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신분제는 근대 이전에는 지배적이었으며, 각 신분은 제도로서 거의 법제화하여 세습적으로 고정되어 봉쇄적 ·배타적 특징을 지니고 있고, 각 신분간에는 귀 ·천, 상 ·하의 구별이 설정되어 있었다. 한편 계급은 생산수단 소유의 유무와 생산과정에 있어서의 역할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신분과는 다른 개념이다. 그러나 봉건사회에서는 신분과 계급의 혼동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것은 신분과 계급이 자본주의사회의 그것보다는 겹쳐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계급사회에 있어서 지배계급은 지배를 영속화하여 이를 불가침의 것으로 하기 위해 온갖 종교적 ·세속적인 의례(儀禮) ·신화 ·제도에 의해 지배의 존엄성을 만들어낸다. 여기에서 지배계급이 존귀하고, 피지배계급은 존귀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되는 신분적인 싹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명확하고 복잡한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이 봉건사회이다. 봉건사회에서는 농민과 소수의 수공업자 및 상인이 지주와 더불어 2대 계급을 이루는데, 이 가운데 지주의 중심세력은 영주(領主) 및 귀족이며, 그 지위는 세습적이었다. 거기에 생산력은 낮고 사회의 변화는 완만하고 미미하였기 때문에 이 부동성(不動性)에 근거해서 각종 법제도가 지주에게 특권을 부여하여 이를 귀족이라 하고, 농민 ·수공업자 ·상인에게 의무를 부과해서 이를 평민으로 함으로써 계급에다 신분이라는 외투를 걸쳤다. 그러나 이 귀족이나 평민 속에서도 각각 몇 개의 신분층이 만들어져 여기에서 탈락되는 자들은 갖은 명칭의 천민신분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고조선의 ‘8조금법(八條禁法)’에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규정이 있어 지배층 ·피지배층과 더불어 최하 신분층인 노예신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BC 1세기경의 부여는 귀족인 사가(四加)와 관리층인 대사(大使)가 지배계급의 신분이었고 하호(下戶)가 피지배층이었으나 토착민으로서 공납(貢納)을 강요당하는 농노적 신분이었다.
고구려에는 왕족 ·준왕족, 5부족의 우두머리인 대가(大加)와 그 밑의 관료군(官僚群)으로 지배계급의 상위신분층을 이루고, 부여와 같은 하호가 노예 ·농노를 포함한 피지배 신분의 일반시민이었다.
백제의 신분제도는 자세하지 않으나, 토착의 씨족공동체를 이루었던 해씨(解氏) ·연씨(燕氏) ·협씨(氏) 등 8성(姓)의 귀족이 왕족과 더불어 최상의 신분층을 이루었다.
신라는 성골(聖骨) ·진골(眞骨)의 골제(骨制)와 6두품(六頭品) 이하 1두품까지의 두품제로서 독특한 신분체제를 갖추었다. 이에 따르면 성골 ·진골은 왕족이고 6두품 이하 4두품까지는 귀족이며, 3두품 이하는 평민층으로 관직담당은 4두품 이상에 한하였다. 그러나 왕족 및 귀족과 평민 사이에는 신분의 고하가 있어 관직의 등용, 특권 등에 차이가 있었다 하나 신분적 예속관계는 없었고 그 하층신분의 노예가 신분적으로 예속되어 있었다.
중세의 고려시대에는 대체로 지배층 ·서민층 ·천민층으로 신분이 구분되어 왕실 ·종친(宗親) ·척신(戚臣) ·공신(功臣) 등이 지방관과 요충지(要衝地)의 지방관을 차지하고 지방의 호족(豪族)들이 향직(鄕職)을 맡았다. 그러나 과거제도가 도입되면서 천인 및 노예를 제외한 왕족 ·귀족, 지방의 향족도 시험으로 등용되어 관료제도가 확립되었다. 또한 여기에 고관 또는 공신의 자손을 유일(遺逸) ·음관(蔭官) 등으로 특채하는 제도가 곁들여 가계(家系)에 의해 관직에 등용되는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되었는데, 이상의 계층은 차차 문무관(文武官)의 정직(正職)을 맡을 수 있는 양반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다음 중간계층이라 할 서인층(庶人層:良人)에는 남반(南班)과 잡기(雜)와 잡직(雜職) 및 기타의 양민층이 이에 속하였다. 서인층에서도 가장 격이 위인 남반은 궁중의 내료직(內僚職)에 취임할 수 있는 계층으로 그 직능은 궁중의 당직 ·시종 등이었다. 잡기는 기술로써 벼슬하는 계층으로, 의복(醫卜) ·지리 ·율(律) ·산(算) 등에 종사하였으며, 잡직은 사역(使役)으로 사관(仕官)하는 부류로, 대개 막사(幕士) ·문복(門僕) ·전리(電吏) ·장수(杖首) ·진역리(津驛吏) ·부곡리(部曲吏) 등 최하급 관리였다. 남반 이하 서인층 관리의 사회적 신분은 문 ·무 양반에 비할 수 없이 낮아 벼슬에도 제한이 있고, 그들 자손에게도 학교교육에 많은 제약이 따랐다. 그러나 서인층의 중심을 이루었던 것은 대다수 농민으로 이 중의 남자(丁)는 16세에서 59세까지 병역과 조역(調役) 등의 국역(國役)을 담당하여 국가의 국방력과 생산력의 중추적 기반이었다. 그러나 양반 ·귀족과 그 자제들은 국역에서 제외되는 특전을 받았다.
