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신분제도 상민의 생활모습 가옥형태 옷차림 여가 생활 의 대해서...

조선시대 신분제도 상민의 생활모습 가옥형태 옷차림 여가 생활 의 대해서...

작성일 2006.04.18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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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공 25 걸어요.. 제발.. 오늘안에... 제발 내공 25 걸어요.. 감사내공까지 10 올려서 35 드릴수도 있으니깐.. 제발 다 알려 주세요 ㅠ.ㅠ

 

공개 수업 대비라서 전부 잘해야 합니다.. ㅠ.ㅠ

 

꼭 생활모습 옷차림 여가생활 가옥형태의 대해서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제발 알려 주십시오. 저 공개수업때 못함면 망신 백배!. ㅠ.ㅠ

 

천재이신 분들 도와 주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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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허삼둘 가옥

화림동에서 흘러내린 계류는 안의면 금천리에 이르러 금천(錦川:비단내)이라는 예쁜 이름의 시내가 되어 마을을 곱게 감싸고 돈다. 마을 복판의 광풍루(光風樓) 앞 금천변에는 갯버들이 가지를 하늘거리며 줄지어 선 둑길 아래 빨래터가 남아 있어, 그 옛날 하얀 머릿수건을 두르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두런대며 방망이 두드리며 빨래하던 아낙네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안의면은 현재 행정구역상 함양군에 속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함양·거창과 대등한 지위를 가진 현(縣)으로, 본래 이름은 안음이었다. 영조 43년(1767)인근 산음현에서 일곱 살 난 여자아이가 아기를 낳는 괴이한 일이 일어나자 음기(陰氣)가 너무 세서 그렇다며 산청으로 개명하면서 안음도 안의가 되었다고 한다.

안의현청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안의초등학교에서부터 금천변 사이의 마을 안 곳곳에는 정겨운 돌담길이 이어진다. 70년대 말 소읍가꾸기사업으로 다소 규격화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옛 골목길의 향수를 느낄 수가 있다.

안의초등학교 가까이에 중요민속자료 제207호로 지정된 허삼둘가옥이 있다.

1918년 윤대흥이라는 사람이 진양 갑부인 허씨 문중에 장가를 들어 부인 허삼둘과 함께 지은 집으로, 가옥의 이름을 남자 주인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여자 주인인 허삼둘의 이름을 따른 것이 매우 흥미롭다. 이름에서 알 수가 있는 것처럼 경제적 실권을 쥐고 있던 안주인의 의견이 존중되어 안채가 비중이 있게 지어졌다는 점말고도, 조선 후기 신분제도 철폐와 신흥부농층의 출현으로 변화된 사회상이 반영된 집으로도 의미가 있다.

우리가 전통한옥의 고가(古家)를 보면 당연히 양반집으로 생각하고 그 가옥구조를 양반 사대부 문화와 연결시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가옥은 양반집이 아니라 그저 부잣집이었다. 즉 요호부민(饒戶富民)의 저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요호부민의 집들을 보면 당시의 지배층인 사대부의 문화를 본받아 양반가옥의 형태를 띠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자티를 내며 곳곳을 변형시켰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허삼둘가옥은 갖가지 모양의 호사스러운 창살이 배치되어 있고, 솟을대문이 유난히 높다. 다양한 무늬로 장식한 창살과 작은 창문들, 솟을대문 지붕 위 바래기 기와에 장식된 사람 닮은 도깨비의 해학스러운 표정도 재미가 있다.

지금은 폐가나 크게 다를 바가 없이 퇴락하여 장독대는 무너지고 사랑채 마당은 동네 채마밭이 되어버렸지만, 조선 후기에서 일제 강점기로 접어드는 시기에 한옥이 어떻게 변모되었는가를 살필 수가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껌뻑! 껌뻑!

갑오개혁(1894)으로 양반과 상민의 구별을 없애고 노비를 풀어주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주택의 규모와 형태를 규제하던 제도가 철폐되면서 경제력만 갖추면 누구든지 자유롭게 집을 지을 수가 있게 되었다. 이로써 재산을 모은 일부 상인이나 부농들은 앞다투어 과거 양반만이 누릴 수가 있었던 주택 양식을 본떠 화려한 집을 지었다.

이들의 주택은 외형상 상류계층 주택의 건축요소를 모방하여 권위를 갖추고자 하였지만, 실생활에서 양반이 지켜온 유교적 생활방식이란 것은 거추장스럽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주택의 규모가 크고 장식적이고 사랑채가 독립되어 있다는 점은 상류저택과 유사했지만, 안채를 중심으로 건물이 배열되는 등 그 평면 형태는 지역 서민의 주거방식에 뿌리를 두었다.

안채와 곳간채, 안행랑채, 사랑채가 크게 튼 자형을 이루는 허삼둘가옥의 특징은 무엇보다 안채의 평면구성이 독특하다. 사랑채는 행랑채, 곳간과 연결되어 선비가 공부한다는 문기(文氣)가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ㄱ자 팔작집으로 된 안채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 한옥과 구조도 다르고 분위기도 다르다. ㄱ자의 꺾이는 모서리 부분을 안쪽으로 한 번 접어 생긴 공간에 배치한 부엌은 매우 특출나다. 이것은 기품이고 체통이고 다 무시해버린 여성생활 위주의 공간배치인 것이다. 부엌으로 드나드는 통로가 토상화(土床化)를 한 마루이고, 꺾인 부분에 선반과 시렁을 걸어 가사활동이 편리하도록 배려했다. 부엌 내부에는 기둥만 두 개가 서 있어 공간이 더 넓어 보인다.

안채가 부엌을 중심으로 마루와 방을 衁자로 배치된 데 반해 사랑채는 평면이 S자형으로 정면 7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향한 사랑채 양쪽 끝에는 누(樓)를 세운 듯이 郼게 앞퇴를 두고 난간을 설치하였다. 사랑채 오른쪽에는 바깥행랑채, 왼쪽에는 안채를 향해 있는 안행랑채가 있으며, 안채와 안행랑채 사이에 곳간채가 있다.

