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진실은 이거아닌가여?

5.18민주화운동진실은 이거아닌가여?

작성일 2013.05.18댓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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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관심있는사람이라 이곳저곳 기사및자료를보다

 

원인은 박정희전대통령 서거후에 전두환전대통령이

 

대통령선거에 나오려고 하자

 

더이상 군출신대통령이 나오길 꺼려하는 김대중+김영삼전대통령이

 

민주화의운동을 외치고 이에 대학생들이 전국적으로 시위를 시작하고

 

특히나 광주에서 유독 시위확산이 커지자 이에 나라는 계엄령선포

 

광주에 군부대투입

 

대학생들의 시위는 진압자체가 안되는과정으로 번지고

 

이에 시위자들 무력진압을 선포

 

군인들은 눈에보이는 사람을 족족 때리고 잡고

 

여기에 아무상관없는 광주시민들도 맞고 끌려가고

 

결국은 광주시민까지 건드려서 광주시민들까지 시위에 동참

 

이부분은 분명 다아시는 내용일겁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민주화운동이라는 하는것은 분명 정치적인거지요!

 

정치인들이 서로 헐뜯고 막고 하는사이 여기에 빙의된 대학생들도 들고 일어나서

 

시위를 한거구  전경들은 나라에서 막으라고하니 어쩔수 없이 막는거고

 

80년대 대학생들 대모 하는거 영상보니 장난아니더군여

 

이건모  돌맹이던지고 화염병던지고  묵묵하게 서있는 전경들 공격하고

 

시위진압하라는 명령떨어지면 그때부터 대학생들 잡아족치고 패싸움이되버리는거져

 

( 광주에서 특히나 이런 대모가 끈이질않고 더많았다고 하내여)

 

광주시위가 커지자  정부는 광주로 시위진압을위한 계엄령선포및 군부대 투입

 

명령에살고 명령에죽는 군인들  시키는대로 시위진압에 나섬

 

대학생들을 잡아야하는대 대학생이 이마에 써있는것도 아니고

 

닥치는대로 고등학생이고 모고 때리고 갈기고 잡아놓고

 

결국 대학생시위자와 시위진압하는군인들사이에  광주에암것도모르는시민들이

 

껴서 피해를 당함

 

무력시위진압과정에  광주의무고한시민이 죽게되고  이에 광분한 광주시민들까지

 

들고 일어선거임

 

 

결론부터 말하면  5.18광주사태는 민주화운동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무슨 일제시대도 아니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것도 아니고여

 

민주화운동은 도대체 누굴위한것이었는지가 가장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더군여

 

과연 저시대에 북한처럼 한국이 군대통제를 받고 사람들 자유가억압되고 못먹고 못살고

 

그랬던것인지?????????????????????????????????????????

 

결국 정치인들의대립이 이사태를 만든게 아닌가 싶내염

 

 

광주사태 피해자는 진정  광주의무고한시민입니다 .............................

 

민주화시위운동을 대학생들과 무력시위진압을 한 군인들사이에서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건 이시위사태에 전혀상관없는 광주 시민이지요!

 

 

광주사태를 재조명한 드라마나 영화를 보아도

 

광주시민들은 분명 행복하게 살고있었습니다 그러다  도시에 탱크가 들어오고

 

군인들이 몰려오고  영문도모른채 구경하다  대학생시위를 잡는군인들에

 

광주시민이 희생된거지요

 

 

이걸두고 민주화운동이라고 하는건 정말 아니라고 봅니다!

 

저분들은 분명 민주화운동하고 상관없는 무력진압에 피해를 당한 광주의무고한시민들이

 

군인들에게 분노를한거지요!  저분들이 민주화운동을 한게 아니란 말입니다!

 

결국은 대학생 민주화운동에 광주민주화운동이 되버린것이라고 생각되내여

 

이사건의 피해자는 분명 광주의 무고한시민입니다!

 

시위를한 대학생들에게 왜 대모를 그토록 해야했는지 궁금합니다 ..................

무력시위진압을 군인들에게 왜 대학생만 잡지 죄없는 시민들까지 공격했는지 궁금합니다 ................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5.18은 엄연한 민주화운동입니다.

 

 

5.18민주화운동의 목적

 

5.18민주화운동의 발단은 12.12군사반란과 5.17비상계엄확대(5.17쿠데타)입니다.

 

다음 내용을 살펴보십시오.

이희성은 12.12 반란 이후 전두환이 직접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한 인물

 

이희성 1980년 당시 계엄사령관이 증언하는 12.12 사태

 

그 때 그건 전두환이가 확실히 잘못한 겁니다.
연행한다는 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되거든요.
소장이, 참모총장을 갖다 연행해야한다는 것이
국방부 장관한테 승인받을래도 국방부 장관이 노재현 장관이니까
전두환이 볼 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차라리 야단맞겠지요.
(전두환이) 대통령에게 이렇게 이렇게 얘기하니까
대통령이 뭐라고 했냐면, 나는 군부 내용을 모르니
국방부 장관을 통해서 가져오라 이렇게 얘기한 겁니다.
그래서 시간을 끌고 그러니까 자기네들은 뭐
큰 사건 일으키는 식으로 해서 끌고 가야 되는데
시간이 늦어지고 그러니까 불쑥 쳐들어간거에요.
(12.12 사태는 ) 하극상이오
쿠데타라기보다는 하극상입니다.
정승화 장군은 절대로 김재규의 손아귀에 들어가거나
김재규의 이용물이 되거나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전두환이가 자기 야심을 채우기 위해서
정승화를 제거하기 위해서 했다고 그렇게 봅니다.
12.12 사태 때 내가 곧 참모총장이 됐거든요.
사실은 그문제를, 1.212 문제를 가지고 조사를 해야되는 그 힘은 미치지 못해요.
왜냐하면 조사기관이나 보좌진이 전부 다 그쪽(보안사)에서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이걸 터뜨리면 번연히 군 전체가 쑥대밭이 되니까
할 수 없이 내버려 뒀거든요.
그게 타성이 되버린 겁니다.

