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금 소금에 관하여

흰색 금 소금에 관하여

작성일 2020.06.10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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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부터 궁금했던건데 써봅니다
예전에 소금은 흰색 금이라고 불렸고 소고기보다 가격이 높았고 귀족들만 먹을 수 있던건데
소금(염화 나트륨)은 바다에 용해되어 있는데 그 때 당시는 바다 근처에 가는 것을 통제(?)했나요?
그냥 바닷물 퍼오고 끓이면서 증발 시키면 좀 쓰겠지만 소금이 나오지않나요?
도대체 왜 귀했던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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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소금의 역사

우리의 몸은 지난 수백만년 동안 하루 1g 정도의 소금의 섭취에 익숙해진 몸이다. 육식에서는 자연스럽게 소금기를 보충할수 있었지만 농사로 곡물위주의 식생활을 가지면서 소금이 부족하여지자 온갖 소금의 상품화가 이루어지고 5~10g의 섭취의 시대가 되었다. 전시대를 통하여 15세기 스웨덴에서 가장 소금섭취가 많았다고 한다. 계산에 따르면 당시 1인당 소금 섭취량이 무려 100g이라고 한다. 가장 큰 원인이 소금에 절인 생선을 통해서라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소금이 가장 많이 소비되는 방부의 목적이다. 냉장고의 도입이 소금 섭취량을 낮추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하였다. 일반적으로 소금을 5 ~ 10g 정도 섭취한다. 통상 미네랄이 필요량의 3~5배를 넘지면 독성이 나타난다. 하지만 소금에 관해서는 다른 미네랄에 비해 상당히 관대한 셈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미라를 만들 때에 시체를 소금물에 담갔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토지를 비옥하게 하기 위하여 소금을 비료로 사용하였다.

또 그들은 인간의 생활에 중요한 소금을 신에게 바치고, 신에게 바치는 짐승의 고기는 짜게 하였다.

이런 풍습은 그리스 사람이나 로마 사람에게도 있었다. 그리고 소금이 물건의 부패를 방지하고, 물건을 불변으로 하는 힘이 있다고 하여 고대인은 소금을 변함 없는 우정 ·성실 ·맹세의 상징으로 생각하였다. 성서의 ‘소금의 맹세’는 이런 데서 생긴 것이다. 아랍인은 함께 소금을 먹은 사람을 친구로 여기는 풍속이 있다. 소금의 이러한 생활상의 중요성 ·귀중성 ·신성한 성질 때문에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인 사람을 ‘땅의 소금’이라고 하였다.

인간에게 소금은 생존상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소금을 얻기 위한 노력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루어졌다.

원시시대에는 바닷물을 증발시켜서 채취하거나 해조(海藻)를 태워서 얻기도 하였는데, 사막의 오아시스에는 염분을 함유한 물이 솟아 나와 대상(隊商)은 그것에서 소금을 얻었다. 유럽에서는 철기시대부터 암염이 이용되고, 때로는 암염이 있는 곳에 물을 붓고 소금이 녹은 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채취한 일도 있다.

또, 사해(死海)나 솔트레이크와 같은 염호에서 얻은 조염(粗鹽)을 녹여 증발시키고 정제하여 소금을 얻었다.

원시시대에는 인간은 조수나 물고기를 잡아 굶주림을 채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초식동물은 식물 속에 함유된 미량의 염분을 몸 속에서 농축하여 가지고 있으며.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을 잡아먹고 그 염분을 소금의 보급 원으로 삼았다. 다시 그것을 인간이 먹는다는 순환을 되풀이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농경생활을 하게되고 언제 잡힐지도 모르는 동물을 쫓지 않고 농사지어 만든 식물을 양식으로 섭취하게 되자, 생리적 요구를 충족할 만한 소금을 보급하는 일이 어렵게 되고, 또한 식물 속에 함유된 칼륨을 많이 섭취하게 되었기 때문에 균형상 소금을 더욱 더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러기 위하여 인간은 따로 소금을 만들어 이것을 식품으로 할 필요가 생겼다.

그 결과 이미 선사시대에 소금이 산출되는 해안. 염호나 암염이 있는 장소는 교역의 중심이 되고, 산간에 사는 수렵민이나 내륙의 농경민은 그들이 잡은 짐승이나 농산물을 소금과 교환하기 위하여 소금 산지에 모이게 되었다. 그 결과 유럽이나 아시아에서도 소금을 얻기 위한 교역로가 발달하였다. 그 중심지 가운데에는 소금을 만드는 집을 뜻하는 독일어의 할레(Halle),할슈타트(Hallstatt),영어의 위치(-wich)가 붙은 드로이트위치l(Droitwich),낸트위치l(Nantwich))등이 지명으로 현재도 남아있다. 미국의 솔트레이크시티(Salt Lake City)도 소금과 관련된 지명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병사들의 월급을 소금으로 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일을 하고 받는 대가를 영어로 "샐러리(salary)"라고 합니다. 이 말은 "병사에게 주는 소금 돈" 이란 뜻의 라틴어 "살리리움(salarium)"에서 유래합니다.

또. 고대 그리스 사람은 소금을 주고 노예를 샀으며. 옛날에는 소금을 얻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 딸을 판 예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한펀, 소금으로 큰 돈을 번 도시도 있다. 6. 7세기까지 작은 어촌이었던 베네치아가 10세기 이후에 풍족한 해항도시로서 번영한 원인은 가까운 해안에서 산출되는 소금을 지중해 동쪽에 있는 여러 나라에 팔고, 그것으 로 얻은 이국의 산물을 유럽에 팔아 큰 이익을 얻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세금을 소금으로 냈던 적이 있는데, 허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소금을 만들거나 팔면 관가에 붙들려 가 큰 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는 소금을 만들거나 파는 일을 나라에서 도맡았던 적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백성들이 가지고 온 베 따위를 관가에서 소금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동양의 문헌에서는 양(梁)의 도홍경(陶弘景)이 엮었다고 전해지는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 의약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약물 중독의 해독제로 소개되어 있고, 그 밖에 BC 27세기 재상 숙사씨(宿沙氏)가 처음으로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채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에서는 고려 이전의 소금에 대한 문헌은 매우 적다. 다만 《삼국지》 <위지동이전(魏璡夷傳)> 고구려조에 소금을 해안지방에서 운반해 왔다는 대목이 있을 뿐이다. 신라나 백제에서도 해안지방에서 소금을 얻었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도염원(都鹽院)을 두어 염분(鹽盆)을 국가에서 관장하여 직접 소금을 제조 ·판매하여 재정수입원으로 삼았으며, 충렬왕(忠烈王) 때 사유로 이관하였다가 다시 1309년(충선 1) 염정을 민부(民部)에 이관하고 유통부분에서는 중국의 입포매법(立涯賣法)과 계구매법(計口賣法)을 모방하여 포(布)를 납부하게 하여 소금을 구입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연안의 주군마다 염장(鹽場)을 설치하여 관가에서 소금을 구워 백성들은 미포와 환물하였는데, 1411년(태종 11)에 염장역미법(鹽場易米法)을 폐지하였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소금은 국가의 중요한 재정 세원이었다. 그리고 궁가와 아문(衙門)경영의 소금은 일부 현물로 수납하고, 일반민영은 세금을 과해 왔다. 그 후 한말을 거쳐 일제강점기가 되자 소금은 완전히 전매제(專賣制)가 되었고, 1961년에 염전매법이 폐지되자 종전의 국유염전과 민영업계로 양분되었다.