어때여? 도움이 되셧는지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 조선시대 건축1. 조선시대 건축의 의의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건축 양식이 그대로 전승되었으나, 차차 다포계양식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 왕조는 모든 면에서 형식 위주로 치우쳐 건축에서도 고려대 주심포계 양식을 지양하고 장려 웅대한 다포계 양식을 더욱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공포 부분에서 가장 심하게 눈에 띄는데, 고려대 주심포계 공포 양식이 간략화되어 첨차가 마침내 상하가 1매의 판재로 겹쳐져 짜여지고 윤곽의 조각이 장식화된 '익공계'건축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주심포계 양식의 건물은 고려대의 다포계 양식에 한층 더 장식화된 부재들을 추가 삽입하여 기능에 알맞은 구성미를 잃게 하였습니다.다포계 건축 양식에서 심원사 보광전, 석왕사 응진전, 서울 남대문 등의 건물은 다포계양식의 정통수법을 그대로 이어온 14세기 후반기에서 15세기 중반기의 건물입니다. 그러나, 15세기 후반기에 들어와 건립된 안변 가학루의 양식을 보면 건물 내부에 복잡한 초화문 조각의 부재가 많이 나오는데 이와 같은 건물은 같은 연대의 창경궁 명전전, 홍화문에서 볼 수 있으며, 가장 잘 나타난 건물은 개심사 대웅전입니다. 개심사 대웅전은 공포가 순수한 다포계 공포 양식으로 되어있으나, 내부의 가구 형식은 고려대 주심포계 절충 양식과 같은 양식으로 되어있어 순수한 다포계 양식이라 할 수 없고, 다포계 양식속에 주심포계의 가구 수법이 절충된 다포계 절충 양식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와 같은 건물로는 석왕사 호지문, 평양 보통문 등이 있습니다. 특히, 조선시대의 건축은 임진왜란을 격으면서 많은 중요한 건물들이 소실 되었고, 그후 인조때에 또다시 만주족의 침입으로 건축계는 차츰 침체되기 시작하였으며 건축양식에도 큰 변화를 가져와 전체적으로 작풍이 섬약하게 되었고, 세부적으로 정돈이 흩어진 복잡성을 띄게 되었다. 조선후기 건축물의 특성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한국화된 장식적 요소가 짙어지는 반면 구조상 불합리한 낭비 성향이 두드러 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건립된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경회루는 한국화된 건축의 하나도 부끄럽지 않은 우리 건축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조선시대 전통 주거공간의 형성배경ⓐ 인문·지리적 배경현대사회와 과거사회의 가장 큰 차이점 중의 하나는 신분계급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 것이다. 사회의 신분계층이 나뉘어졌을 때 주택의 형태도 그 안에 사는 사람의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방법의 하나가 되었다. 상류계층에서는 자신들의 신분과 지위를 주택을 통해서 과시하려 하였고, 재산을 모은 하류계층에서는 자신들의 주택도 상류주택과 비슷하게 흉내내는 사례가 만연했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신분에 맞는 주택의 규모와 형태, 재료 등을 법으로 제한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이렇듯 신분에 따라 주택의 규모와 형태, 재료 등을 법으로 제한하는 것을 가사규제(家舍規制) 라고 하며, 가사규제는 삼국시대부터 행하여 졌으며 주거건축의 신분, 계층적 특성을 이루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지리적인 배경을 살펴보면,우선 기후적으로 한국의 기후는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기후와의 점이지대(移地) 에 위치하여 추운 북부지방과 따뜻한 남부지방으로 나뉘고 사계절이 분명하고 장마철 이외에는 항상 청명하고 건조한 날씨를 보인다. 춥고 긴 겨울과 더운 여름은 주택에 있어서 온돌과 마루라는 특성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지형적으로는 산지와 소구릉의 기복이 많고 대부분의 지표는 화강암으로 덮여 임업에 불리하게 되어있다. 양질의 목재가 많이 생산되는 일본에 비해 석재를 많이 사용하는 목조건축문화를 가지게 되었으며,우리 나라의 독특한 낮은 산세를 본뜬 곡선미가 탁월한 건축 조형미를 가지게 되었다.ⓑ 사상적 배경(1) 유교사상유교의 의미는 경전과 함께 유교전통의 핵심적 내용으로 전승되어온 예 의 문제로 유교에 있어서 예는 내용과 형식, 즉 사상과 의식을 통합하는 연결고리로써의 의미를 갖는다. 곧 유교사상의 본질적 내용이 형식적 표현을 통하여 실현되는 과정을 제도화 내지 의례화하는 데에서 바로 예의 문제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는 유교인의 생활 전반에 걸쳐 있는 것이며, 유교사상의 근본관념으로부터 가장 구체적인 일상생활 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영역을 갖게 된다. 이러한 유교에 대한 이념은 조선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던 당시의 정치세력들이 조선왕조의 왕권의 정당성과 강화를 위해 구국이념으로 답변확정되게 되었다. 유교사상은 정치이념으로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건축적으로는 공간의 위계성,공간의 분화 등과 같은 형태가 나타나게되었다.(2) 풍수지리사상풍수지리설은 오래 전부터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건축 등 여러 분야에 걸쳐서 응용되고 전승되었다. 풍수지리라 함은 지중(地中)에 일종의 신비한 기(氣)가 있어 이것이 인간의 길흉화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으로 생과 사를 구별하여 생자 를 양(陽) 이라 하고, 사자를 음(陰) 이라 하였으며, 생자의 주택지를 양택(陽宅), 그 주위를 양기(陽基) 라 하여, 인간의 주거할 수 있는 땅으로 인간이 주거할 수 있는 좁은 의미의 장소를 말한 양택론을 민간 건축 문화를 지배해온 원리로 삼았다3. 조선시대 건축의 구분ⓐ 계층별 구분1) 상류일반적으로 조선의 상류주택은 내외사상으로 여자들이 사용하는 "안" 공간과 남자들이 사용하는 "밖"의 공간으로 구분이 되어집니다. 안공간인 안채는 집안의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의 공간이며 주택의 안쪽에 위치하였으며 가부장적 제도의 권위를 상징하는 사랑채는 밖 공간으로 집안의 가부장과 장자를 비롯한 남자들이 글공부를 하거나 풍류를 즐기던 공간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전통주택은 상하 신분제도의 영향으로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공간을 다르게 배치하였는데 상(上)의 공간인 안채와 사랑채는 양반들이, 하(下) 공간인 행랑채는 대문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머슴들이 기거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중문간 행랑채는 중(中)의 공간으로 중간계충인 청지기가 거처하는 공간이었으며 이들 공간들은 커다란 한 울타리안에 작은 담장을 세우거나 채를 분리하여 구획하였습니다. 이렇게 상류주택은 신분과 남녀, 장유별로 공간을 분리하여 대가족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당시의 가족 생활을 고려한 공간 배치를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상류주택의 건물내부① 내벽 - 우리나라 주택의 벽은 대개가 흙벽이며, 중류 이상의 주택에 있어서는 그 내벽은 흰 석회로 발라서 회벽으로 만드는 것이 많으나 벽의 균열과 방풍을 고려하여 종이를 바르기도 한다. 또 상류주택에 있어서는 명주를 벽지 대신 사용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벽에 서예나 그림을 걸어 놓고 그것을 늘 애호하기도 한다.② 천장 - 대부분이 종이로 만든 천장이며, 그 천장에 바르는 종이는 역시 벽의 그것과 거의 같은 종류의 색지가 사용된다. 지붕 밑에 반자틀을 짜 문양 이 아름다운 벽지를 바르거나 혹은 천장틀을 짜서 널을 붙여 널천장으로 한다.③ 문.창 - 대개 이중문이며 이는 차가운 기온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방한적인 고려라고 생각된다. 덧문의 형태는 주로 안팎에 종이를 막바른 장지문이 많으며 이런 문은 모두가 양여닫이로 되는 것이다. 창은 채광통풍을 위한 것으로 문과 창에서는 살문을 볼 수 있다. 문살문은 세 살문, 완자문, 아자문, 혼화문 등이 있으며 상류주택에서는 동적이고 화려하며 우아한 완자문 혹은 새로운 멋에 넘쳐흐르는 혼화문 을 사용한다.④ 바닥 - 온돌방의 바닥과 마루방의 바닥이 있다. 대개 온돌방의 바닥은 별다른 특색이 없고 바닥위에 문양이 표현된 방석이나 돗자리를 깔았다. 마루바 닥은 보통 장마루이고 고급주택에서는 정자형 혹은 아자형으로 깐다.2) 민가민가(民家)란 백성의 집이란 뜻이지만 일반적으로 중하류층의 일반 서민들이 살았던 집을'민가'라 부릅니다. 초가지붕은 민가를 상징할 정도로 가장 흔히 쓰인 서민주택의 지붕형태이며 민가의 형태는 지형적, 기후적 여건과 지방의 경제상태 등에 따라 규모나 건물 배치 방식이 달랐으며 특히 기후의 영향으로 지방마다 각기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민들은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했으므로 주택을 지을때도 장식적인 면보다는 기능적인 면을 더 중시하여 대부분 방과 대청, 부엌으로 구성된 단순한 구조를 지녔습니다. 한국 전통가옥의 지붕으로는 기와지붕과 초가지붕 두 가지가 가장 보편적인데 부유한 집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올렸고 서민들이 거주하는 일반 농가에서는 대부분 볏짚으로 이은 초가지붕을 얹었습니다. 초가지붕은 겨울에는 열을 뺏기지 않고 여름에는 강렬한 태양열을 차단해주며 구하기 쉽고 비도 잘 스며 들지 않아 지붕의 재료로 가장 널리 쓰였습니다.ⓑ 공간별 구분1) 구조적분류- 안채 안공간인 안채는 집안의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의 공간으로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에 위치하였으며 보통 안방, 안대청, 건넌방, 부엌으로 구성되며 안채의 안방은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실내 공간중에서도 상징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출산, 임종 등 집안의 중요한 일이 이뤄지던 여성들의 주된 생활 공간이었습니다. 안채는 위치상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인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는 여성들의 사회생활을 꺼려하여 남편이나 친척외에는 남자들을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등 여성들의 외부와의 출입을 제한하던 당시 사회상을 엿볼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채와 달리 가족들의 의식주를 전담하는 공간으로 가구들도 의복과 침구류 보관을 위한 수납용 가구등이 놓였습니다. - 사랑채사랑채는 외부로부터 온 손님들에게 숙식을 대접하는 장소로 쓰이거나 이웃이나 친지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고 집안 어른이 어린 자녀들에게 학문과 교양을 교육하는 장소이기도 하였으며 사대부 남자들이 모여서 학문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고 시를 짓거나 거문고 등의 악기를 연주하며 수준높은 문화생활을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부유한 집안의 경우는 사랑채가 독립된 건물로 있었지만 일반적인 농가에서는 주로 대문 가까이의 바깥쪽 방을 사랑방으로 정해 남자들의 공간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사랑채는 보통 사랑대청과 사랑방으로 구성되며 부유한 집안은 누마루를 마련하여 한층 멋을 살렸습니다. 사랑방은 사랑채의 주요 공간으로 남자주인과 귀한 귀한 손님이 기거하는 공간이다. 상류주택의 사랑방은 기거와 침식외에도 독서, 예술활동, 접대 등의 많은 행위가 이루어졌던 중요한 공간이었으며 유학을 장려하여 문필문학을 존중하고 경전을 연구하는 풍조가 만연하였던 조선시대에는 사랑방문화 또한 발달하였습니다. 또한 금욕적 유교생활을 지향하는 선비의식의 영향으로 사랑방의 가구나 장식은 매우 간소하게 꾸며져 보통 몇개의 방석과 작은 책상, 장농과 책장, 문방소품 등으로 구성되었집니다. - 사당채조선시대에는 조상숭배의식의 정착과 함께 중상류의 주택에는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 안채의 안대청 뒤쪽이나 사랑채 뒤쪽 제일 높은 곳에 '사당'이라는 의례 공간을 마련하기도 하였습니다. 보통 사당에는 4개의 신위를 모시는데 서쪽부터 고조의 신위, 증조의 신위, 할아버지의 신위를 모시며 마지막에 부모의 신위를 모시고 각 위마다 탁자를 놓으며 향탁은 최존위앞에 놓았다. 대개의 중상류 주택은 가묘법에 따라 사당을 건축하지만 사당이 없는 집도 있어 그런집에서는 대청마루에 벽감을 설치하여 신위를 모셨습니다.- 행랑채전통주택은 상하 신분제도의 영향으로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공간을 다르게 배치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안의 경우에는 안채와 사랑채 외에도 하인들이 기거하거나 곡식등을 저장해두는 창고로서 쓰였던 행랑채가 따로 있었으며 하(下) 공간인 행랑채는 그 주택의 규모에 따라 "바깥행랑채"와 "중문간 행랑채"도 존재하였습니다. 바깥행랑채는 대문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집안에서 가장 신분이 낮은 머슴들이 기거하는 공간이었으며 중문간 행랑채는 양반들이 기거하는 안채, 사랑채와의 중(中)의 공간으로 중간계충인 청지기가 거처하였습니다. 이들 공간들은 커다란 한 울타리안에 작은 담장을 세우거나 채를 분리하여 구획하였습니다. 이렇게 상류주택은 신분과 남녀별, 장유별로 공간을 분리하여 대가족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당시의 가족생활을 고려한 공간 배치를 하였습니다.- 별당채규모가 있는 집안의 가옥에는 별당이 집의 뒤, 안채의 뒷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이름이 다르게 불리웠습니다. 결혼전의 딸들이 기거하는 별당은 "초당"으로 불리웠으며 또한 결혼전의 남자 아이들의 글공부를 위해 "서당"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집도 있었습니다. - 곳간채중상류층의 주택중에서도 부유한 집안은 수십칸 규모의 주택에서 살았으며 이들 "칸"수가 많은 전통주택에는 곳간채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어 오래 저장해두어야 할 음식이나 여러가지 생활용품들을 저장, 보관하였습니다. 2) 기능적분류- 대청안채의 안방과 건넌방, 사랑채의 사랑큰방앞의 넓은 마루를 '대청'이라 하였습니다. 대청은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의식과 권위를 표현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며 각각의 방을 연결하는 공간으로 오늘날 주택의 거실에 해당하는 공간입니다. 여름철에 분합문을 서까래 밑에 내려진 들쇠에 걸어 올려 놓으면 대청은 열린공간으로 생활의 중심이 되는 공간이 되었으며 겨울철에는 분합문을 닫아 한기를 막고 대청공간을 아늑한 실점수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안채에 있는 것을 안대청이라하며 사랑채에 면해있으면 사랑대청이라 하였습니다. 대청은 한여름의 무더위를 이기기위해 현명하게 고안한 가옥의 구조라고 할 수 있는데 전면 또는 사방이 트여있어 엄밀히 말하면 실내라고 할 수 없으며 대청의 바닥은 상류주택이나 민가나 일반적으로 우물마루가 쓰여졌습니다.- 방전통주택에서 방은 열린공간인 대청과 반대되는 폐쇄적인 의미를 지닌 개인적인 공간입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바닥에 바로 앉아서 생활하기 때문에 방은 언제나 청결하게 유지하였으며 방의 내부는 모두 벽지나 천장지를 발랐으며 바닥은 장판지로 마감하였습니다. 잠을 자고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는 전통가옥에서의 방은 잠을 잘때는 침대대신 따뜻한 구들 방바닥위에 이부자리를 펴고 자고 낮에는 의자대신 방석에 앉아 지내는 좌식생활을 하도록 되어있는 공간입니다. - 사랑방 보통 사랑대청과 사랑방으로 이루어진 사랑채의 사랑방은 집안의 가장인 남자 어른이 잠을 자거나 식사를 하는 방으로 남자들의 공간입니다. 