포 KwK42 1문과 포탄 79발을 장비하였다. 부무장은 7.92㎜ 기관총 MG34 2정과 기관총탄 5,100발이다. 장갑두께는 16~110㎜로써 티거 전차에 버금가는 강력한 방어력을 갖추었다. 성능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영국과 미국의 주력전차와 구소련의 T-34/76 T-34/85 등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6호 전차 티거 1

6호전차 티거 1

포획된 티거 1, 1943년 튀니스
종류 중전차
개발국가 나치 독일
개발사 Henschel & Son
역사
개발년도 1942년
생산기간 1942년 ~ 1945년
사용국가 나치 독일
사용된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생산 대수 1,355대
일반 제원
승무원 5명
길이 대포까지 8.45 m
높이 3.0 m
3.55 m
중량 56.9 t
공격력
주무장 8.8 cm KwK 36 L/56 1문
주포개발사 크루프(Krupp)
부무장 7.92 mm Machinengewehr 34
탄약수 4,800발
기동력
엔진 V-12 Maybach HL230 P45 700 PS
마력 690.4 마력, 514.8 kW
출력/중량 12.3 PS/t
현가장치 토션바
노상 속도 38 km/h
항속 거리 110 ~ 195 km
도하 2 ~ 4 m
방어력
전면 장갑 110 mm
측면 장갑 80 mm
상부 장갑 25 ~ 40 mm
장갑 25 ~ 110 mm

 

티거 1(Tiger I)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나치 독일 중전차의 일반적인 명칭이다. 최초의 공식 독일 명칭은 판저캄프바겐 젝스 아우스퓌룽 하(Panzerkampfwagen VI Ausführung H; 줄여서 'PzKpfw VI Ausf. H')였는데,[1]다시 1943년 3월에 '하(H)'에서 '에(E)'로 다시 명칭이 바뀌었다. 또한, 이 전차는 군수품 목록상 '존더크라프트파르조이크(Sonderkraftfahrzeug; 줄여서 SdKfz) 181'라는 명칭을 갖고 있었다. "티거(Tiger, 호랑이)"라는 별명은 페르디난드 포르셰에 의해 붙여졌다. 로마숫자 'I'은, 후에 '티거 2'(Tiger II) 전차가 생산되면서 덧붙여졌다.

티거 1은 1942년말부터 독일이 항복한 1945년까지 사용되었다. 전차의 설계는 다른 장갑차량, 중자주포 스툼티거와 '베르게티거' 장갑복구차량의 기본이 되었다.

티거의 승무원 훈련 지침서인 '티거피벨(Tigerfibel)'은 세계대전 후 기념품 품목이 되었다.

 

 

6호 전차 B형 쾨니히스티거

6호전차 티거 2

박물관의 6호전차(Sd.Kfz. 182)
종류 중전차
개발국가 나치 독일
개발사 Henschel & Son
역사
개발년도 1943년
생산기간 1943년 ~ 1945년
사용국가 나치 독일
사용된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개량형 야크트티거 구축전차
생산 대수 487대
일반 제원
승무원 5명 (지휘관, 포수, 장전수, 통신병, 조종수)
길이 7.61 m (대포까지 10.286 m)
높이 3.09 m
3.755 m
중량 68.5 t (초기) ~ 69.8 t (양산)
공격력
주무장 8.8 cm KwK 43 L/71 1문 84발
주포개발사 크루프(Krupp)
부무장 7.92 mm Machinengewehr 34
탄약수 4,800발
기동력
엔진 V-12 Maybach HL 230 P30 700 PS
마력 690 마력, 515 kW
출력/중량 10 PS/t
현가장치 Maybach OLVAR EG 40 12 16 B
노상 속도 41.5 km/h
항속 거리 170 km
변속 전진 8단, 후진 4단
방어력
전면 장갑 하부 100mm 40°, 상부 150mm 40°
측면 장갑 하부 80mm 90°, 상부 80mm 65°
상부 장갑 40mm 90°

 

티거 2(Tiger II)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나치 독일 중전차의 일반적인 명칭이다. 공식적인 독일 명칭은 Panzerkampfwagen(판저캄프바겐) VI Ausf. B, PzKpw VI Ausf.B이며, 또한, 제작 명칭인 '존더크라프트파르조이크(Sonderkraftfahrzeug) 182, SdKfz.182'도 있다. 이 전차는 '쾨니히스티거(Königstiger)'의 명칭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독일어 König는 영어의 King에 해당되어 영어로 '킹 타이거(King Tiger)', 또는 '로얄 타이거'로 불리기도 한다.

티거 2는 티거 1의 중장갑에 판터(Panther) 전차의 비스듬한 장갑을 결합하였다. 설계는 티거 1의 개념을 따랐으나, 보다 강력해지게 하였다. 티거 2의 차대는 야크트티거의 포탑이 없는 돌격포(tank destroyer)의 원칙을 대체하였다. 티거 2는 68.5(초기 포탑) ~ 69.8 톤의 무게였고, 150 ~ 180 mm 의 전면 장갑으로 보호되었으며, 88 mm KwK 43 L/71 포로 무장하였다.

매우 육중한 장갑과 강력한 장거리 대포는 티거 2에 실질적인 적 전차에 대한 강점을 제공하였다. 이는 특히 대항할 만한 중전차를 보유하지 못한 영국군과 미국군의 서부전선에서 그러했다. 이들은 방어의 위치에서 파괴하기 어려웠으나, 공격에서는 그보다는 성과가 좋지 못했다.

티거 2는 연합군 소련 전차에 잘 대응하였다. 방어에 있어서, M4 셔먼은 정면에서도 정면 장갑을 관통하지 못하였고, M26 퍼싱 IS-2는 각각 1300 m 와 200 m 이내로 접근해야 했다.

티거 2는 그 크기와 선전적인 가치로 널리 알려졌다.

 

 

35(t)전차

베오그라드 군사 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35(t)전차

 

35(t) 전차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에 체코슬로바키아 슈코다 사가 개발한 경전차로서 원래 제식명은 LT-35 또는 LT vz. 35였지만,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한 이후 독일군이 제식 전차로 채용하면서 이름을 Panzerkampfwagen 35(t) (Pz.Kpfw. 35(t))로 바꾸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군의 주요 전차 전력으로 활용되었다. 보통 35(t) 전차(Panzer 35(t))라 불리며 t는 독일어로 체코슬로바키아(독일어: Tschechoslowakei)를 뜻한다.

 제원

  • 길이 : 4.90 m
  • 넓이 : 2.16 m
  • 높이 : 2.20 m
  • 중량 : 11톤
  • 서스펜션 : 리프스프링 방식
  • 노상 속도 : 시속 34km
  • 항속 거리 : 193km (노상) / 118km (야지)
  • 주포 : 슈코다 37mm M1934 전차포 (독일 제식명은 Kw.K.34(t) L/40)
  • 포탄 탑재량 : 78발
  • 부무장 : 7.92mm 기관총 X 2정
  • 장갑 : 8mm ~ 25mm
  • 사용연료 : 가솔린
  • 연료 탑재량 : 153 리터
  • 연비 : 0.81리터/km.(노상) / 1.33리터/km (야지)
  • 승무원 : 4명
  • 엔진 출력 : 120hp (90kw)
  • 중량 대비 출력 : 11마력/1톤

상세 사항

35(t)전차(LT-35)는 1리벳 고정식 장갑과 2인승 포탑, 후방 엔진 및 조종석 등 930년대 후반의 틀에 박힌 전차 설계였다. 주포는 스코다 37mm M1934(Škoda vz 34) 전차포로서 37.2mm 포였으며, 전차장이 조작했다. 포탄은 72발을 바닥에 탑재했다. 주포에는 7.92mm 동축 기관총이 설치되었다[1]. 포탑의 2번째 승무원은 주포 장전수였다. 조종수는 차체 전면 오른쪽에 앉았으며, 차체 전면 장갑판에 고정된 7.92mm 기관총 사수를 겸했다. 7.92mm 기관총의 탄환은 모두 2,700발을 탑재했다.

 

독일 육군 전차는 그림에 보신봐와 같이  1호 5호 6호티거 1 6호 티거2 그리고 35t형전차가 주종입니다

2 3 4호는 1호의 변형이지 크게 다른것은 없습니다

 

 

2차대전당시 독일 주요화력  

Panzer VI Ausf. B Tiger II

Tiger II preserved at La Gleize, Belgium
Type Heavy tank
Place of origin Nazi Germany


Walther PPK

Karabiner 98 Kurz

Karabiner 98 kurz

 

Maschinenpistole 40 (MP40)

Type submachine gun
Place of origin Nazi Germany
Panzerfaust

Four Panzerfausts in original casing, on display at the Helsinki Military Museum대전차포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

비스마르크

자매함 틸피츠의 식별용 그림
개략적인 정보
함종  전함
함급  비스마르크급
함명  비스마르크
자매함  틸피츠
제작  함부르크의 Blohm & Voss
연혁
발주  1935년 11월 16일
기공  1936년 7월 1일
진수  1939년 2월 14일
취역  1940년 8월 24일
최후  1941년 5월 27일 실종
함장  에른스트 린데만
일반적인 특징
배수량  기준 배수량:39,517톤
상비 배수량:45,451톤
만재 배수량:49,406톤
전장  상부 251.0 m, 흘수선 241.5 m
선폭  36 m
흘수  기준 9.3 m 만재시 10.2 m
추진 
  • Wagner high-pressure 12기;
  • Blohm & Voss 변속 터빈 3기;
  • three-blade 프로펠러 3개, 직경 4.70 m, 150,170 마력 (121 MW)
속력  최대 속도 30.8노트 (57km/h)
항속거리  16노트/9,280해리, 19노트/8,525해리, 24노트/6,640해리, 28노트/4,500해리
장갑 
  • 장갑대: 145 to 320 mm
  • 갑판: 50 ~ 120 mm
  • 칸막이: 220 mm
  • 포탑: 130 ~ 360 mm
  • 포좌: 342 mm
  • 사령탑: 360 mm
승조원  2,092명 (사관103명, 병사1,962명 , 지휘관27명)(1941년당시)
무장 
  • 38.1cm(47구경)연장포 2연장 8문
  • 15cm(55구경)연장포 6기
  • 10.5cm(65구경)연장 고각포 8기
  • 37mm(83구경)연장 기관표 8기
  • 20mm(65구경)4연장 기관포 2기
  • 20mm(65구경)단장 기관포12기
함재기 
  • Ar 196
  • 아라도 Ar196A-3수상 정찰기 4대