소금을 뿌리는 까닭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 가운데 배신자 유다 곁에 소금 그릇이 엎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다가 그리스도와의 약속을 어기고 배신할 것이라는 것을 엎어져 나오는 소금으로 상징한 것이다. 소금은 기독교에서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과의 불변의 약속을 상징하며 세례 때 소금을 썼던 때도 있었다. 회교도들도 소금을 더불어 먹음으로써 약속이나 계약의 신성을 보증받았다. 우리 조상들은 소금 뿌린 산실(産室)에서 태어났고 태어나 맨 먼저 소금을 먹이는 관행도 있었다. 소금이 액귀(厄鬼)나 병귀(病鬼)를 쫓는다고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태어나 자라면서 잠결에 오줌을 싸면 키를 둘러 씌우고 이웃에 소금 빌어 오라 조리를 돌렸다. 소금은 이처럼 버릇을 고치기도 했다.그렇게 장성하여 시집 장가 갈 때면 가마바닥에 소금을 뿌려 신부를 앉히고 말 안장 아래 소금을 깔아 신랑을 앉혔다. 새 인생을 해코지하려는 귀신들을 물리쳤던 소금이기도 했다. 아이를 못 낳으면 소금으로 배꼽 뜸질을 하고 합방했다. 원인 모를 병에 걸리면 소금을 검은 보로 싸 이마에 대고 ‘쐬!쐬!쐬!’ 세 번 하면 병귀가 도망가는 것으로 알았다. 전라도 해안지방에 가보면 무당굿의 제상에는 소금이 한 그릇 소복이 놓여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다가 초상을 당하면 관 속에 소금을 뿌려 주력(呪力)으로 연관된 세상과의 고리를 끊고 떠나갔고 떠나보낸 사람은 그렇게 집에 돌아와 소금을 뿌려 단절을 확인했다. 재수 없는 사람이나 물건, 불길한 조짐도 우리 조상들은 소금을 무기로 대결했다. 부정한 것을 보고 듣고 입에 댔을 때 눈, 귀, 입을 씻는 물에 소금을 탔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소금은 사람을 해치는 부정(不淨)과 살(煞)을 씻어내고 마음의 평온을 얻게 해온 한국 정신사의 영롱한 결정체다.

인도 타말족 격언중에는 “아버지의 가치는 죽고 난 뒤에 알고,소금의 가치는 없어지고 난 다음에 안다”는 말이 있다.

우리 속담에도 “소금은 열두 가지 반찬을 만든다”며 보배로운 식품으로 여겨왔다.

우리나라처럼 바다를 끼고 있는 나라들에서는 소금의 가치가 대륙보다는 덜하다.

몽골처럼 내륙국에서는 대부분 암염을 사용한다.바다가 없어 소금 생산이 없는 것이 주된 이유다. 안데스산맥에 고도의 문명을 일군 케추아족(인디오의 주류)은 소금광산을 신의 선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암염에는 요드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 갑상선 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몽골에서는 소금은 물론 수돗물에도 의무적으로 요드를 포함시키고 있다. 전통적으로 몽골인들이 귀한 손님들에게 내놓는 수테 차에는 소금(다부tabusun)이 들어간다. 찝찔한 맛이 나지만 필수적인 것이다.기후가 건조하고 소금기를 섭취할 기회가 거의 없는 몽골인들은 차를 마시면서 염분을 보충하는 것이다. 차를 끓일 때는 소금을 넣는 시기가 중요하다고 한다.소금이야말로 온갖 화학반응의 촉매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끓는 차안에서도 소금을 구성한 나트륨이 다른 화학물질과 쉽게 반응을 일으킨다.소금을 일찍 넣으면 차의맛과 색이 금방 달라진다고….따라서 소금은 가장 나중에 넣는 것이 좋다고 한다.

소금의 뛰어난 촉매역할은 서양의 연금술사들에게 크게 주목받기도 했다.알렉산더 대왕시대(기원전 4세기)에 이집트에서도 성행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연금술은 중세시대 유럽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유럽의 연금술은 무어족의 화학지식이 중세 스콜라철학의 논리적 사고와 접목되면서 15세기 초부터 약 300년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연금술사들은 모든 물질이 수은·유황·소금의 세 가지 원소로 구성된다고 믿었다. 연금술사들은 여러 가지 물질을 섞고,끓이고,달구고,분리하는 과정을 거쳐 쇠붙이를 금으로 바꾸는 힘을 갖고 ‘현자(賢者)의 돌’을 얻고자 했다.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자의 돌을 얻은 연금술사는 없었지만 현대화학의 기틀을 세운 업적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부정을 막는 상징

동양에서는 부패를 막는 소금의 속성에 주목,부정을 맑게 하는 힘의 상징으로 인식했다.무속에서도 소금물은 잿물,쑥물,황토수와 함께 부정을 가시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굿당을 정화할 때 소금물을 뿌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민간에서는 초상집에 다녀온 사람에게 소금을 뿌려 부정한 것을 방지하고자 했다.중국이나 일본,몽골에서는 소금에 악귀를 쫓는 신비한 힘이 깃들여 있다고 믿었다. 일본의 야마구치 지방에서는 여자가 성폭행 당했을 때 음부에 소금나무로 일컬어지는 백교목(白膠木) 열매를 갈아붙이면 다시 깨끗해 진다고 여겼다.서양에서도 소금은 악령,악마,마녀를 쫓는데 쓰인다. 예수는 가짜 신앙이 판칠 때 사도들에게 스스로 소금이 되라고 가르쳤다.성서에서도 결코 깨뜨리지 않는 약속을 ‘소금의 약속’이라고 했다. 소금은 인도의 역사를 바꾸는데 촉매역할을 했다.간디는 소금에 대한 세금이 가난한 사람에게 많은 부담을 준다는 것을 알고 이른바 ‘소금행진’을 했다. 간디는 자발적으로 지원한 사람들과 함께 천천히 그 나라를 가로질러 행진했고,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반란의 불씨가 터졌다.소금의 위대한 변신이었던 것이다

매운 김치맛의 원형은 짠맛이다. 육식을 주로 하는 문화권에선 소금을 많이 먹지 않아도 된다. 동물의 살과 피를 먹는 일 자체가 소금 섭취와 연결된다. 소금을 구하기 어려웠던 원시 문화에서 짐승의 피를 신성시한 것은 그 피가 곧 소금물이자 생명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육식을 주로 하는 서양인들은 한국인의 절반 이하 수준의 소금만 섭취한다.

반면 곡물과 채소를 주로 먹으면, 소금을 따로 먹어야 한다. 모든 동물은 소금 없이 신진대사를 유지할 수 없다. 사람도 살아남기 위해 소금이 필요하다. 불교를 숭상한 고려시대에는 임금이 직접 나서 육식을 말렸다. 조선시대에는 먹고 싶어도 먹을 고기가 부족했다. 이 때문에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 이후 고려·조선을 거치는 동안 줄기차게 (식초가 아닌) 소금에 절인 ‘짠맛의 채소 절임’ 식품이 발전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부터 ‘짠맛 채소 절임’을 먹는 일에 문제가 생겼다. 소금이 귀해진 것이다. 소금 광산 등이 따로 없던 조선시대에는 서해 일부에서만 천일염을 생산했다. 산출은 언제나 제한적이었고, 유통은 왕실 일족이 장악했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을 겪은 조선 후기 민중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특히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는 거의 매년 기근이 들었다. 당시 구황식품의 대표 격은 소금이었다. 굶주리는 백성이 생기면 나라에서 소금을 내렸다. 소금이 있으면 들판의 억센 초목을 절여 먹을 수 있었다. <중종실록>을 보면, 함경도의 기근을 조사한 관리의 보고서가 나와 있다. “소금이 가장 긴요하다. 곡물이 없더라도 채소에 섞어 먹으면 명을 이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심해지고 잦아지는 기근을 소금의 물량이 따라가지 못했다. 게다가 조선 후기, 양반의 수가 늘고 상민까지 유교식 제례를 치르면서 새로운 소금 수요가 생겼다. 제수용품의 으뜸인 생선의 수요와 함께 생선을 절일 소금의 수요도 높아졌다. 부자는 부자대로, 빈자는 빈자대로 소금 쓸 일이 많아진 것이다.

빈자는 짠지를, 부자는 양념 김치를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18~19세기 사회·문화의 혼란이 매운 음식맛을 요구하게 했다”고 설명한다. 주 교수는 고추의 캡사이신이 소금 대체효과를 낸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임진왜란 때, 일본을 거쳐 들어온 고추는 원래 독성물질로 여겼었다. 1590년대에 한반도에 전래한 고추는 무려 200년 동안 식품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다 기근과 격변이 집중된 19세기 초반부터 김치를 담글 때 고추를 쓰게 됐다. 19세기 중반이 되면, 유학자들이 지은 문헌에 고추·마늘·파·젓갈 등의 양념을 김치에 많이 쓰라는 적극적인 권유도 등장한다. 소금에만 절이지 말고, 다른 ‘대체물’을 찾으라는 이야기다. 이 방식은 가난한 조선 민중에게 먹혔다. 고추·마늘·파 등 소금의 대체물인 양념 채소는 원래부터 가난한 자의 음식이었다. 서양에선 마늘을 “가난한 자의 강장제”라 불렀다. 5천 년 전 지어진 피라미드 벽화를 보면, 당시 노예들이 먹은 마늘의 양을 기록해뒀다. 마늘을 먹여 일을 시킨 것이다. 보리밥과 팟국을 가리키는 ‘총탕맥반’이란 동양의 고어가 있다. 가난한 상차림이라는 뜻인데, 파 역시 빈자의 음식으로 통했던 것이다. 문화인류학자 아말 나지는 “잘사는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맵게 먹는다. 농부와 노동자는 매운 고추 덕에 매일 먹는 밥의 단조로움을 이겨낸다”고 말했다. 고기를 주식으로 삼는 부자들은 매운 고추를 즐겨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금의 대체물로 등장한 고추·마늘·파 등 김치 양념은 주린 배로 일해야 하는 서민을 위한 채소였다. 가난한 이의 몸을 덥혀 겨울을 견디게 했다.