 

12.12 사태 이후 전두환의 행태

 

제일 처음에 (전두환이) 그 때 소장이였거든요.
소장이 중장 진급을 자꾸 시켜달라고 나한테 애를 무척 태웠어요.
뭐 국방장관까지 동원해 가지고
뭐, 여러 사람을 동원해 가지고 했는데
그 때 소장되고 나서 중장 될 차례가 안되었을 때 자꾸 중장 진급시켜달라고 해서
이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해 중장할려고 그러느냐,
그런 걱정을 하고 있으면서
다른 뜻이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 다음에 차츰차츰 가보니까 애들이 하는 행동이요.
경호 문제를 굉장히 걱정을 하더라 이거요.
자기의 경호!
경호대장같은 사람을 해가지고
시내에 가든지 골프장에 가든지 하면
굉장히 대통령 행사 모양으로 경호를 해요.
얘네들이 왜 그러냐 할때
처음에는 12.12 일어나고 난 다음에 자기의 적이
많으니까 신변보호를 하기 위해 그랬지 않느냐
그 생각이 들고도, 쭉 가보니까 그 때도
'야 이것이 지금 큰 꿈을 꾸고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하고
이와 같은 것이 징후에 나타나더라 말이야. 

 

 

 

 

피고인들이 이른바 12·12군사반란으로 군의 지휘권과 국가의 정보기관을 실질적으로 완전히 장악한 뒤, 정권을 탈취하기 위하여 1980. 5. 초순경부터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비상대책기구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시국수습방안' 등을 마련하고, 그 계획에 따라 같은 달 17.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전군지휘관회의에서 결의된 군부의 의견인 것을 내세워 그와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강압하고 병기를 휴대한 병력으로 국무회의장을 포위하고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여 국무위원들을 강압 외포시키는 등의 폭력적 불법수단을 동원하여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의결·선포하게 함으로써, 국방부장관의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배제하였으며, 그 결과로 비상계엄 하에서 국가행정을 조정하는 일과 같은 중요국정에 관한 국무총리의 통할권 그리고 국무회의의 심의권을 배제시킨 사실, 같은 달 27. 그 당시 시행되고 있던 계엄법(1981. 4. 17. 법률 제3442호로 전문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같다) 제9조, 제11조, 제12조 및 정부조직법(1981. 4. 8. 법률 제3422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5조에 근거하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및 그 산하의 상임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상임위원장에 피고인 전두환이 취임하여 공직자 숙정, 언론인 해직, 언론 통폐합 등 중요한 국정시책을 결정하고 이를 대통령과 내각에 통보하여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가 사실상 국무회의 내지 행정 각 부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대신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 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사실 등을 인정한 다음, 피고인들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게 하여 비상계엄 하에서 국가행정을 조정하는 일과 같은 중요국정에 관한 국무총리의 통할권과 이에 대한 국무회의의 심의권을 배제시킨 것은 헌법기관인 국무총리와 국무회의의 권능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하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 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것은 행정에 관한 대통령과 국무회의의 권능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역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다.

 

 

-5공관련 재판내용中-

 

12.12와 5.17의 재판은 현정질서를 무시한 법이므로 이것은 근거가 될수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당시 재판에서 법적으로 공소시효와 일사부재리원칙에 어긋나서 처벌하지 못하던것을 여론을 반영하여 처벌한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전두환과 신군부가 현정질서를 파괴한것은 엄연히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가지고 처벌을 해야하나 마냐에 대해서 논란이 되있지 결국 죄는 맞다는겁니다.

 

또한 5.17비상계엄 확대의 명분이 된 북한의 공격 의도에 대해 미 국무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NO information indicating a North Korean intention to attack was received by the United States during the period covered by this statement, nor did United States officials regard the domestic situation in the South as being so serious as to justify either Full Martial Law or harsh repressive measures."
"미국은 북한의 공격 의도가 있었다는 어떤 정보도 [1980년 당시] 받지 못 했고, 미국 정부는 대한민국의 당시 상황이 계엄령 또는 극심한 탄압을 정당화할만큼 심각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http://seoul.usembassy.gov/backgrounder.html)

 

 

12.12,5.17쿠데타에대한 법적 정리:http://blog.naver.com/rapid81/120188421143

국회의원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군부:http://blog.naver.com/rapid81/120185050654

 

결과적으로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를 받았다고 하지만 이것은 구한말의 을사늑약과 다름없는 짓일뿐입니다.

전화선을 끊고 강압적 분위기를 조성하여 몇분만에 통과된 계엄령이 어째서 합법입니까?

 

 

그렇다면 이제 5.18광주민주화운동에서 시민들이 목표했던 것이 "국민이 모든 결정의 중심이 되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우선 1980년 5월 25일, 광주 시민들이 조직한 수습대책위원회는「광주사태 원인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유인물에서 " 5월 18일과 19일에 자행된 공수특전단의 살상만행이 80만 시민을 분노케 하고 정당방위로써 시민봉기(의거)에로 유도했다."라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목적이 공수특전단으로부터 시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을 명기하고 있습니다. 다음 날인 5월 26일, 구 수습대책위원회인 광주시민학생구국위원회의 이름으로 발표된 「민주시민회보」 제10호에서 다음과 같이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했습니다:

'1. 우리는 명분 없는 비상계엄의 해제와, 반민족적이요 역사를 역행하는 유신세력의 일소를 위해 끝까지 싸운다. 이는 민족사의 요청이다.
2. 우리는 전두환 쿠데타 세력이 득세하는 현 정부당국을 국민의 정부로서 인정할 수 없다.
3. 온 국민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고 자립경제를 이룩하고 복된 사회를 건설코자 납입한 피와 땀(세금)으로 페퍼포그•최루탄 및 총기를 수입하여 국민의 배를 가르고 가슴에 총을 쏘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우리 광주시민은 이들 유신 미치광이들을 위한 세금이요 방위성금이라면 단 한 푼이라도 납입하기를 거부한다.
4. 광주의거에 관한 계엄사의 발표 일체가 거짓임을 밝힌다. 또한 이를 신뢰할 사람은 한 명도 없다(사상자 천 명 이상ㅡ수습대책위 통계).
5. 우리 80만 광주시민은 앞면의 '광주시민 장송곡'을 누구나 부를 수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회보를 입수하신 분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이용하여 보급 및 전파에 최대의 힘을 역주하여야 할 것이다.
6. 군인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누구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가!'

