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세계2차 대전이 두 나라가 싸우는데 다른 나라가 끼어 들어서 세나라가 같이 싸우는게 세계2차 대전이 아닌가 싶어요. 이제 제가 알려드릴게요. 조금씩 퍼왔어요, 제가 모든걸 다 아는게 아니어서
일단
제 1차 세계대전
원인 :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세계 대전의 시초를 알리는 사건이 일어 났다.
이 곳을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공(公) 부처가 탄 자동차가 환영을 받으며 거리를 지날 때 한 청년이 뛰어나와 차를 향해 권총을 쏘았다. 범인은 오스트리아를 반대하던 세르비아 청년으로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지만, 황태자 부처는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을 사라예보 사건이라 한다.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는 사건의 책임이 세르비아 정부에 있다고 하며,
최후 통첩을 세르비아에 보내어 강경하게 요구하였다. 세르비아는 요구 조건의 대부분을
받아들였으나, 사건을 조사하는 데 오스트리아 대표를 참가시킨다는 것만은 내정 간섭이라 하여 거절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이를 최후 통첩을 거절한 것으로 보고, 그 해 7월 29일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하였다.
두 나라의 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원조할 뜻을 굳히고 군사 동원령을 내렸다. 이에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돕기 위하여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니, 프랑스와 영국도 러시아를 돕기 위해 전쟁에 참가했다.
경과 : 전쟁의 확대, 전쟁의 상황, 러시아 혁명
전쟁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동맹군과, 러시아·프랑스·영국 등의 연합군이 맞서는 가운데 크게 확대되어 갔다. 이탈리아는 3국 동맹에 가담한 나라였으나, 오스트리아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초기에는 중립을 지키다가 얼마 후 연합국에 가담하였다.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은 아시아에서까지 번져 일본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일본은 영일 동맹을 구실로 독일에 선전 포고하였는데, 이는 중국과 태평양에 있는 독일의 식민지를 빼앗으려는 술책에서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통적으로 강한 영국 해군은 독일의 해안선을 봉쇄하여 해외로부터 물자 수입을 막았기 때문에 독일은 경제적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이에 독일도 이른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펴 연합국의 군함은 물론 여객선과 중립국의 상선까지 무차별 공격하였다.
독일의 이와 같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많은 중립국 사람이 희생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중립을 지켜 오던 미국이 참전하고(1917년),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와 중국까지도 연합국 편에 가담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많은 나라가 연합국 편에 가담함으로써 참전국이 모두 30여 개 국에 이르렀다. 동맹국 편에 가담한 나라로는 투르크와 불가리아가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독일은 미리 짜 놓았던 작전 계획대로 서쪽의 프랑스를 단숨에 격파하고, 동쪽의 러시아를 공격하려 하였다. 따라서 독일은 영세 중립국인 벨기에 쪽으로 돌아 프랑스에 침입하였다. 독일군은 약 1개월 만에 파리 근처까지 진격하였으나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반격을 받아 국경 근방까지 후퇴하였다.
한편 동부 전선에서는 독일의 힌덴부르크 장군이 러시아 군을 공격하였으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더구나 해군이 약한 독일로서는 전쟁을 오래 끌수록 전세가 불리하였다. 그래서 독일은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려고 동부 전선의 병력을 끌어다가 프랑스 국경의 방어선인 베르됭 요새에 대해 총공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페탱 장군이 잘 막아 내었기 때문에 독일은 50만 명의 많은 희생자를 낸 끝에 물러나고 말았다.
해전에서도 영국 해군이 우세하여 독일은 해외에 있는 식민지를 모두 빼앗기고, 본국의 항구도 봉쇄당하였다.
제 1차 대전 때에는 무기도 새로운 것이 발명되었다. 영국은 최초로 탱크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독일은 잠수함·독가스·비행선을 사용하였다.