사랑채는 외부로부터 온 손님들에게 숙식을 대접하는 장소로 쓰이며 이웃이나 친지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고 집안 어른이 어린 자녀들에게 학문과 교양을 교육하는 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부유한 집안의 경우는 사랑채가 독립된 건물이었지만 일반적인 농가에서는 주로 대문가까이의 바깥쪽 방을 사랑방으로 정해 남자들의 공간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부엌불을 지펴서 각종음식을 조리하는 공간인 부엌은 주로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에 안방과 바로 인접하여 위치하였으며 일부 대가들의 집에는 반빗간이라하여 별채로 독립시키기도 하였다. 전통한옥의 부엌은 작업 동선을 고려해볼 때 매우 불편한 구조를 지녔으며 부엌 바닥을 일반적으로 방바닥보다 75-90cm 정도 낮게하여 아궁이에서 땐 불길을 방고래로 빨아들이도록 되어 있는 "온돌구조" 때문이었습니다. 부엌에는 2~4개의 아궁이가 있었으며 불을 때는 아궁이위 부뚜막에는 솥을 걸어 두었습니다. 아궁이는 안방과 면한 벽쪽에 설치하여 음식물을 조리하면서 동시에 방을 데우도록 하였습니다. 부엌은 주택의 규모에 따라 안방과 건넌방에 각각 위치하는데 안방과 접한 부엌이 주된 조리 공간이었으며 건넌방쪽은 물을 데우는데 쓰이는 등 보조적인 공간으로 이용되었습니다. - 사당 조상숭배의식의 정착과 함께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 안채의 안대청 뒤쪽이나 사랑채 뒤쪽 제일 높은 곳에 "사당'이라는 의례 공간을 마련하였으며 보통 사당에는 4개의 신위를 모시는데 서쪽부터 고조의 신위, 증조의 신위, 할아버지의 신위를 모시며 마지막에 부모의 신위를 모십니다. 각 위 앞에는 탁자를 놓으며 향탁은 최 존위앞에 놓았습니다. 대개의 중상류 주택은 가묘법에 따라 사당을 건축하지만 사당이 없는 집도 있어 그런집에서는 대청마루에 벽감을 설치하여 신위를 모셨습니다. - 찬방 "찬방" 또는 "찬마루"라고 불리는 이곳은 오늘날의 주택의 부엌방과 다용도실 정도에 해당하는 공간으로 반가나 중, 상류 지방의 가옥에서 볼 수 있는 부엌과 인접한 공간입니다. 부엌과는 문으로 연결되어 있어 부엌에서 조리된 음식을 이곳에서 상에 올려 안방, 사랑방 등으로 내갔으며 간단한 음식은 이곳에서 조리하였습니다. 이곳에는 상을 차리는데 필요한 그릇, 식기 등이 마련되어 있으며 음식물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로도 쓰였습니다.- 장독대우리의 자연환경은 잘 썩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음식을 보관할 때도 발효시키는 방법이 가장 좋았다. 그런만큼 젖갈류를 비롯한 발효음식이 매우 잘 발달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추장, 된장, 간장, 김치, 젖갈류 등을 보관할 장독대는 실생활과 어울려 중요한 요소였다. 발효음식은 햇빛이 잘들고 통풍이 잘되는 양지바른 곳에 두었는데, 통풍을 위해서 장독대는 지표에서 일정한 높이에 두었다. 또한 장독 하나 하나에도 돌로 동아리를 해서 받치기도 하였다. 장독은 조리를 하는 부엌이나 우물과도 가까워야하기 때문에 대부분 반빗간 뒤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안채로 반빗간이 합쳐짐에 따라서 안채 부엌과 가까운 곳에 장독을 설치하였는데, 주로 안채의 후원이나 옆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장독은 음식을 보관하는 곳이지만 정한수를 떠 놓고 소원을 비는 곳이기도 하여서 정신적인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우물살림집에서는 지표의 물도 중요하지만 우물을 통해 얻어지는 지하수맥도 중히 여겼다. 우물은 삼국시대 이미 집집에 있었다. 굴착하는 도구와 기술이 일찍부터 발달해 있었다. 벽화에 묘사되어 있는 우물을 보면 지표위로 우물틀을 설치하고 있다. '井'자형으로 방틀을 짜고 물을 들어 올리는 도루레를 설치하는 등의 과학성을 보이고 있다. 우물 옆에는 물확과 연결 수조가 있어서 부엌이나 방앗간에 물길이 닿도록 하기도 한다.우물은 물을 제공하는 것 외에도 냉장고의 역할을 한다. 빙고가 시설되지 않는 일반민가에서는 여름에 과일이나 음식을 우물에 끈을 매 보관했다가 먹는다. 어느 곳에서는 우물 옆에 샘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 루각건물을 지은 다음 남쪽은 사창으로 하고 나머지 3면은 판벽으로 막아 음식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뒷간지방에서는 잿간에 변소를 마련하는 경우가 있다. 부춧돌 두 개를 놓고 한쪽 벽에는 주걱처럼 생긴 부삽이나 고무레 놓여 있다. 뒷쪽에 재를 용변을 보기전에 일정양 부춧돌 사이에 끌어다 놓는다. 그리고 용변을 본 후에는 주걱을 이용하여 재에 말아 한쪽에 치워뒀다가 거름으로 이용한다. 재는 탈취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요즘의 수세식 보다도 냄새가 안난다. 또 거름으로 활용하니 일석이조다. 화장실을 잿간 위에 높게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떨어지는 가속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재로 감싸진다. 제주도에서 '통시'라고 하는 유형은 뒷간이 돼지울간 위에 마련된다. 일을 보면 돼지가 달려들어 깨끗이 치워준다. 화장실을 지면으로부터 높게 설치하는 것은 오랜역사를 갖고 있는 것으로 맹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화장실은 정착과 농경생활이 시작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동생활에서는 이동식 화장실인 요강이나 매화틀이 사용되었다. 또 특별한 화장실의 시설없이 노천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것은 현재 서역의 이동식 몽고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생활습속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역사 이래로 발달된 많은 화장실을 갖고 있는 것이 또한 한옥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안채 뒤쪽에는 여인들이 이용하는 후원공간이 마련된다. 여기에는 여인들이 뒷물을 할 수 있는 북수간(北水間)이 마련된다.4. 조선시대 건축의 세부구조(한옥의 경우)ⓐ 온돌 온돌은 열의 전도, 복사, 대류를 이용한 한국 고유의 난방 방식이다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우리나라는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는 춥기때문에 가옥의 구조에도 계절적 온도 변화를 고려하였다. 방을 따뜻하게 데우는 구들과 여름이면 사방으로 바람이 통하도록 되어있는 시원한 대청이 공존하는 가옥 구조를 만들었다. 추운날에는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바닥 밑의 구들장을 데워 방안을 따뜻하게 하였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그 열기로 인해서 음식이 조리되며 경사진 부넘기를 넘은 열과 연기는 아궁이로 내닫지 않고 개자리에 이른다. 열과 연기는 개자리에서 머물다가 굴뚝을 통해 빠져 나가므로 구들은 오랫동안 온기를 유지할 수 있다.ⓑ 창 전통주택에서는 채광과 통풍을 위한 '창'과 드나들기 위한 '문'을 엄격히 구분하기가 어렵다.그러나 일반적으로 형태가 같더라도 머름대가 있으면 창이고 머름대가 없으면 문으로 구분한다. 창은 채광과 통풍을 위하여 대개 홑창호지를 발랐다. 오늘날의 창에 유리를 대는 것과 달리 창호지를 발라 외부와 내부를 단절시키지 않고 공기가 통하도록 하였으며 은은한 채광을 살렸다. 창호지나 문풍지는 공기가 통하므로 여닫지 않고 고정된 붙박이 창인 봉창을 만들기도 했다.ⓒ 창호지 한국의 전통가옥에서 문과 창문은 격자무늬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무늬의 나무 창살을 만든후 그 위에 한지를 발라 채광과 통풍을 고려하였다. 투명한 유리가 아니라 한지를 통해 비쳐 들어오는 햇살은 강렬하지 않고 은은하여 방안 분위기를 한층 차분하고 아늑하게 만들어준다. 한지는 채광뿐 아니라 통풍에도 유리하여 조금씩이나마 방안의 탁한 공기가 빠져나가고 밖의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기 떄문에 공기의 순환을 시켜준다. 이렇게 공기를 순환시켜줌으로써 뜨거운 구들 바닥으로 인해서 건조해지기 쉬운 방안 공기의 온도와 습도를 항시 적당하게 유지 시켜 주는 것이다.ⓓ 문 출입문의 위치나 용도에 따라 조선시대의 '문'은 모양이 다양했다. 실외의 문에는 대문, 중문, 협문 등이 있는데 대문은 집의 정면에 있어서 집을 대표하는 문이며 평상시에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조그맣게 낸 문은 협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랑채와 안채 사이와 같은 곳에 있어서 집의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통하는 문은 중문이라고 한다. 문은 통과한다는 의미가 더 크게 부각되므로 정성을 들여 아름답게 치장을 하며 특별한 이름을 붙여 현판을 걸기도 한다. 대청에는 들어열개문인 분합문을 설치했으며 대청뒷면이나 부엌의 출입문으로는 판장문이라 불리는 두꺼운 문을 주로 설치했다.ⓔ 기단 기단이란 전통 가옥에서 우천시에 빗물이 튀는것과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습기를 피하고 동시에 건물의 군위를 높히기 위하여 건물 밑부분에 돌을 쌓거나 다른 자재를 써서 쌓아 올린 단인데, 돌로만 쌓기도 하며 기와와 벽돌을 또는 돌과 벽돌을 섞어 쌓기도 한다. 한국의 전통한옥 중에서 상류층의 주택은 3척(90cm)-4척(120cm) 정도 높이의 화강석 기단위에 축조되는 것이 기본이다. 이러한 기단의 높이는 거주자의 사회적 지위와 가문의 권위에 비례하여 권위가 높을수록 높이 지어져 안에서 밖을 아래로 내려다 보도록 되어있다.ⓕ 누마루 주로 사랑채에 설치되었던 누마루는 기단없이 기둥위에 설치된 형태로 원두막처럼 마루바닥 밑으로 바람이 통하도록 사방이 트인 노출공간이다. 누마루는 대청처럼 여름에는 문을 걸어 올려 주변의 자연의 운치를 즐기는 공간으로 사용했으며 겨울철에는 문을 닫아 한기를 막았다.ⓖ 다락 다락은 안방의 아랫목쪽 벽과 부엌과 면한 벽쪽에 방바닥에서 1.5척 (45cm)되는곳에 설치된 수납공간이다이 다락에는 꿀단지 등 귀한 음식에서부터 가재도구 등 살림살이에 필요한 잡다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곳이다.ⓗ 담 한국 전통 가옥의 담은 치안을 위해서 높이 쌓거나 위협적으로 쌓는 일이 없이 나즈막하고 은은한 장식을 하여 시적(詩的)인 정취가 있다. 또한 담장을 장식한 무늬는 풍요와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많았다.일반 농가의 경우, 지나가는 사람도 담 너머 들여다 볼 수 있을 만큼 나지막 하게 쌓아서 단지 집 밖과 집 안을 구분한다는 의미에서 둘러놓은 경우도 많다. 민가에는 특별히 담장이나 대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경우도 많아서 싸리나무를 집 둘레에 빙 둘러 심어 경계를 나타내거나 아예 대문이 없거나 사립문이 있더라도 늘 열어 놓고 살았다. 문은 닫아놓아 공간을 단절한다는 의미보다는 늘 열어놓고 통과하는 데 더 많은 의미를 두었기 때문에 한국의 문들은 대부분 늘 열려있다★ 한국 전통주거의 주동배치에 관한 연구-호남지방 중·상류주거를 중심으로- Ⅰ. 서 론1.1. 연구의 배경과 목적주거는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상이 구체적이고 종합적으로 투영된 유형적인 사료이며, 민족문화의 가장 구체적인 실상이고, 건축학적으로 볼 때 주거건축은 모든 건축의 규범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주거건축은 조선시대 모든 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 할 수 있고 또 이들 건축공간은 조선시대의 정치, 문화, 사상, 생활감정 등이 집약된 표현체로 볼 수 있다.1970년대 이후 조선시대 주거건축에 대한 연구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어 왔으며 이러한 연구성과에 의하여 주거건축의 전통성 규명과 주거문제의 질적인 향상을 도모하는데는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연구의 관점이 개별적이고 정태적이며 소수의 가옥들을 중심으로 배치계획이나 공간적 특성을 밝히는데 치중하고 있어 전통론을 포함한 이론문제와 양적인 문제를 극복하는데는 미흡하다 할 수 있다.따라서 주거사의 체계화는 주거사를 구성하는 개개의 가옥에 대한 사실의 정확한 조사에서 비롯되며 현존하는 전통주거에 대한 실증적이고 심층적인 연구는 중요한 의의를 지니며 체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전체적인 인식은 건물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 조사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의 구체적인 목적은 다음과 같다.첫째, 현존하는 전남지방 中上流層 주거의 실측 및 문헌조사를 통하여 지역성에 대한 분석과 기존의 문헌 및 자료 등을 비교 분석한 내용을 토대로 자료를 수정 보완하여 전통주거건축의 실증적 자료로 활용하고자 한다.둘째, 주거건축을 형성하는 안채와 사랑채, 부속채를 중심으로 이들의 배치형식 및 상관관계를 규명하고자 한다.셋째, 조선시대 중상류주거의 유형분류를 시도하며 중상류주거의 보편적 구조와 내재된 특성을 규명함으로써 조선시대 중상류주거의 역사적 위치설정 및 성격규정과 중상류주거에 담겨진 내재적 계기성(繼起性)과 발전의 이론을 규명하고자 한다.1-2. 연구 대상 및 범위본 연구의 대상은 호남지역에 존재하는 전통주거건축물로서, 국가에서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여 국가지정 또는 시·도지정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는 가옥으로, 일정 규모이상을 갖춘 가옥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전통주거건축중 2001년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와가(瓦家)43가옥 중 문화재 수리관계로(나주 홍기헌 가옥) 실측을 하지 못한 곳과 해남 녹우당을 제외한 41가옥을 선정하여 동촌별, 마을별로 가옥을 비교하고자 한다. 또한 조사 대상의 가옥을 조선시대로 한정한 이유로는 어느 시대보다도 유구가 많으며, 보존이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Ⅱ전남지역 중상류 주거의 건축적 특성1. 배치유형1) 마당의 구성형식에 의한 분류.안채와 사랑채에 연관되어 나타나는 안마당 사랑마당과 부속 채와 연관되어 나타나는 행랑마당 혹은 문간마당, 가사작업과, 농작업을 위한 작업마당등이 어떠한 공간적, 기능적 형태로 존재하는가에 의해서 분류한다.(1) 분리형(分離型)각개의 마당이 기능적으로 명확히 구별되고 건물과 담장등에 의해서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類型이다. 이 유형에서 나타나는 마당의 종류는 다양하며(안마당, 사랑마당, 행랑마당, 작업마당, 문간마당, 별당마당, 중사랑마당등), 시기적으로 中期의 안마당에 비해서 後期의 안마당은 공간적 개방도가 높은 편이며 특히 사랑마당의 경우는 後期에는 담장으로만 구획되는 경우가 많으며 中期에 비해서 마당의 면적이 좁은 편이다. 中期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행랑마당은 後期에서는 문간마당으로 변화되며 별도의 농작업을 위한 작업마당이 존재하기도 한다.(2) 일반형(一般型)안마당, 사랑마당은 공간적으로 명확히 구별되나 작업마당, 문간마당, 행랑마당등이 안마당이나 사랑마당에 접속되어 공간적으로는 구분되지 않으나 기능적으로는 분리되어 있는 유형이다. 안밖의 구분을 위하여 中門채가 일반적으로 존재하며 안마당으로 중요한 부속 채들이 집약된다. 이 유형은 조선중기의 향반 층과 조선후기의 地主層 住宅에 보편적인 유형이다. (3) 미분화형(未分化型)마당구분이 안마당과 사랑마당으로 이분되어 안팎의 구분은 있으나 문간마당이나 작업마당등이 안마당이나 사랑마당에 混在되어 있는 유형이다. 별도의 中門채가 업이 사랑마당을 통과하여 사랑채의 측면을 돌아서 안마당으로 진입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어서 진입 과정상의 內外間의 동선구분은 미약하지만 장소간의 內外구분은 엄격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유형은 조선중기 향반층(鄕班層)의 ㅁ字型 주택, 朝鮮後期의 부농층(富農層) 및 경제력이 떨어지는 지주층(地主層) 住宅에 보편적인 유형이다.2) 동구성 형식에 의한 분류 주요 몸채인 사랑채, 안채의 구성형식에 따라 마당이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의해서 분류한다.