이 유인물들로부터 우리는 광주시민들이 당시 비상계엄의 해제, 전두환을 위시로 한 군부 세력의 퇴진, 계엄군의 무차별적 폭력에 대한 정당방위, 그리고 군의 정상화를 요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그 외의 유인물들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찾을 수 있으니 이것이 단순히 소수의 의견에 불과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를 살펴보십시오). 군부 세력의 퇴진, 계엄군의 무차별적 폭력에 대한 정당방위, 그리고 군의 정상화 모두 국민이 모든 결정의 중심이 되는 데에 필요한 요소라는 점은 함께 동의할 수 있는 바입니다

 

 

전두환과 신군부의 비상계엄령은 현정질서를 파괴하는 명백한 쿠데타이며 이것에 대항하는것이므로 엄연히 정당한 목적을 가지고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오해와 진실

 

최근 인터넷에서 나돌고 있는 유언비어들과 터무니 없는 주장들을 정리해봤습니다.


대법원에서는 이미 5·17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을 내란죄(폭동죄) 및 반란죄로
사형 선고를 내린 바 있습니다. 폭도는 전두환입니다.
폭도에게 맞서 싸운 사람들이 폭도라는 주장만큼 황당한 주장이 어딨습니까.
 

   
 
* 5.18을 폭동이라고할때 하는주장 list

 

1. 시민군의 무기 사용
1.01 계엄군이 총기를 발포하기 전 시민군이 먼저 총을 쐈다. 이를 증명하는 힌츠페터의 영상이 있다.
1.02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군사적 기밀 장소인 무기고 습격을 짧은 시간 내에 46곳이나 한 것은 당시 광주에 불순분자가 배후로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1.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장갑차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1.04 신원미상의 시체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의 소행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1.05 시민군은 도청에 TNT를 설치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
1.06 시민 측에서 의도적인 버스 돌격으로 경찰이 먼저 사망했다.
1.07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망자의 70% 가량이 시민군이 사용한 총기에 의해 사망했다.
1.08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중화기와 무전기로 중무장했던 것은 광주에 불순분자가 배후로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1.09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복면을 사용한 것은 이들이 남파 간첩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1.10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북한군의 무기였던 AK 소총 및 파파샤를 사용했다.
1.11 시민군에게 "조선인민군" 마크가 있는 실탄 사진이 있다.
1.12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시민들에게 총기를 무작위로 배포함으로써 극렬한 사회 분란을 조장했다.
 
2. 북침설
2.01 북한에서 5·18민주화운동을 기념한다는 것은 당시 북한이 광주에 간첩을 보낸 것을 의미한다.
2.02 북침설에 대한 증언이 있다(임천용 및 자유북한군인연합).
2.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일어난 간첩 신고에 대한 기사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이창용).
2.04 5·18민주화운동 당시 일어난 간첩 신고에 대한 기사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전옥주 및 차명숙).
2.05 인민군영웅렬사묘(인민군 영웅들의 렬사묘)에는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군인들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2.06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은 잠수함을 통해 광주에 침입해 있었다.
2.07 윤기권이 5·18민주화운동 유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월북했다는 것은 이들이 간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2.08 5·18민주화운동 당시 배후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신군부가 발표한 바 있다.
2.09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을 생중계했다.
2.10 (1.10) 시민군은 당시 북한군의 무기였던 AK 소총 및 파파샤를 사용했다.
2.11 (1.11) 시민군에게 "조선인민군" 마크가 있는 실탄 사진이 있다.
2.12 1985년 북한에서 발행된 '광주의 분노'라는 서적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
 
3. 기타
3.01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요구한 것은 민주화가 아닌 김대중의 석방에 불과했다.
3.02 어린이/임산부/학생에게도 총을 쐈다, 계엄군이 대검을 사용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3.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교도소를 습격했다.
3.04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파출소 등의 공공시설을 파괴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3.05 고등법원은 지만원이 받은 소송에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3.06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절도를 자행했다.
3.07 80년대에 미국은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3.08 5·18민주화운동 진압 당시 대통령은 최규하였으므로 5·18민주화운동과 전두환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3.09 5·18민주화운동은 민주화에 대한 공로가 없으므로 민주화 운동이 아니다.
3.10 5·18민주화운동 당시에 유언비어가 나돌았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3.11 계엄 선포 당시의 사회 상황을 고려하면, 5·17비상계엄전국확대(5·17 쿠데타)는 정당화될 수 있다.
3.12 전두환은 이후에 사면을 받았으므로 내란죄와 무관하다.
3.13 당시 시민들은 전두환이 누군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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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민군의 무기 사용
1.01 계엄군이 총기를 발포하기 전 시민군이 먼저 총을 쐈다. 이를 증명하는 힌츠페터의 영상이 있다.
출처 : http://study21.org/518/photo/5-19.htm
http://www.study21.org/518/video/5-20.htm

 

이같은 유언비어의 퍼져나간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역사학도라는 한 극우인사의 황당한 주장에 있습니다.