매운 김치가 서민들의 음식으로 자리잡을 무렵,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배추다. 원래 김치의 주재료는 오이·무·가지·순무 등이었다. 과거에도 야생 배추가 있었으나, 그 생김이 무와 다르지 않았다. 속이 꽉 찬 배추는 1850년대 한반도에 들어왔다. 중국 산둥 지역의 배추를 들여와 오늘의 서울 왕십리 지역에서 키워 ‘조선 배추’를 육종했다. 누가 어떻게 그 작업을 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인 20세기 초반까지도 배추 재배 면적은 충분치 않았다. 통배추는 완전히 새로운 상품이었다. 오늘날 먹는 통배추 김치의 제조법을 처음으로 본격 소개한 문헌은 1917년에 출간된 <조선요리제법>이다. 빈부격차가 더욱 벌어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배추김치는 말 그대로 ‘귀족의 반찬’이 됐다. 1940년, 경성제대 의학부 학생들이 서울에 사는 103가구의 식단을 상·중·하 계층으로 나눠 조사한 적이 있다. 계층을 막론하고 모두 김치를 반찬으로 먹었다. 다만, 하층 서민들은 양념 없이 소금물에 절인 김치를 먹었다. 빈자는 짠지를 먹고, 부자는 매운 양념 김치를 먹었던 것이다. 해방 이후, 경제 상황이 다소 나아지면서, 상류 문화가 중하층에 스며들었다. 통배추김치를 너도나도 먹게 된 것이다. 잡곡밥과 배추김치로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1960~70년대 한국 서민들의 일상이 됐다. 부자 김치가 서민 김치로 ‘진화’한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언론은 매년 김장철 기사를 썼다. 1980년 10월21일 <조선일보>를 보면, 5인 가족의 김장김치 양으로 배추 25~30포기가 적당하다고 추천했다.

금보다 귀중했던 분자, 소금

소금(염화나트륨, NaCl)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소금은 아주 귀하고 꽃 필요하고 매우 중요해서 세계 무역뿐만 아니라 경제 제제, 독점, 전쟁, 도시의 성장, 사회ᆞ정치 제도, 산업 발달 인구의 이동 등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오늘날 소금은 수수께끼 같은 물질이다. 소금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하지만(소금이 없으면 죽는다.), 소금을 많이 섭취해도 죽을 수 있으니 소금 섭취량에 주의 하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소금은 싸다(우리는 소금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소비한다.). 하지만 유사 이전은 물론 대부분의 역사에서 소금은 매우 귀하고 비싼 상품이었다. 19세기 초 사람들이 오늘날 겨울만 되면 얼음을 녹이기 위해 소금을 뿌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도저히 믿지 못할 것이다. 화학자들의 노력으로 가격이 떨어진 분자들이 많다. 가격이 떨어진 이유로는 실험실과 공장에서 화합물을 합성할 수 있게 된 경우(아스코르브산, 고무, 인디고, 페니실린)도 있고 우리가 만든 인공대체 물질이 천연 물질의 특성과 매우 유사해서 천연 물질이 덜 중요하게 된 경우(직물, 플라스틱, 아닐린 염료)도 있다. 식품 보존을 위해 새로운 화학물질(냉각제)을 쓸 수 있게 된 덕분에 우리는 더 이상 향신료 분자들을 생산량을 증대시켜 포도당, 셀룰로오스, 니코틴, 카페인, 올레산 같은 분자들의 공급을 증가시켰다. 하지만 이 모든 화합물 가운데 소금만큼 그 생산량이 급격하게 늘어남과 동시에 가격이 급격하게 하락한 물질은 없을 것이다.

하얀 금, 소금

인류는 역사 기간 내내 소금을 채취하거나 생산해 왔다. 소금을 생산하는 주요 방법 세가지(바닷물 증발, 염천가열, 암염체굴)는 고대부터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바닷물을 태양열로 증발시키는 방법은 열대 해안 지역에서 소금(천일염)을 생산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다. 이 방법은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생산원가가 싸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바닷물을 태양열로 증발시켰던 것은 아니다. 원래는 불붙은 석탄위에 뿌려 불이 꺼지면 석탄위의 소금을 긁어냈다. 해안가 바위로 이뤄진 호수가 있는 경우에는 호수의 암벽에서 많은 소금을 긁어낼 수 있었다. 조수가 있는 곳에서는 인공적으로 만든 얕은 호수, 즉 ‘염전(鹽田)’ 을 바닷물로 채워 훨씬 더 많은 소금을 생산할 수 있었다.

바닷물에서 얻은 소금은 염천(鹽泉: 농도가 매우 높은 소금물로 이뤄진 지하수가 솟아오르는 곳, 종종 바닷물 농도의 10배가 넘는 경우도 있다.)에서 얻은 소금이나 암염보다 품질이 많이 떨어진다. 바닷물의 염류 농도는 약 3.5퍼센트지만 실제로는 염류의 3분의 2만 염화나트륨이고 3분의 1은 염화마그네슘과 염화칼슘의 혼합물이다. 염화마그네슘과 염화칼슘은 염화나트륨보다 물에 더 잘녹고 함유량이 적기 때문에 바닷물을 결정화 하면 NaCl이 가장먼저 분리된다. 이때 나머지 용액을 버리면 대부분의 MgCl2와 CaCl2는 제거된다. 하지만 이렇게 결정할 때 일부 MgCl2와 CaCl2가 섞여 들어오기 때문에 바닷물로 만든 소금은 쓴맛이 난다. 염화마그네슘과 염화칼슘을 함유한 소금은 덩어리를 이루며 굳는다.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얻는 방법은 덥고 건조한 지방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소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염천수를 끓이는 데 쓸 나무가 염천 주위에 충분하다면).소금 생산을 위해 나무 수요가 늘어나자 유럽 곳곳의 삼림이 남벌 되었다. 바닷소금인 천일염과 달리 염천염은 식품 보존 효과를 떨어뜨리는 염화마그네슘과 염화칼슘이 없기 때문에 천일염보다 선호되고 가격도 더 비쌌다.

암염(巖鹽, 지하에서 광물 형태로 발견되는 소금)은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암염은 대양이나 바다가 수세기 동안 말라 형성된 것으로 특히 지표면 근처의 암염은 수세기전부터 채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금은 워낙 귀한 나머지 이보다 훨씬 이른 철기 시대에 이미 유럽인들은 암염을 캐기 위해 깊은 수갱과 수킬로미터에 달하는 터널을 뚫었고 그 당시 암염을 채취한 자리는 오늘날 거대한 동굴로 남았다. 이들 소금 광산 주변에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마을과 도시가 형성되었고 이런 마을과 도시는 소금경제로 부를 축적했다. 소금제조나 소금채취는 중세 시대 내내 유럽 곳곳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다. 소금은 너무나 귀해 ”하얀황금”으로 불렸다. 수세기 동안 향료 무역의 중심지였던 베네치아는 초기 석호에서 추출한 소금으로 지역경제를 발전 시켰다. 잘츠부르크, 할레, 할수타트, 할라인, 라살, 모젤 같은 유럽의 수많은 강이름, 마을이름, 도시이름은 소금채취나 소금제조에 관련된 것들이다.(hals는 소금을 뜻하는 그리스어이고 Sal은 소금을 뜻하는 단어이다.). 터키 해안 지방에는 투즐라(Tuzla)나 투즐라 비슷한 이름을 지닌 마을이 많다. 투즐라는 소금을 뜻하는 터키어 투즈에서 온 이름이다. 투즐라라는 마을 이름은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의 소금 생산 지역에서도 볼 수 있다.