비스마르크(독일어: Bismarck)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나치 독일 해군 최대의 전함으로 알려져 있다(실제로 나치 독일 해군 최대의 전함은 비스마르크의 자매함인 틸피츠이다.). 비스마르크급 전함의 네임쉽(Name Ship)이며, 함명은 독일 통일의 주역인 철혈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

 

독일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

 
DKM 샤른호르스트

샤른호르스트(DKM Sharnhorst)호의 식별용 그림
개략적인 정보
함종  순양전함(Battlecruiser)
함급  샤른호르스트급
함명  DKM 샤른호르스트
자매함  그나이제나우
제작  Kriegsmarinewerft Wilhelmshaven
연혁
발주  1934년 1월 25일
기공  1935년 6월 15일
진수  1936년 10월 3일
취역  1939년 1월 7일
최후  1943년 12월 26일 노르웨이 북쪽 100km 해상에서 침몰
함장 

1939년 ~ 1943년 총 4명

  • 오토 칠리악스 (1939년)
  • 쿠르트 체자르 호프만 (1939 ~ 1942년)
  • 프리드리히 휴프마이너 (1942 ~ 1943년)
  • 프릿츠 힌체 (1943년)
일반적인 특징
배수량  표준 31,552 톤, 만재시 38,900 톤
전장  상부 236.4 미터, 하부 229.8 미터
선폭  30 미터
흘수  37,500 톤일 때 9.93 미터
추진  3개의 브로운 보베리 기어 터빈
3개의 3날 프로펠라, 지름 4.8 미터
속력  표준 19노트(35.2 km/h)
최대 31.5노트(58.3 km/h)
항속거리  35.2 km/h 로 18,710 km
승조원  1,968명(장교 60명)
무장 
  • 283 mm(11.1인치)포 3연장 포탑 9문
  • 150 mm(5.9인치)포 12문
  • 105 mm (4.1인치)포 14문
  • 37 mm 16문
  • 20 mm 10문
  • 533 mm(21인치) 어뢰 발사튜브
함재기  아라도 Ar196A-3 3대

 

샤른호르스트(Scharnhorst, DKM Scharnhorst)는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독일 해군(German Kriegsmarine)이 건조한 순양전함이다. 샤른호르스트급 순양전함의 제1번함(Nameship)으로, 배의 이름은 나폴레옹 점령시 독립전쟁을 이끈 프로이센의 장군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Gerhard von Scharnhorst)'에 유래하며, 1914년 포클랜드 섬 전투에서 침몰된 SMS 샤른호르스트를 기념한 이름이기도 하다. 독일 해군은 전함에 분류하며, 영국 해군은 순양전함으로 분류한다.

 

독일 순양전함 그나이제나우

DKM 그나이제나우

자매함 샤른호르스트호의 식별용 그림
개략적인 정보
함종  순양전함(Battlecruiser)
함급  샤른호르스트급
함명  DKM 그나이제나우
자매함  샤른호르스트
제작  의 Deutsche Werke, 235번 Bau
연혁
발주  1934년 1월 25일
기공  1935년 5월 6일
진수  1936년 12월 8일
취역  1938년 5월 21일
최후  1945년 3월 27일 폐기 처분됨
일반적인 특징
배수량  표준 32,100 톤, 만재시 38,434 톤
전장  상부 235 미터, 흘수선 226 미터
선폭  30 미터
흘수  37,303 톤일 때 9.69 미터
추진  3개의 브로운 보베리 기어 터빈
3개의 3날 프로펠라, 지름 4.8 미터
승조원  1,908명
무장 
  • 280 mm(11.1인치)포 9문
  • 150 mm(5.9인치)포 12문
  • 105 mm (4.1인치)포 14문
  • 37 mm 16문
  • 20 mm 10문 (후에 16문)
  • 533 mm(21인치) 어뢰 발사튜브 6기
함재기  아라도 Ar196A-3 3대

 

그나이제나우(Gneisenau, DKM Gneisenau)는 제1차 세계 대전 때에 독일 해군이 건조한 경순양함이다. 샤른호르스트급 순양전함의 제2번함으로, 함명은 나폴레옹의 점령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군제도 개혁에 힘을 쏟은 샤른호르스트에 협력한 '아우구스트 폰 그나이제나우'에 유래하였다. 독일 해군은 전함에 분류하며, 영국 해군은 네임쉽(Nameship)인 순양전함으로 분류하였다.

 

지상에 설치된 그나이제나우의 함포

1945년 3월 23일 고텐하펜의 폐기함으로서 예인되어 자침되었다. 1947년에 다시 건져 해체하고, 고철로 처분되었다.

 

 

독일 순양함 프린츠 오이겐

프린츠 오이겐

원폭 실험을 위해 대기중인 프린츠 오이겐
개략적인 정보
함종  순양함
함급  어드미랄 히퍼급
함명  프린츠 오이겐
자매함 
제작  의 크루프 게르마니아베루프, 564번
연혁
기공  1936년 4월 23일
진수  1938년 8월 22일
취역  1940년 8월 1일
최후  원자폭탄 실험후 1946년 12월에 쿠제린 환초에 좌초
함장 

1940년 ~ 1946년 6명

일반적인 특징
배수량  기준 배수량 15,000톤
만재 배수량 18,400 톤
전장  하부 199.5 m, 상부 212.5 m
선폭  21.8 m
흘수  7.2 m
속력  최대 속도 33.5노트 (62.04km/h)
항속거리  7,200 해리 (20노트/h)
장갑 
  • 장갑대 80mm
  • 상부갑판 30 mm
  • 장갑갑판 30 mm
  • 어뢰 칸막이 20 mm
  • 주 포탑 160 - 70 mm
  • 사령탑 150 mm
승조원  1,600명
무장 
  • 8인치 포 8문
  • 10.5cm 포 12문
  • 4cm 대공포 17문
  • 3.7cm 포 8문
  • 2cm 포 28문
  • 21인치 어뢰 발사관 12문
함재기  아라도 Ar 196 3기

 

프린츠 오이겐(독일어: Prinz Eugen)은 나치 독일 해군의 중순양함이다. 어드미럴 히퍼(Admiral Hipper-class)급 중순양함의 세번째 함이다. 함명은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오스트리아 제국의 군인으로 활약한 사보이의 왕자 오이겐(Prinz Eugen von Savoyen)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각국별 전함 비교

 

독일

전력과 특징

비스마르크호

설계는 1934년에 시작했으며, 배수량은 영국과의 합의된 35,000톤을 넘어 42,600톤까지 증가시켰다. 1936년 7월 1일에 독일 함부르크의 Blohm + Voss사에서 설계 및 건조를 시작해 1939년 2월 14일에 진수, 1940년 8월에 취역했다.

배수량만을 보고 따진다면 당시 세계 최대의 전함이었으나 대공 사격 관제나 장갑판의 배치, 승무원 숙련도 등에 문제가 많아 일반적으로 말하는 '세계 최강의 전함'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비스마르크는 설계 단계에서 당연히 고려되는 원거리 포격전에 대한 방어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바덴급 전함의 설계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로서, 그 결과 비스마르크는 원거리 포격에는 취약하고 근거리 포격에는 강한 전함이었다.

바덴급 전함의 설계를 계승한 이유로서 발트해를 들수 있다. 독일 해군의 활동 해역은 주로 시야가 나쁜 발트해를 기본으로 하고 있어, 근거리전이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계는 이미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부정되어 있다. 결국, 독일 해군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실패의 경험을 차세대 전함 설계에 유용하게 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샤론호스트호

1930년 6월 30일 빌헬름스하펜(Wilhelmshaven) 해군 조선소에서 기공, 1차례 건조를 중지하였고, 1935년 6월 15일에 건조를 재기, 1936년 10월 3일에 진수하여, 1939년 1월 7일에 취역하였다. 첫 함장은 오토 칠리악스였다. 첫 항해 후, 1939년 중반까지 후미에 메인마스트를 장착하고 해면에 대해 수직이었던 함수의 모양을 항해에 적합한 전방으로 튀어 나온 형태(Atlantic bow)로 고쳤다. 어쨌든, 샤른호르스트는 건현(흘수선에서 갑판까지의 부분)이 상대적으로 낮아 큰 파도에 젖기 쉬웠다. HMS 리나운과의 전투 후의 함포 보고서(Gunnery report)에서는 "A" 포탑에 바닷물이 심각하게 범람하여 효율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고 보고하였다.

샤른호르스트의 무장은 전함에 필적하며, 상대적으로 작은 구경의 대포가 없었다면 영국으로부터 전함으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독일 해군은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를 전함(Schlachtschiffe)으로 분류하였다.

 

그나이제우호

1934년 12월 8일에 '도이체 베르케'에서 기공하여, 건조를 중지하였다가, 1935년 5월 6일 건조를 재개, 1936년 12월 8일에 진수, 1938년 5월 21일에 준공하였다.

1939년 11월 23일에 '페로섬 해전'에 참가하여 영국의 무장상선 라왈핀디호를 샤른호르스트와 협력하여 격침시켰다.

1940년 4월 9일, 샤른호르스트와 함께 '나르빅 해전', 6월 8일에는 노르웨이 해전에 참가하여, 영국 항공모함 글로리아호를 격침시켰다. 6월 20일, 트룬하임에서 영국 잠수함 클라이드에 어뢰공격을 받아 피해를 입었다. 수리가 완료된 후, 12월 28일에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는 통상파괴작전에 출격하였으나, 악천후로 돌아와야 했다. 1941년 1월 ~ 3월에는 베를린 작전에 투입되었다.

4월 6일, 브레스트에서 영국 항공기의 공격을 받아 어뢰 1발이 우현 뒷편에 명중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4월 10일, 폭격을 받아 여러 발의 폭탄이 명중, 약 50명의 승무원이 사망하였다.