 
역사학도에 따르면, 위 사진은 계엄군이 발포하기 전날인 20일 힌츠페터가 광주에서 촬영한 영상(http://www.youtube.com/watch?v=Rq_qa1HhnBo)에서 가져온 캡쳐 사진입니다. 사실 역사학도는 힌츠페터가 "조총련의 간계에 말려들어 조총련 충복 노룻"을 했다며 영상 촬영 날짜의 신뢰성을 스스로 비하하고 있지만, 이를 떠나서 영상 어디에도 해당 영상이 20일에 촬영됐다는 코멘트는 보이지 않습니다. 힌츠페터는 5월 19일에 광주로 내려갔다가, 도쿄에 돌아간 뒤 5월 23일에 다시 광주로 돌아가 광주 시민들을 촬영했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34715) 즉, 해당 영상은 광주시민들이 무장한 뒤인 23일에 촬영된 영상입니다. 20일에 촬영됐다는 주장은 단순히 그가 19일에 광주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내세우는 황당한 추측일 뿐입니다.

 

 

 

또한 역사학도는 위 사진이 5월 19~20일 사이의 사진이라는 단서가 "[광주 시민]이 이미 5월 19일에 나주경찰서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했기 때문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이 역시 근거 없는 황당한 주장입니다. 1995년 완료된 5.18사건 의문점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에 따르면(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탈취에 나서 나주 경찰소의 무기 가져간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있었던 공수부대의 발포 다음입니다.


실제로 총을 먼저 발사한 건 계엄군입니다. 5월 19일, 계엄군 장갑차가 시위 군중에게 포위되자 계엄군은 시민을 향해 발포해 당시 조대부고에 다니던 학생이 총상을 입었습니다. 이를 보고 군의 정당방위라고 주장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5월 20일 밤 11시경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공방전이 격렬해지고 시위대가 차량을 앞세워 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려하자 계엄군이 또다시 발포를 했습니다. 이 때 비무장 시민 두 명이 죽었다는 것은 당시 계엄군의 총기 사용이 정당방위로 볼 수 없는 까닭입니다. 뿐만 아니라 5월 21일 13시 공수부대가 금남로에서 시민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습니다. 시민들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던 이 시점 이후로 광주 시민들은 총기로 무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총기 사용 이전에, 청각 장애인 김경철 씨가 계엄군에 의해 5월 19일 사망한 사례가 있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273631). 즉, 최초의 사망자는 시민입니다.


  


1.02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군사적 기밀 장소인 무기고를 짧은 시간 내에 46곳이나 습격을 한 것은 당시 광주에 불순분자가 배후로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출처 :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2312


지만원에 의해 퍼지게 된 해괴한 논리입니다.


1995년 완료된 5.18사건 의문점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입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광주에서 시위대에 의한 무기탈취는 19일 오후 3시 15분께 시위대가 기독교방송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31사단 경계병력으로부터 M16소총 1정을 탈취한 것이 처음으로 이 소총은 곧 회수됐으며 그후 20일 밤 11시께 광주세무서 방화, 점거시 지하실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을 탈취했고 21일 오후 1시께 광산 하남파출소에서 칼빈 9정이 탈취됐으나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 화순,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 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음."
즉 당시 광주 시민들은 경찰서,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 또는 근처 방위 상업체에서 무기를 탈취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90년대 초 예비군 무기를 군부대로 이관하는 사업이 추진될 때까지 향방 무기는 경찰서와 파출서의 예비군무기고에서, 직장 무기는 직장 예비군무기고에 보관되고 있었습니다. 이 파출소들과 방위 상업체가 시민들이 찾기 쉬운 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군사적 기밀 장소"라는 수사를 이용해서 포장하려는 것은 시민군을 어떻게든 불순세력과 연관하려고 하는 비열한 의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군부는 무기고 습격에 가담한 자들을 5·18민주화운동 이후 "간첩죄"나 "반공법"에 의한 죄목이 아닌 "내란죄"로 처벌했습니다. 신군부 입장에서도 무기고 습격에 가담한 자들을 "간첩"으로 몰았을 때 진압의 정당성을 얻었을텐데 스스로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이 불순분자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1.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장갑차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출처 :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2312


시민군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습격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당시 아시아자동차 공장이 광주 내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시민군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시민들은 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차량을 탈취하여 계엄군에 대항하였는데 그 때 사용한 장갑차는 바로 시가전을 대비해서 만들어진 KM900 장갑차입니다. KM900 장갑차는 궤도식 장갑차가 아닌 장륜(차륜형) 장갑차이죠. 이 차륜형 장갑차의 운전 방식은 일반적인 자동차의 운전 방식과 거의 동일합니다. 따라서 일반 시민이 이 장갑차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은 광주 시민들을 어떻게든 북한과 관련지으려는 억측에 불과합니다.

 


1.04 신원미상의 시체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의 소행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출처 :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2312


황당한 논리입니다.


현재 5·18묘지에 5구의 신원미상의 시체가 묻혀있는 것은 사실입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1949099).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북한 개입설을 뒷받침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자,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직후에는 무려 30명에 달하는 시체의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고(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03/2012110300062.html) 대구 지하철 참사의 희생자 중 6명도 아직 신원 미상입니다(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18/2008021801357.html). 신원 미상자가 있다해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과 대구 지하철 참사가 북한의 소행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습니까? 터무니 없는 논리입니다.

 


1.05 시민군은 도청에 TNT를 설치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
출처 : http://blog.daum.net/sillasouls/109


우선 시민군이 도청에 TNT를 설치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두 가지 이상한 주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 1. 북한군이 아니었으면 다이너마이트 설치는 힘들었다. 2. TNT 설치는 시위대가 시도했던 대한민국 전복의 명백한 증거다.


광주민주화운동 일지의 원전인 『5.18 正史』에 따르면(http://cafe.naver.com/enature.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1), 당시 다이너마이트 설치를 담당한 사람들은 호남탄좌 화순광업소에 근무하고 있던 김영봉 씨 등 모두 13명이었습니다. 광업소에서 근무하던 분에게 다이너마이트 설치가 불가능한 일이었을까요. 북한군이 아니었으면 다이너마이트 설치는 힘들었다는 주장이 어불성설인 이유입니다.