과거 소금 채취나 소금 제조로 돈을 벌어들인 마을은 오늘날 관광 산업을 통해 부를 창출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잘츠브르크에 있는 소금광산들은 오늘날 주요 관광 자원이 되었다. 폴란드의 크라코프 인근의 비엘리치카는 소금 채굴로 만들어진 거대한 동굴에 댄스홀, 예배당, 소금으로 된 성스러운 조각상, 지하 호수등을 만들어 놓고 수천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염전, 볼리비아의 살라데 우유니 근처에는 관광객들이 묵을 수 있는, 100퍼센트 소금으로 지은 호텔이 있다.

나폴레옹과 소금

고대 문명의 기록을 보면 소금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교역 상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소금을 얻고자 교역을 했다(소금은 미라를 만들 때 꼭 필요한 물질이었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425년, 리비아의 사막에 있는 소금 광산을 방문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에티오피아 다나킬 지역의 거대한 소금평원에서 채취된 소금은 로마와 아랍과 인도까지 수출되었다. 로마 인들은 테베레강 어귀 오스티아 해변에 거대한 제염소를 지었고 기원전 600년경 소금길이라는 뜻의 비아 살라리아 도로를 건설해 오스티아 해변에서 로마까지 소금을 수송했다. 지금도 로마의 주요 간선 도로 중에는 비아 살라리아라는 도로가 있다. 로마인들은 오스티아 제염소에 땔감을 공급하기 위해 삼림을 남벌했고 비가 오자 산림남벌로 인한 토양 침식으로 테베레 강의 퇴적물이 쌓여 강어귀 삼각주의 확장이 가속화되었다. 이렇게 수세기가 흐르자 오스티아 제염소는 해안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다시 제염소를 해안선으로 원위치 시켜야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인류의 산업 활동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최초의 사례 가운데 하나로 인용되고는 한다.

소금은 세계 여러 삼각 무역들 가운데 하나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동시에 이슬람 문명을 아프리카 서해안으로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극심하게 건조하고 황폐한 사하라 사막은 수세기 동안 지중해에 면한 북아프리카와 아프리카 중남부 국가사이를 가로막던 장벽이었다. 사하라 사막에는 방대한 양의 소금이 묻혀 있었지만 사하라 사막 남쪽에 있는 국가들은 소금이 매우 귀했다. 8세기, 북아프리카 베르베르 인 상인들은 곡물, 말린과일, 직물, 기구등을 주고 사하라 사막(오늘날의 말리아 모리타니아)의 거대한 소금 광산에서 캐낸 암염판을 받는 물물교역을 시작했다. 말리아 모리타니아의 소금광산 지역 주변에 형성되고 발전한 테그하자(소금도시라는 뜻이다.) 같은 도시들은 소금이 너무 풍부한 나머지 도시 전체가 소금으로 지어졌다. 베르베르 상인들은 한 번에 수천 마리의 낙타에 암염판을 싣고 사하라 사막남쪽 끝에 위치한 팀북투에 도착했다. 니제르 강 지류에 접한 작은 야영지였던 팀북투는 14세기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 사하라에서 나온 소금과 서아프리카에서 나온 황금이 그곳에서 교환되었다. 베르베르인 상인들이 소개한 이슬람 문명도 팀북투를 기점으로 퍼져 나갔다. 16세기, 팀북투의 영향력 있는 이슬람 대학교, 거대한 모스크와 탑, 장엄한 이슬람 궁전 등이 들어서면서 팀북투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베르베르인 대상들은 팀북투에서 황금, 노예, 상아 등을 싣고 지중해에 면한 모로코로 돌아오거나 유럽으로 진출했다. 수세기 동안 수많은 황금이 사하랄 사막의 황금 및 소금 교역로를 통해 유럽으로 건너갔다. 유럽에서 소금 수요가 늘어나면서 사하라의 소금도 유럽으로 건너갔다. 바다에서 갓 잡은 생선은 빨리 저장 하지 않으면 쉽게 상한다. 해상에서 훈제나 건조는 거의 불가능 했지만 염장은 가능했다. 발트해와 북해에 풍부한 청어, 대구 등은 14세기 이래 지금 까지도 해상과 인근 항구에서 절여져 유럽전역으로 팔려 나가고 있다.(그 수는 헤아릴 수 조차 없다.)14~15세기 발트 해 연안 국가들 간의 교역은 한자동맹이 통제했다.

북해 무역은 원래 네덜란드와 영국 동해안 중심으로 이루어지다가, 소금 덕분에 갓 잡은 생선을 신선하게 보존할 수 있게 되면서 어선들은 훨씬 더 먼 바다까지 조업을 나갈 수 있게 되었다.15세기 말 ,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의 바스크 지역, 포르투갈 등 유럽 각국의 어선들은 뉴 펀들랜드 근해의 그랜드 뱅크까지 정기적인 조업을 나갔다. 이로부터 4세기 동안, 북대서양 그랜드 뱅크에서는 엄청난 양의 대구들이 잡혀 씻겨지고 염장되어 항구로 수송되었다. 대구는무한정 공급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감스럽게도,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1990년대, 그랜드뱅크의 대구는 멸종 위기에 직면했다. 1992년, 캐나다가 대구잡이에 대한 모라토리엄(moratorium: 일시중지)를 발의 했고 대부분의 전통적인 어업 국가들은 모라토리엄을 준수하였다.

소금을 원하는 수요가 워낙 높다 보니 소금은 종종 교역 대상이라기보다 전리품으로 여겨졌다. 고대, 흑해 주변의 정착촌들은 귀한 소금을 확보하려는 침략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중세시대, 베네치아는 소중한 소금 독점권을 주위의 연안도시들이 위협하자 그들과 전쟁을 벌였다. 적군에게 공급되는 소금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것은 훌륭한 병법으로 여겨진 지 오래이다. 미국 독립혁명 기간의 소금 부족은 유럽과 서인도에서 미국으로 들어오는 소금을 영국이 막은 데서 비롯되었다. 영국이 식민지 주민을 강하게 통제하고자 뉴저지 해안 제염소를 폐쇄하고 수입되는 소금에 높은 가격을 매겼던 것이다. 미국 남북 전쟁 기간 중이던 1864년, 국군이 버지니아 주 솔트빌을 점령한 사건은 그 지역 주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남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12년 나폴레옹 군대의 모스크바 퇴각 당시, 나폴레옹 병사들은 소금 섭취 부족으로 전쟁에서 입은 상처가 아물지 못해 수천명이 사망했을 거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아스코르브산 결핍(과 이어지는 괴혈병의 발병)또한 소금 결핍만큼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주석과 리세르그산 유도체까지 겹쳐 나폴레옹의 꿈은 끝내 좌절되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마하트마 간디와 소금

소금에 대한 사람들의 수요와 소금만이 갖는 독특한 제조 방식 때문에 역사속에서 소금만큼권력과 독점과 과세에 적합한 것은 없었다. 정부 입장에서 보면, 소금에 부과된 세금, 즉 염세(鹽裞)는 믿을만한 세원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소금을 원하는 반면 소금은 대체할 만한 마땅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누구라도 세금을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금은 출처를 숨길 수가 없었다(소금은 숨어서 만들기 어렵고 한번 만들면 대량으로 생산되기 때문에 부피가 커 감추기 어렵다. 또한 소금 수송은 쉽게 규제할 수있었고, 과세할 수 있었다.). 기원전 2000년, 중국 황제 하우(하나라의 시조인 우임금)가 황실에서 쓰는 소금은 산둥지방의 소금으로 하라는 명령을 내린 이래, 소금은 중극에서 세금, 통행세, 관세의 형태로 정부의 수입원이 되었다. 성서 시대에도 소금은 양념으로 쓰인 것으로 보이며, 중국처럼 세금이 부과되었고 특히 대상로를 따라 나 있는 수많은 숙박 장소에 들를 때마다 추가적으로 관세가 부과되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가 사망하지 시리아와 이집트 지역의 관리들은 그리스 정부가 받아 오던 염세를 자국민들에게 계속해서 징수했다.