제 1차 세계 대전중에 있었던 가장 큰 사건은 러시아 혁명이다. 1917년 3월과 11월의 두 차례에 걸친 혁명으로 전제 군주 정치는 무너지고, 세계 최초의 공산 정권이 이 지구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오랜 전제 정치 밑에 시달리던 러시아 국민은 전쟁이 장기화되자 식량 부족으로 더욱 고통을 받았다. 더구나 전쟁에서도 독일군에게 패전을 거듭하였으므로 사회 불안은 극심해졌다.
1917년 3월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지금의 레닌그라드)에서 부인·노동자들이 앞장서서 빵을 요구하는 데모를 벌인 데 이어 수많은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나 전제 타도· 전쟁 반대를 외치면서 혁명을 일으켰다. 혁명 운동은 군대에까지 번져서 노동자와 병사의 대표자 회의인 ‘소비에트’가 각지에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가운데 국회의 자유주의 파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황제 니콜라이 2세를 물러나게 했다.
이 3월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는 몰락하고 황제의 전제 정치도 끝났다.
그 후 케렌스키가 이끄는 임시 정부는 자본가들의 요구에 따라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하여 경제 상태가 한층 악화되고 개혁도 제대로 실시하지 못했다.
이에 소비에트의 중심 세력이었단 볼셰비키 당(뒤의 공산당)은 레닌(1870~1924년)의 지도 아래 반정부 운동을 벌였다. 그 해 11월 그들은 케렌스키 정부를 타도하고, 레닌을 중심으로 하는 소비에트 정부를 탄생시켰다.
이것이 러시아의 11월 혁명이다.
새로 탄생한 소비에트 정부는 나라 안팎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공산당에 의한 일당 독재 체제를 굳혀 나갔다.
결과 : 전쟁의 끝남
1917년 미국의 참전과 러시아 혁명은 제 1차 세계 대전을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소비에트 정부는 세계 대전을 제국주의 국가간의 싸움이라 하여 독일과 단독으로 휴전 조약을 맺었다(1918년 3월). 이 때문에 독일은 서부 전선에만 힘을 쏟을 수 있게 되었으나, 전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1918년 9월부터 동맹국의 일원이던 불가리아·투르크·오스트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하고, 독일 국내에서도 전쟁 반대의 소리가 높아 갔다. 이 해 11월에 마침내 킬 군항(軍港)에 있던 해군의 반란을 계기로 혁명이 일어나,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였다.
새로 수립된 공화국 정부는 곧바로 연합국과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다(1918년 11월 11일).
이로써 4년간 계속된 제 1차 세계 대전은 약 1,000만 명의 인명을 희생시키고 연합군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 여기서부터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갭을 메우기 위해 세계 정세를 잠깐 다루겠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원인 : 전체주의의 위협
제 1차 세계 대전 후 미국·영국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서 민주주의가 더욱 발전하여 갔다. 이들 나라들은 민주주의 헌법의 답변확정, 남녀 평등의 보통 선거 제도를 실시하는 등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9년을 전후하여 세계에 몰아닥친 경제 공황은 새로운 사태를 야기시켰다.
국민들 중에는 이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강력한 통치를 원하는 사람도 있어 민주주의와 반대되는 전체주의가 나타났다.
전체주의는 1920년대부터 싹트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나라는 파시스트의 이탈리아, 나치의 독일, 군국주의의 일본 등이고, 공산주의의 소련은 좀 색다른 전체주의 국가였다.
이들 전체주의 국가의 출현으로 민주 주의와 세계 평화는 다시 위협을 받게 되었다.
세계 경제 공황
제 1차 세계 대전 후 미국 경제는 번영을 계속하는 가운데 생산 과잉 상태에 빠져들었다.
곧 공장이 너무 많이 생긴 나머지 물건이 남아 돌게 된 것이다. 또 일확 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의 심각한 투기 현상까지 일어나 경제 불안의 징조를 보였다.
드디어 1929년 10월 2일 뉴욕 증권 시장의 주식 값이 폭락하고, 이를 계기로 미국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심한 불경기가 시작되었다. 물건이 팔리지 않고 재고품이 쌓이게 되자, 많은 공장과 회사가 쓰러지고, 이들 회사에 돈을 대부하여 준 은행들도 문을 닫게 되었다.