다음으로, TNT 설치가 시위대가 시도했던 대한민국 전복의 명백한 증거라는 논리를 살펴봅시다. 위에서 언급했던 5.18 正史에 기록된 신만식 씨의 증언입니다. 신만식 씨 역시 화순 광업소 다이너마이트 유출 작업에 참여한 분입니다.


"떡밥과 뇌관 결합작업을 벌인것은 사실이지만 도화선을 연결하진 않았다. 형식적으로 다이너마이트 인근에 연결된 것처럼 보이게 해뒀을 뿐이다. 만약 담뱃불이라도 떨어지는 날이면 광주시내가 온통 불바다가 될게 뻔한데 그런 위험한 일은 할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다이너마이트는 위협용이었지 사용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시민군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다이너마이트는 단순한 위협용이었습니다. 의도적으로 전남도청을 폭파할 의도가 있었다면 도화선을 연결했을텐데 시민군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도화선 자체를 설치하지 않았다는 또다른 증거로는 온건파의 요청에 의해 폭약 제거를 시도한 배승일 씨에 대한 명예회복 판결이 있습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70116104502&Section=03). 뉴스 기사에 따르면, 배승일 씨는 당시 뇌관과 신관을 제거했습니다. 만약 도화선이 있었더라면 도화선을 먼저 제거했겠지요.

 


1.06 시민 측에서 의도적인 버스 돌격으로 경찰이 먼저 사망했다.
출처 : http://gall.dcinside.com/list.php?id=cdh&no=5295


말도 안 되는 거짓입니다.


우선, 먼저 사망한 쪽은 시민 측입니다. 목차 1.01를 봐주세요.
경찰이 시민 측에서 온 버스에 의해 사망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하게 의도적이지 않았습니다. 우선 광주민주화운동 일지의 원전인 5.18 正史에 수록된 증언에 따르면(http://cafe.daum.net/80518/N8mQ/40?docid=DKjbN8mQ4020031117052216)


"한편 이날 차량시위는 금남로에 이어 노동청 앞에서도 계속된다. 소위 노동청 전투라고 불리는 노동청 앞 오거리에서는 9시20분께 광주고속 차량 10대가 경찰 저지선을 뚫고 들어가 함평경찰서 소속 경관4명이 사망하기도 한다. 당시 광주∼남원간 정기노선을 운행하던 광주고속 운전기사 배용주씨 (당시나이 34세)는 정기노선운행을 마치고 본사에 도착, 이소식을 듣자 시내로 차를 몰고 나간다. 노동청과 도청사이로 들어온 배씨는 다른 차량들과 함께 맨앞으로 차를 운전, 도청을 향해나가기 시작한다. 갑자기 공수대로부터 발사된 최루탄 하나가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차내에서 터지자 엉겹결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뛰어내린다. 그러나 그대로 시동이 걸린 차량은 계속 앞으로 돌진, 경찰들을 깔아버린 것. 배씨는 이 사건으로 체포돼 사형선고까지 받기에 이른다. 또 차량시위는 현대교통기사 김복만씨 (당시 29세)의 희생이 뒤따르기도 한다."


당시 경찰들을 사망하게 한 건 버스 기사의 고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루탄 연기가 가득한 차 안에서 제대로 된 운전이 가능했을까요. 증언이 거짓이라 생각하는 분들은 당시 상황을 기록한 아래 사진을 봐주십시오.

 


 


버스 안에 가득한 최루탄 연기를 보십시오. 이 상황에서 제대로 운전을 해서 의도적으로 경찰들을 죽일 수 있었을까요. 이건 상식의 문제입니다.

 


1.07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망자의 70% 가량이 시민군이 사용한 총기에 의해 사망했다.
출처 : http://www.ilbe.com/4481766
http://systemclub.net/bbs/zb4pl5/view.php?id=n_1&page=5&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reg_date&desc=desc&no=46


신군부의 나팔수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분들이 계시다니 굉장히 안타깝습니다. 이같은 유언비어가 원천이 된 두 가지 서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선 제5공화국은 1982년 신군부를 정당화하기 위해 작성한 서적 『계엄사』에서 총상에 의한 사망자 중 117명이 시민군이 사용한 칼빈 소총에 의해 죽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해주십시오.  

 


반면, 1980년 5월 16일부터 6월 19일에 광주 지방검찰청에 의해 작성된「5.18관련 사망자 검시 내용」에서 따르면 사망자 1백65명의 사인은 총상이 전체 79.4%인 1백31명(M16 96명, 카빈 소총 26명, 기타 총상9명)으로 가장 많고, 개머리판. 곤봉 등에 의한 타박사가 18명, 차량사 12명, 대검 등에 의한 자상이 4명인 것이라고 합니다. 카빈 소총에 의한 사망자가 26명이라는 뜻입니다. 어떻습니까? 검찰청 입장에서 카빈 소청에 의한 사망자 숫자를 축소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82년 후에 군에서 나온 출처 없는 주장과는 많이 다른 내용입니다. 즉, 1982년 발표된 군의 주장은 거짓입니다.