이런 염세 징수의 역사를 거치면서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대부분의 세리들은 세율을 올리고 특별세를 추가하고 면세품을 파는 식으로 부를 축적했다. 로마도 예외가 아니었다. 테베레 강 유역의 오스티아 제염소는 처음부터 로마 제국이 차지했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소금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호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소금에 세금을 부과했을 때 벌어들일 수 있는 수입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고 결국 로마의 세리들은 로마 시민들에게 염세를 부과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팽창으로 소금 독점은 점점 심해졌고 덩달아 염세도 올라갔다. 로마의 세리들은 각 주 총독의 감독만 받을 뿐 특별한 규제 없이 독립적으로 아무 곳에나 마음대로 세금을 부과할 수 있었다. 제염소와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은 매우 비싼 가격을 주고 소금을 구입했는데 이는 운송비 때문이기도 했지만 각 운송 단계마다 부과된 관세, 세금, 부과금 때문이기도 했다.

중세 시대, 유럽은 소금 광산이나 해안가의 제염소에서 소금을 실어 나르는 선박이나 수레에 통행세의 형태로 염세를 부과했다. 염세는 프랑스가 가장 심했다. 가벨(gabelle)로 불린 프랑스의 염세는 악랄하기로 유명했고 압제적이었으며, 국민들로 하여금 극도의 조세 저항을 불러 일으켯다. 가벨의 기원은 기록상 다양하다. 1259년 프로방스지방에 있던 앙주 공국의 샤를이 가벨을 부과했다는 기록이 있고, 13세기 후반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해 밀, 포도주, 소금 같은 일용품에 보통세로서 가벨이 부과되기 시작했다는 기록도 있다. 어쨌든 15세기, 가벨은 프랑스의 주요 국세 가운데 하나이자 염세만을 의미하는 세금이 되었다.

그러나 가벨은 단순한 염세가 아니었다. 왕이 정한 가격대로 모든 남성, 여성, 8세 이상의 어린이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의무적으로 소금을 사야 하는 제도였다. 왕은 자기 마음대로 가벨의 세율과 할당량을 올릴 수 있었다. 원래 가벨의 의도는 모든 국민에게 공평과세를 부과 하는 것이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지역에 따른 차별 과세가 이루어 졌다. 대서양 연안 제염소로부터 소금을 공급받는 지역들은 그랑드 가벨(grande gabelle)이 부과되었고, 지중해 연안 제염소로부터 소금을 공급받는 지역들은 프티가벨이 부과되었는데, 그랑드 가벨의 세율은 비티가벨의 2배였다.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조약을 맺은 지역은 가벨이 면제되거나 세금의 일부만을 냈다. 브르타뉴 지방은 가벨이 면제되기도 했고 노르망디 지방은 가벨의 세율이 아주 낮게 책정되기도 해다. 가벨이 가장 심했을 때 그랑드 가벨 과세 지역의 경우 소금 원가의 20배가 넘는 금액이 책정되었다.

염세 징수관들(국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둬갔으므로 가벨농부라고 불렸다.)은 의무 소비량을 지켰는지 확인하기 위해 1인당 소금 사용량을 점검했다. 소금을 밀수하다 적발되면 심한 형벌에 처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소금 밀수가 성행했다(소금을 밀수하다 적발되면 대개 갤리 선의 노예로 보내졌다.). 가혹하고 불공평한 가벨로 인해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사람은 농부들과 도시의 가난한 소시민들이었다. 부담스러운 세금을 줄여 달라고 왕에게 탄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역사가들은 가벨을 프랑스혁명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보고있다. 1790년, 혁명이 최고조에 달하자 가벨은 폐지되었고 30명이 넘는 가벨 징수관들은 처형되었다. 하지만 가벨 폐지는 오래가지 못했다. 1805년, 나폴레옹은 다시 가벨 제도를 도입했다(나폴레옹은 이탈리아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고 강변했다.). 가벨은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에야 마침내 폐지되었다.

가벨 같은 세금이 국민들의 짐이 되었던 것은 비단 프랑스만이 아니었다. 스코틀랜드 연안, 특히 포스만 주변은 염세가 부과되기 수세기 전부터 소금을 생산하던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기온도 낮고 습도가 높아 태양열에 의한 증발로는 소금을 생산할 수 없어, 거대한 용기에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생산했다(처음에는 땔감으로 나무를 사용했지만 나중에는 석탄을 사용했다.). 1700년대, 스코틀랜드에는 석탄을 때는 제염소가 150곳 이상 들어섰고 이탄을 때는 제염소도 많이 생겼다. 스코틀랜드 인들에게 소금 산업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1707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통합할 때 맺은 조약 제8조에서는 스코틀랜드에게 부과되는 7년간의 염세를 면제하고 그 이후의 염세에 대해서도 영구히 낮은 세율을 부과한다는 것을 보장할 정도였다. 잉글랜드의 소금 산업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염세의 면제나 경감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1825년, 영국은 염세를 폐지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수세기 동안 징수한 염세에 노동자 계급이 분노했기 때문이 아니라 소금의 역할이 바뀌었다는 걸 영국 정부가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산업 혁명은 기계혁명(직기의 씨실 넣는 장치, 방적기, 수력방적기, 증기기관, 동력직기 등의 개발)으로 여겨졌지만 한편으론 화학 혁명이기도 했다. 섬유 산업, 염색, 비누 제조, 유리 제조, 요업, 철강 산업, 무두질, 제지업, 양조 산업 등에 대한 수요 때문에 화학물질을 대량 생산할 필요성이 생겼다. 소금은 방부제나 조미료로서의 중요성보다 화학 물질 제조 공정의 시작 물질로서의 중요성이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에 각종 제조 업자들과 공장 소유주들은 염세를 철회하라는 압력을 정부에 가했다. 소금이 영국 산업 번영의 핵심 원료 물질이라는 인식을 하자 비로소 가난한 사람들이 수세기 동안 그토록 원했던 염세 폐지가 현실화 되었다.

영국은 본토의 염세는 폐지했지만 식민지의 염세는 폐지하지 않았다. 인도의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이 부과한 염세에 반대하기 시작하면서 염세는 인도에서 식민압제의 상징이 되었다. 인도의 염세는 세금 이상의 것이었다. 이미 지난 수세기 동안 많은 정복자들이 터득한 바와 같이 소금 공급의 통제는 정치적ᆞ경제적 통제를 의미했다. 영국령 인도의 정부 규정에 따라 정부의 인허가 없는 소금 생산이나 판매는 범법 행위로 규정되었다. 석호 주변에 자연 증발로 생성된 소금을 채취하는 것조차 불법이었다. 소금은(가끔 영국에서 수입되기도 했는데)영국이 정한 가격으로 영국 정부가 지정한 중개상을 통해서만 구입해야 했다. 인도의 식단은 주로 채식으로 이루어져있고 연중 날씨가 무더워 땀으로 인한 채내 소금 손실이 많기 때문에, 인도인에게서 음식을 통한 소금 섭취는 매우 중요했다. 식민 통치를 받게 되면서 인도인들은 거의 공짜로 채취하거나 생산할 수 있었던 소금을 돈 주고 사먹을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영국이 자국 시민들에게 부과한 염세를 폐지한 지 거의 1세기가 지난 1923년, 인도의 염세는 오히려 2배나 올라있었다. 1930년 3월 간디와 간디를 지지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인도 북서쪽의 조그마한 해안 마을 단디에 도착하는 380킬로미터에 이르는 행진을 시작했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간디의 순례 여행에 동참했고 이들은 단디에 도착하자 해변가 바위의 소금을 긁어 모으기도 하고 바닷물을 끓이기도 해서 여기서 나온 소금을 팔기 시작했다. 이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 운동에 추가로 동참했다. 여기서 나온 소금은 인도 전역의 마을과 도시에서 판매되었지만 경찰에 의해 번번이 몰수당했다. 경찰은 간디의 지지자들을 잔인하게 처벌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투옥되었다. 그러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에 동참해 계속해서 소금을 만들었다.