미국에서 비롯된 이와 같은 경제 공황은 미국 경제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그 식민지에까지 파급되어 세계 공황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리하여 각국의 공업 생산은 크게 위축되고 실업자 사태가 빚어졌다. 그리고 이에 따른 정치적·사회적 불안은 전체주의 국가가 출현하는 배경이 되었다.
각국의 공황대책
경제 공황이 절정에 달했던 1933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통제 경제 정책인 뉴 딜 정책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사용했다.
곧 ‘전국 산업 부흥법’을 제정하여 노동자를 보호하였고, 테네시 강 유역 개발 공사(TVA)와 같은 대규모 공사를 일으켜 실업자들을 구제하였다. 또 최저 임금제를 마련하여 가난한 노동자들의 생활을 보장하고, 국가에서 농업과 공업의 생산을 통제하여 가격의 균형을 조절하는 등 여러 가지 정책을 폈다. 이에 미국 경제는 차츰 안정되어 갔다.
한편 영국도 공황으로 말미암아 경제적 어려움을 겪자 당시의 영국 수상 맥도널드는 이른바 ‘블록 경제’로 불경기를 회복해 나갔다.
곧 관세는 인상하여 외국 상품의 수입을 억제하는 보호주의 무역 정책을 쓰는 한편, 영연방 안의 나라들 사이에는 관세를 낮추어 무역 활동을 원활하게 하였다.
그런데 미국·영국 같은 선진 민주 국가는 민주주의 테두리를 벗어남이 없이 문제를 해결해 나갔지만, 민주주의 토대가 약하고 산업의 기초가 단단하지 못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은 다른 나라를 침략함으로써 불경기를 극복하려 하였다.
히틀러의 나치즘
세계 공황으로 타격을 가장 크게 받은 나라가 독일(바이마르 공화국)이었다. 독일은 경제 부흥을 미국 자본에 거의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이 매우 커 실업자가 600만이 넘었다.
이러한 속에서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당이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나치 당은 사회 통제의 기능을 잃은 바이마르 공화 정부를 반대하는 한편, 공화주의와 베르사유 체제 타도, 실업자 구제와 사회 보장을 내세워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이 무렵 경제 불황을 틈타 공산당의 세력이 커지고 있었는데, 이에 불안감을 가졌던 자본가와 군부들이 히틀러를 지지하였다. 이리하여 나치 당은 1932년의 선거에서 제 1당이 되어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였다.
수상이 된 히틀러는 독재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법을 의회로하여금 만들게 하여, 나치 당 이외의 모든 정당을 해산시키고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1934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죽자, 히틀러는 수상과 통령을 겸한 총통 자리에 올라 완전한 독재자가 되었다. 그래서 이 때부터를 독일의 제3제국이라 한다.
히틀러의 나치스 정권은 토목 공사나 군수산업에 힘을 기울여 실업자수를 줄이는 한편, 친위대· 돌격대· 비밀 경찰(게슈타포)등을 통하여 국민 생활을 통제하고, 언론·출판의 자유를 박탈하였다. 한편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유태인에 대한 박해를 강화해 갔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제휴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군비가 크게 제한되고, 독일과 프랑스의 완충 지대인 라인란트에는 군대를 주둔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1933년 국제 연맹을 탈퇴한 데 이어, 1935년에는 재군비를 선언하고 징병제를 부활시켰으며, 그 이듬해에 다시 라인란트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같은 해 가을부터는 4개년 계획을 세워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한편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지배하는 이탈리아도 경제 공황으로 크게 고통을 받았다. 이에 무솔리니는 국민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외국 침략을 꾀하였다.
1935년 독일의 재군비 선언으로 세계가 소란한 틈을 타서 에티오피아에 침입하였다.
국제 연맹은 즉시 이탈리아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군사용 물자를 이탈리아에 일체 팔지 않기로 결의했으나, 이탈리아의 침략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완전히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을 뒤따라 국제 연맹에서도 탈퇴하였다(1937년).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관계는 급속히 가까워져, 1936년 10월 독일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정복을 인정하고, 이탈리아는 독일의 오스트리아 진출을 인정하는 협약을 맺었는데, 이를 베를린 · 로마 추축이라 한다. 또 이 협약에서는 두 나라가 앞으로의 외교 문제에 있어서도 공동 보조를 취할 것을 약속하였다.