 

 


보안사에서 발간한 5.18 자료를 인용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칼빈 및 기타 총상 사망자는 94명, M16 사망자는 38명이지만, 이 역시 거짓입니다. 당시 보안사는 505보안부대에서 파악한 사체 검안 자료를 가지고 167명에 대해 양민과 난동자(원문에는 폭도와 비폭도)로 분류하는 작업을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진행했습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이 분류 과정에 참여한 의사 2명과 목사는 사망자가 폭도로 분류될 경우 위로금 등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양민으로 분류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처음 폭도로 분류된 것은 20여명이 조금 넘었으나 군에서는 이 정도의 비율이면 곤란하다고 하여 격론을 벌인 끝에 최종적으로 38명이 폭도로 분류됐습니다. 이 때, 분류 과정이 불확실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로는 마지막 사망자의 분류 과정이 있습니다. 바로 5월 27일 YWCA 안에서 사망한 고등학생이었는데, 이 학생은 경기도 출신으로 그 안에서 저항했다는 이유로 군측에서는 계속 ‘폭도’라고 주장했고, 세 사람은 고등학생인데 어떻게 폭도가 될 수 있냐며 시민들은 비폭도로 분류할 것을 주장해 결국 ‘비폭도’로 분류됐습니다. 이 같은 과정 때문에 사체 검안위원회 회의 결과 M16보다는 M1이나 카빈 사망자가 더 많아졌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자료의 원본이 됐던 505보안부대의 검시자료에 따르면(이 문서는 최근 공개되었습니다), 카빈 소총에 의한 사망자는 20명입니다. 즉, 보안사에서 원본 자료를 왜곡했다는 것입니다.

 


1.09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복면을 사용한 것은 이들이 남파 간첩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출처 : http://www.study21.org/518/photo/rioters-in-mask.htm


굉장히 황당한 주장이니,

 

 

 


 
 
  
 
6월 항쟁에 참여한 자랑스러운 시민들의 사진으로 답을 대신하겠습니다.
이들도 남파 간첩인가요.

 


1.10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북한군의 무기였던 AK 소총 및 파파샤를 사용했다.
출처 : http://www.ilbe.com/4474860, http://www.ilbe.com/77398014


둘 다 유언비어입니다.


AK 소총 사용에 대한 근거는 정말 정사갤/일베 등 모든 사이트를 뒤져봐도 아무데도 없군요.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시민군의 파파샤 사용을 증명한다며 제기한 재밌는 사진이 있습니다.

 

 


 

 

 

이들은 해당 사진이 "5.18광주민주화운동" 유물전에 있었던 사진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극단적인 예로 바로 옆의 확성기에 부착되어 있는 Q마크를 보십시오. Q마크 보증제는 82년에 도입된 건데 어떻게 80년에 이게 있었을까요. 사실 이 사진은 한 시민이 "오월 판화체험전 시민군 현장 체험전"에 참석해서 찍은 사진입니다. 시민군 소품을 어떻게 실제 총기로 과장할 수 있을까요. 모조품에 지나지 않다는 거죠. 그래도 이게 진짜 같다면 다른 각도에서 찍은 아래 사진을 보십시오.

 

 

 

 

장전 손잡이도 없고, 방아쇠울도 저런 모양인 파파샤 총기가 어딨습니까.. 원래 총기의 사진과 직접 비교해봅시다(https://www.google.ca/search?q=PPSH-41).


1.11 시민군에게 "조선인민군" 마크가 있는 실탄 사진이 있다.


조잡한 합성입니다.

 

  

 

 

 

 

 

1.12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시민들에게 총기를 무작위로 배포함으로써 극렬한 사회 분란을 조장했다.
출처 : http://www.ilbe.com/444804976

 


2. 북침설
2.01 북한에서 5·18민주화운동을 기념한다는 것은 당시 북한이 광주에 간첩을 보낸 것을 의미한다.
출처 : http://blog.daum.net/kagicstaton88/601
http://blog.naver.com/totoro890907/90146962497


제일 황당한 논리입니다.


예, 북한에서는 5·18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4·19혁명(http://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0100&num=21228), 6월항쟁(http://www.ytn.co.kr/_ln/0101_200706102202527375
), 심지어 3·1운동(https://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9000&num=68182)과 6·3항쟁(http://media.daum.net/breakingnews/view.html?cateid=100000&newsid=19930603173400596&p=yonhap)도 기념합니다. 그래서 4·19혁명과 6월항쟁 그리고 6·3항쟁은 북한의 소행이고 3·1운동은 공산투쟁입니까?

 


2.02 북침설에 대한 증언이 있다(임천용 및 자유북한군인연합).
출처 : http://www.study21.org/518/doc/nk-Kang.htm, http://www.ilbe.com/429606599


북침설에 대한 증언은 대부분 임천용이라는 이 괴악한 사람한테서 나온 증언입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시나요? 무려 북한에서 "암살용"으로 "휴대용 핵폭탄"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냐 하면 미국에서조차 이 사람을 난민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결정을 내렸죠(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894678). 이 분의 정신상태가 이상하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물론, 정신상태가 멀쩡하지 않다고 해서 증언이 거짓이라고 확실하게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증언들이 엇갈린다면 어떨까요? 임천용은 총 세 곳에서의 인터뷰에서, 침투 인원을 어떤 곳에서는 450명으로, 어떤 곳에서는 1개 대대로, 어떤 곳에서는 2개 대대로 증언했습니다. 이 분의 오락가락한 증언은 여기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http://asegaew.egloos.com/2269768). 심지어 귀환 인원에 대해서도 제각각 다르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3군 사령관 출신인 서종표 의원은 이에 대해 "600명이 침투해서 광주에서 어떻게 활동을 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 해도 그 동안 정부와 군은 무엇을 했는가.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을 군 경험을 가진 보수단체장이 말할 수 있는가"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75238).


심지어 다른 탈북 군인 협회인 탈북군인협회의 대표는 “자유북한군인연합과 협력해서 일하면 좋겠지만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 탈북군인협회와 자유북한군인연합은 일하는 방법이 달라 같이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된다. 특히 보여주기 사업, 이벤트성 사업 등은 지양해야 한다. ‘북한 보급창고 등을 까고 나오자’ 식의 선동적이고 과격한 활동이나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주장 등도 현실과 맞지 않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6100&num=53887) 이들의 주장이 현실과 맞지 않다는 또다른 근거입니다.