(1) 별동형(別棟型)사랑채, 안채, 주요 부속 채가 별동으로 구성되며 안마당을 중심으로 주요 부속 채가 위치한다. 주요 몸채(특히 안채의 경우)는 一자형과 ㄱ자형이 보편적이며 드물게 ㄷ자형이 나타난다. 영남북부권을 제외한 조선후기에 건립된 중상류주거에 보편적인 유형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놓이는 위치에 따라 직렬형(二), 병렬형(一 一), 직교형으로 구분된다.(2) ㅁ 字型사랑채, 안채 및 주요 부속 채가 한 몸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마당이 건물로 둘러싸여 외부공간이면서 내부 공간적인 기능을 행하고 있다. 몸채의 구성형식에 따라 완전형(回), 튼ㅁ자형(『』), 날개형으로 구분된다. 지역적으로 영남북부권, 영동권, 충청권, 경기권에 분포되어 있고 조선중기의 중상류주거는 거의 대부분 이 유형에 속한다.(3) 혼합형(混合型)사랑채, 안채는 별동으로 구성되고 주용 부속 채가 안채나 사랑채에 접속되어 안마당이 ㅁ字型으로 형성되는 유형으로 안마당의 공간적 위요감은 별동형(別棟型)보다 높은 편이다. ㅁ字型에 비해 안마당이 넓은 편이며 경제규모가 큰집에서 이 유형이 많이 나타나며 지역적으로는 경기권, 충청권, 영남북부권에서 나타난다. 부속 채 접속형식(接屬形式)에 따라 안채접속형과 사랑채접속형으로 구분된다.2. 외부공간의 구성 - 우리 나라 주거건축의 외부공간은 건축을 하고 남은 여백의 공간이나 단순한 관상의 대상이 아니며, 보다 적극적인 생활 공간으로 계획되고 조성된 것이다. 즉, 우리 나라의 주거건축은 내부공간을 구성하는 채와 외부공간인 마당이 모여 비로소 완전한 생활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이 때 마당은 관련된 각 채의 구성과 어울려 각기 개성 있는 외부공간을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외부공간의 구성 역시 외부공간만을 따로 떼어 내어 생각할 수는 없고, 그와 짝을 이루는 내부공간 즉, 채의 구성 및 형태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 다음에 이야기하겠지만, 전남 지역의 주거건축은 채의 구성형태에 있어 영남지역과는 달리 ㅁ자형의 폐합형을 취하는 예가 드물고, 대부분 一자형을 띠고 있다. 따라서 폐쇄적인 외부공간의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一자형의 채와 함께 담장이나 문 등의 공간적 한정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경우라 할지라도 폐합형의 채 구성에 비해서 공간의 위요도가 떨어지며, 이를 만회하기 위한 방편으로 각 단위 영역 사이에 단차를 두거나 식물 등을 이용하는 예를 쉽게 발견하게 된다. - 영광군에 있는 연안 김씨가는 전남지역의 전형적인 비산비야적인 지세에 자리하고 있는데, 안채 영역과 사랑채 영역, 서당 영역, 사당 영역 등이 각기 마당과 부속채 그리고 담장 등을 이용하여 독립적인 외부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각 영역 사이의 연결은 담장에 부속한 문과 채에 부속한 문간에 의해 이루어진다. 즉, 바깥 마당에서 사랑채로의 진입은 독특한 솟을 삼문 형식을 갖춘 대문간채를 이용하고, 다시 안대문간채를 통해 안채로 들어간다. 사당 마당으로의 출입과 사랑 뒷마당으로의 출입은 담장에 부속한 쪽문을 이용한다. 영광 신호준 가옥의 경우는 대문간 안마당에서 사랑채로 출입하는 곳에 독립적인 문간을 구성한 특이한 예에 속한다. 이것은 다른 부차적인 기능을 갖지 않는 독립적인 중문간으로써, ㄱ자형 평면의 좁은 부분에 문을 달아 진입시 2칸의 깊은 내부공간을 통과하게 하였다. 그래서 대문간에 바싹 붙어있는 사랑채 영역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한다. 아궁이가 놓이는 부엌은 신발을 벗지 않고 출입할 수 있는 유일한 내부공간이기 때문에 채를 통과해야 되는 부차적 동선이 지나가는 곳으로 흔히 이용된다. 그러나 담장과 채로 구획된 공간 간의 이동을 가장 극적으로 연출하는 방법은 문간 등의 내부공간을 통과하면서 진입의 방향을 꺾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는 공간 간의 깊이감을 증대시키는 역할도 한다. - 방촌 위성탁 가옥의 중문간은 사랑채에 부가되어 있으며, 중문간을 지나 바로 안방과 안마당이 드러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중문간 내에서 출입방향을 직각으로 꺾어 안마당 영역을 보호하고 있다. ㅁ자형의 안채를 구성하는 구례 운조루나 해남 녹우당의 경우에도 안마당으로의 진입을 중문간에서 한번 꺾어서 진입하게 한다. 더욱이 구례 운조루의 경우에는 이 중문간에서 사랑채의 뒷마당으로 통하는 출입구를 두었으며, 안채에서 사당으로 통하는 출입 역시 건넌방 부엌을 통하게 하였다. 건물 내의 동선공간을 이용하여 건물의 양쪽에 있는 공간을 연결하는 수법은 공간의 연결보다는 격리에 더욱 비중을 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전남의 주거건축이 一자형의 평면형을 주로 사용함으로써, 보다 개방적인 외부공간을 가질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상과는 차이가 나는 점이다. 一자형 집에서 안채의 뒷마당은 폐합형 주거의 안마당과 같은 정도의 폐쇄성을 갖는다.- 전남의 주거건축 외부공간을 이야기할 때 또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인공적인 연못을 만들어 마당을 조경하는 수법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중상류 주거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많은 유례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보성 강골마을의 이금재 가옥과 이용욱 가옥은 마을의 전면부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데, 두 채 모두 집 앞에 연못을 조영하고 있다. 이들과 같이 주거의 전면에 연못을 조성하는 경우가 방촌마을의 위계환 가옥과 위성탁 가옥에서도 발견되며, 구례 운조루와 해남 녹우당의 경우는 마을로의 주진입구 부근에 대규모의 방지를 둔 예이다. 한편 사랑 마당의 일부에 방지를 조영한 예로는 해남의 녹우당과 방촌의 위성룡가옥, 영광의 연안 김씨가 등에서 발견된다. 주거 외부에 놓이는 것이 진입로에 인접하여 비교적 대규모로 조성되는 것에 비하여 사랑 마당에 조성되는 연못은 마당의 한쪽에 치우쳐 보다 작은 규모를 갖는 것이 보통이다.여러 채로 구성되는 중상류 주거에서 각 채의 배치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면을 에워싸는 형식이 일반적이다. 이 때 안채와 사랑채는 각기 앞뒤로 평행하게 놓이게 되며 아래채와 창고 등의 부속채가 그 단부를 막아서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영암 최성호 가옥의 경우는 이와 같은 채 구성방식의 대표적인 예로 보인다. 비록 원래의 진입 방향은 현재와는 반대였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안마당의 구성이라는 차원에서는 차이가 없다. 보성 문형식 가옥의 경우도 비슷한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대지의 전후 방향으로의 경사가 심하여 사랑을 겸하는 별당채가 안마당보다 한단 높은 축단 위에 올라가 있다. 대지 내 경사를 축단을 이용하여 처리하는 일은 전남 지역의 주거에서 흔히 발견되는 모습이다.- 전남 지역의 주거건축의 외부공간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열된 각 채들을 담장과 문을 이용하여 구획하고, 그들 사이의 연결을 개방적으로 할 경우는 문을 통하여, 폐쇄적으로 할 경우는 문간을 통하여 꺾이어 진입하도록 하는 수법을 사용한다. 독립적인 채의 구성으로 말미암은 외부공간의 개방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수목과 연못을 사용하고 또 각 마당의 수평적 높이에 차이를 두어 공간적 영역성을 확보하는 것을 특성으로 볼 수 있다. 2. 마을공동체와 모정우리나라의 마을에 대한 최초의 연구자인 선생영조의 기록에 따르면, 전남지역은 경북지역 다음으로 씨족마을이 분포가 많은 지역이다. 그러나 건축사적 차원에서 본다면, 경북 지방의 하회나 양동 마을과 같이 마을 내에 오래된 주거 건축물들을 다량으로 유지하고 있는 곳은 없고, 그 대부분이 19세기 이후의 건축들로 채워져 있다. 비교적 전통적인 건축 유적을 잘 유지하고 있는 곳으로는 장흥의 방촌마을과 보성의 강골마을, 화순의 월곡마을과 나주의 도래마을 등이 알려져 있고, 최근 근대 시기의 정주환경 변화에 초점이 모아지면서 담양의 창평 등이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 장흥의 방촌마을은 장흥 위씨의 씨족마을로 조선후기 실학의 대가인 존재 위백규를 배출한 마을이다. 최초의 입향은 임란 직후인 1600년대 초반의 일이며, 이후 '수등들'이라고 부르는 평야를 둘러 7개의 동네가 모두 장흥 위씨의 집거촌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여러 개의 동네가 가운데 들판을 둘러싸면서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마을을 구성하는 경우는 다른 예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것이다. - 화순의 월곡마을은 제주 양씨들의 집성촌으로 조선 성종대의 문신이자 산수화의 대가인 학포 양팽손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방촌마을이 전란을 피하기 위한 이동이었던 것과는 달리, 월곡마을은 학포공의 절친한 친구인 조광조의 적거지를 쫓아 이동한 것으로, 조선 전기 사족의 이동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마을의 규모는 약 32채로 작은 편이나, 마을 뒷편 고개 너머로 또다른 제주 양씨의 집거촌인 '버들골'이 있고, 마을 어귀에는 효자 정려와 솟대, 모정 등의 공동체적 기념물이 있어 씨족마을의 경관을 잘 유지하고 있다. - 나주의 도래마을은 풍산 홍씨의 씨족마을이다. 마을 내에 양벽정과 괴고정 등 정자를 비롯한 모정은 물론, 마을회관과 공동 구매시설과 마을 창고 등 공동체적 시설물이 잘 갖추어져 있다. 월곡마을과 마찬가지로 등뼈를 이루는 큰 길을 따라 각 주호로 통하는 2차적 위계의 길들이 큰길과 직각으로 나란히 뻗어 있다. 이러한 골목길의 형태는 가운데 큰 길을 중심으로 나무가지형으로 뻗어 나가는 계곡형 입지의 마을과는 다른 패턴을 보여주는 것이며, 전남 지역의 정주형태를 특징짓는 요소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큰 길은 정주지와 농경지를 가르는 경계선 역할을 하며, 이 큰 길과 마을이 만나는 가운데 부분에 모정이나 마을회관, 마을창고 등의 시설이 들어서게 된다. 전면에 넓게 놓인 농경지로의 출입을 용이하게 하고, 농경지를 최대한 보호하기 위하여 정주지가 산기슭으로 물러 앉은 결과로 보여진다.- 보성의 강골마을은 다른 세 곳의 마을과 마찬가지로 마을내에 여러 채의 문화재 주택을 가지고 있는 곳으로 광주 이씨의 씨족마을이다. 주변의 큰 벌판을 뒤로하고 돌아앉은 모습은 월곡마을과 같은데, 바다쪽으로 열린 계곡의 남사면과 동사면에 전후 2열의 띠를 이루며 주거지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강골마을은 1930년대의 득량만 방조제 완공으로 마을 주변이 급격한 성장을 하게 되면서 마을 내부의 공간구조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즉, 마을 출입구의 변화에 따른 주거지 개발축의 변화와 대지의 압박에 따른 문간채 처리방식 및 길과의 관계 변화 등을 초래하였는데, 이러한 변화의 양상은 근대에 대한 농촌의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향후 보다 엄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 이 외에도 담양군 창평면 소재지의 고씨 마을이 최근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고있는데, 창평은 근대기 신학문 전파의 요람으로서 개화한 들의 근대적 정주환경 구축의 단서를 가지고있는 것으로 기대된다. 모정은 이미 여러 연구자들의 연구결과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전남을 포함하는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공동체적 시설물로 특기할 만하다.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이 많음에도 그에 상응하는 건축적 유구가 부족한 전남 지역의 주거문화를 고려할 때, 비록 실제의 건축연대는 오래지 않지만, 그 형식에 있어서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모정은 전남 지역의 정주환경 연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모정은 건축 형식적인 측면에서 지나치게 단순한 만큼, 마치 일본의 신사가 식년천궁(式年遷宮) 제도에 의하여 고식을 유지해 온 것과 마찬가지로, 고식을 보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또한 모정은 도서지방을 제외한 전남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만큼 국지적인 문화권을 구분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필자가 그 호칭 및 분포빈도, 건축 형식의 분포도를 조사하여 본 결과, 발견빈도는 평야의 분포와 밀접하게 관계 있어 모정이 논농사지역의 시설물이라는 가정을 하게 되었으며, 호칭은 전북과 연접한 지역에서 '모정', 영산강 중류지역에서 '동각', 영산강 상류지역에서 '시정' 등의 용어가 사용되는 것과 함께 전반적으로는 '우산각'이라는 호칭이 폭넓게 사용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또한 호칭의 다양성과 건축 형식 및 규모의 면에서 영산강 중류지역의 나주, 영암이 다른 지역에 비해 단연 우세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모정이 가지고있는 또 다른 의의는 그것이 살아있는 농촌공동체의 상징이라는 점이다. 1993년의 조사에서 조사 대상 162개의 모정 가운데 60% 이상이 1980년 이후에 신축한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모정이 현재의 농촌 마을에서도 훌륭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최근의 도시 집합주거에서 세워지고 있는 '아파트 정자'도 그 기능과 형태의 근원이 모정에 이어져 있음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Ⅲ. 결 론이상과 같이 조선시대 상류주거의 배치형태를 분석한 결과 좌향으로는 남·서향이 17채로 46%를 차지하고 그 다음이 남·동향으로 24.3%을 차지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산간지방의 주거에서는 동향이 우위를 차지한다면 내륙인 호남지방은 남향이 우위를 차지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배치유형으로는 마당구성형식과, 동 구성형식으로 나누어지는데 일반형이 24채를 차지하며 안채의 동구성 형식에서는 41가옥 중 一자형이 26채를, 간분화 형식에서는 겹집(22채)에 일렬형배(32채)치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음을 알 수 있다.사랑채 또한 동구성에서는 별동형이 28채를 차지하고 간분화에서는 퇴간집이 18채를 차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전남 지역 주거건축의 특성을 외부공간의 구성과 마을 공동체와 모정의 운영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하지만 중상류 주거에서는 건축주의 경제력과 의지를 바탕으로 당시의 장인들의 기법이나 생활 풍속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렇듯 일정한 지역적 범위 내에 있는 건축물의 공통적 특성을 확인하는 일은 지방사의 정립을 위해서는 물론, 다른 지역과의 비교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http://www.livingportfolio.com/school/school_house08.asp http://www.homun.or.kr/data/2sebu_chui_004.hwp http://www.khousing.or.kr/nonmun/12-3/허진석12-3.PDF http://www.dongbuic.org/build/board/upload/한옥.hwp http://web.edunet4u.net/~nschool/house/h2-4-2.htm