파업, 불매운동, 시위가 잇달았다. 마침내 이듬해3월 가혹한 염세법은 개정되었다. 지역 주민들이 자기 마을에서 소금을 채취하거나 만드는 것이 허용되었고 같은 마을 내에서 다른 사람에게 파는 것도 허용되었다. 상업적으로 판매되는 소금에는 여전히 세금이 붙어있었지만 영국 정부의 소금 독점은 무너졌다. 간디의 비폭력 시민 불복종이라는 숭고한 이상이 결실을 맺고 영국의 주권이 인도를 떠나야 할 날도 얼마 남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몸은 지난 수백만년 동안 하루 1g 정도의 소금의 섭취에 익숙해진 몸이다. 육식에서는 자연스럽게 소금기를 보충할수 있었지만 농사로 곡물위주의 식생활을 가지면서 소금이 부족하여지자 온갖 소금의 상품화가 이루어지고 5~10g의 섭취의 시대가 되었다. 전시대를 통하여 15세기 스웨덴에서 가장 소금섭취가 많았다고 한다. 계산에 따르면 당시 1인당 소금 섭취량이 무려 100g이라고 한다. 가장 큰 원인이 소금에 절인 생선을 통해서라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소금이 가장 많이 소비되는 방부의 목적이다. 냉장고의 도입이 소금 섭취량을 낮추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하였다. 일반적으로 소금을 5 ~ 10g 정도 섭취한다. 통상 미네랄이 필요량의 3~5배를 넘지면 독성이 나타난다. 하지만 소금에 관해서는 다른 미네랄에 비해 상당히 관대한 셈이다.

한국 천일염의 역사

인류는 음식 보존뿐만 아니라 음식의 간을 맞추는 데 소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소금에서 해리된 이온은 우리 몸에서 세포와 세포를 둘러싼 체액 사한국인이 천일염을 먹기 전까지, 한반도 소금의 대종은 자염(煮鹽) 또는 화염(火鹽)이었다. 자염은 구웠다는 의미고, 화염은 불을 때서 얻었다는 얘기다. ‘화렴’이라는 곁말도 있다. 갯벌 흙을 일구어 만든다는 점에서는 토염(土鹽)이라고도 했다. “달인 소금” “졸인 소금”이라는 말도 있다. 일본에서는 달일 전(煎), 볶을 오(熬)를 써 전오염(煎熬鹽)이라 했다. 어떤 말이든 사람의 힘으로 농도 짙은 짠물을 모으고, 그 물에 불을 때 소금 결정을 받는 과정이 깃든 말이다.

한국 천일염 생산은 산업혁명의 막차를 탄 일본제국이 기획했다. 화학공업에 막대한 소금이 들기 때문이다. 일제는 1895년 대만을 집어삼키면서 대만을 통해 천일염 제법을 배운다. 1905년 한국(대한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고서는 한반도에 천일염전을 만들 구상을 시작했다. 일제의 기획과 한국의 재무 부서인 탁지부의 호응이 동력이 되어 1907년 인천 주안과 부산 용호동에서 천일염 시험이 이루어졌다. 1908년에는 평안도 광량만으로 천일염전이 확대됐다. 1907년에서 1944년까지 일제가 한반도에 조성한 천일염전의 면적은 대략 6,090정보(1정보는 3,000평)에 이른다. 한국 천일염의 역사는 그 연대기가 아주 분명하다.

천일염 맹신자들은 소금의 역사가 노동의 역사라는 사실에 절망적일 정도로 관심이 없다. 100년 전 그때, 막 생긴 천일염전에서 염부 노릇을 하려는 한국인은 없었다. 염부의 일이란, 당시 한국인이 보기에는 대대로 소금만 굽다 죽는 불쌍한 사람들의 일, 노비의 일, 군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맡은 수군의 일이었다. 일하려는 사람이 없다? 오늘날과 똑같다. 처음에는 산동에서 수천 명의 중국인 노동자를 수입해 썼다. 이들이 기반을 닦은 뒤에야 한국인들이 천일염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당시 대형 염전의 소유자였던 한국 탁지부는 임금도 제대로 주지 못했다. 이주 노동자들은 폭발했다.

1910년 4월 광량만염전에서 일하던 중국 노동자는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쟁의를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6월에는 한국인과 중국인이 편을 갈라 투석전까지 벌였다. 결국 1910년 6월 20일 854명의 노동자들이 배를 타고 다시 고향 산동으로 돌아갔다. 이 가운데 극소수가 농업이민으로 정착한다. 김동인 소설 ‘감자’에 나오는 배추밭은 아마 산동 출신 염부의 후예가 가꾼 밭이었을 것이다.

그 쟁의의 세부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주모자 19인의 체포 소식만큼은 분명하게 남아 있다. 이주 노동자 854명이 “퉷, 일 안 해!” 하고 돌아가는 판인데, 당국은 쟁의의 주모자만큼은 확실히 체포했다. 100년 전 염전의 노동이 이랬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천일염전은 조선인 노동자의 차지가 됐다. 농토 없는 농민, 광산의 일당보다 싼 일당이라도 받고 일하겠다는 사람들이 천일염전에 모여들었다.

자염 생산도 고달프긴 마찬가지였다. 소금을 굽자면 많은 연료가 필요하다. 하지만 국가는 연료를 지급하지 않고 소금을 굽게 했다. 연료 조달은 노동자에게 떠넘겼다. 소금 노동자들은 늘 연료가 아쉬웠다. 이들이 연료를 구하기 위해 남의 산에 들어갔다가 산주한테 곤욕을 당했다. 국유림에 들어갔다가는 고을 원님이 잡아 죽였다. 소금 노동자가 당한 곤경과 억울한 죽음은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 차고 넘친다. 싸구려 노동력을 얼마든지 쓸 수 있고, 연료도 들지 않는 천일염은 금세 자염을 밀어내고 한반도를 석권했다.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 정부 또한 산림 훼손을 막기 위해 자염 생산에 간섭했다. 정부는 1960년 ‘염업 임시조치법’을 공포하면서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자염 생산을 아예 끊어버렸다. 이후 소금을 둘러싼 한국인의 상상력은 뻔해졌다. 소금이란 바닷가 염전에서 나는 천일염으로 고정됐다.

유대인. 절임청어로 승부보다

- 유대인 이야기 http://m.blog.naver.com/aaaa4d/40203364122

스칸디나비아 근처 발트해에서 잡히던 청어가 14세기부터는 해류의 변화로 네덜란드 연안까지 밀려드는 이변이 일어났다. 청어는 겨울에는 바다 깊이 숨어버리지만 봄부터 가을까지는 수면으로 올라오고 연안의 산란지를 향해 수천 킬로미터를 헤엄쳐 온다. 그러다 1425년경부터는 어장의 중심이 아예 발트해로부터 북해로 이동하였다. 네덜란드인들은 너도 나도 청어 잡이에 나섰다. 그 결과 매년 여름이면 약 1만 톤의 청어가 잡혔다. 그 무렵 네덜란드는 총인구가 약 100만 명 정도였는데 고기잡이와 관련된 인구만 30만 명이었다. 거의 전 세대가 청어 잡이와 연관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청어 잡이는 전 국민의 목숨 줄이었다. 그 뒤 어장 쟁탈로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는 세 번이나 전쟁을 치렀다.

중세 유럽인들에게는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는 소금에 절인 생선과 돼지고기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소금이 귀해 대부분은 생선을 햇빛에 말려 저장했다 조금씩 아껴 먹었다. 이들에게 말린 청어와 말린 대구는 양식이자 화폐였다. 청어나 대구를 크기와 모양을 똑같이 해서 말린 후 각지를 돌아다니며 곡식, 옷, 도구 등 온갖 물건으로 바꿨다. 그래서 이를 돈고기 ‘STOCK FISH’라 불렀다.

조금 여유 있는 사람들은 청어를 때로는 와인에 담가 저장하기도 했고, 말렸다가 훈제도 했다. 그들은 겨우살이 준비로 가을에 겨울 음식을 준비했다. 주로 11~12세기에 시작된 생선염장은 청어, 고등어, 연어, 농어, 뱀장어, 대구 등을 절였다. 그 중에서도 청어와 고등어가 단백질 공급원으로 최고였다.

14세기 중엽 네덜란드 한 어민 빌렘 벤켈소어는 청어 내장을 단칼에 베어내 제거할 수 있는 생선처리용 칼을 개발했다. 그리고 이를 이용해 선상에서 한 칼에 청어의 배를 갈라 이리를 제외한 내장을 꺼내고 머리를 없앤 다음 바로 소금에 절여 통에 보관하는 염장법을 고안해 냈다. 바다에서 잡은 청어를 잡는 즉시 소금에 한번 절이고 육지에 돌아와서 한 번 더 절이는 거였다. 이렇게 하면 1년 넘게 보관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개선이었다. 보통 잡은 생선을 육지로 가지고 와서 내장을 따고 소금 절임을 시작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났다. 특히 신선도와 보관기간에서 많은 차이가 났으며 기존의 절임 방법으로는 조업기간이 길어질 수가 없어 포획량이 달랐다.