1942년 2월11일에는 샤른호르스트, 프린츠 오이겐과 함께 켈베로스 작전에 참가하여 작은 피해를 입어 군항에서 수리를 받았다. 같은 해 2월 26일에 군항 내에서 연합군 항공기의 폭격으로 폭탄이 명중, 화재가 뱃머리의 탄약고를 폭발시켜 큰 피해를 입어 바닥에 침몰하였다. 이를 건져내어 주포탑을 연장 380 mm포로 바꾸기 위해 고텐하펜으로 회항하였으나, 1943년에 바렌츠 해전의 패전 소식을 들은 히틀러의 대형함 폐기명령에 의해 공사가 중지, 폐기가 결정되었다. 탑재한 대포는 철거되어 육상에 전용되었다.

 

프린츠 오이겐호

1936년 4월 23일 독일 의 크루프 게르마니아(Krupp Germania)에서 기공했으며, 1938년 8월 22일에 진수했다. 기준 배수량이 10,000톤을 넘는 대형 순양함이었으며, 주포는 8인치(20.3cm) 2연장포 4기(총 8문)을 가지고 있었다.

취역전에 1940년 7월 1일 에 대규모 폭격이 퍼부어진다. 이 때 프린츠 오이겐도 경미한 손상을 입는다.

1941년 5월, 프린츠 오이겐은 전함 비스마르크와 함께 라인 연습 작전에 참가하게 된다. 18일, 고덴하펜을 출격해 스카게라크 해협을 통과해 북해로 나오게 된다. 24일,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은 덴마크 해협에서 영국 해군 순양전함 HMS 후드(Hood)와 교전하게 된다. HMS 후드는 비스마르크의 공격에 의해 두동강 나면서 격침된다. 이때, 프린츠 오이겐도 영국 해군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Prince of Wales)에 명중시킨다.

그후, 프린츠 오이겐은 비스마르크와 헤어지게 된다. 이때가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프린츠 오이겐은 6월 1일 항구에 입항하게 되고, 7월 1일 공습으로 손상된다.

그리고 1942년 2월 11일에서 13일 까지 '켈베로스 작전(Operation Cerberus)'-통칭 채널 데쉬(Channel dash)라고 부른다.- 에 참가하게 된다.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와 함께 가게 되었는데 이 작전은 영국 도버 해협 눈앞을 통과한다는 매우 대담한 작전이었다. 그러나 프린츠 오이겐은 상처 없이 통과하게 된다.

1942년 2월 노르웨이로 이동했다. 그러나 2월 23일 트론 하임 앞바다에서 영국 잠수함 트라이던트가 발사함 어뢰중 1기가 함미에 명중하게 된다. 다행히 침몰을 하지 않게 되었지만 항해 불능이 되었으며, 7명의 전사자를 내게 되었다. 프린츠 오이겐은 트론 하임항까지 예인되어 응급수리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5월에는 항으로 수리를 받기위해 독일로 향한다. 영국 해군의 공격을 빠져 나가서 5월 18일에 킬에 도착하게 된다. 곧바로 함미 수복 작업에 들어갔으며, 1942년 말에는 전선에 복귀하게 된다. 그 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발트해에서 활약했으나, 경순양함 라이프찌히(Leipizig)와 충돌사고를 일으켜 함수가 손상되었다.

 

결론적으로  장점은 기동성과 장거리포 위주에  함재기까지 장비된것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 합니다

반면 거함은  지구전에는 강하나 영국처럼 단기해전이나  해엽전에는 불리 합니다


 

2차대전당시 독일 공군

 

 

BF-109 메서슈미트 전투기

FW-109 포케울프 전투기

ME262 제트전투기

HE-111 폭격기

JU87 수투카 급강하 폭격기

JU88 융커스 폭격기

DO-17 도르니에 폭격기

 

 

He 111

 

Bf 110
Junkers Ju 88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혹시 세계2차 대전이 두 나라가 싸우는데 다른 나라가 끼어 들어서 세나라가 같이 싸우는게 세계2차 대전이 아닌가 싶어요. 이제 제가 알려드릴게요. 조금씩 퍼왔어요, 제가 모든걸 다 아는게 아니어서 

 

일단

제 1차 세계대전

 

원인 :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세계 대전의 시초를 알리는 사건이 일어 났다.

이 곳을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공(公) 부처가 탄 자동차가 환영을 받으며 거리를 지날 때 한 청년이 뛰어나와 차를 향해 권총을 쏘았다. 범인은 오스트리아를 반대하던 세르비아 청년으로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지만, 황태자 부처는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을 사라예보 사건이라 한다.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는 사건의 책임이 세르비아 정부에 있다고 하며,

최후 통첩을 세르비아에 보내어 강경하게 요구하였다. 세르비아는 요구 조건의 대부분을

받아들였으나, 사건을 조사하는 데 오스트리아 대표를 참가시킨다는 것만은 내정 간섭이라 하여 거절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이를 최후 통첩을 거절한 것으로 보고, 그 해 7월 29일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하였다.

 

두 나라의 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원조할 뜻을 굳히고 군사 동원령을 내렸다. 이에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돕기 위하여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니, 프랑스와 영국도 러시아를 돕기 위해 전쟁에 참가했다.

 

경과 : 전쟁의 확대, 전쟁의 상황, 러시아 혁명

 

전쟁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동맹군과, 러시아·프랑스·영국 등의 연합군이 맞서는 가운데 크게 확대되어 갔다. 이탈리아는 3국 동맹에 가담한 나라였으나, 오스트리아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초기에는 중립을 지키다가 얼마 후 연합국에 가담하였다.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은 아시아에서까지 번져 일본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일본은 영일 동맹을 구실로 독일에 선전 포고하였는데, 이는 중국과 태평양에 있는 독일의 식민지를 빼앗으려는 술책에서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통적으로 강한 영국 해군은 독일의 해안선을 봉쇄하여 해외로부터 물자 수입을 막았기 때문에 독일은 경제적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이에 독일도 이른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펴 연합국의 군함은 물론 여객선과 중립국의 상선까지 무차별 공격하였다.

 

독일의 이와 같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많은 중립국 사람이 희생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중립을 지켜 오던 미국이 참전하고(1917년),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와 중국까지도 연합국 편에 가담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많은 나라가 연합국 편에 가담함으로써 참전국이 모두 30여 개 국에 이르렀다. 동맹국 편에 가담한 나라로는 투르크와 불가리아가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독일은 미리 짜 놓았던 작전 계획대로 서쪽의 프랑스를 단숨에 격파하고, 동쪽의 러시아를 공격하려 하였다. 따라서 독일은 영세 중립국인 벨기에 쪽으로 돌아 프랑스에 침입하였다. 독일군은 약 1개월 만에 파리 근처까지 진격하였으나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반격을 받아 국경 근방까지 후퇴하였다.

 

한편 동부 전선에서는 독일의 힌덴부르크 장군이 러시아 군을 공격하였으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더구나 해군이 약한 독일로서는 전쟁을 오래 끌수록 전세가 불리하였다. 그래서 독일은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려고 동부 전선의 병력을 끌어다가 프랑스 국경의 방어선인 베르됭 요새에 대해 총공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페탱 장군이 잘 막아 내었기 때문에 독일은 50만 명의 많은 희생자를 낸 끝에 물러나고 말았다.

해전에서도 영국 해군이 우세하여 독일은 해외에 있는 식민지를 모두 빼앗기고, 본국의 항구도 봉쇄당하였다.

제 1차 대전 때에는 무기도 새로운 것이 발명되었다. 영국은 최초로 탱크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독일은 잠수함·독가스·비행선을 사용하였다.

 

제 1차 세계 대전중에 있었던 가장 큰 사건은 러시아 혁명이다. 1917년 3월과 11월의 두 차례에 걸친 혁명으로 전제 군주 정치는 무너지고, 세계 최초의 공산 정권이 이 지구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오랜 전제 정치 밑에 시달리던 러시아 국민은 전쟁이 장기화되자 식량 부족으로 더욱 고통을 받았다. 더구나 전쟁에서도 독일군에게 패전을 거듭하였으므로 사회 불안은 극심해졌다.

 

1917년 3월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지금의 레닌그라드)에서 부인·노동자들이 앞장서서 빵을 요구하는 데모를 벌인 데 이어 수많은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나 전제 타도· 전쟁 반대를 외치면서 혁명을 일으켰다. 혁명 운동은 군대에까지 번져서 노동자와 병사의 대표자 회의인 ‘소비에트’가 각지에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가운데 국회의 자유주의 파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황제 니콜라이 2세를 물러나게 했다.

이 3월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는 몰락하고 황제의 전제 정치도 끝났다.

 

그 후 케렌스키가 이끄는 임시 정부는 자본가들의 요구에 따라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하여 경제 상태가 한층 악화되고 개혁도 제대로 실시하지 못했다.

이에 소비에트의 중심 세력이었단 볼셰비키 당(뒤의 공산당)은 레닌(1870~1924년)의 지도 아래 반정부 운동을 벌였다. 그 해 11월 그들은 케렌스키 정부를 타도하고, 레닌을 중심으로 하는 소비에트 정부를 탄생시켰다.

이것이 러시아의 11월 혁명이다.

새로 탄생한 소비에트 정부는 나라 안팎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공산당에 의한 일당 독재 체제를 굳혀 나갔다.

 

결과 : 전쟁의 끝남

 

1917년 미국의 참전과 러시아 혁명은 제 1차 세계 대전을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소비에트 정부는 세계 대전을 제국주의 국가간의 싸움이라 하여 독일과 단독으로 휴전 조약을 맺었다(1918년 3월). 이 때문에 독일은 서부 전선에만 힘을 쏟을 수 있게 되었으나, 전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1918년 9월부터 동맹국의 일원이던 불가리아·투르크·오스트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하고, 독일 국내에서도 전쟁 반대의 소리가 높아 갔다. 이 해 11월에 마침내 킬 군항(軍港)에 있던 해군의 반란을 계기로 혁명이 일어나,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였다.

새로 수립된 공화국 정부는 곧바로 연합국과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다(1918년 11월 11일).

이로써 4년간 계속된 제 1차 세계 대전은 약 1,000만 명의 인명을 희생시키고 연합군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 여기서부터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갭을 메우기 위해 세계 정세를 잠깐 다루겠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원인 : 전체주의의 위협

 

제 1차 세계 대전 후 미국·영국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서 민주주의가 더욱 발전하여 갔다. 이들 나라들은 민주주의 헌법의 답변확정, 남녀 평등의 보통 선거 제도를 실시하는 등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9년을 전후하여 세계에 몰아닥친 경제 공황은 새로운 사태를 야기시켰다.

