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가루는 장창병 조총병이 아니고 당시의 하급무사 계급에 해당하는 직제입니다. 이중에 창병, 총병이 따로 있었겠죠. 이시가루가 농민병이었던 시점은 사실 그 전세대입니다만, 센고쿠 시대 이후의 이시가루는 농민병보다는 종사 아래의 하급무사 개념으로 여겨졌습니다.
뭐 그리고 조총의 위력은 확실했습니다. 질문자가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1. 조선의 편전수는 조총병보다 많지 않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유는 그 각궁이 하도 비싸서....
그리고 화포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고요.
사실 이건 임진왜란 이후 조총이 급속하게 보급되면서 각궁을 밀어낸 것과도 연관이 있는데, 조선의 합성궁은 생각보다 수입재료를 많이 쓴 고급품이어서 외려 총기보다 고가품에 해당했습니다. 또한 다른 분 답변에 있는 것과 같이 총병의 경우는 훈련이 많이 필요 없었습니다. 반면 궁병은 전문적인 훈련이 필요한 병과이니 운용에 한계점이 있었죠.
게다가 화포도 사용이 만만치는 않았던 겁니다.
즉, 이런 경우인데...
(1) 당시 왜군의 병력은 대부분 실전으로 다져진 병력이어서 무기 자체를 사용하는데 능숙했습니다. 즉, 만일 총병이 죽었다고 칠 경우 이 총병 훈련을 받은 다른 병과의 인물이 총병을 대체할수 있는 경우라고 봐야 하는 셈인데, 조선의 경우 궁병이 죽을 경우 전문적으로 훈련받지 않은 다른 병사가 그 자리를 대체할수 있을 확률이 없었던 겁니다. 이런 식으로 싸우다 보니 수성전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박힌 지휘관이 아닌 야지의 전투의 경우는 왜군을 상대하기 상당히 까다로웠는데, 당시 왜군의 전술은 스페인의 테르시오와 비슷한 전법을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며(장창병/총병 조합) 이럴 경우 근대적인 포병 운용을 통해서 밀집 대형을 분쇄하는 방식이 아니면 상대하기 어려웠던 거죠.
(2) 반면 조선의 경우는 화포기술이 일본보다 좋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로 이 포가 "공성포 형태"를 지니진 못했습니다. 이건 상당히 중요한 경우인데요. 야포의 운용에 있어서 서양의 포술은 주로 공성전을 주안점으로 두고 이동 거치 및 사격에 용이하도록 개량된 반면, 조선의 경우는 거치포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선박이나 혹은 수성전을 위주로 사용된 셈입니다. 즉, 견인포 형태로는 상당히 불편해서 이 포를 가지고 이동해서 적의 수시로 바뀌는 대형을 정확히 노린다는 건 상당히 곤란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때문에 명군 참전 이후에 이 포병 운용의 전환으로 인해서 왜국에 대해서 상당한 우위를 점하긴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의 포술의 한계상, 수시로 바뀌는 대형을 위주로 운용되는 왜군에 대응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고 할수 밖에요.
참고로.. 이건 이미 포가 공성용으로 자주 쓰였기 때문에 견인포 개념이 일찌감치 발달하던 유럽에서도 현상이 비슷했습니다. 요인즉, 밀집대형의 느린 전진속도에 맞춰서 그걸 분쇄하는 정도까지는 대포의 속사가 가능해지긴 했지만, 거의 럭키샷 개념이었고 그나마 전열보병 전투 시대가 오자 포병으로 인해서 상대방의 전열을 무너뜨리는 것도 상당히 힘들어진 것이 사실이었고요.
즉, 정리하면.. 조선의 화포로 "야지의 전투에서 왜군에 대응하기는 지극히 까다로웠다" 정도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3)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작 비용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실 신기전과 같은 경우는 보병 상대로 유용하긴 했지만, 외려 명군측이 이런 유형의 무기를 다량 보유하고 잘 써먹었고, 제작 비용이 비싸다 보니 조선군이 다량으로 이것을 보유하진 못했다고 합니다.
특히나 조선의 경우 초석 생산량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대포와 신기전의 운용을 위해서 확보해야 할 원자재의 문제가 언제나 걸림돌이 된 건 두말할 나위도 없는 셈이었으니... 당시 이순신 장군의 병참관리 능력이야 말로 해전 승리의 가장 큰 공신이 되었을 판이라고 할 정도이니...