좀 길지만 봐주세염..
ㅋㅋ
도움이 돼셧으면 하넴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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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옷차림만 알려드리겠습니다.

조선시대때는 여름에 사람들이 등등거리라는 것을 만들어서 입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모시와 삼베로 만든옷으로 여름에 입었는데 그것을 만들려면 식물에 있는줄기를 뽑아서 삼베와모시를 만드는데 모시는 여자가 거의 입고 삼베는 남자가 거의 입었습니다.

하지만 삼베를 만져보면 까끌까끌하지만 옷에구멍으로 바람이 잘 통해서  아주 시원하다고 합니다.

모시도 삼베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겨울에는 비단으로 입는것으로 알고 있는데 옛날에는 양반들이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ㅎㅎ 전 이것밖에 몰라서 여 ㅈㅅㅈ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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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들의 신분은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신분에 따라 하는 일이 서로 달랐다.


-★양반:
1.조선의 상류 계급으로 백성들을 지배 하였다.
2.유학을 공부하고 과거 시험을 통하여 관리가 된 후에 나라를 다스리는 데 참여하였다.
3.선비로서 바른 생활을 하여 백성들의 모범이 되도록 요구하였다.

-★중인:
1.양반보다 낮은 신분으로 의학, 기술 등에 뛰어난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다.
2.대개 양반을 도와 관청 등에서 일을 하였다.


-★상민:
1.백성들의 대부분을 이루는 사람들이다.
2.주로 농사짓는 일을 하였다.
3.수공업, 상업 등을 하기도 하였다.
4.세금을 내고, 군대에 가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5.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기 때문에 관리가 될 수도 없었다.