국민들 중에는 이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강력한 통치를 원하는 사람도 있어 민주주의와 반대되는 전체주의가 나타났다.

 

전체주의는 1920년대부터 싹트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나라는 파시스트의 이탈리아, 나치의 독일, 군국주의의 일본 등이고, 공산주의의 소련은 좀 색다른 전체주의 국가였다.

이들 전체주의 국가의 출현으로 민주 주의와 세계 평화는 다시 위협을 받게 되었다.

 

세계 경제 공황

 

제 1차 세계 대전 후 미국 경제는 번영을 계속하는 가운데 생산 과잉 상태에 빠져들었다.

곧 공장이 너무 많이 생긴 나머지 물건이 남아 돌게 된 것이다. 또 일확 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의 심각한 투기 현상까지 일어나 경제 불안의 징조를 보였다.

드디어 1929년 10월 2일 뉴욕 증권 시장의 주식 값이 폭락하고, 이를 계기로 미국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심한 불경기가 시작되었다. 물건이 팔리지 않고 재고품이 쌓이게 되자, 많은 공장과 회사가 쓰러지고, 이들 회사에 돈을 대부하여 준 은행들도 문을 닫게 되었다.

미국에서 비롯된 이와 같은 경제 공황은 미국 경제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그 식민지에까지 파급되어 세계 공황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리하여 각국의 공업 생산은 크게 위축되고 실업자 사태가 빚어졌다. 그리고 이에 따른 정치적·사회적 불안은 전체주의 국가가 출현하는 배경이 되었다.

 

각국의 공황대책

 

경제 공황이 절정에 달했던 1933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통제 경제 정책인 뉴 딜 정책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사용했다.

곧 ‘전국 산업 부흥법’을 제정하여 노동자를 보호하였고, 테네시 강 유역 개발 공사(TVA)와 같은 대규모 공사를 일으켜 실업자들을 구제하였다. 또 최저 임금제를 마련하여 가난한 노동자들의 생활을 보장하고, 국가에서 농업과 공업의 생산을 통제하여 가격의 균형을 조절하는 등 여러 가지 정책을 폈다. 이에 미국 경제는 차츰 안정되어 갔다.

 

한편 영국도 공황으로 말미암아 경제적 어려움을 겪자 당시의 영국 수상 맥도널드는 이른바 ‘블록 경제’로 불경기를 회복해 나갔다.

곧 관세는 인상하여 외국 상품의 수입을 억제하는 보호주의 무역 정책을 쓰는 한편, 영연방 안의 나라들 사이에는 관세를 낮추어 무역 활동을 원활하게 하였다.

그런데 미국·영국 같은 선진 민주 국가는 민주주의 테두리를 벗어남이 없이 문제를 해결해 나갔지만, 민주주의 토대가 약하고 산업의 기초가 단단하지 못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은 다른 나라를 침략함으로써 불경기를 극복하려 하였다.

 

히틀러의 나치즘

 

세계 공황으로 타격을 가장 크게 받은 나라가 독일(바이마르 공화국)이었다. 독일은 경제 부흥을 미국 자본에 거의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이 매우 커 실업자가 600만이 넘었다.

이러한 속에서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당이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나치 당은 사회 통제의 기능을 잃은 바이마르 공화 정부를 반대하는 한편, 공화주의와 베르사유 체제 타도, 실업자 구제와 사회 보장을 내세워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이 무렵 경제 불황을 틈타 공산당의 세력이 커지고 있었는데, 이에 불안감을 가졌던 자본가와 군부들이 히틀러를 지지하였다. 이리하여 나치 당은 1932년의 선거에서 제 1당이 되어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였다.

수상이 된 히틀러는 독재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법을 의회로하여금 만들게 하여, 나치 당 이외의 모든 정당을 해산시키고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1934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죽자, 히틀러는 수상과 통령을 겸한 총통 자리에 올라 완전한 독재자가 되었다. 그래서 이 때부터를 독일의 제3제국이라 한다.

 

히틀러의 나치스 정권은 토목 공사나 군수산업에 힘을 기울여 실업자수를 줄이는 한편, 친위대· 돌격대· 비밀 경찰(게슈타포)등을 통하여 국민 생활을 통제하고, 언론·출판의 자유를 박탈하였다. 한편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유태인에 대한 박해를 강화해 갔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제휴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군비가 크게 제한되고, 독일과 프랑스의 완충 지대인 라인란트에는 군대를 주둔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1933년 국제 연맹을 탈퇴한 데 이어, 1935년에는 재군비를 선언하고 징병제를 부활시켰으며, 그 이듬해에 다시 라인란트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같은 해 가을부터는 4개년 계획을 세워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한편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지배하는 이탈리아도 경제 공황으로 크게 고통을 받았다. 이에 무솔리니는 국민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외국 침략을 꾀하였다.

1935년 독일의 재군비 선언으로 세계가 소란한 틈을 타서 에티오피아에 침입하였다.

국제 연맹은 즉시 이탈리아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군사용 물자를 이탈리아에 일체 팔지 않기로 결의했으나, 이탈리아의 침략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완전히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을 뒤따라 국제 연맹에서도 탈퇴하였다(1937년).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관계는 급속히 가까워져, 1936년 10월 독일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정복을 인정하고, 이탈리아는 독일의 오스트리아 진출을 인정하는 협약을 맺었는데, 이를 베를린 · 로마 추축이라 한다. 또 이 협약에서는 두 나라가 앞으로의 외교 문제에 있어서도 공동 보조를 취할 것을 약속하였다.

 

일본의 중국 침략

 

서양의 산업 기술을 재빨리 받아들여 공업화를 서두르던 일본에도 경제 공황의 물결이 밀어닥쳤다. 일본은 러일 전쟁 때 차지한 요동 반도를 근거지로 벌써부터 대륙 침략을 꾀하여 왔지만, 제 1차 세계 대전 후의 국제적인 평화의 움직임과 중국의 5·4 운동 등으로 한동안 주춤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불경기가 날로 심해지자 과격한 군부 세력이 앞장서서 침략주의를 밀고 나갔다.

1931년 일본군은 그들이 관리하던 남만주 전영토를 점령했다(만주 사변). 그러고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데려다가 ‘만주국’이라는 괴뢰 정권을 세웠다.

 

이와 같은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하여 중국의 국민 정부는 곧 국제 연맹에 제소했으며, 국제 연맹은 리튼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만주에 보냈다. 그 결과 일본은 국제 연맹에서 탈퇴하고 말았다(1933년).

 

그 후 일본의 중국 침략이 더욱 노골화되어 가던 중, 1937년 7월의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마침내 중일 전쟁이 일어났다. 일본군은 베이징·난징·상하이 등의 주요 도시를 잇따라 점령하고 많은 중국인을 학살하였다.

그러나 장 제스의 국민 정부는 공산당과 손잡고(제 2차 국공 합작) 미국 · 영국의 원조를 받아 끈질긴 항전을 계속하였다.

 

3국 협정의 성립

 

전체주의 국가로 국제 연맹에서 탈퇴한 독일·이탈리아·일본 등 3국은 서로 비슷한 입장이었으므로 손을 잡았다.

베를린 · 로마 추축이 결성된 1개월 뒤에 독일과 일본이 방공 협정(防共協定)을 맺었고, 이듬해인 1937년에는 이탈리아도 여기에 가담하여 3국 방공 협정이 성립되었다.

이리하여 전체주의 국가들간의 결속은 한층 강화되어 ‘베를린·로마·도쿄 추축’으로 발전하였다.그래서 이들 세 나라를 일컫어 ‘추축국’이라 한다.

 

3국 방공 협정은 본래의 목적이 공산주의 소련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뒤에는 소련보다도 영국·미국·프랑스 등 민주주의 국가에 대항하는 조직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그리하여 세계는 다시 전체주의 국가인 독일·이탈리아·일본 등의 추축국과 민주주의 국가인 영국·미국·프랑스 등의 연합국으로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 두 세력의 대립 충돌로 일어난 것이 제 2차 세계 대전이다.

 

독일의 침략과 뮌헨 회담

 

3국 방공 협정이 체결된 후, 독일의 침략 정책은 한층 노골화되었다. 그 첫번째 목표로, 1938년 3월 이 지역을 완전히 독일 영토로 삼아 버렸다. 그럼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의 사이가 나빠지는 것을 꺼려 이를 눈감아 주었기 때문에 독일은 더욱 기세가 올라 계속 침략의 손길을 뻗쳤다.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히틀러는 같은 해 다시 체코슬로바키아 서부의 독일인 거주 지역인 수데텐 지방을 차지하려고 함으로써 심각한 국제 분쟁이 야기되었다. 그리하여 1938년 9월 영국 수상 체임벌린의 주선으로 국제 분쟁을 조절하기 위한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4개 국 거두 회담이 뮌헨에서 열렸다(뮌헨 회담).

이 때 히틀러는 수데텐 지방이 ‘독일이 요구하는 마지막 영토’라고 강경한 태도로 나왔으므로 영국과 프랑스는 최후의 선물로서 수데텐 지방을 독일에 양도하는 협정에 조인하고 말았다.

 

이 같은 영국·프랑스의 ‘유화 정책’은 소련과 유럽 약소국들에게 실망을 주었고, 그들 나라로하여금 독일과 타협 쪽으로 기울게 했다. 히틀러는 이러한 정세를 이용해 침략의 폭을 넓혀 나갔다. 그리하여 1939년에는 다시금 체코슬로바키아의 서쪽 반을 빼앗고, 나머지 영토도 보호국으로 삼았다.

독일의 침략이 갈수록 확대되자, 영국과 프랑스도 이제까지의 유화 정책을 버리고 군비 강화를 서두르는 한편, 히틀러의 다음 목표로 되어 있던 폴란드 등과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하여 더 이상의 독일 침략을 저지하려 했다.