냉장고가 없는 당시에 소금에 절인 청어는 전 유럽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때 유럽 각 지역에서 온 상인 수 백 명이 매일 아침 소금에 절인 청어를 사 모아서 유럽 전역으로 보내며 돈을 벌었다. 이렇게 청어를 저장하고 수출하는 데에는 소금이 필수품이었다. 당시 필요한 소금 대부분은 독일이나 폴란드 암염광산에서 한자동맹 무역망을 통해 공급받아 왔다.

1492년 스페인에서 추방되어 지금의 벨기에 저지대와 네덜란드에 정착했던 유대인들에게 이 지역은 종교의 자유를 제외하고는 그리 풍요로운 곳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열악한 환경이었다. 주변 국가의 지형에 비해 움푹 파인 ‘저지대’ 지형 때문에 홍수가 빈번해 농업도 어려웠다. 그래서 수리시설로 만들어진 것이 풍차였고, 대부분 습지에서 생활하기 위해 나무신발을 신고 다녔다. 저지대와 네덜란드는 청어 잡이와 염료산업이 있기는 했으나 전반적으로 지하자원이나 특별한 생산물이 없는 빈국이었다. 이러한 척박한 환경 속에서 유대인들이 상업을 키워 나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 역사를 살펴보면 형극의 역사를 반드시 영광의 역사로 바꾸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즈니스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러한 네덜란드의 생태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유대인들은 더욱 중계무역에 주목했다.

그들이 살았던 스페인에서는 북부 바스크인들이 대구를 소금에 절여 먹었다. 이를 ‘바칼라오’라 불렀다. 당시 스페인 북부 해안에는 천일염 염전들이 있었다. 브뤼헤와 앤트워프의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청어를 절이는데 필요한 대량의 ‘소금’이었다. 그 무렵 네덜란드가 북쪽의 한자동맹으로부터 공급받는 암염은 비쌌다. 유대인들은 바로 이점에 착안했다.

그들은 먼저 한자동맹으로부터 공급받는 암염 대신 이베리아 반도의 천일염을 수입했다. 천일염이 암염보다 값쌀 뿐 아니라 품질이 좋았다. 이로써 유대인들은 청어절임 소금을 암염에서 천일염으로 대체하였다.

* 유대인, 최초의 천일염 ‘정제소금’으로 고객을 사로잡다

(정제소금)

유대인들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갔다. 천일염을 다시 한 번 ‘정제’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천일염은 암염보다 순도도 높고 깨끗했다. 그런데도 이를 다시 한 번 더 정제하여 더욱 고운 소금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당시 소비자는 소금의 순도, 모양, 때깔 등 소금의 질에 민감했는데 특히 양질의 음식에 쓰일 소금에는 더 그랬다. 유대인들이 이러한 고객의 요구에 맞춘 것이다. 이 요구에 부응해 역사상 처음으로 거친 소금을 소비자가 원하는 질대로 만드는 소금 정제산업이 유대인에 의해 최초로 발달했다. 유대인들은 대서양 연안 천일염으로 결정이 더 작고 염도가 높은 소금을 만들기 위해 이를 다시 끓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증발시켜 순도 높고 고운 결정을 만들었다. 유대인은 고대로부터 이렇게 고객을 만족시켜 돈 버는 법을 알고 있었다.

16세기 중엽에는 총 4백 개의 대서양 연안 소금정제소에서 4만 톤의 소금을 생산했다. 이는 당시 베네룩스 3국 소금 필요량의 절반에 해당했다. 그럼에도 이 정제소금이 오스트리아나 독일에서 육로로 오는 암염보다 쌌다. 한 마디로 이베리아 반도의 정제 천일염은 대단한 가격 경쟁력과 품질 경쟁력 모두를 갖추고 있었다. 이로써 발트해 지역이 북해를 제치고 소금 중개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 유대인의 소금교역, 한자동맹을 역사 속에 파묻다

경쟁에서 밀린 한자동맹 도시들의 북해 주도권은 여기서 끝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만큼 소금이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채굴하기도 어렵고 운반도 힘든 암염 대신 유대인들은 양질의 바다소금을 정제하여 대량으로 들여와 한자동맹과의 무역전쟁에서 이긴 것이다. 소금이 경제권역 간의 주도권을 바꾼 것이다.

당시 한자동맹이 망한 이유는 또 있었다. 그들은 유대 상인들이 발행하는 환어음을 거부하였다. 현지 화폐로만 상품을 매매하였다. 그리고 차액은 현찰을 요구하였다. 그러니 당시 북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상권을 쥐고 있었던 유대 상인과는 상업이 연계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소금의 독점적 공급이 깨지고 판매가 줄면서 금융이 꽉 막힌 그들에게 유동성이 줄어들자 급격히 쇠퇴한 것이다.

청어를 절이고 남는 천일염과 정제소금은 인근국들에 싼값에 되팔아 소금 유통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로써 유대인은 소금의 품질은 높이고 가격은 암염에 비해 낮추어 생산지-유통-소비지 일체를 지배하는 독과점체제를 이루었다. 유대인들은 유통시킬 국내 자원이 부족하자 이렇게 경쟁력 있는 원자재나 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여 재수출하는 중계무역을 키워 나갔다. 네덜란드의 척박한 환경이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던 셈이다.

* 네덜란드의 부, 청어로부터 시작되다

유대인들은 염장 대구가 영국과 프랑스 해군과 상선의 필수품이 되었듯이 네덜란드 해군과 상선 모두에 소금에 절인 청어를 공급했다. 이로써 안정적인 공급처를 확보했다. 그리고 규모의 경제를 살려 절임청어를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 전 유럽에 판매하였다. 게다가 나중에 네덜란드의 한 어부가 소금 대신 바닷물을 졸여서 농축한 간수에 청어를 저장하면 더 오래, 더 신선하게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청어 처리에도 일대 혁신을 가져 왔다. 바로 ‘분업화’를 도입한 것이다. 고기 잡는 사람, 내장 발라내는 사람, 간수에 절여 통에 넣는 사람 등으로 나누어 작업을 진행했다. 숙련공들은 1시간에 약 2천 마리의 청어내장을 발라냈다. 이로써 절임 청어의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증가했다. 그러자 청어의 포획부터 시작하여 처리와 가공 그리고 수출은 기업화되기 시작했다. 청어절임이 본격적인 산업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후 유대인들은 네덜란드에서 오늘날의 수협 격인 “어업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회는 의회로부터 법적인 권리를 부여받아 체계적인 청어산업을 관리 감독했다. 위원회는 품질관리를 위해 저장용 통의 재질과 소금의 종류, 그물코의 크기를 정했다. 그리고 가공 상품의 중량, 포장 규격 등 엄격한 품질기준을 만들어 네덜란드산 청어가 뛰어난 품질을 지속적으로 지킬 수 있도록 관리했다. 그리고 어획시기를 한정해 청어산업의 장기적인 포석과 더불어 공급을 조절하여 청어 산업의 고부가가치화를 이끌었다. 이로써 유럽시장에서 다른 나라에 견주어 우수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관 공정체계의 완성과 유통의 장악 그리고 공급의 조절은 원래 유대인들의 장기였다.

게다가 1596년 네덜란드 항해가 빌렘바렌츠가 북극해의 스발바르제도를 발견했다. 당시 포를 이용한 고래잡이 기술을 발명한 네덜란드인들은 그곳을 장악했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고래잡이 분야에서도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어 대량의 고래기름과 고래수염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고래기름은 오랫동안 밤거리 가로등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게다가 고래 고기는 찬 음식으로 분류되어 육식이 금지된 금식일에도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생선으로 오랜 기간 서구인의 사랑을 받았다. 그 뒤 네덜란드와 영국의 포경선단은 1610~1840년 북극해 일대의 고래 무리를 거의 멸종 단계로 몰아넣었다.