일본의 중국 침략
서양의 산업 기술을 재빨리 받아들여 공업화를 서두르던 일본에도 경제 공황의 물결이 밀어닥쳤다. 일본은 러일 전쟁 때 차지한 요동 반도를 근거지로 벌써부터 대륙 침략을 꾀하여 왔지만, 제 1차 세계 대전 후의 국제적인 평화의 움직임과 중국의 5·4 운동 등으로 한동안 주춤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불경기가 날로 심해지자 과격한 군부 세력이 앞장서서 침략주의를 밀고 나갔다.
1931년 일본군은 그들이 관리하던 남만주 전영토를 점령했다(만주 사변). 그러고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데려다가 ‘만주국’이라는 괴뢰 정권을 세웠다.
이와 같은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하여 중국의 국민 정부는 곧 국제 연맹에 제소했으며, 국제 연맹은 리튼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만주에 보냈다. 그 결과 일본은 국제 연맹에서 탈퇴하고 말았다(1933년).
그 후 일본의 중국 침략이 더욱 노골화되어 가던 중, 1937년 7월의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마침내 중일 전쟁이 일어났다. 일본군은 베이징·난징·상하이 등의 주요 도시를 잇따라 점령하고 많은 중국인을 학살하였다.
그러나 장 제스의 국민 정부는 공산당과 손잡고(제 2차 국공 합작) 미국 · 영국의 원조를 받아 끈질긴 항전을 계속하였다.
3국 협정의 성립
전체주의 국가로 국제 연맹에서 탈퇴한 독일·이탈리아·일본 등 3국은 서로 비슷한 입장이었으므로 손을 잡았다.
베를린 · 로마 추축이 결성된 1개월 뒤에 독일과 일본이 방공 협정(防共協定)을 맺었고, 이듬해인 1937년에는 이탈리아도 여기에 가담하여 3국 방공 협정이 성립되었다.
이리하여 전체주의 국가들간의 결속은 한층 강화되어 ‘베를린·로마·도쿄 추축’으로 발전하였다.그래서 이들 세 나라를 일컫어 ‘추축국’이라 한다.
3국 방공 협정은 본래의 목적이 공산주의 소련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뒤에는 소련보다도 영국·미국·프랑스 등 민주주의 국가에 대항하는 조직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그리하여 세계는 다시 전체주의 국가인 독일·이탈리아·일본 등의 추축국과 민주주의 국가인 영국·미국·프랑스 등의 연합국으로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 두 세력의 대립 충돌로 일어난 것이 제 2차 세계 대전이다.
독일의 침략과 뮌헨 회담
3국 방공 협정이 체결된 후, 독일의 침략 정책은 한층 노골화되었다. 그 첫번째 목표로, 1938년 3월 이 지역을 완전히 독일 영토로 삼아 버렸다. 그럼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의 사이가 나빠지는 것을 꺼려 이를 눈감아 주었기 때문에 독일은 더욱 기세가 올라 계속 침략의 손길을 뻗쳤다.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히틀러는 같은 해 다시 체코슬로바키아 서부의 독일인 거주 지역인 수데텐 지방을 차지하려고 함으로써 심각한 국제 분쟁이 야기되었다. 그리하여 1938년 9월 영국 수상 체임벌린의 주선으로 국제 분쟁을 조절하기 위한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4개 국 거두 회담이 뮌헨에서 열렸다(뮌헨 회담).
이 때 히틀러는 수데텐 지방이 ‘독일이 요구하는 마지막 영토’라고 강경한 태도로 나왔으므로 영국과 프랑스는 최후의 선물로서 수데텐 지방을 독일에 양도하는 협정에 조인하고 말았다.