-★천민:
1.양반집, 관청 등에서 종이나 노비로 일을 하였다.
2.갓바치, 백정 등 험한 일을 주로 하였다.
3.향, 소, 부곡 등에서 따로 사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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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보 유용하게 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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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건축1. 조선시대 건축의 의의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건축 양식이 그대로 전승되었으나, 차차 다포계양식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 왕조는 모든 면에서 형식 위주로 치우쳐 건축에서도 고려대 주심포계 양식을 지양하고 장려 웅대한 다포계 양식을 더욱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공포 부분에서 가장 심하게 눈에 띄는데, 고려대 주심포계 공포 양식이 간략화되어 첨차가 마침내 상하가 1매의 판재로 겹쳐져 짜여지고 윤곽의 조각이 장식화된 '익공계'건축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주심포계 양식의 건물은 고려대의 다포계 양식에 한층 더 장식화된 부재들을 추가 삽입하여 기능에 알맞은 구성미를 잃게 하였습니다.다포계 건축 양식에서 심원사 보광전, 석왕사 응진전, 서울 남대문 등의 건물은 다포계양식의 정통수법을 그대로 이어온 14세기 후반기에서 15세기 중반기의 건물입니다. 그러나, 15세기 후반기에 들어와 건립된 안변 가학루의 양식을 보면 건물 내부에 복잡한 초화문 조각의 부재가 많이 나오는데 이와 같은 건물은 같은 연대의 창경궁 명전전, 홍화문에서 볼 수 있으며, 가장 잘 나타난 건물은 개심사 대웅전입니다. 개심사 대웅전은 공포가 순수한 다포계 공포 양식으로 되어있으나, 내부의 가구 형식은 고려대 주심포계 절충 양식과 같은 양식으로 되어있어 순수한 다포계 양식이라 할 수 없고, 다포계 양식속에 주심포계의 가구 수법이 절충된 다포계 절충 양식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와 같은 건물로는 석왕사 호지문, 평양 보통문 등이 있습니다. 특히, 조선시대의 건축은 임진왜란을 격으면서 많은 중요한 건물들이 소실 되었고, 그후 인조때에 또다시 만주족의 침입으로 건축계는 차츰 침체되기 시작하였으며 건축양식에도 큰 변화를 가져와 전체적으로 작풍이 섬약하게 되었고, 세부적으로 정돈이 흩어진 복잡성을 띄게 되었다. 조선후기 건축물의 특성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한국화된 장식적 요소가 짙어지는 반면 구조상 불합리한 낭비 성향이 두드러 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건립된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경회루는 한국화된 건축의 하나도 부끄럽지 않은 우리 건축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조선시대 전통 주거공간의 형성배경ⓐ 인문·지리적 배경현대사회와 과거사회의 가장 큰 차이점 중의 하나는 신분계급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 것이다. 사회의 신분계층이 나뉘어졌을 때 주택의 형태도 그 안에 사는 사람의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방법의 하나가 되었다. 상류계층에서는 자신들의 신분과 지위를 주택을 통해서 과시하려 하였고, 재산을 모은 하류계층에서는 자신들의 주택도 상류주택과 비슷하게 흉내내는 사례가 만연했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신분에 맞는 주택의 규모와 형태, 재료 등을 법으로 제한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이렇듯 신분에 따라 주택의 규모와 형태, 재료 등을 법으로 제한하는 것을 가사규제(家舍規制) 라고 하며, 가사규제는 삼국시대부터 행하여 졌으며 주거건축의 신분, 계층적 특성을 이루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지리적인 배경을 살펴보면,우선 기후적으로 한국의 기후는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기후와의 점이지대(移地) 에 위치하여 추운 북부지방과 따뜻한 남부지방으로 나뉘고 사계절이 분명하고 장마철 이외에는 항상 청명하고 건조한 날씨를 보인다. 춥고 긴 겨울과 더운 여름은 주택에 있어서 온돌과 마루라는 특성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지형적으로는 산지와 소구릉의 기복이 많고 대부분의 지표는 화강암으로 덮여 임업에 불리하게 되어있다. 양질의 목재가 많이 생산되는 일본에 비해 석재를 많이 사용하는 목조건축문화를 가지게 되었으며,우리 나라의 독특한 낮은 산세를 본뜬 곡선미가 탁월한 건축 조형미를 가지게 되었다.ⓑ 사상적 배경(1) 유교사상유교의 의미는 경전과 함께 유교전통의 핵심적 내용으로 전승되어온 예 의 문제로 유교에 있어서 예는 내용과 형식, 즉 사상과 의식을 통합하는 연결고리로써의 의미를 갖는다. 곧 유교사상의 본질적 내용이 형식적 표현을 통하여 실현되는 과정을 제도화 내지 의례화하는 데에서 바로 예의 문제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는 유교인의 생활 전반에 걸쳐 있는 것이며, 유교사상의 근본관념으로부터 가장 구체적인 일상생활 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영역을 갖게 된다. 이러한 유교에 대한 이념은 조선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던 당시의 정치세력들이 조선왕조의 왕권의 정당성과 강화를 위해 구국이념으로 답변확정되게 되었다. 유교사상은 정치이념으로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건축적으로는 공간의 위계성,공간의 분화 등과 같은 형태가 나타나게되었다.(2) 풍수지리사상풍수지리설은 오래 전부터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건축 등 여러 분야에 걸쳐서 응용되고 전승되었다. 풍수지리라 함은 지중(地中)에 일종의 신비한 기(氣)가 있어 이것이 인간의 길흉화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으로 생과 사를 구별하여 생자 를 양(陽) 이라 하고, 사자를 음(陰) 이라 하였으며, 생자의 주택지를 양택(陽宅), 그 주위를 양기(陽基) 라 하여, 인간의 주거할 수 있는 땅으로 인간이 주거할 수 있는 좁은 의미의 장소를 말한 양택론을 민간 건축 문화를 지배해온 원리로 삼았다3. 조선시대 건축의 구분ⓐ 계층별 구분1) 상류일반적으로 조선의 상류주택은 내외사상으로 여자들이 사용하는 "안" 공간과 남자들이 사용하는 "밖"의 공간으로 구분이 되어집니다. 안공간인 안채는 집안의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의 공간이며 주택의 안쪽에 위치하였으며 가부장적 제도의 권위를 상징하는 사랑채는 밖 공간으로 집안의 가부장과 장자를 비롯한 남자들이 글공부를 하거나 풍류를 즐기던 공간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전통주택은 상하 신분제도의 영향으로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공간을 다르게 배치하였는데 상(上)의 공간인 안채와 사랑채는 양반들이, 하(下) 공간인 행랑채는 대문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머슴들이 기거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중문간 행랑채는 중(中)의 공간으로 중간계충인 청지기가 거처하는 공간이었으며 이들 공간들은 커다란 한 울타리안에 작은 담장을 세우거나 채를 분리하여 구획하였습니다. 이렇게 상류주택은 신분과 남녀, 장유별로 공간을 분리하여 대가족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당시의 가족 생활을 고려한 공간 배치를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상류주택의 건물내부① 내벽 - 우리나라 주택의 벽은 대개가 흙벽이며, 중류 이상의 주택에 있어서는 그 내벽은 흰 석회로 발라서 회벽으로 만드는 것이 많으나 벽의 균열과 방풍을 고려하여 종이를 바르기도 한다. 또 상류주택에 있어서는 명주를 벽지 대신 사용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벽에 서예나 그림을 걸어 놓고 그것을 늘 애호하기도 한다.② 천장 - 대부분이 종이로 만든 천장이며, 그 천장에 바르는 종이는 역시 벽의 그것과 거의 같은 종류의 색지가 사용된다. 지붕 밑에 반자틀을 짜 문양 이 아름다운 벽지를 바르거나 혹은 천장틀을 짜서 널을 붙여 널천장으로 한다.③ 문.창 - 대개 이중문이며 이는 차가운 기온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방한적인 고려라고 생각된다. 덧문의 형태는 주로 안팎에 종이를 막바른 장지문이 많으며 이런 문은 모두가 양여닫이로 되는 것이다. 창은 채광통풍을 위한 것으로 문과 창에서는 살문을 볼 수 있다. 문살문은 세 살문, 완자문, 아자문, 혼화문 등이 있으며 상류주택에서는 동적이고 화려하며 우아한 완자문 혹은 새로운 멋에 넘쳐흐르는 혼화문 을 사용한다.④ 바닥 - 온돌방의 바닥과 마루방의 바닥이 있다. 대개 온돌방의 바닥은 별다른 특색이 없고 바닥위에 문양이 표현된 방석이나 돗자리를 깔았다. 마루바 닥은 보통 장마루이고 고급주택에서는 정자형 혹은 아자형으로 깐다.2) 민가민가(民家)란 백성의 집이란 뜻이지만 일반적으로 중하류층의 일반 서민들이 살았던 집을'민가'라 부릅니다. 초가지붕은 민가를 상징할 정도로 가장 흔히 쓰인 서민주택의 지붕형태이며 민가의 형태는 지형적, 기후적 여건과 지방의 경제상태 등에 따라 규모나 건물 배치 방식이 달랐으며 특히 기후의 영향으로 지방마다 각기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민들은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했으므로 주택을 지을때도 장식적인 면보다는 기능적인 면을 더 중시하여 대부분 방과 대청, 부엌으로 구성된 단순한 구조를 지녔습니다. 한국 전통가옥의 지붕으로는 기와지붕과 초가지붕 두 가지가 가장 보편적인데 부유한 집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올렸고 서민들이 거주하는 일반 농가에서는 대부분 볏짚으로 이은 초가지붕을 얹었습니다. 초가지붕은 겨울에는 열을 뺏기지 않고 여름에는 강렬한 태양열을 차단해주며 구하기 쉽고 비도 잘 스며 들지 않아 지붕의 재료로 가장 널리 쓰였습니다.ⓑ 공간별 구분1) 구조적분류- 안채 안공간인 안채는 집안의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의 공간으로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에 위치하였으며 보통 안방, 안대청, 건넌방, 부엌으로 구성되며 안채의 안방은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실내 공간중에서도 상징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출산, 임종 등 집안의 중요한 일이 이뤄지던 여성들의 주된 생활 공간이었습니다. 안채는 위치상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인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는 여성들의 사회생활을 꺼려하여 남편이나 친척외에는 남자들을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등 여성들의 외부와의 출입을 제한하던 당시 사회상을 엿볼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채와 달리 가족들의 의식주를 전담하는 공간으로 가구들도 의복과 침구류 보관을 위한 수납용 가구등이 놓였습니다. - 사랑채사랑채는 외부로부터 온 손님들에게 숙식을 대접하는 장소로 쓰이거나 이웃이나 친지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고 집안 어른이 어린 자녀들에게 학문과 교양을 교육하는 장소이기도 하였으며 사대부 남자들이 모여서 학문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고 시를 짓거나 거문고 등의 악기를 연주하며 수준높은 문화생활을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부유한 집안의 경우는 사랑채가 독립된 건물로 있었지만 일반적인 농가에서는 주로 대문 가까이의 바깥쪽 방을 사랑방으로 정해 남자들의 공간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사랑채는 보통 사랑대청과 사랑방으로 구성되며 부유한 집안은 누마루를 마련하여 한층 멋을 살렸습니다. 사랑방은 사랑채의 주요 공간으로 남자주인과 귀한 귀한 손님이 기거하는 공간이다. 상류주택의 사랑방은 기거와 침식외에도 독서, 예술활동, 접대 등의 많은 행위가 이루어졌던 중요한 공간이었으며 유학을 장려하여 문필문학을 존중하고 경전을 연구하는 풍조가 만연하였던 조선시대에는 사랑방문화 또한 발달하였습니다. 또한 금욕적 유교생활을 지향하는 선비의식의 영향으로 사랑방의 가구나 장식은 매우 간소하게 꾸며져 보통 몇개의 방석과 작은 책상, 장농과 책장, 문방소품 등으로 구성되었집니다. - 사당채조선시대에는 조상숭배의식의 정착과 함께 중상류의 주택에는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 안채의 안대청 뒤쪽이나 사랑채 뒤쪽 제일 높은 곳에 '사당'이라는 의례 공간을 마련하기도 하였습니다. 보통 사당에는 4개의 신위를 모시는데 서쪽부터 고조의 신위, 증조의 신위, 할아버지의 신위를 모시며 마지막에 부모의 신위를 모시고 각 위마다 탁자를 놓으며 향탁은 최존위앞에 놓았다. 대개의 중상류 주택은 가묘법에 따라 사당을 건축하지만 사당이 없는 집도 있어 그런집에서는 대청마루에 벽감을 설치하여 신위를 모셨습니다.- 행랑채전통주택은 상하 신분제도의 영향으로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공간을 다르게 배치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안의 경우에는 안채와 사랑채 외에도 하인들이 기거하거나 곡식등을 저장해두는 창고로서 쓰였던 행랑채가 따로 있었으며 하(下) 공간인 행랑채는 그 주택의 규모에 따라 "바깥행랑채"와 "중문간 행랑채"도 존재하였습니다. 바깥행랑채는 대문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집안에서 가장 신분이 낮은 머슴들이 기거하는 공간이었으며 중문간 행랑채는 양반들이 기거하는 안채, 사랑채와의 중(中)의 공간으로 중간계충인 청지기가 거처하였습니다. 이들 공간들은 커다란 한 울타리안에 작은 담장을 세우거나 채를 분리하여 구획하였습니다. 이렇게 상류주택은 신분과 남녀별, 장유별로 공간을 분리하여 대가족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당시의 가족생활을 고려한 공간 배치를 하였습니다.- 별당채규모가 있는 집안의 가옥에는 별당이 집의 뒤, 안채의 뒷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이름이 다르게 불리웠습니다. 결혼전의 딸들이 기거하는 별당은 "초당"으로 불리웠으며 또한 결혼전의 남자 아이들의 글공부를 위해 "서당"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집도 있었습니다. - 곳간채중상류층의 주택중에서도 부유한 집안은 수십칸 규모의 주택에서 살았으며 이들 "칸"수가 많은 전통주택에는 곳간채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어 오래 저장해두어야 할 음식이나 여러가지 생활용품들을 저장, 보관하였습니다. 2) 기능적분류- 대청안채의 안방과 건넌방, 사랑채의 사랑큰방앞의 넓은 마루를 '대청'이라 하였습니다. 대청은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의식과 권위를 표현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며 각각의 방을 연결하는 공간으로 오늘날 주택의 거실에 해당하는 공간입니다. 여름철에 분합문을 서까래 밑에 내려진 들쇠에 걸어 올려 놓으면 대청은 열린공간으로 생활의 중심이 되는 공간이 되었으며 겨울철에는 분합문을 닫아 한기를 막고 대청공간을 아늑한 실점수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안채에 있는 것을 안대청이라하며 사랑채에 면해있으면 사랑대청이라 하였습니다. 대청은 한여름의 무더위를 이기기위해 현명하게 고안한 가옥의 구조라고 할 수 있는데 전면 또는 사방이 트여있어 엄밀히 말하면 실내라고 할 수 없으며 대청의 바닥은 상류주택이나 민가나 일반적으로 우물마루가 쓰여졌습니다.- 방전통주택에서 방은 열린공간인 대청과 반대되는 폐쇄적인 의미를 지닌 개인적인 공간입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바닥에 바로 앉아서 생활하기 때문에 방은 언제나 청결하게 유지하였으며 방의 내부는 모두 벽지나 천장지를 발랐으며 바닥은 장판지로 마감하였습니다. 