 

독·소 불가침 조약

 

예상한 대로 히틀러는 폴란드에 침략의 손길을 뻗쳐 일부 영토를 요구해 왔다. 사태의 위급함을 깨달은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해서 소련에 대해 군사 동맹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영국·프랑스의 유화 정책에 의구심을 품고 있던 소련은 이에 선뜻 응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39년 8월에 이르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독일과 소련이 서로 상대방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지만, 독·소 두나라가 제휴하여 영국과 프랑스에 대항한다는 것을 뜻하였으므로 영국과 프랑스 양국이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제 2차 세계 대전

 

전쟁의 시작

 

폴란드의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자 독일군은 1939년 9월 1일 새벽에 선전 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그러자 이틀 후인 9월 3일 폴란드와 동맹 관계에 있던 영국과 프랑스 양국이 독일에 선전 포고함으로써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많은 전차와 비행기를 동원하여 이른바 ‘전격 작전’을 써서 불과 2주 만에 폴란드 군을 무너뜨리고 그 서반부를 휩쓸었다. 그러나 폴란드를 점령한 히틀러는 동료라고 믿었던 무솔리니가 갑자기 중립을 선언하자, 영국과 프랑스에 화평을 제의하면서 전쟁은 잠시 소강 상태에 빠졌다.

 

한편 소련도 독일의 폴란드 침입과 거의 때를 같이해서 폴란드를 침공하여 그 동반부를 점령하였다. 이어 소련은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 등 ’발트 3국’을 합치고 핀란드를 침략하여 영토의 일부를 빼앗았다. 이 때 국제 연맹은 소련을 침략국으로 규정짓고 제명시켰다.

 

프랑스의 패망과 영국의 고전

 

한동안 계속된 소강 상태를 이용하여 작전 준비를 새로이 갖춘 독일은 1940년 4월부터 서부 전선에 대한 대공격을 시작하였다. 우선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굴복시키고, 5월에는 전격적으로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노선을 돌파하고, 마침내 파리를 함락시켰다.

이리하여 프랑스를 패망시킨 독일은 북반부를 직접 지배하고, 남반부는 독일에 협력적인 페탱의 비시 정부를 세워 간접 지배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 때 드골 장군은 영국에 건너가 ‘자유 프랑스 정부’를 세우고 본국 국민들에게 독일에 대한 저항 운동을 고취시켰다.

 

프랑스의 패망으로 혼자 남은 영국은 독일과의 힘겨운 전쟁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처칠(1874~1965년) 수상의 탁월한 지도 밑에 이 위기를 잘 견디어 나갔다.

한편 중립을 지키면서 형세를 살피던 이탈리아는 독일군이 잇따라 승리를 거두자, 파리 합락 작전 영국·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하고 전쟁에 끼여들었다.

 

독·소 전쟁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 조약을 맺었지만 서로 상대를 경계하고 있었다. 소련은 독일이 싸우는 틈을 타서 부지런히 영토를 확장하는 한편, 일본과 일·소 중립 조약을 맺어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다짐하였다(1941년 4월).

1941년 6월, 독일은  독 · 소 불가침 조약을 깨뜨리고 소련 영내로 진격해 들어갔다.

불시에 침입을 받은 소련은 처음 얼마 동안 후퇴를 거듭했지만, 차츰 전세를 만회해 갔다.

모스크바까지 후퇴한 소련의 스탈린은 중공업 공장 등을 후방으로 옮기고, 10월 중순부터 대규모적인 반격을 개시하였다.

한편 독·소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은 즉시 소련과 군사 동맹을 맺고, 미국은 많은 원조 물자를 소련에 제공하였다.

 

태평양 전쟁의 시작

 

일본은 유럽에서 대전이 일어나기 2년 전부터 중국과의 힘겨운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중국인의 민족적 저항을 받은데다 미국·영국 등이 중국을 원조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항일 전쟁을 지원하고 있던 미국은 1939년 미일 통상 조약을 파기하고,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중단하였다. 곤경에 빠진 일본은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침략을 정당화하는 ‘대동아 공영권’의 건설을 선전하면서 석유·고무 등의 중요한 자원을 확보하고자 동남 아시아에의 진출을 꾀하였다.

 

또한 대전 초기에 중립을 지켰던 일본은 독일·이탈리아가 결정적인 우세를 보이자 이들 나라와 새로 3국 군사 동맹을 맺고, 세력을 동남 아시아 방면으로 뻗쳐 나갔다. 이에 동남 아시아에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영국과 네덜란드도 미국·중국과 함께 일본에 대항하여 이른바 ‘ABCD라인’이 형성되었다.

국제적으로 고립된 일본은 미국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미국은 해외에 나가 있는 일본군의 전면 철수를 강력히 요구했으므로 두 나라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이러한 중에 일본에서는 군부를 중심으로 미국과의 전쟁론이 우세해져 1941년 12월 8월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마침내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

 

진주만 기습에 뒤이어 일본군은 순식간에 홍콩·필리핀·자바·수마트라·미얀마 등을 잇따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1942년 전반까지 남태평양 일대가 일본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연합군의 반격

 

전쟁 초기에는 유럽 방면이나 태평양 방면에서 독일·일본 등의 추축국이 미리 전쟁 준비를 해 왔으므로 계속 승리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본격적으로 무기를 제조하고 연합국을 돕게 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태평양 방면에서는 1942년 6월에 있었던 미드웨이 해전이 고비가 되었다.

이 해전에서 미국의 태평양 함대는 일본 해군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 이 때부터 일본 해군은 맥을 못 추게 되었으며, 맥아더 장군 지휘 아래 연합군이 반격을 개시하여 남태평양의 과달카날 섬을 탈환하였다.

 

한편 유럽에서는 소련군이 1943년 1월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을 포위하여 전멸시켰다. 이 무렵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은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여 독일·이탈리아 군을 몰아내고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이에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는 쓰러지고 새 정권이 들어서서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또한 승세를 잡은 연합군은 이듬해 6월 아이젠하워 장군의 지휘 아래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펴서 저항하는 독일군을 무찌르고 파리 해방에 성공하였다.

 

결과 : 연합군의 승리

 

이탈리아 항복 후인 1943년 11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 제스 총통 등 세 사람이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전후 처리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회담을 가졌다. 여기에서는 주로 일본의 영토 문제에 대한 방침이 결정되었는데, 일본이 차지한 해외 영토를 모두 무효로 하여 만주와 타이완을 중국에 돌려 주고,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카이로 선언을 발표하였다. 곧 이어서 루스벨트·처칠·스탈린 등이 테헤란에 모여 노르망디 상륙 작전 등에 대해 협의하였다(테헤란 회담).

 

또한 1945년 2월에는 미국·영국·소련의 3대표가 크림 반도의 얄타에 모여 독일 항복 후의 처리 문제와 새로운 국제 기구의 창설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얄타 회담). 이 얄타 회담 이전에 소련군은 이미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4월에는 드디어 베를린 시내에 돌입하였다.

이 때 히틀러는 절망 속에서 자살하고, 독일은 무조건 항복하였다(1945년 5월 7일).

같은 해 7월 트루먼과 처칠 · 스탈린이 베를린 근처의 포츠담에 모여서 일본에 항복을 권하고, 항복 조건을 내세운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버티었다.

 

8월에 들어서자, 일본의 숨통을 조이는 결정적인 두 가지 사건이 벌어졌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떨어지고, 소련이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한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도 마침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제 2차 세계 대전은 막을 내렸다.

 

어때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독일의 대표적인 전차 타이거는 연합군들에게 두려움에 대상이 되었죠. 그러나 제작비가 비싸고 수량이 적었기 때문에 그러한 단점도 있었고 대표적인 대전차화기로는 팬져파우스트를 빼놓을 수없죠

팬져파우스트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독일군 팬져파우스트를 든 4명과 타이거전차로 소련군을 제압하고 있었는데 한 멍청한 독일군인이 팬져파우스트를 거꾸로쏴서 타이거 전차가 파괴됬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대단하다는 겁니다. 또 기관단총에서 하나를 뽑자면 역시mp40이죠 여러게임에서 나오는데 아무튼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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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第二次世界大戰)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긴 가장 참혹했던 전쟁이다. 통상적으로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독일군이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하고, 소련군이 1939년 9월 18일 폴란드의 동쪽 국경을 침공함으로써 발발하였다고 본다. 때로는 1937년 7월 7일 일본 중국 침략, 1939년 3월 독일군의 프라하 진주 등을 개전일로 보기도 한다. 또한 한국 중국의 일부 학계에서 2차 대전이 일어난 해를 1939년으로 하는 것은 서양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때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1945년 8월 6일 8월 9일, 미국 원자 폭탄 투하 이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끝이 났다. 이 결과로 한국이 독립하였다.

전사자는 약 2500만 명, 민간인 희생자도 약 4천만 명에 달했다. 전쟁 기간 중 일본 1937년, 중국 침략 때 난징 등에서 대학살을 감행, 겁탈과 방화를 일삼으며 수십만 난징시민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1944년 여자정신대근무령을 통해 조선인, 중국인, 동남아시아인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여성을 종군위안부로 동원하였으며, 독일은 ‘인종 청소’라는 이유로 수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 집시를 학살하였다. 또한 미국 1945년 3월 10일, 일본의 수도 도쿄와 그 주변 수도권 일대를 대규모적으로 폭격한 이른바 도쿄대공습을 감행해 15만 명을 살상했고(재일 조선인 포함), 같은 해 8월 6일과 9일에 각각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 공격을 감행하여 약 34만 명을 살상하였으며, 영국 미국의 공군은 드레스덴 뮌헨 공습을 감행하여 각각 20여만 명을 살상하는 등, 전쟁의 피해는 극히 심하였다.