다음의 천인계층은 진척(津尺:津丁) ·역정(驛丁) ·양수척(楊水尺:禾尺) ·재인(才人:광대) ·상인(商人) ·공장(工匠) ·악공(樂工) ·노비(奴婢) 및 향(鄕) ·소(所) ·부곡(部曲) ·도민(島民)으로, 이들은 가장 천대를 받았던 최하의 신분층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천대를 받았던 노(奴)와 비(婢)는 왕궁 ·관청 등에 소속된 공노비(公奴婢)와 사찰에 소속된 사노비(寺奴婢), 귀족 등 개인에게 소속된 사노비(私奴婢) 등으로 구분되어 매매 ·증여 ·상속 ·약탈 ·전당 등의 대상이 되었다.
노비의 값은 15세 이상 50세 이하가 가장 높아 포(布) 120필, 15세 이하 60세 이상은 가장 낮아 50필에 해당하는 등 효용가치에 따라 달랐다. 이들은 소유주의 호적에 올라 어느 정도 법률상의 보호를 받고 특수한 공로가 있으면 벼슬을 할 수도 있고, 양반의 비첩(婢妾)이 되기도 하였다. 고려의 신분제도는 비교적 엄격하여 8세(世:代) 호적 중에 천인층과 혈연관계가 없어야 사관(仕官)하게 되었고, 과거를 치르는 데도 가계(家系)를 엄밀히 심사하여 천인과의 혈연관계가 있으면 응시자격을 박탈하였다.
조선시대의 신분제도는 대체로 고려의 것을 계승한 것이어서 그 구조상 본질적 차이는 없다. 다만 고려와는 달리 적서(嫡庶)의 차별이 심하여 양반의 첩자손인 서얼(庶)은 사족(士族)이 기피하는 무관(武官)의 말직을 차지하는 등 특수층을 형성하여 기술관 ·서리(胥吏) 등으로 진출하는 중인(中人)과 더불어 양반 ·양인(良人)의 중간계층을 이루었다. 다음은 법률상 양인으로 불리는 계층이 있다. 이들은 조세(租稅) ·요역(役) ·군역(軍役)을 담당한 대다수의 농민으로 서인(庶人) ·상민(常民)으로도 불렸으며, 고려와는 달리 상인(商人) ·공장(工匠)도 양인에 속하였다. 최하층의 천인으로는 노비 ·역리(驛吏) ·진정(津丁) ·백정(白丁) ·재인(才人) ·광대 ·창우(倡優) ·승려 ·무격(巫覡) 등이 있었다.
노비의 지위는 고려와 별로 다르지 않았으나 조예(隸) ·반당(伴) 등의 하졸(下卒)에 채용되는 지위가 약간 향상되었다. 역리 ·진정 등은 직무의 세습적 의무를 지녀 신분적으로는 구속되어 있었고, 창우 ·재인 ·광대 ·백정 등은 연예 ·도살(屠殺) 등 천역에 종사하였으나 신분적 구속은 받지 않았다. 권력구조와 관련하여 중국보다 엄격하고 폐쇄적이었던 조선시대까지의 신분제도는 관료층 ·생산층 ·천역층(賤役層)으로 대별되어 특권과 수탈, 제약과 구속으로 특징지워져 내려오다가 임진왜란 후의 변혁과정 속에서 서서히 붕괴양상을 띠다가 갑오개혁 후에 급속히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