잠을 자고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는 전통가옥에서의 방은 잠을 잘때는 침대대신 따뜻한 구들 방바닥위에 이부자리를 펴고 자고 낮에는 의자대신 방석에 앉아 지내는 좌식생활을 하도록 되어있는 공간입니다. - 사랑방 보통 사랑대청과 사랑방으로 이루어진 사랑채의 사랑방은 집안의 가장인 남자 어른이 잠을 자거나 식사를 하는 방으로 남자들의 공간입니다. 사랑채는 외부로부터 온 손님들에게 숙식을 대접하는 장소로 쓰이며 이웃이나 친지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고 집안 어른이 어린 자녀들에게 학문과 교양을 교육하는 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부유한 집안의 경우는 사랑채가 독립된 건물이었지만 일반적인 농가에서는 주로 대문가까이의 바깥쪽 방을 사랑방으로 정해 남자들의 공간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부엌불을 지펴서 각종음식을 조리하는 공간인 부엌은 주로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에 안방과 바로 인접하여 위치하였으며 일부 대가들의 집에는 반빗간이라하여 별채로 독립시키기도 하였다. 전통한옥의 부엌은 작업 동선을 고려해볼 때 매우 불편한 구조를 지녔으며 부엌 바닥을 일반적으로 방바닥보다 75-90cm 정도 낮게하여 아궁이에서 땐 불길을 방고래로 빨아들이도록 되어 있는 "온돌구조" 때문이었습니다. 부엌에는 2~4개의 아궁이가 있었으며 불을 때는 아궁이위 부뚜막에는 솥을 걸어 두었습니다. 아궁이는 안방과 면한 벽쪽에 설치하여 음식물을 조리하면서 동시에 방을 데우도록 하였습니다. 부엌은 주택의 규모에 따라 안방과 건넌방에 각각 위치하는데 안방과 접한 부엌이 주된 조리 공간이었으며 건넌방쪽은 물을 데우는데 쓰이는 등 보조적인 공간으로 이용되었습니다. - 사당 조상숭배의식의 정착과 함께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 안채의 안대청 뒤쪽이나 사랑채 뒤쪽 제일 높은 곳에 "사당'이라는 의례 공간을 마련하였으며 보통 사당에는 4개의 신위를 모시는데 서쪽부터 고조의 신위, 증조의 신위, 할아버지의 신위를 모시며 마지막에 부모의 신위를 모십니다. 각 위 앞에는 탁자를 놓으며 향탁은 최 존위앞에 놓았습니다. 대개의 중상류 주택은 가묘법에 따라 사당을 건축하지만 사당이 없는 집도 있어 그런집에서는 대청마루에 벽감을 설치하여 신위를 모셨습니다. - 찬방 "찬방" 또는 "찬마루"라고 불리는 이곳은 오늘날의 주택의 부엌방과 다용도실 정도에 해당하는 공간으로 반가나 중, 상류 지방의 가옥에서 볼 수 있는 부엌과 인접한 공간입니다. 부엌과는 문으로 연결되어 있어 부엌에서 조리된 음식을 이곳에서 상에 올려 안방, 사랑방 등으로 내갔으며 간단한 음식은 이곳에서 조리하였습니다. 이곳에는 상을 차리는데 필요한 그릇, 식기 등이 마련되어 있으며 음식물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로도 쓰였습니다.- 장독대우리의 자연환경은 잘 썩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음식을 보관할 때도 발효시키는 방법이 가장 좋았다. 그런만큼 젖갈류를 비롯한 발효음식이 매우 잘 발달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추장, 된장, 간장, 김치, 젖갈류 등을 보관할 장독대는 실생활과 어울려 중요한 요소였다. 발효음식은 햇빛이 잘들고 통풍이 잘되는 양지바른 곳에 두었는데, 통풍을 위해서 장독대는 지표에서 일정한 높이에 두었다. 또한 장독 하나 하나에도 돌로 동아리를 해서 받치기도 하였다. 장독은 조리를 하는 부엌이나 우물과도 가까워야하기 때문에 대부분 반빗간 뒤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안채로 반빗간이 합쳐짐에 따라서 안채 부엌과 가까운 곳에 장독을 설치하였는데, 주로 안채의 후원이나 옆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장독은 음식을 보관하는 곳이지만 정한수를 떠 놓고 소원을 비는 곳이기도 하여서 정신적인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우물살림집에서는 지표의 물도 중요하지만 우물을 통해 얻어지는 지하수맥도 중히 여겼다. 우물은 삼국시대 이미 집집에 있었다. 굴착하는 도구와 기술이 일찍부터 발달해 있었다. 벽화에 묘사되어 있는 우물을 보면 지표위로 우물틀을 설치하고 있다. '井'자형으로 방틀을 짜고 물을 들어 올리는 도루레를 설치하는 등의 과학성을 보이고 있다. 우물 옆에는 물확과 연결 수조가 있어서 부엌이나 방앗간에 물길이 닿도록 하기도 한다.우물은 물을 제공하는 것 외에도 냉장고의 역할을 한다. 빙고가 시설되지 않는 일반민가에서는 여름에 과일이나 음식을 우물에 끈을 매 보관했다가 먹는다. 어느 곳에서는 우물 옆에 샘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 루각건물을 지은 다음 남쪽은 사창으로 하고 나머지 3면은 판벽으로 막아 음식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뒷간지방에서는 잿간에 변소를 마련하는 경우가 있다. 부춧돌 두 개를 놓고 한쪽 벽에는 주걱처럼 생긴 부삽이나 고무레 놓여 있다. 뒷쪽에 재를 용변을 보기전에 일정양 부춧돌 사이에 끌어다 놓는다. 그리고 용변을 본 후에는 주걱을 이용하여 재에 말아 한쪽에 치워뒀다가 거름으로 이용한다. 재는 탈취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요즘의 수세식 보다도 냄새가 안난다. 또 거름으로 활용하니 일석이조다. 화장실을 잿간 위에 높게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떨어지는 가속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재로 감싸진다. 제주도에서 '통시'라고 하는 유형은 뒷간이 돼지울간 위에 마련된다. 일을 보면 돼지가 달려들어 깨끗이 치워준다. 화장실을 지면으로부터 높게 설치하는 것은 오랜역사를 갖고 있는 것으로 맹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화장실은 정착과 농경생활이 시작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동생활에서는 이동식 화장실인 요강이나 매화틀이 사용되었다. 또 특별한 화장실의 시설없이 노천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것은 현재 서역의 이동식 몽고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생활습속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역사 이래로 발달된 많은 화장실을 갖고 있는 것이 또한 한옥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안채 뒤쪽에는 여인들이 이용하는 후원공간이 마련된다. 여기에는 여인들이 뒷물을 할 수 있는 북수간(北水間)이 마련된다.4. 조선시대 건축의 세부구조(한옥의 경우)ⓐ 온돌 온돌은 열의 전도, 복사, 대류를 이용한 한국 고유의 난방 방식이다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우리나라는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는 춥기때문에 가옥의 구조에도 계절적 온도 변화를 고려하였다. 방을 따뜻하게 데우는 구들과 여름이면 사방으로 바람이 통하도록 되어있는 시원한 대청이 공존하는 가옥 구조를 만들었다. 추운날에는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바닥 밑의 구들장을 데워 방안을 따뜻하게 하였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그 열기로 인해서 음식이 조리되며 경사진 부넘기를 넘은 열과 연기는 아궁이로 내닫지 않고 개자리에 이른다. 열과 연기는 개자리에서 머물다가 굴뚝을 통해 빠져 나가므로 구들은 오랫동안 온기를 유지할 수 있다.ⓑ 창 전통주택에서는 채광과 통풍을 위한 '창'과 드나들기 위한 '문'을 엄격히 구분하기가 어렵다.그러나 일반적으로 형태가 같더라도 머름대가 있으면 창이고 머름대가 없으면 문으로 구분한다. 창은 채광과 통풍을 위하여 대개 홑창호지를 발랐다. 오늘날의 창에 유리를 대는 것과 달리 창호지를 발라 외부와 내부를 단절시키지 않고 공기가 통하도록 하였으며 은은한 채광을 살렸다. 창호지나 문풍지는 공기가 통하므로 여닫지 않고 고정된 붙박이 창인 봉창을 만들기도 했다.ⓒ 창호지 한국의 전통가옥에서 문과 창문은 격자무늬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무늬의 나무 창살을 만든후 그 위에 한지를 발라 채광과 통풍을 고려하였다. 투명한 유리가 아니라 한지를 통해 비쳐 들어오는 햇살은 강렬하지 않고 은은하여 방안 분위기를 한층 차분하고 아늑하게 만들어준다. 한지는 채광뿐 아니라 통풍에도 유리하여 조금씩이나마 방안의 탁한 공기가 빠져나가고 밖의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기 떄문에 공기의 순환을 시켜준다. 이렇게 공기를 순환시켜줌으로써 뜨거운 구들 바닥으로 인해서 건조해지기 쉬운 방안 공기의 온도와 습도를 항시 적당하게 유지 시켜 주는 것이다.ⓓ 문 출입문의 위치나 용도에 따라 조선시대의 '문'은 모양이 다양했다. 실외의 문에는 대문, 중문, 협문 등이 있는데 대문은 집의 정면에 있어서 집을 대표하는 문이며 평상시에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조그맣게 낸 문은 협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랑채와 안채 사이와 같은 곳에 있어서 집의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통하는 문은 중문이라고 한다. 문은 통과한다는 의미가 더 크게 부각되므로 정성을 들여 아름답게 치장을 하며 특별한 이름을 붙여 현판을 걸기도 한다. 대청에는 들어열개문인 분합문을 설치했으며 대청뒷면이나 부엌의 출입문으로는 판장문이라 불리는 두꺼운 문을 주로 설치했다.ⓔ 기단 기단이란 전통 가옥에서 우천시에 빗물이 튀는것과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습기를 피하고 동시에 건물의 군위를 높히기 위하여 건물 밑부분에 돌을 쌓거나 다른 자재를 써서 쌓아 올린 단인데, 돌로만 쌓기도 하며 기와와 벽돌을 또는 돌과 벽돌을 섞어 쌓기도 한다. 한국의 전통한옥 중에서 상류층의 주택은 3척(90cm)-4척(120cm) 정도 높이의 화강석 기단위에 축조되는 것이 기본이다. 이러한 기단의 높이는 거주자의 사회적 지위와 가문의 권위에 비례하여 권위가 높을수록 높이 지어져 안에서 밖을 아래로 내려다 보도록 되어있다.ⓕ 누마루 주로 사랑채에 설치되었던 누마루는 기단없이 기둥위에 설치된 형태로 원두막처럼 마루바닥 밑으로 바람이 통하도록 사방이 트인 노출공간이다. 누마루는 대청처럼 여름에는 문을 걸어 올려 주변의 자연의 운치를 즐기는 공간으로 사용했으며 겨울철에는 문을 닫아 한기를 막았다.ⓖ 다락 다락은 안방의 아랫목쪽 벽과 부엌과 면한 벽쪽에 방바닥에서 1.5척 (45cm)되는곳에 설치된 수납공간이다이 다락에는 꿀단지 등 귀한 음식에서부터 가재도구 등 살림살이에 필요한 잡다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곳이다.ⓗ 담 한국 전통 가옥의 담은 치안을 위해서 높이 쌓거나 위협적으로 쌓는 일이 없이 나즈막하고 은은한 장식을 하여 시적(詩的)인 정취가 있다. 또한 담장을 장식한 무늬는 풍요와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많았다.일반 농가의 경우, 지나가는 사람도 담 너머 들여다 볼 수 있을 만큼 나지막 하게 쌓아서 단지 집 밖과 집 안을 구분한다는 의미에서 둘러놓은 경우도 많다. 민가에는 특별히 담장이나 대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경우도 많아서 싸리나무를 집 둘레에 빙 둘러 심어 경계를 나타내거나 아예 대문이 없거나 사립문이 있더라도 늘 열어 놓고 살았다. 문은 닫아놓아 공간을 단절한다는 의미보다는 늘 열어놓고 통과하는 데 더 많은 의미를 두었기 때문에 한국의 문들은 대부분 늘 열려있다★ 한국 전통주거의 주동배치에 관한 연구-호남지방 중·상류주거를 중심으로- Ⅰ. 서 론1.1. 연구의 배경과 목적주거는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상이 구체적이고 종합적으로 투영된 유형적인 사료이며, 민족문화의 가장 구체적인 실상이고, 건축학적으로 볼 때 주거건축은 모든 건축의 규범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주거건축은 조선시대 모든 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 할 수 있고 또 이들 건축공간은 조선시대의 정치, 문화, 사상, 생활감정 등이 집약된 표현체로 볼 수 있다.1970년대 이후 조선시대 주거건축에 대한 연구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어 왔으며 이러한 연구성과에 의하여 주거건축의 전통성 규명과 주거문제의 질적인 향상을 도모하는데는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연구의 관점이 개별적이고 정태적이며 소수의 가옥들을 중심으로 배치계획이나 공간적 특성을 밝히는데 치중하고 있어 전통론을 포함한 이론문제와 양적인 문제를 극복하는데는 미흡하다 할 수 있다.따라서 주거사의 체계화는 주거사를 구성하는 개개의 가옥에 대한 사실의 정확한 조사에서 비롯되며 현존하는 전통주거에 대한 실증적이고 심층적인 연구는 중요한 의의를 지니며 체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전체적인 인식은 건물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 조사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의 구체적인 목적은 다음과 같다.첫째, 현존하는 전남지방 中上流層 주거의 실측 및 문헌조사를 통하여 지역성에 대한 분석과 기존의 문헌 및 자료 등을 비교 분석한 내용을 토대로 자료를 수정 보완하여 전통주거건축의 실증적 자료로 활용하고자 한다.둘째, 주거건축을 형성하는 안채와 사랑채, 부속채를 중심으로 이들의 배치형식 및 상관관계를 규명하고자 한다.셋째, 조선시대 중상류주거의 유형분류를 시도하며 중상류주거의 보편적 구조와 내재된 특성을 규명함으로써 조선시대 중상류주거의 역사적 위치설정 및 성격규정과 중상류주거에 담겨진 내재적 계기성(繼起性)과 발전의 이론을 규명하고자 한다.1-2. 연구 대상 및 범위본 연구의 대상은 호남지역에 존재하는 전통주거건축물로서, 국가에서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여 국가지정 또는 시·도지정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는 가옥으로, 일정 규모이상을 갖춘 가옥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전통주거건축중 2001년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와가(瓦家)43가옥 중 문화재 수리관계로(나주 홍기헌 가옥) 실측을 하지 못한 곳과 해남 녹우당을 제외한 41가옥을 선정하여 동촌별, 마을별로 가옥을 비교하고자 한다. 또한 조사 대상의 가옥을 조선시대로 한정한 이유로는 어느 시대보다도 유구가 많으며, 보존이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Ⅱ전남지역 중상류 주거의 건축적 특성1. 배치유형1) 마당의 구성형식에 의한 분류.안채와 사랑채에 연관되어 나타나는 안마당 사랑마당과 부속 채와 연관되어 나타나는 행랑마당 혹은 문간마당, 가사작업과, 농작업을 위한 작업마당등이 어떠한 공간적, 기능적 형태로 존재하는가에 의해서 분류한다.(1) 분리형(分離型)각개의 마당이 기능적으로 명확히 구별되고 건물과 담장등에 의해서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類型이다. 이 유형에서 나타나는 마당의 종류는 다양하며(안마당, 사랑마당, 행랑마당, 작업마당, 문간마당, 별당마당, 중사랑마당등), 시기적으로 中期의 안마당에 비해서 後期의 안마당은 공간적 개방도가 높은 편이며 특히 사랑마당의 경우는 後期에는 담장으로만 구획되는 경우가 많으며 中期에 비해서 마당의 면적이 좁은 편이다. 中期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행랑마당은 後期에서는 문간마당으로 변화되며 별도의 농작업을 위한 작업마당이 존재하기도 한다.(2) 일반형(一般型)안마당, 사랑마당은 공간적으로 명확히 구별되나 작업마당, 문간마당, 행랑마당등이 안마당이나 사랑마당에 접속되어 공간적으로는 구분되지 않으나 기능적으로는 분리되어 있는 유형이다. 안밖의 구분을 위하여 中門채가 일반적으로 존재하며 안마당으로 중요한 부속 채들이 집약된다. 이 유형은 조선중기의 향반 층과 조선후기의 地主層 住宅에 보편적인 유형이다. (3) 미분화형(未分化型)마당구분이 안마당과 사랑마당으로 이분되어 안팎의 구분은 있으나 문간마당이나 작업마당등이 안마당이나 사랑마당에 混在되어 있는 유형이다. 별도의 中門채가 업이 사랑마당을 통과하여 사랑채의 측면을 돌아서 안마당으로 진입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어서 진입 과정상의 內外間의 동선구분은 미약하지만 장소간의 內外구분은 엄격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유형은 조선중기 향반층(鄕班層)의 ㅁ字型 주택, 朝鮮後期의 부농층(富農層) 및 경제력이 떨어지는 지주층(地主層) 住宅에 보편적인 유형이다.2) 동구성 형식에 의한 분류 주요 몸채인 사랑채, 안채의 구성형식에 따라 마당이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의해서 분류한다.