이 같은 영국·프랑스의 ‘유화 정책’은 소련과 유럽 약소국들에게 실망을 주었고, 그들 나라로하여금 독일과 타협 쪽으로 기울게 했다. 히틀러는 이러한 정세를 이용해 침략의 폭을 넓혀 나갔다. 그리하여 1939년에는 다시금 체코슬로바키아의 서쪽 반을 빼앗고, 나머지 영토도 보호국으로 삼았다.
독일의 침략이 갈수록 확대되자, 영국과 프랑스도 이제까지의 유화 정책을 버리고 군비 강화를 서두르는 한편, 히틀러의 다음 목표로 되어 있던 폴란드 등과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하여 더 이상의 독일 침략을 저지하려 했다.
독·소 불가침 조약
예상한 대로 히틀러는 폴란드에 침략의 손길을 뻗쳐 일부 영토를 요구해 왔다. 사태의 위급함을 깨달은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해서 소련에 대해 군사 동맹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영국·프랑스의 유화 정책에 의구심을 품고 있던 소련은 이에 선뜻 응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39년 8월에 이르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독일과 소련이 서로 상대방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지만, 독·소 두나라가 제휴하여 영국과 프랑스에 대항한다는 것을 뜻하였으므로 영국과 프랑스 양국이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제 2차 세계 대전
전쟁의 시작
폴란드의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자 독일군은 1939년 9월 1일 새벽에 선전 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그러자 이틀 후인 9월 3일 폴란드와 동맹 관계에 있던 영국과 프랑스 양국이 독일에 선전 포고함으로써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많은 전차와 비행기를 동원하여 이른바 ‘전격 작전’을 써서 불과 2주 만에 폴란드 군을 무너뜨리고 그 서반부를 휩쓸었다. 그러나 폴란드를 점령한 히틀러는 동료라고 믿었던 무솔리니가 갑자기 중립을 선언하자, 영국과 프랑스에 화평을 제의하면서 전쟁은 잠시 소강 상태에 빠졌다.
한편 소련도 독일의 폴란드 침입과 거의 때를 같이해서 폴란드를 침공하여 그 동반부를 점령하였다. 이어 소련은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 등 ’발트 3국’을 합치고 핀란드를 침략하여 영토의 일부를 빼앗았다. 이 때 국제 연맹은 소련을 침략국으로 규정짓고 제명시켰다.
프랑스의 패망과 영국의 고전
한동안 계속된 소강 상태를 이용하여 작전 준비를 새로이 갖춘 독일은 1940년 4월부터 서부 전선에 대한 대공격을 시작하였다. 우선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굴복시키고, 5월에는 전격적으로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노선을 돌파하고, 마침내 파리를 함락시켰다.
이리하여 프랑스를 패망시킨 독일은 북반부를 직접 지배하고, 남반부는 독일에 협력적인 페탱의 비시 정부를 세워 간접 지배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 때 드골 장군은 영국에 건너가 ‘자유 프랑스 정부’를 세우고 본국 국민들에게 독일에 대한 저항 운동을 고취시켰다.
프랑스의 패망으로 혼자 남은 영국은 독일과의 힘겨운 전쟁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처칠(1874~1965년) 수상의 탁월한 지도 밑에 이 위기를 잘 견디어 나갔다.
한편 중립을 지키면서 형세를 살피던 이탈리아는 독일군이 잇따라 승리를 거두자, 파리 합락 작전 영국·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하고 전쟁에 끼여들었다.
독·소 전쟁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 조약을 맺었지만 서로 상대를 경계하고 있었다. 소련은 독일이 싸우는 틈을 타서 부지런히 영토를 확장하는 한편, 일본과 일·소 중립 조약을 맺어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다짐하였다(1941년 4월).
1941년 6월, 독일은 독 · 소 불가침 조약을 깨뜨리고 소련 영내로 진격해 들어갔다.
불시에 침입을 받은 소련은 처음 얼마 동안 후퇴를 거듭했지만, 차츰 전세를 만회해 갔다.
모스크바까지 후퇴한 소련의 스탈린은 중공업 공장 등을 후방으로 옮기고, 10월 중순부터 대규모적인 반격을 개시하였다.