전쟁은 크게 유럽 전선 중일전쟁·태평양 전선으로 구분할 수 있다. 유럽 전선만을 얘기할 경우 히틀러 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대전 발생배경및 국제적환경

1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 세계는 전반적 위기단계에 돌입. 더욱이 자본주의 제국의 발전의 불균등이 두드러졌고, 1929∼33년의 세계공황은 이와 같은 불균등에 근거하는 국제대립을 가속화 시켰으며 열강의 블록화와 폐쇄경제적인 경향은, 자본주의국으로서 기초가 약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게되었고

독일에서는 국내정치의 혼란 가운데에서 1933년 베르사유 체제 타파를 외치던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고 같은 해 10월 제네바 군축회의 결과의 불만으로 국제연맹을 탈퇴하였으며, 1935년 3월에는 재군비를 선언, 1936년 3월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에 진주하여 로카르노 조약을 파기함과 아울러 베르사유 조약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독일이 재무장하는길을 선택

1937년 11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합병을 결의한 히틀러는 1938년 2월 일련의 인사이동으로 나치스 체제를 강화하고 같은 해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요구하여 전쟁의 위기를 조성하자,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1938년 9월 뮌헨 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로 하여금 수데텐 지방을 할양케 하였다. 이리하여 독일은 동 ·중부 유럽 진출을 위한 전략적 지위를 확보하였으나, 한편 국제연맹 또는 집단안전보장 체제는 붕괴되어 독일이 폴랜드를 전격 전으로 탈환하여 2차대전의 서막을 알리게 되었음
 

전쟁주요일지

년 도

일시

                 

년도

일시

내 용

1939

9-1

독일 폴랜드 침공

1944

6-15

사이판 전투

 

11-4

미국중립선언

 

6-19

필립핀 전투

1940

5-10

독일 서부전선 공격

 

7-28

미군 파리진주

 

6-22

프랑스 독일과 정전협정

 

8-25

파리 해방

1941

6-22

독일 쏘련공격

 

10-20

미군 필립핀 상륙

 

8-9

미 영 대서양 헌장답변확정

 

12-16

독일군 발지 전투

 

12-7

일본 진주만 공습

1945

1-28

발지전투 종료

 

12-8

미국 일본에 선전포고

 

2-4

얄타회담

 

12-11

독일 이태리 미국에 선전포고

 

2-19

미군유황도 상륙

 

12-23

일본필립핀공격

 

3-9

미군 일본 본토 폭격

 

12-24

일본 웨이크섬 공격

 

4-12

루스벨트 서거

1942

6-4

미드웨이 전투

 

4-28

이태리 발치산 무솔리니 저격

1943

1-14

카사블랑카 협상 (미영쏘)

 

4-30

힛틀러 자살

 

2-2

스타린그란드 쏘련 승리

 

5-2

베를린 함락

 

5-13

북아프리카 연합국승리

 

5-8

유럽전 종식 독일 항복

 

6-10

연합국 시실리 상륙

 

7-17

포츠담 선언

 

9-3

연합국 이태리 상륙 이태리항복

 

8-6

리틀보이 히로시마 원폭투하

1944

2-20

연합국 독일 공습

 

8-9

펫맨 나가사키 원폭투하

 

6-4

로마 함락

 

8-15

일본항복

 

6-6

노르만디 상륙작전

 

9-2

미 전함 미조리함에서 일본항복조인

 

전쟁후유증및 결과

연합국:

미국 쏘련 영국 프랑스 카나다 폴란드 중국 인도  뉴질랜드 유고 이집트 브라질 남아프리카 그리스 노르웨이 혼두라스 오스틀레리아 네델란드 벨기 체코(20개국)

패전국:

독일 이태리  일본 항거리 핀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버마 (9개국)

전사자 총계

  

전투병력

민간인

    

        

연 합 국

18,587,000명

25,475,185명

44.062,185명

 

패 전 국

5,930,000명

8,587,000명

14,517,000명

 

국가별 전사자(연합국)

 

영 국

중 국

프랑스

폴란드

미국

쏘련

기타연합국

   

전투병

452,000

3,500,000

250,000

120,000

295,000

13,600,000

370,000

18,587,000

민간인

60,000

10,000,000

360,000

5,300,000

115,185

7,700,000

1,940,000

25,475,185

 

512,000

13,500,000

610,000

5,420,000

410,185

21,300,000

2,310,000

44.062,185

(독일동맹국)

구 분

독일

일본

기타동맹국

           

                    

전투병

3,250,000

1,700,000

980,000

5,930,000명

1939-1945

민간인

3,810,000

3,860,000

917,000

8,587,000명

태평양전쟁(1941-1945) 포함

  

7,060,000

5,560,000

1,897,000

14,517,000명

 

*유태인 학살 600만명 별도

연합군 13개국 참전 으로 세계경제의  침체화

유럽의 초토화

미국의 마샬프랜으로 유럽부흥

동서 양극화 블럭형성 공산 민주진영으로  냉전체제 구축

제삼세계의 독립가속화로 세계가 유럽중심에서 다변화로 바뀜

일본패망과 핵폭탄의 위력 실감

한국독립 해방공간에서 좌우이념 사상투쟁의 결과로  전쟁 발발  남북고착

유엔창설 세계화로 가속화

미국의 세계 경찰국가로써 역활주의  등장

 

교전국
연합국
미국
영국
자유 프랑스
소비에트연방
중화민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네덜란드
추축국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비시 프랑스
핀란드
헝가리 왕국
루마니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타이
지휘관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오시프 스탈린
윈스턴 처칠
장제스
샤를 드골
아돌프 히틀러
히로히토
베니토 무솔리니
필리프 페탱
미클로시 호르티
이온 안토네스쿠
피푼 송크람
피해 상황
군인 사망
1400만 명 이상
민간인 사망
3600만 명 이상
총 5000만 명 이상 사망
군인 사망
800만 명 이상
민간인 사망
400만 명 이상
총 1200만 명 이상 사망

 

 

 

 

 

 

 

 

 

 

 

 

 

 

 

 

 

 

 

 

 

 

 

 

 

 

 
전쟁의 경과
     서방 연합국      소련 측 연합국      추축국, 추축국의 식민지와 비시 프랑스      중립국

 

 

대전 관련 주요 학살 사건

독일군 주요무기

 

탱크류

 잠수함

 로켓

 

독일전차 종류

 

1호 전차
종류 경전차
형식 명 SdKfz 101 PzKpfw I
용도 및 목적
개발국가 독일
생산회사 크루프 사
역사
개발년도 1932년
생산기간 1934년 ~ 1943년
사용국가 나치 독일
스페인
중화민국
불가리아
사용된 전쟁
개량형
계열 차량
생산량 1,563대 (파생형 제외)
일반 제원
승무원 2명
길이 4.02m (A형) / 4.42m (B형)
높이 1.72m
2.06m
중량 6톤
공격력
주무장 MG-13 기관총 2정
개발사 크루프 사
사용 포탄 7.92mm 소총탄
탑재량 2,250발
장전 방식
사통 장비 TZF2 광학조준경
부무장
탑재량
기동력
엔진
  • 크룹사 M305 4실린더 57마력 엔진 (A형)
  • 마이바흐 NL38TR 6실린더 100마력(B형)
중량 대비 출력 17마력 / 1톤
서스펜션
노상 속도 시속 37km (A형) / 시속 40Km (B형)
항속 거리
  • A형: 100 (야지) ~ 145km (도로)
  • B형: 115 (야지) ~ 170Km (도로)
연료 탑재량 144리터 (A형) / 146리터 (B형)

 1호전차(SdKfz 101 PzKpfw I)은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독일이 개발한 최초의 전차다. 7.92mm 기관총 2정 등으로 인해 훈련용 전차(대규모 기갑부대 전술 숙달용) 정도였지만, 에스퍄냐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의 폴란드 전역 프랑스 전역때까지 주력 전차로 활약했다. 그러나 1940년 프랑스 전역 이후 1호전차는 일선에서 물러나 후방 경비, 훈련용으로 사용되거나 자주포나 대전차자주포 등의 파생형의 차체로 사용되었다.

1호 전차는 많은 이름과 설계안을 거쳤는데, 대부분 기록에 나오는 공식 명칭은 Panzerkampfwagen I(약칭 PzKpfw I)였다. 공식 형식명은 Sonderkraftfahrzeug 101(약칭 SdKfz 101)이었다. 한국어로 직역하면 "특수군대용차량"이란 의미다. 개발 기간 중에는 산업용 트랙터라는 의미인 Landwirtschaftlicher Schlepper(약칭 L-S)로 불렸다. 이는 독일의 전차 개발 시도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개발이 시작된 1932년 당시에는 베르사이유 조약의 눈치를 살폈기 때문이다. 종종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Traktor' 등의 명칭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1호 전차는 많은 수가 특수 목적이나 자주포로 개수되었다.

 

독일 전차박물관에 전시 중인 1호 전차 A형

 

 

 

 

 

 

 

 

 

 

 

 

 

 

 

 

 

 

 

 

 

 

 

 

 

 

 

 

 

 

 

 

 

 

 

 

 

 

 

 

 

 

 

 

 

 

 

 

 

 

5호 전차 판터

5호 전차 판터

위장색이 칠해진 판터 사진
종류 중전차(中)
개발국가 나치 독일
개발사 MAN AG
역사
개발년도 1942년
생산기간 1942년 ~ 1945년
사용국가 나치 독일
사용된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생산 대수 대략 6,000대
일반 제원
승무원 5명 (지휘관, 포수, 장전수, 통신병, 조종수)
길이 6.87 m, 8.66 m(주포 포함)
높이 2.99m
3.42m
중량 44.8톤
공격력
주무장 7.5 cm KwK 42 L/70
주포개발사 크루프(Krupp)
부무장 7.92 mm MG-34
탄약수 5,100발
기동력
엔진 V-12 마이바흐 HL 230 P30 700 PS
마력 690 마력, 515 kW
출력/중량 10 PS/t
노상 속도 55 km/h (초기형), 46 km/h (후기형)
항속 거리 250 km
방어력

 

 

5호 전차 판터 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군이 사용한 중전차(中戰車)이다. 1941년 6월 발발한 독소전쟁에서 독일 기갑부대에 큰 충격을 준 소비에트 연방 T-34에 대항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1943년 중반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티거 전차와 함께 독일 기갑부대의 주력으로 활약하였다. 제식 이름은 PzKpfw(PanzerKampfwagen) Ⅴ Panther, 즉 5호 전차 판터(표범)이다.

1943년 5월 12일 MAN AG사(社)에서 개발한 VK. 30.02(M)가 5호 전차 판터D형으로 선정되면서 양산을 시작하였다. 1943년 9월까지 842대가 생산된 판터D형은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차전에 처음 투입되었지만 기계고장이 잦았기 때문에 실전평가가 나빴다. 이후 판터A형, G형, F형, 판터2 등의 개량형이 개발되었다.

판터D형의 엔진과 포탑을 개선한 A형은 2,200대, 판터2의 양산형인 판터G형은 2,953대가 생산되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일 기갑부대의 주력전차로 활약하였다. 판터2는 방어력 강화와 생산성 향상을 꾀한 전차로 1대만 제작되었고 판터 시리즈의 마지막 개량형인 F형은 1대도 완성되지 못하였다.