(1) 별동형(別棟型)사랑채, 안채, 주요 부속 채가 별동으로 구성되며 안마당을 중심으로 주요 부속 채가 위치한다. 주요 몸채(특히 안채의 경우)는 一자형과 ㄱ자형이 보편적이며 드물게 ㄷ자형이 나타난다. 영남북부권을 제외한 조선후기에 건립된 중상류주거에 보편적인 유형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놓이는 위치에 따라 직렬형(二), 병렬형(一 一), 직교형으로 구분된다.(2) ㅁ 字型사랑채, 안채 및 주요 부속 채가 한 몸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마당이 건물로 둘러싸여 외부공간이면서 내부 공간적인 기능을 행하고 있다. 몸채의 구성형식에 따라 완전형(回), 튼ㅁ자형(『』), 날개형으로 구분된다. 지역적으로 영남북부권, 영동권, 충청권, 경기권에 분포되어 있고 조선중기의 중상류주거는 거의 대부분 이 유형에 속한다.(3) 혼합형(混合型)사랑채, 안채는 별동으로 구성되고 주용 부속 채가 안채나 사랑채에 접속되어 안마당이 ㅁ字型으로 형성되는 유형으로 안마당의 공간적 위요감은 별동형(別棟型)보다 높은 편이다. ㅁ字型에 비해 안마당이 넓은 편이며 경제규모가 큰집에서 이 유형이 많이 나타나며 지역적으로는 경기권, 충청권, 영남북부권에서 나타난다. 부속 채 접속형식(接屬形式)에 따라 안채접속형과 사랑채접속형으로 구분된다.2. 외부공간의 구성 - 우리 나라 주거건축의 외부공간은 건축을 하고 남은 여백의 공간이나 단순한 관상의 대상이 아니며, 보다 적극적인 생활 공간으로 계획되고 조성된 것이다. 즉, 우리 나라의 주거건축은 내부공간을 구성하는 채와 외부공간인 마당이 모여 비로소 완전한 생활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이 때 마당은 관련된 각 채의 구성과 어울려 각기 개성 있는 외부공간을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외부공간의 구성 역시 외부공간만을 따로 떼어 내어 생각할 수는 없고, 그와 짝을 이루는 내부공간 즉, 채의 구성 및 형태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 다음에 이야기하겠지만, 전남 지역의 주거건축은 채의 구성형태에 있어 영남지역과는 달리 ㅁ자형의 폐합형을 취하는 예가 드물고, 대부분 一자형을 띠고 있다. 따라서 폐쇄적인 외부공간의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一자형의 채와 함께 담장이나 문 등의 공간적 한정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경우라 할지라도 폐합형의 채 구성에 비해서 공간의 위요도가 떨어지며, 이를 만회하기 위한 방편으로 각 단위 영역 사이에 단차를 두거나 식물 등을 이용하는 예를 쉽게 발견하게 된다. - 영광군에 있는 연안 김씨가는 전남지역의 전형적인 비산비야적인 지세에 자리하고 있는데, 안채 영역과 사랑채 영역, 서당 영역, 사당 영역 등이 각기 마당과 부속채 그리고 담장 등을 이용하여 독립적인 외부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각 영역 사이의 연결은 담장에 부속한 문과 채에 부속한 문간에 의해 이루어진다. 즉, 바깥 마당에서 사랑채로의 진입은 독특한 솟을 삼문 형식을 갖춘 대문간채를 이용하고, 다시 안대문간채를 통해 안채로 들어간다. 사당 마당으로의 출입과 사랑 뒷마당으로의 출입은 담장에 부속한 쪽문을 이용한다. 영광 신호준 가옥의 경우는 대문간 안마당에서 사랑채로 출입하는 곳에 독립적인 문간을 구성한 특이한 예에 속한다. 이것은 다른 부차적인 기능을 갖지 않는 독립적인 중문간으로써, ㄱ자형 평면의 좁은 부분에 문을 달아 진입시 2칸의 깊은 내부공간을 통과하게 하였다. 그래서 대문간에 바싹 붙어있는 사랑채 영역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한다. 아궁이가 놓이는 부엌은 신발을 벗지 않고 출입할 수 있는 유일한 내부공간이기 때문에 채를 통과해야 되는 부차적 동선이 지나가는 곳으로 흔히 이용된다. 그러나 담장과 채로 구획된 공간 간의 이동을 가장 극적으로 연출하는 방법은 문간 등의 내부공간을 통과하면서 진입의 방향을 꺾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는 공간 간의 깊이감을 증대시키는 역할도 한다. - 방촌 위성탁 가옥의 중문간은 사랑채에 부가되어 있으며, 중문간을 지나 바로 안방과 안마당이 드러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중문간 내에서 출입방향을 직각으로 꺾어 안마당 영역을 보호하고 있다. ㅁ자형의 안채를 구성하는 구례 운조루나 해남 녹우당의 경우에도 안마당으로의 진입을 중문간에서 한번 꺾어서 진입하게 한다. 더욱이 구례 운조루의 경우에는 이 중문간에서 사랑채의 뒷마당으로 통하는 출입구를 두었으며, 안채에서 사당으로 통하는 출입 역시 건넌방 부엌을 통하게 하였다. 건물 내의 동선공간을 이용하여 건물의 양쪽에 있는 공간을 연결하는 수법은 공간의 연결보다는 격리에 더욱 비중을 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전남의 주거건축이 一자형의 평면형을 주로 사용함으로써, 보다 개방적인 외부공간을 가질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상과는 차이가 나는 점이다. 一자형 집에서 안채의 뒷마당은 폐합형 주거의 안마당과 같은 정도의 폐쇄성을 갖는다.- 전남의 주거건축 외부공간을 이야기할 때 또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인공적인 연못을 만들어 마당을 조경하는 수법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중상류 주거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많은 유례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보성 강골마을의 이금재 가옥과 이용욱 가옥은 마을의 전면부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데, 두 채 모두 집 앞에 연못을 조영하고 있다. 이들과 같이 주거의 전면에 연못을 조성하는 경우가 방촌마을의 위계환 가옥과 위성탁 가옥에서도 발견되며, 구례 운조루와 해남 녹우당의 경우는 마을로의 주진입구 부근에 대규모의 방지를 둔 예이다. 한편 사랑 마당의 일부에 방지를 조영한 예로는 해남의 녹우당과 방촌의 위성룡가옥, 영광의 연안 김씨가 등에서 발견된다. 주거 외부에 놓이는 것이 진입로에 인접하여 비교적 대규모로 조성되는 것에 비하여 사랑 마당에 조성되는 연못은 마당의 한쪽에 치우쳐 보다 작은 규모를 갖는 것이 보통이다.여러 채로 구성되는 중상류 주거에서 각 채의 배치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면을 에워싸는 형식이 일반적이다. 이 때 안채와 사랑채는 각기 앞뒤로 평행하게 놓이게 되며 아래채와 창고 등의 부속채가 그 단부를 막아서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영암 최성호 가옥의 경우는 이와 같은 채 구성방식의 대표적인 예로 보인다. 비록 원래의 진입 방향은 현재와는 반대였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안마당의 구성이라는 차원에서는 차이가 없다. 보성 문형식 가옥의 경우도 비슷한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대지의 전후 방향으로의 경사가 심하여 사랑을 겸하는 별당채가 안마당보다 한단 높은 축단 위에 올라가 있다. 대지 내 경사를 축단을 이용하여 처리하는 일은 전남 지역의 주거에서 흔히 발견되는 모습이다.- 전남 지역의 주거건축의 외부공간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열된 각 채들을 담장과 문을 이용하여 구획하고, 그들 사이의 연결을 개방적으로 할 경우는 문을 통하여, 폐쇄적으로 할 경우는 문간을 통하여 꺾이어 진입하도록 하는 수법을 사용한다. 독립적인 채의 구성으로 말미암은 외부공간의 개방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수목과 연못을 사용하고 또 각 마당의 수평적 높이에 차이를 두어 공간적 영역성을 확보하는 것을 특성으로 볼 수 있다. 2. 마을공동체와 모정우리나라의 마을에 대한 최초의 연구자인 선생영조의 기록에 따르면, 전남지역은 경북지역 다음으로 씨족마을이 분포가 많은 지역이다. 그러나 건축사적 차원에서 본다면, 경북 지방의 하회나 양동 마을과 같이 마을 내에 오래된 주거 건축물들을 다량으로 유지하고 있는 곳은 없고, 그 대부분이 19세기 이후의 건축들로 채워져 있다. 비교적 전통적인 건축 유적을 잘 유지하고 있는 곳으로는 장흥의 방촌마을과 보성의 강골마을, 화순의 월곡마을과 나주의 도래마을 등이 알려져 있고, 최근 근대 시기의 정주환경 변화에 초점이 모아지면서 담양의 창평 등이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 장흥의 방촌마을은 장흥 위씨의 씨족마을로 조선후기 실학의 대가인 존재 위백규를 배출한 마을이다. 최초의 입향은 임란 직후인 1600년대 초반의 일이며, 이후 '수등들'이라고 부르는 평야를 둘러 7개의 동네가 모두 장흥 위씨의 집거촌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여러 개의 동네가 가운데 들판을 둘러싸면서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마을을 구성하는 경우는 다른 예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것이다. - 화순의 월곡마을은 제주 양씨들의 집성촌으로 조선 성종대의 문신이자 산수화의 대가인 학포 양팽손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방촌마을이 전란을 피하기 위한 이동이었던 것과는 달리, 월곡마을은 학포공의 절친한 친구인 조광조의 적거지를 쫓아 이동한 것으로, 조선 전기 사족의 이동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마을의 규모는 약 32채로 작은 편이나, 마을 뒷편 고개 너머로 또다른 제주 양씨의 집거촌인 '버들골'이 있고, 마을 어귀에는 효자 정려와 솟대, 모정 등의 공동체적 기념물이 있어 씨족마을의 경관을 잘 유지하고 있다. - 나주의 도래마을은 풍산 홍씨의 씨족마을이다. 마을 내에 양벽정과 괴고정 등 정자를 비롯한 모정은 물론, 마을회관과 공동 구매시설과 마을 창고 등 공동체적 시설물이 잘 갖추어져 있다. 월곡마을과 마찬가지로 등뼈를 이루는 큰 길을 따라 각 주호로 통하는 2차적 위계의 길들이 큰길과 직각으로 나란히 뻗어 있다. 이러한 골목길의 형태는 가운데 큰 길을 중심으로 나무가지형으로 뻗어 나가는 계곡형 입지의 마을과는 다른 패턴을 보여주는 것이며, 전남 지역의 정주형태를 특징짓는 요소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큰 길은 정주지와 농경지를 가르는 경계선 역할을 하며, 이 큰 길과 마을이 만나는 가운데 부분에 모정이나 마을회관, 마을창고 등의 시설이 들어서게 된다. 전면에 넓게 놓인 농경지로의 출입을 용이하게 하고, 농경지를 최대한 보호하기 위하여 정주지가 산기슭으로 물러 앉은 결과로 보여진다.- 보성의 강골마을은 다른 세 곳의 마을과 마찬가지로 마을내에 여러 채의 문화재 주택을 가지고 있는 곳으로 광주 이씨의 씨족마을이다. 주변의 큰 벌판을 뒤로하고 돌아앉은 모습은 월곡마을과 같은데, 바다쪽으로 열린 계곡의 남사면과 동사면에 전후 2열의 띠를 이루며 주거지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강골마을은 1930년대의 득량만 방조제 완공으로 마을 주변이 급격한 성장을 하게 되면서 마을 내부의 공간구조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즉, 마을 출입구의 변화에 따른 주거지 개발축의 변화와 대지의 압박에 따른 문간채 처리방식 및 길과의 관계 변화 등을 초래하였는데, 이러한 변화의 양상은 근대에 대한 농촌의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향후 보다 엄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 이 외에도 담양군 창평면 소재지의 고씨 마을이 최근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고있는데, 창평은 근대기 신학문 전파의 요람으로서 개화한 들의 근대적 정주환경 구축의 단서를 가지고있는 것으로 기대된다. 모정은 이미 여러 연구자들의 연구결과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전남을 포함하는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공동체적 시설물로 특기할 만하다.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이 많음에도 그에 상응하는 건축적 유구가 부족한 전남 지역의 주거문화를 고려할 때, 비록 실제의 건축연대는 오래지 않지만, 그 형식에 있어서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모정은 전남 지역의 정주환경 연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모정은 건축 형식적인 측면에서 지나치게 단순한 만큼, 마치 일본의 신사가 식년천궁(式年遷宮) 제도에 의하여 고식을 유지해 온 것과 마찬가지로, 고식을 보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또한 모정은 도서지방을 제외한 전남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만큼 국지적인 문화권을 구분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필자가 그 호칭 및 분포빈도, 건축 형식의 분포도를 조사하여 본 결과, 발견빈도는 평야의 분포와 밀접하게 관계 있어 모정이 논농사지역의 시설물이라는 가정을 하게 되었으며, 호칭은 전북과 연접한 지역에서 '모정', 영산강 중류지역에서 '동각', 영산강 상류지역에서 '시정' 등의 용어가 사용되는 것과 함께 전반적으로는 '우산각'이라는 호칭이 폭넓게 사용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또한 호칭의 다양성과 건축 형식 및 규모의 면에서 영산강 중류지역의 나주, 영암이 다른 지역에 비해 단연 우세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모정이 가지고있는 또 다른 의의는 그것이 살아있는 농촌공동체의 상징이라는 점이다. 1993년의 조사에서 조사 대상 162개의 모정 가운데 60% 이상이 1980년 이후에 신축한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모정이 현재의 농촌 마을에서도 훌륭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최근의 도시 집합주거에서 세워지고 있는 '아파트 정자'도 그 기능과 형태의 근원이 모정에 이어져 있음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Ⅲ. 결 론이상과 같이 조선시대 상류주거의 배치형태를 분석한 결과 좌향으로는 남·서향이 17채로 46%를 차지하고 그 다음이 남·동향으로 24.3%을 차지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산간지방의 주거에서는 동향이 우위를 차지한다면 내륙인 호남지방은 남향이 우위를 차지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배치유형으로는 마당구성형식과, 동 구성형식으로 나누어지는데 일반형이 24채를 차지하며 안채의 동구성 형식에서는 41가옥 중 一자형이 26채를, 간분화 형식에서는 겹집(22채)에 일렬형배(32채)치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음을 알 수 있다.사랑채 또한 동구성에서는 별동형이 28채를 차지하고 간분화에서는 퇴간집이 18채를 차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전남 지역 주거건축의 특성을 외부공간의 구성과 마을 공동체와 모정의 운영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하지만 중상류 주거에서는 건축주의 경제력과 의지를 바탕으로 당시의 장인들의 기법이나 생활 풍속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렇듯 일정한 지역적 범위 내에 있는 건축물의 공통적 특성을 확인하는 일은 지방사의 정립을 위해서는 물론, 다른 지역과의 비교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http://www.livingportfolio.com/school/school_house08.asp http://www.homun.or.kr/data/2sebu_chui_004.hwp http://www.khousing.or.kr/nonmun/12-3/허진석12-3.PDF http://www.dongbuic.org/build/board/upload/한옥.hwp http://web.edunet4u.net/~nschool/house/h2-4-2.htm

좀 길지만 봐주세염..
ㅋㅋ
도움이 돼셧으면 하넴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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