한편 독·소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은 즉시 소련과 군사 동맹을 맺고, 미국은 많은 원조 물자를 소련에 제공하였다.
태평양 전쟁의 시작
일본은 유럽에서 대전이 일어나기 2년 전부터 중국과의 힘겨운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중국인의 민족적 저항을 받은데다 미국·영국 등이 중국을 원조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항일 전쟁을 지원하고 있던 미국은 1939년 미일 통상 조약을 파기하고,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중단하였다. 곤경에 빠진 일본은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침략을 정당화하는 ‘대동아 공영권’의 건설을 선전하면서 석유·고무 등의 중요한 자원을 확보하고자 동남 아시아에의 진출을 꾀하였다.
또한 대전 초기에 중립을 지켰던 일본은 독일·이탈리아가 결정적인 우세를 보이자 이들 나라와 새로 3국 군사 동맹을 맺고, 세력을 동남 아시아 방면으로 뻗쳐 나갔다. 이에 동남 아시아에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영국과 네덜란드도 미국·중국과 함께 일본에 대항하여 이른바 ‘ABCD라인’이 형성되었다.
국제적으로 고립된 일본은 미국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미국은 해외에 나가 있는 일본군의 전면 철수를 강력히 요구했으므로 두 나라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이러한 중에 일본에서는 군부를 중심으로 미국과의 전쟁론이 우세해져 1941년 12월 8월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마침내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
진주만 기습에 뒤이어 일본군은 순식간에 홍콩·필리핀·자바·수마트라·미얀마 등을 잇따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1942년 전반까지 남태평양 일대가 일본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연합군의 반격
전쟁 초기에는 유럽 방면이나 태평양 방면에서 독일·일본 등의 추축국이 미리 전쟁 준비를 해 왔으므로 계속 승리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본격적으로 무기를 제조하고 연합국을 돕게 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태평양 방면에서는 1942년 6월에 있었던 미드웨이 해전이 고비가 되었다.
이 해전에서 미국의 태평양 함대는 일본 해군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 이 때부터 일본 해군은 맥을 못 추게 되었으며, 맥아더 장군 지휘 아래 연합군이 반격을 개시하여 남태평양의 과달카날 섬을 탈환하였다.
한편 유럽에서는 소련군이 1943년 1월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을 포위하여 전멸시켰다. 이 무렵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은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여 독일·이탈리아 군을 몰아내고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이에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는 쓰러지고 새 정권이 들어서서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또한 승세를 잡은 연합군은 이듬해 6월 아이젠하워 장군의 지휘 아래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펴서 저항하는 독일군을 무찌르고 파리 해방에 성공하였다.
결과 : 연합군의 승리
이탈리아 항복 후인 1943년 11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 제스 총통 등 세 사람이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전후 처리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회담을 가졌다. 여기에서는 주로 일본의 영토 문제에 대한 방침이 결정되었는데, 일본이 차지한 해외 영토를 모두 무효로 하여 만주와 타이완을 중국에 돌려 주고,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카이로 선언을 발표하였다. 곧 이어서 루스벨트·처칠·스탈린 등이 테헤란에 모여 노르망디 상륙 작전 등에 대해 협의하였다(테헤란 회담).
또한 1945년 2월에는 미국·영국·소련의 3대표가 크림 반도의 얄타에 모여 독일 항복 후의 처리 문제와 새로운 국제 기구의 창설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얄타 회담). 이 얄타 회담 이전에 소련군은 이미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4월에는 드디어 베를린 시내에 돌입하였다.
이 때 히틀러는 절망 속에서 자살하고, 독일은 무조건 항복하였다(1945년 5월 7일).
같은 해 7월 트루먼과 처칠 · 스탈린이 베를린 근처의 포츠담에 모여서 일본에 항복을 권하고, 항복 조건을 내세운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버티었다.
8월에 들어서자, 일본의 숨통을 조이는 결정적인 두 가지 사건이 벌어졌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떨어지고, 소련이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한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도 마침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제 2차 세계 대전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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