모두 5,995대가 생산된 판터 시리즈는 70구경 75㎜ 전차포 KwK42 1문과 포탄 79발을 장비하였다. 부무장은 7.92㎜ 기관총 MG34 2정과 기관총탄 5,100발이다. 장갑두께는 16~110㎜로써 티거 전차에 버금가는 강력한 방어력을 갖추었다. 성능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영국과 미국의 주력전차와 구소련의 T-34/76 T-34/85 등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6호 전차 티거 1

6호전차 티거 1

포획된 티거 1, 1943년 튀니스
종류 중전차
개발국가 나치 독일
개발사 Henschel & Son
역사
개발년도 1942년
생산기간 1942년 ~ 1945년
사용국가 나치 독일
사용된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생산 대수 1,355대
일반 제원
승무원 5명
길이 대포까지 8.45 m
높이 3.0 m
3.55 m
중량 56.9 t
공격력
주무장 8.8 cm KwK 36 L/56 1문
주포개발사 크루프(Krupp)
부무장 7.92 mm Machinengewehr 34
탄약수 4,800발
기동력
엔진 V-12 Maybach HL230 P45 700 PS
마력 690.4 마력, 514.8 kW
출력/중량 12.3 PS/t
현가장치 토션바
노상 속도 38 km/h
항속 거리 110 ~ 195 km
도하 2 ~ 4 m
방어력
전면 장갑 110 mm
측면 장갑 80 mm
상부 장갑 25 ~ 40 mm
장갑 25 ~ 110 mm

 

티거 1(Tiger I)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나치 독일 중전차의 일반적인 명칭이다. 최초의 공식 독일 명칭은 판저캄프바겐 젝스 아우스퓌룽 하(Panzerkampfwagen VI Ausführung H; 줄여서 'PzKpfw VI Ausf. H')였는데,[1]다시 1943년 3월에 '하(H)'에서 '에(E)'로 다시 명칭이 바뀌었다. 또한, 이 전차는 군수품 목록상 '존더크라프트파르조이크(Sonderkraftfahrzeug; 줄여서 SdKfz) 181'라는 명칭을 갖고 있었다. "티거(Tiger, 호랑이)"라는 별명은 페르디난드 포르셰에 의해 붙여졌다. 로마숫자 'I'은, 후에 '티거 2'(Tiger II) 전차가 생산되면서 덧붙여졌다.

티거 1은 1942년말부터 독일이 항복한 1945년까지 사용되었다. 전차의 설계는 다른 장갑차량, 중자주포 스툼티거와 '베르게티거' 장갑복구차량의 기본이 되었다.

티거의 승무원 훈련 지침서인 '티거피벨(Tigerfibel)'은 세계대전 후 기념품 품목이 되었다.

 

 

6호 전차 B형 쾨니히스티거

6호전차 티거 2

박물관의 6호전차(Sd.Kfz. 182)
종류 중전차
개발국가 나치 독일
개발사 Henschel & Son
역사
개발년도 1943년
생산기간 1943년 ~ 1945년
사용국가 나치 독일
사용된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개량형 야크트티거 구축전차
생산 대수 487대
일반 제원
승무원 5명 (지휘관, 포수, 장전수, 통신병, 조종수)
길이 7.61 m (대포까지 10.286 m)
높이 3.09 m
3.755 m
중량 68.5 t (초기) ~ 69.8 t (양산)
공격력
주무장 8.8 cm KwK 43 L/71 1문 84발
주포개발사 크루프(Krupp)
부무장 7.92 mm Machinengewehr 34
탄약수 4,800발
기동력
엔진 V-12 Maybach HL 230 P30 700 PS
마력 690 마력, 515 kW
출력/중량 10 PS/t
현가장치 Maybach OLVAR EG 40 12 16 B
노상 속도 41.5 km/h
항속 거리 170 km
변속 전진 8단, 후진 4단
방어력
전면 장갑 하부 100mm 40°, 상부 150mm 40°
측면 장갑 하부 80mm 90°, 상부 80mm 65°
상부 장갑 40mm 90°

 

티거 2(Tiger II)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나치 독일 중전차의 일반적인 명칭이다. 공식적인 독일 명칭은 Panzerkampfwagen(판저캄프바겐) VI Ausf. B, PzKpw VI Ausf.B이며, 또한, 제작 명칭인 '존더크라프트파르조이크(Sonderkraftfahrzeug) 182, SdKfz.182'도 있다. 이 전차는 '쾨니히스티거(Königstiger)'의 명칭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독일어 König는 영어의 King에 해당되어 영어로 '킹 타이거(King Tiger)', 또는 '로얄 타이거'로 불리기도 한다.

티거 2는 티거 1의 중장갑에 판터(Panther) 전차의 비스듬한 장갑을 결합하였다. 설계는 티거 1의 개념을 따랐으나, 보다 강력해지게 하였다. 티거 2의 차대는 야크트티거의 포탑이 없는 돌격포(tank destroyer)의 원칙을 대체하였다. 티거 2는 68.5(초기 포탑) ~ 69.8 톤의 무게였고, 150 ~ 180 mm 의 전면 장갑으로 보호되었으며, 88 mm KwK 43 L/71 포로 무장하였다.

매우 육중한 장갑과 강력한 장거리 대포는 티거 2에 실질적인 적 전차에 대한 강점을 제공하였다. 이는 특히 대항할 만한 중전차를 보유하지 못한 영국군과 미국군의 서부전선에서 그러했다. 이들은 방어의 위치에서 파괴하기 어려웠으나, 공격에서는 그보다는 성과가 좋지 못했다.

티거 2는 연합군 소련 전차에 잘 대응하였다. 방어에 있어서, M4 셔먼은 정면에서도 정면 장갑을 관통하지 못하였고, M26 퍼싱 IS-2는 각각 1300 m 와 200 m 이내로 접근해야 했다.

티거 2는 그 크기와 선전적인 가치로 널리 알려졌다.

 

 

35(t)전차

베오그라드 군사 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35(t)전차

 

35(t) 전차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에 체코슬로바키아 슈코다 사가 개발한 경전차로서 원래 제식명은 LT-35 또는 LT vz. 35였지만,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한 이후 독일군이 제식 전차로 채용하면서 이름을 Panzerkampfwagen 35(t) (Pz.Kpfw. 35(t))로 바꾸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군의 주요 전차 전력으로 활용되었다. 보통 35(t) 전차(Panzer 35(t))라 불리며 t는 독일어로 체코슬로바키아(독일어: Tschechoslowakei)를 뜻한다.

 제원

  • 길이 : 4.90 m
  • 넓이 : 2.16 m
  • 높이 : 2.20 m
  • 중량 : 11톤
  • 서스펜션 : 리프스프링 방식
  • 노상 속도 : 시속 34km
  • 항속 거리 : 193km (노상) / 118km (야지)
  • 주포 : 슈코다 37mm M1934 전차포 (독일 제식명은 Kw.K.34(t) L/40)
  • 포탄 탑재량 : 78발
  • 부무장 : 7.92mm 기관총 X 2정
  • 장갑 : 8mm ~ 25mm
  • 사용연료 : 가솔린
  • 연료 탑재량 : 153 리터
  • 연비 : 0.81리터/km.(노상) / 1.33리터/km (야지)
  • 승무원 : 4명
  • 엔진 출력 : 120hp (90kw)
  • 중량 대비 출력 : 11마력/1톤

 

 

2차대전당시 독일 주요화력  

Panzer VI Ausf. B Tiger II

Tiger II preserved at La Gleize, Belgium
Type Heavy tank
Place of origin Nazi Germany


Walther PPK

Karabiner 98 Kurz

Karabiner 98 kurz

 

Maschinenpistole 40 (MP40)

Type submachine gun
Place of origin Nazi Germany
Panzerfaust

Four Panzerfausts in original casing, on display at the Helsinki Military Museum대전차포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

비스마르크

자매함 틸피츠의 식별용 그림
개략적인 정보
함종  전함
함급  비스마르크급
함명  비스마르크
자매함  틸피츠
제작  함부르크의 Blohm & Voss
연혁
발주  1935년 11월 16일
기공  1936년 7월 1일
진수  1939년 2월 14일
취역  1940년 8월 24일
최후  1941년 5월 27일 실종
함장  에른스트 린데만
일반적인 특징
배수량  기준 배수량:39,517톤
상비 배수량:45,451톤
만재 배수량:49,406톤
전장  상부 251.0 m, 흘수선 241.5 m
선폭  36 m
흘수  기준 9.3 m 만재시 10.2 m
추진 
  • Wagner high-pressure 12기;
  • Blohm & Voss 변속 터빈 3기;
  • three-blade 프로펠러 3개, 직경 4.70 m, 150,170 마력 (121 MW)
속력  최대 속도 30.8노트 (57km/h)
항속거리  16노트/9,280해리, 19노트/8,525해리, 24노트/6,640해리, 28노트/4,500해리
장갑 
  • 장갑대: 145 to 320 mm
  • 갑판: 50 ~ 120 mm
  • 칸막이: 220 mm
  • 포탑: 130 ~ 360 mm
  • 포좌: 342 mm
  • 사령탑: 360 mm
승조원  2,092명 (사관103명, 병사1,962명 , 지휘관27명)(1941년당시)
무장 
  • 38.1cm(47구경)연장포 2연장 8문
  • 15cm(55구경)연장포 6기
  • 10.5cm(65구경)연장 고각포 8기
  • 37mm(83구경)연장 기관표 8기
  • 20mm(65구경)4연장 기관포 2기
  • 20mm(65구경)단장 기관포12기
함재기 
  • Ar 196
  • 아라도 Ar196A-3수상 정찰기 4대

비스마르크(독일어: Bismarck)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나치 독일 해군 최대의 전함으로 알려져 있다(실제로 나치 독일 해군 최대의 전함은 비스마르크의 자매함인 틸피츠이다.). 비스마르크급 전함의 네임쉽(Name Ship)이며, 함명은 독일 통일의 주역인 철혈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

 

독일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

 
DKM 샤른호르스트

샤른호르스트(DKM Sharnhorst)호의 식별용 그림
개략적인 정보
함종  순양전함(Battlecruiser)
함급  샤른호르스트급
함명  DKM 샤른호르스트
자매함  그나이제나우
제작  Kriegsmarinewerft Wilhelmshaven
연혁
발주  1934년 1월 25일
기공  1935년 6월 15일
진수  1936년 10월 3일
취역  1939년 1월 7일
최후  1943년 12월 26일 노르웨이 북쪽 100km 해상에서 침몰
함장 