문제는 수군에서 이렇게 써먹을 정도였다면(당시 조선수준이 왜군을 제압한 대부분이 화포전투) 당연히 어느쪽엔 별로 이 화약이 적었다는 소립니다. 즉, 그만큼 조선군 일선에서 화포를 대놓고 갈기진 못했을 걸로 보이는 건 아마도 당연한 문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때문에 진주성 전투 등에서 기록이 보이지만, 화포를 이용해서 상당량의 전과를 내진 못했던 거죠.
2. 반면 조총은 사실 조선에서는 별로 중요시하지 않다가 데였지만 상당한 장점이 있었습니다.
(1) 먼저, 조총의 최대 장점은 사용화약의 양이 작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적은 화약으로 그만큼 많은 탄알을 발사할수 있었기 때문에 화포보다는 연비가 훨씬 나았던 겁니다. 이는 지상전에서 극단적인 장점으로 작용했는데요, 쉽게 말하면 화약사용량 절감에 있어서 같은 양의 화약을 사용했다면 당연하게도 왜군 측에서 더 많은 총알을 날려대는 상황이었다는 점을 쉽게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더군다나 당시 왜군은 대포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이때 왜에 전래된 대포는 공성포 유형이 아니고 함포 유형이었기 때문에 지상군에 사용하기엔 소구경이고 위력도 부족했었기에 잘 사용되진 않았던 거죠.
(2) 두번째 장점은, 먼저 언급한 대로 훈련이 별로 필요 없었다는 점입니다만, 당시 이시가루를 포함한 왜군들은 다이묘들의 사병이었고 기본적으로 무기 훈련을 많이 받은 편이었습니다. 즉, 사실상 징집군이 아닌 정예군 성격이었기 때문에 조총수가 죽어도 다른 병사가 이걸 채워서 사용하는건 어렵지 않았다는 점이 포인트였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어느 글처럼 조총수 비율이 20%(물론 문제는 이게 대장이 누구냐에 따라서 엄청 변동폭이 심했던 겁니다. 다테군의 경우는 텟포병 운용비가 다른데보다 훨씬 많았고 아예 당시로서는 돈지랄의 대명사인 총기병을 운용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라고 가정하면 이 20%는 조총이 파괴되지 않는 이상 계속 유지되는 비율이라는 점이 문제입니다.
(3) 이동사격이 쉬웠습니다. 그것도 범위 타격이 아닌 개인사격 형태였던 점이 장점이었습니다. 조선의 개인화기인 총통의 경우는 사실 핸드캐넌 치곤 잘 만들어진 것이 맞았습니다만,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보다 사격 편의성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에 외려 임진왜란 발생 이후 1년쯤 지나자 소구경 총통들 대부분이 사장되게 됩니다. 뭐 없어서 부족한 것을 쓰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유인즉 화약이 귀하던 시대에 그 화약을 대량으로 낭비하는 총통보다는 적절한 편의성과 명중율을 가진 조총이 더 낫다는 결론이 나온 겁니다. 결론적으로 이때문에 조총으로 훈련된 사수들이 적절한 대형과 이동을 통해서 적의 화포를 피하면서 원거리 공격, 적의 전진저지를 하는 것이 쉬웠던 반면 조선군의 경우는 이런 점에서 크게 낭패를 볼수 밖에 없었죠.
사실 이 조총 우월론.. 이랄지 이건 거의 검증된 사안이긴 한데... 질문자의 생각과는 달리 외려 이건 우리가 져서 문제였던게 아니고 우리가 이긴 전투에서 검증된 사안이었습니다. 임진왜란 1년쯤 경과시점에서 조선 조정도 완전히 바보는 아닌지라서 조총을 도입해서 무장을 시작한 이후에 승전하는 부대 대부분이 조총으로 무장한 부대였다는 기록이 의미심장한 거죠. 즉, 웃기는 일인데... 외려 조총을 먼저 쓴 왜군보다 조총을 늦게 쓴 조선군이 조총에 더 뛰어났다는 아주 웃지못할 상황까지 벌어진 판이었습니다.
따라서 이건 "선조 때문에 생긴 폄하"는 아닙니다. 단지 세계사에서 보이는 핸드캐넌->아퀘버스->머스켓 진화 과정의 당연한 수순이 조선에서도 벌어진 정도인데, 우리는 이 아퀘버스 단계를 넘어서 그냥 바로 머스켓에 근접한 조총의 단계로 넘어가 버린 생각보다 특이한 케이스이긴 합니다.
즉, 간단히 요약하면... 결론적으로 "핸드캐넌(총통) vs 총(조총) 대결이 조선에서 벌어져서 다른데와 마찬가지로 총이 이긴 것" 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딱히 이걸 부정할 이유는 전혀 없는 셈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