 


2.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일어난 간첩 신고에 대한 기사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이창용).
출처 : http://www.study21.org/518/doc/nk-Kang.htm


끔찍한 왜곡입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보고서에는 간첩 이창용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창용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 의하면 5. 16. 전남 보성을 통해 침투했으며, 광주에서의 시위와는 상관 없이 남파됐다. 5;18과 관련한 임무나 광주로 잠입하기 위한 시도도 발견할 수 없다."
이창용이 검거 된 곳은 서울입니다. 게다가 그 때의 날짜는 무장투쟁이 시작되고 난 뒤인 5월 24일이었죠.
무엇보다도,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신군부 세력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과 연관된 것처럼 여론조작을 하기 위해 허위사실을 유포했습니다.

 


2.05 인민군영웅렬사묘(인민군 영웅들의 렬사묘)에는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군인들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출처 :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24632


뉴데일리라는 언론사의 신문사에서 나온 황색 유언비어입니다.


해당 뉴스 기사에 따르면, 10월 북한군 개입설을 증명하기 위해 김주호 박사가 공개한 자료는 바로 '인민군영웅렬사묘'를 촬영한 다음과 같은 사진 두 장 뿐입니다:

 

 

 

 
  

 


자, 김 박사는 이 묘에 있는 군인들이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되었다는 증거는 아무 것도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김 박사는 “비석에 이름이 새겨진 158명이 ‘남조선혁명투쟁에서 희생된 인민군 영웅들’이라는 사실을 각기 다른 문건에서 중복 확인했다,” “사망자의 ‘죽은 날’로 기록된 1980년 6월 19일은 소속부대의 광주남파작전 종결일로, 사망일을 이 날짜에 맞췄다”라고 주장했지만 김 박사는 그 문건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재밌는 사실은, 해당 사진의 '인민군영웅렬사묘'가 김주호 박사가 지칭하는 묘라는 명확한 증거 역시 없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북한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사실을 밝히는 기사가 있었죠(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5041153541&code=910303). 이 기사에 따르면,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이 “어버이 장군님(김정일 위원장을 지칭)께서 월남전쟁에서 희생된 비행사들을 한시도 잊지 않으시다가 이국 땅에 묻혀있는 그들을 조국에 데려다 인민군 영웅 렬사묘에 안치하도록 하신데 대해 뜨겁게 회고하시였다.”라고 밝혔다고 합니다.


출처가 된 문건도 없고, 사진의 비석이 어떤 묘의 비석인지조차 밝히지 않으니, 김 박사의 주장은 근거없는 유언비어입니다.

 


2.06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은 잠수함을 통해 광주에 침입해 있었다.
출처 : 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submarine.htm


근거 없는 유언비어입니다. 무장간첩이 침투한 것은 3월 23일, 35일, 27일에 있었으며, 그마저도 모두 검거되었습니다.

 


2.07 윤기권이 5·18민주화운동 유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월북했다는 것은 이들이 간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출처 : http://blog.daum.net/sionvoice/13756351


괴악한 논리적 비약이군요.


윤기권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재학중인 고등학생이었는데, 이 사람이 어떻게 간첩 훈련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더군다나, 윤기권이 북한으로 넘어갔다해서 5·18민주화운동에 참가한 시민들 대다수가 어떻게 간첩이 됩니까.

 


2.09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을 생중계했다.
출처 : http://study21.tistory.com/entry/%EA%B4%91%EC%A3%BC%EC%82%AC%ED%83%9C-%EC%83%9D%EC%A4%91%EA%B3%84%ED%95%98%EC%98%80%EB%8D%98-%EC%9D%B4%EB%B6%81-%EB%B0%A9%EC%86%A1


상식에서 벗어난 어불성설입니다.


역사학자라는 사람은 5월 28일자 대한뉴스가 당시 평양의 생중계 방송을 편집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근거는 전무합니다. 이건 상식의 문제입니다. 1980년 당시 기술로 중계시설이나 송신소도 없이 광주에서 수백 킬로미터가 떨어진 평양까지 어떻게 생중계를 했을까요. 동영상 후반에 나오는 북한 방송에서 나온 듯한 구호는, 5·18민주화운동 이후의 북한 방송의 보도일 수 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탈북자가 북한에서 계엄군이 시민군을 전기톱으로 머리를 갈라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생중계로 보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머리가 전기톱에 갈려 죽은 사람에 대한 검시기록은 없습니다.

 


3. 기타
3.02 어린이/임산부/학생에게도 총을 쐈다, 계엄군이 대검을 사용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유언비어가 아닌 사실입니다.


5월 20일에는 군인이 정조준한 총에 임신 8개월 된 최미애 씨가 맞아 쓰러졌고, 병원에 옮겼으나 아이와 함께 숨을 거두었습니다.
5월 24일, 신군부의 공수여단은 달리는 차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나 집을 향해 M16을 마구 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을 앞 저수지에서 목욕을 하던 중학교 1년 방광범 군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마을 어귀에서 놀던 초등학교 1학년 전재수 군이 벗어진 신발을 주우려는 순간 10여 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습니다.
대검 사용도 사실로 밝혀졌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실제로 사망자 중 14세 이하의 사망자는 무려 8명에 이릅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59021).


다시 말하지만 대법원에서는 이미 5·17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을 내란죄(폭동죄) 및 반란죄로 사형 선고를 내린 바 있습니다. 누가 폭도인지는 자명하지 않습니까.

 


3.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교도소를 습격했다.
출처 : http://unifykorea.hosting.paran.com/xe/kwangjuinsurgence/23995
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submarine.htm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신군부의 왜곡에 그대로 동조하는 분들이 아직도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이 같은 주장은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 기록(전교사 전투상보)에 ‘시민군의 교도소 습격’ 내용에서 시작된 유언비어입니다. 5·18기념재단의 설명대로, 시민군들은 광주의 고립과 봉쇄를 뚫고 담양과 장성에 광주의 사실을 알리기 위해 교도소 앞의 차단을 뚫어야 했고, 공수부대의 무차별 학살에 맞서기 위해서 교도소 앞으로 출동했을 뿐입니다(http://www.518.org/ease/board.es?mid=a10501000000&bid=0006). 당시 시민군이 광주 외곽으로 진출하려던 것을, "교도소 습격"으로 왜곡한 것입니다. 실제로 총격전이 일어난 곳은 근처 호남고속도로에서 일어난 것이 대부분이고, 교도소로 진출하려는 일부 시도가 있었습니다만 해당 사건에 관련된 시민군은 4명, 6명으로 교도소 습격 자체가 목표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6명 이하의 인원으로 교도소를 함락할 수 있나요. 상식의 문제입니다. 이에 따라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몰아가기 위해 관련자를 조작했음을 밝혀낸 바 있습니다.