1939년 ~ 1943년 총 4명

  • 오토 칠리악스 (1939년)
  • 쿠르트 체자르 호프만 (1939 ~ 1942년)
  • 프리드리히 휴프마이너 (1942 ~ 1943년)
  • 프릿츠 힌체 (1943년)
일반적인 특징
배수량  표준 31,552 톤, 만재시 38,900 톤
전장  상부 236.4 미터, 하부 229.8 미터
선폭  30 미터
흘수  37,500 톤일 때 9.93 미터
추진  3개의 브로운 보베리 기어 터빈
3개의 3날 프로펠라, 지름 4.8 미터
속력  표준 19노트(35.2 km/h)
최대 31.5노트(58.3 km/h)
항속거리  35.2 km/h 로 18,710 km
승조원  1,968명(장교 60명)
무장 
  • 283 mm(11.1인치)포 3연장 포탑 9문
  • 150 mm(5.9인치)포 12문
  • 105 mm (4.1인치)포 14문
  • 37 mm 16문
  • 20 mm 10문
  • 533 mm(21인치) 어뢰 발사튜브
함재기  아라도 Ar196A-3 3대

 

샤른호르스트(Scharnhorst, DKM Scharnhorst)는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독일 해군(German Kriegsmarine)이 건조한 순양전함이다. 샤른호르스트급 순양전함의 제1번함(Nameship)으로, 배의 이름은 나폴레옹 점령시 독립전쟁을 이끈 프로이센의 장군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Gerhard von Scharnhorst)'에 유래하며, 1914년 포클랜드 섬 전투에서 침몰된 SMS 샤른호르스트를 기념한 이름이기도 하다. 독일 해군은 전함에 분류하며, 영국 해군은 순양전함으로 분류한다.

 

독일 순양전함 그나이제나우

DKM 그나이제나우

자매함 샤른호르스트호의 식별용 그림
개략적인 정보
함종  순양전함(Battlecruiser)
함급  샤른호르스트급
함명  DKM 그나이제나우
자매함  샤른호르스트
제작  의 Deutsche Werke, 235번 Bau
연혁
발주  1934년 1월 25일
기공  1935년 5월 6일
진수  1936년 12월 8일
취역  1938년 5월 21일
최후  1945년 3월 27일 폐기 처분됨
일반적인 특징
배수량  표준 32,100 톤, 만재시 38,434 톤
전장  상부 235 미터, 흘수선 226 미터
선폭  30 미터
흘수  37,303 톤일 때 9.69 미터
추진  3개의 브로운 보베리 기어 터빈
3개의 3날 프로펠라, 지름 4.8 미터
승조원  1,908명
무장 
  • 280 mm(11.1인치)포 9문
  • 150 mm(5.9인치)포 12문
  • 105 mm (4.1인치)포 14문
  • 37 mm 16문
  • 20 mm 10문 (후에 16문)
  • 533 mm(21인치) 어뢰 발사튜브 6기
함재기  아라도 Ar196A-3 3대

 

그나이제나우(Gneisenau, DKM Gneisenau)는 제1차 세계 대전 때에 독일 해군이 건조한 경순양함이다. 샤른호르스트급 순양전함의 제2번함으로, 함명은 나폴레옹의 점령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군제도 개혁에 힘을 쏟은 샤른호르스트에 협력한 '아우구스트 폰 그나이제나우'에 유래하였다. 독일 해군은 전함에 분류하며, 영국 해군은 네임쉽(Nameship)인 순양전함으로 분류하였다.

 

지상에 설치된 그나이제나우의 함포

1945년 3월 23일 고텐하펜의 폐기함으로서 예인되어 자침되었다. 1947년에 다시 건져 해체하고, 고철로 처분되었다.

 

 

독일 순양함 프린츠 오이겐

프린츠 오이겐

원폭 실험을 위해 대기중인 프린츠 오이겐
개략적인 정보
함종  순양함
함급  어드미랄 히퍼급
함명  프린츠 오이겐
자매함 
제작  의 크루프 게르마니아베루프, 564번
연혁
기공  1936년 4월 23일
진수  1938년 8월 22일
취역  1940년 8월 1일
최후  원자폭탄 실험후 1946년 12월에 쿠제린 환초에 좌초
함장 

1940년 ~ 1946년 6명

일반적인 특징
배수량  기준 배수량 15,000톤
만재 배수량 18,400 톤
전장  하부 199.5 m, 상부 212.5 m
선폭  21.8 m
흘수  7.2 m
속력  최대 속도 33.5노트 (62.04km/h)
항속거리  7,200 해리 (20노트/h)
장갑 
  • 장갑대 80mm
  • 상부갑판 30 mm
  • 장갑갑판 30 mm
  • 어뢰 칸막이 20 mm
  • 주 포탑 160 - 70 mm
  • 사령탑 150 mm
승조원  1,600명
무장 
  • 8인치 포 8문
  • 10.5cm 포 12문
  • 4cm 대공포 17문
  • 3.7cm 포 8문
  • 2cm 포 28문
  • 21인치 어뢰 발사관 12문
함재기  아라도 Ar 196 3기

 

프린츠 오이겐(독일어: Prinz Eugen)은 나치 독일 해군의 중순양함이다. 어드미럴 히퍼(Admiral Hipper-class)급 중순양함의 세번째 함이다. 함명은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오스트리아 제국의 군인으로 활약한 사보이의 왕자 오이겐(Prinz Eugen von Savoyen)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2차대전당시 독일 공군

 

 

BF-109 메서슈미트 전투기

FW-109 포케울프 전투기

ME262 제트전투기

HE-111 폭격기

JU87 수투카 급강하 폭격기

JU88 융커스 폭격기

DO-17 도르니에 폭격기

 

 

He 111

 

Bf 110
Junkers Ju 88

 

 

 

 

Panzer VI Ausf. B Tiger II

Tiger II preserved at La Gleize, Belgium
Type Heavy tank
Place of origin Nazi Germany

 

Karabiner 98 Kurz

Karabiner 98 kurz

 

Maschinenpistole 40 (MP40)

Type submachine gun
Place of origin Nazi Germany
Panzerfaust

Four Panzerfausts in original casing, on display at the Helsinki Military Museum대전차포

 

 

소련군개인화기

SVT-40

Type Semi-automatic rifle
Place of origin USSR
PPSh-41

Type Submachine gun

Type Light machine gun

 


.
Type Anti-tank rifle
Place of origin

Soviet Union

 

T-50 light infantry tank

Specifications
Weight 14 tonnes
Yak-9
Yak-9D of the Soviet Air Force

 

미군장비  톰슨 기관총

 

Rifle, Caliber .30, M1

 

US M1 Carbine semi-automatic rifle
M3machine gun
M3A1machine gun
Rifle, Caliber .30, Automatic, Browning
Launcher, Rocket, Antitank, M-9 Series

Bazooka with Super Bazooka
The Lockheed Constellation was developed during World War II and served as both a civilian airliner and a military transport.
 
B-17 Flying Fortress
USAAF B-17G-30-DL levels off for a bomb run

 

 

 

연표

1939년

  • 9월 1일 - 독일, 폴란드를 침공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그 순간이다.
  • 9월 3일 - 영국프랑스, 독일에 선전 포고하다.
  • 9월 17일 - 소련군, 폴란드에 침입.
  • 9월 27일 - 독일, 바르샤바를 점령하다. 그리고, 항전에 참여한 폴란드인을 체포하다.
  • 9월 28일 - 독일-소련 경계 설정, 우호 조약으로 폴란드 분할하다. 소련, 핀란드에 영토 통과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함.
  • 11월 30일 - 소련, 핀란드에 침입하다(겨울전쟁). 연합군이 핀란드를 지원함(스웨덴은 무기를 대여했음. 그러나 다시 중립으로 회귀).

1940년

1941년

1942년

1943년

1944년

1945년

일본의 항복

 

관련사진

World War II

 

German troops at the 1935 Nuremberg Rally.
Soviet and German officers in Poland.
German troops in Paris after the fall of France.
 
 
British troops firing a mortar during the Battle of Imphal.
 
A Soviet tank during the Battle of Kursk.
 
American and Soviet troops meet east of the Elbe River.
 
Victims of the Holocaust.
 
Body disposal at Unit 731, the infamous Japanese biological warfare research unit.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945년

일본의 항복

제2차세계대전..독일의장비(내공100)

... 그리구영 제가 특히 독일 장비에 관심이 많은데... ㅋㅋ) 여러분을 믿쓰미다내공 100걸겠쓰미다 독일... 사변 제2차 세계 대전 개량형 계열 차량 생산량 1...

제2차세계대전당시 독일과일본의과학기...

제2차세계대전당시 독일은 거의 모든분야에서 우수하다고들어서 종전후... 반대로 소련은 하루에 100대이상이 생산될만큼 엄청나게 대량생산을 했구여 미국 역시 만만치...

제 2차 세계대전독일이 폴란드를...

... 배우는데 제 2차 세계대전의 직접적 원인이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한 것이... 약간이라면 100만의 독일군의 진격을 볼탠데 피해가 하도 커서 1940년 도 까진 100만이란 거대한...

제2차세계대전독일 전차에 대해...

... 79발을 장비하였다. 부무장은 7.92㎜ 기관총 MG34 2정과 기관총탄 5,100발이다. 장갑두께는 16~110㎜로써... 35(t))로 바꾸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군의 주요...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모든것

... 79발을 장비하였다. 부무장은 7.92㎜ 기관총 MG34 2정과 기관총탄 5,100발이다. 장갑두께는 16~110㎜로써... 35(t))로 바꾸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군의 주요...

제2차세계대전독일의 격추에이스에...

... 모두 독일에서 내놓라하는 제2차세계대전의 최고 격추... 내공드림(10) 윗분 말도 맞는데요... 거기에 약간 추가를 하자면 독일에이스들을 보면 100대를 넘기는 사람들이...

(내공80,감사내공20,총100)

... 79발을 장비하였다. 부무장은 7.92㎜ 기관총 MG34 2정과 기관총탄 5,100발이다. 장갑두께는 16~110㎜로써... 35(t))로 바꾸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군의 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