1620년에 이르러 네덜란드의 선박은 2천척이 넘었는데 대부분 70톤에서 100톤에 이르는 청어잡이 어선이었다. 선원들이 한 척당 약 15명 정도 승선했다. 단순 계산으로도 약 3만 명 이상의 어부가 조업했다. 1630년대에서 1640년대에는 연간 약 3만 2500톤의 청어를 처리해 당시 유럽 전체 청어 포획량 6만 톤의 절반을 넘겼다. 이렇게 네덜란드의 부는 청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1669년에는 청어 잡이와 청어의 가공처리, 통 제작, 망, 어선건조 등 관련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합하면 그 수가 약 45만 명에 달했다. 당시 노동인구의 태반이 청어와 관련된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렇게 수산업에서 촉발된 활황은 배 만드는 조선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는 또 운송업으로 발전하면서 목재업ㆍ무역업ㆍ금융업을 낳았다. 이렇게 하여 청어 어업이 네덜란드 경제와 해운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리하여 네덜란드는 청어산업의 호황과 더불어 한자(Hansa) 상인을 물리치고 북유럽의 무역 주도권을 획득했다.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는 유대인들 덕분에 베네치아에서 포르투갈로 이어졌던 동방상품의 유럽 유통권을 인계받았다. 유대인을 추방한 포르투갈에서는 상품을 실은 배가 들어와도 이 상품들을 유럽에 유통시킬 유대인들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본격적인 네덜란드 시대가 전개된다.

소금의 화학

영국의 염세 폐지는 소금을 필요로 하는 제조 공정을 지닌 산업들과 소금을 시작 물질로 하는 무기 화합물 제조사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염세 폐지는 특히 소다회(무수탄산나트륨)또는 세탁용 소다로 알려진 나트륨 화합물, 즉 탄산나트륨(Na2CO3)제조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소다회는 비누의 원재료였는데 비누 수요가 증가하면서 소다회가 대량으로 필요해졌다. 그전까지 소다회는 주로 자연 발생적 퇴적물(알칼리 호수가 마르면서 호숫가에 생긴 것)에서 얻거나 다시마나 해초 같은 것을 불에 태우고 남은 재에서 얻었다. 이렇게 얻은 소다회는 불순물이 많고 공급량이 한정되어있었다. 이때 풍부하게 공급되고 있던 소금에서 탄산나트륨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자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1790년대, 제9대 던도널드 백작인 아치볼드 코크런은 소금을 인공 알칼리로 변환시키는 공정에 대한 특허를 취득했다(오늘날 코크런은 영국 화학혁명을 선도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며 알칼리 산업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그가 가문에서 물려받은 얼마 안되는 땅은 스코틀랜드의 포스 만 연안에 있었는데 포스만 연안 근초는 석탄을 때는 수만은 염전이 있었다.). 하지만 코크런의 공정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791년, 프랑스의 니콜라 르블랑은 소금, 황산, 석탄, 석회석으로 탄산나트륨을 제조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르블랑법으로 소다회를 생산하는 일은 지연되었다. 결국 잉글랜드에서 그블랑법으로 소다회가 상업적으로 제조되기 시작했다. 1860년대, 벨기에의 에르네스트 솔베이와 알프레트 솔베이 형제는 석회석(CaCO3)과 암모니아 기체(NH3)를 이용해 소금(염화나트륨)을 탄산나트륨으로 바꾸는(르블랑법보다)개선된 방법을 개발했다. 이 공정의 핵심은 소금 농축액과 암모니아 기체, 이산화탄소(석회석)를 섞어서 탄산수소나트륨(NaHCO3)을 만들고 탄산수소나트륨을 가열해 탄산염을 만드는 것이다. 솔베이법은 지금도 합성 소다회 제조의 주된 방법이다. 하지만 거대한 천연 소다회 광상의 발견(예를들어, 미국 와이오밍 주 그린강 유역에는100억톤 이상의 소다회가 묻혀있다.)으로 오늘날 솔베이법으로 만든 소다회에 대한 수요는 많이 줄어들었다.

또 하나의 나트륨 화합물, 가성 소다에 대한 수요도 오래전부터 있었다. 가성소다. 즉 수산화나트륨(NaOH)은 염화나트륨 용액에 전류를 통과시켜 대량 생산하는데 이 공정을 전기 분해법이라 한다. 가성 소다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열 가지 화학물질 가운데 하나이다. 가성 소다는 광석에서 알루미늄을 뽑아내는 데 쓰이거나 레이온, 셀로판, 비누, 세제, 석유제품, 종이, 펄프 등을 제조할 때 필요하다. 소금물을 전기 분해할 때 생성되는 염소 기체는 처음에 공정의 부산물로 여겨졌으나 곧 훌륭한 표백제이자 강력한 살균제임이 밝혀졌다. 오늘날 상업적으로 염화나트륨을 전기 분해 하는 목적은 수산화나트륨을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염소를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염소는 살충제, 중합체, 의약품 같은 수많은 유기화학제품 제조에 사용되고 있다.

동화에서 성서에 이르기까지, 스웨덴 전설에서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전설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곳곳의 수많은 사회에는 소금에 대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소금은 의식과 의례에 사용되고 있고 환대와 행운을 상징하고 악령과 불운을 막아 주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소금이 인류문명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은 우리가 쓰는 언어에서도 알 수 있다. 급료를 의미하는 salary라는 말은 로마 병사들이 급료로 소금을 받은 데서 유래했다. 샐러드(salad, 원래 샐러드는 소금만 친것이었다), 소스(sauce)와 살사(salsa), 소시지와 살라미(salami) 같은 말들도 모두 소금을 의미하는 라틴어(sal)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다른 언어에서도 그렇지만 영어에도 소금에 대한 비유가 많다. 예를 들면 ’salt of the earth(세상의 소금)’, ‘old salt(뱃사람)’, ‘world his salt(급료값을 하는)’, ‘below the salt(말석에)’, ‘with a grain of salt(에누리해서)’, ‘back to the salt mine(일터로 복귀하다)’등이 있다.

소금 때문에 벌어진 수많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소금에 부과된 세금 및 통행세에 대한 투쟁과 저항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소금을 찾아 인구가 이동하고 소금 밀수로 수십만 명이 투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기술이 소금 가격을 엄청나게 떨어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소금에 대한 마지막 아이러니는 오늘날 음식 보존을 위한 소금 수요가 대폭 줄었다는 사실이다(냉장법이 소금을 대신해 음식 부패를 방지하는 표준 방법이 되었다.). 인류 역사 내내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었고 욕망과 투쟁의 대상이었고 때로는 금보다 더 높게 평가 받았던 소금은 이제 값싸고 손쉽게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흔한 것이 되어버렸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지구상에서 바다에서 소금을 채취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한정적입니다. 맛이 없고, 모래가 필연적으로 껴있으며 썩기까지 합니다. 즉 천일염같은 소금을 원래 사람들은 안 먹었습니다. 님 말대로 그냥 바닷물 말리면 나오는 거라서 싸니까 먹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선 어쩔 수 없이 바다에서 소금을 먹을 때는 자염이란걸 만들어 먹었는데 이건 옛날에도 비쌌는데 지금은 훨씬 비싸서 몇그램에 몇만원 하고 이 지경입니다.

그래서 그냥 땅에서 캐서 먹었습니다. 암염광산이 있으니까요. 동굴이나 지하에 나트륨이 자연적으로 결정화 된 깨끗한 암염이 있기 때문에 그냥 그걸 부숴서 먹었습니다. 양도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리고 소고기보다 비싸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옛날에 소고기에 소금을 엄청 많이 뿌렸는데 군인들이 원정을 떠나면 신선한 고기를 얻기 어렵다보니 젓갈담구듯 소금항아리에 소고기를 담아서 다녔습니다. 도저히 그냥은 못먹어서 물에 행구거나 건빵이랑 끓여서 죽으로 해먹었죠.

빨리 빨리 내공 140

... 에펠탑에 관하여 간단히 설명해 주세요~~ 내공은 30겁니다^^ 그대신 빨리요!! 답변... 메가가 프랑스로부터 녹색 ·흰색 ·오렌지색의 3가지 빛깔로 된 3색기를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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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화 에 대해 잘 설명되있는 책...

... 일본문화에 관하여 ● 주제에 들어가기 앞서 옛말에... 관서지방 - 원재료의 순수한 맛을 중요시 하고 소금으로... 주로 흰색을 사용한 복장이었다고 한다. 헤이안(平安)시대...

제사 축/지방

... 가례에 관하여 쓴 책 주자가례(朱子家禮) : 중국 명나라... 주된 음식 조미료(꿀, 초장, 소금, 겨자 등)는 기록되지... 붉은 색은 양이라 동쪽, 흰색은 음이라 서쪽, 밤과 대추...

성경에서 베드로가

... 가르침에 관하여 설명을 하고 있고, 베드로나 야고보나... " 라고 표현이 되어 있는 것이며, 또 ‘흰색 옷’ 으로... 금할 食: 밥 식)을 하면서 “나를 불쌍하게 여기셔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