오히려 신군부는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민간인들을 학살했습니다.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신군부의 발포로 인해 가족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차량, 아이들과 함께 광주를 떠나던 사람, 계엄군 주둔지역의 마을주민 등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http://asegaew.egloos.com/3653375를 참고해주십시오.

 


3.04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파출소 등의 공공시설을 파괴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출처 : http://www.ilbe.com/437085841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을 파괴하는 주장입니다.


4. 19 혁명 때도 경찰서가 방화됐고, 6. 10 항쟁 때도 파출소와 방송국이 방화됐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4. 19 혁명과 6. 10 항쟁이 폭동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대한국민이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은 잘못됐네요.

 


3.05 고등법원은 지만원이 받은 소송에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출처 : http://www.ilbe.com/146457631


괴악한 비약이군요.


5·18단체가 고소한 사건에서 지만원이 무죄 판결을 받은 이유는 5·18민주화운동이 폭동이라는 지만원의 주장이 옳아서가 아니라, 지만원이 5·18단체 회원들을 직접 지칭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281626)

 


3.07 80년대에 미국은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출처 : http://www.ilbe.com/354176114


말장난하지 마십시오.


우선 극우세력이 가장 자주 인용하는 미국 헤리티지 재단의 보고서는 1985년에 작성된 것입니다. 우선 헤리티지 재단은 미국의 공화당 성향의 우파 싱크탱크라는 사실과, 전두환 정부의 비서실장인 허화평이 1983년 1월부터 1986년 6월까지 헤리티지 재단의 수석 연구위원을 지냈다는 사실을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헤리티지 재단의 보고서는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보기 힘든 까닭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87년 6월 항쟁에 의한 민주화 이후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시작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 인사들이 제대로 된 정보를 알게 된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고서에는 5월 18일 전남대에서의 시위부터 이틀 간 두 명의 사망자가 나타났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1.01을 참조하십시오).


"...There were many injuries on both sides, but only two rioters were killed during the first two days of the confrontation." (http://www.heritage.org/research/reports/1985/09/south-koreas-kwangju-incident-revisited?query=South+Korea's+Kwangju+Incident+Revisited)


또한 이 보고서에서는 광주교도소에서 50명의 시민군이 사망했다고 보고하고 있지만 실제로 교도소로 진출하려 했던 시민군은 총 10명에 그쳤습니다 (3.06을 참고하십시오).


"...At the Kwangju Prison, for example, more than 50 armed rioters were killed during the numerous assaults against the government-held facility." (Ibid.)


이같이 왜곡된 정보만으로 헤리티지 재단이 당시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입니다.
그렇다면 5·18민주화운동 직후에 작성된 CIA의 기밀문서와 1980년 6월 25일에 발행된 미국 국방부의 보고서는 어떨까요. 여기에서도 5·18민주화운동을 광주 폭동(riot)으로 규정하지만 이 역시 당시 진상규명의 부족함과 신군부와의 공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해당 미국 국방부의 보고서에는 굉장히 흥미로운 사실이 보고되어 있습니다.

 


 

 

 

"그 전두환은 정부 조사관들에게 학생/시민들이 군인을 구타하는 영상물을 찾아낼 것을 명령했다. 그의 계획은 타임지나 뉴스위크지같은 외국 언론사가 촬영한 민간 시위에 대한 군인들 (대부분이 특전사)의 잔인한 대응을 상쇄시키려는 것이다. ...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해낸 것이 없다."


실제로 1989년 미 국무부는 5·18민주화운동을 "May 18th K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 즉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했습니다(http://seoul.usembassy.gov/backgrounder.html).

 


3.08 5·18민주화운동 진압 당시 대통령은 최규하였으므로 5·18민주화운동과 전두환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출처 : http://www.ilbe.com/438961786, http://www.ilbe.com/439148590


다음은 전두환에 대한 내란죄 관련 판결문입니다.


"...피고인들이 이른바 12·12군사반란으로 군의 지휘권과 국가의 정보기관을 실질적으로 완전히 장악한 뒤, 정권을 탈취하기 위하여 1980. 5. 초순경부터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비상대책기구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시국수습방안' 등을 마련하고, 그 계획에 따라 같은 달 17.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전군지휘관회의에서 결의된 군부의 의견인 것을 내세워 그와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강압하고 병기를 휴대한 병력으로 국무회의장을 포위하고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여 국무위원들을 강압 외포시키는 등의 폭력적 불법수단을 동원하여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의결·선포하게 함으로써, 국방부장관의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배제하였으며, 그 결과로 비상계엄 하에서 국가행정을 조정하는 일과 같은 중요국정에 관한 국무총리의 통할권 그리고 국무회의의 심의권을 배제시킨 사실, 같은 달 27. 그 당시 시행되고 있던 계엄법(1981. 4. 17. 법률 제3442호로 전문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같다) 제9조, 제11조, 제12조 및 정부조직법(1981. 4. 8. 법률 제3422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5조에 근거하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및 그 산하의 상임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상임위원장에 피고인 전두환이 취임하여 공직자 숙정, 언론인 해직, 언론 통폐합 등 중요한 국정시책을 결정하고 이를 대통령과 내각에 통보하여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가 사실상 국무회의 내지 행정 각 부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대신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 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사실 등을 인정한 다음, 피고인들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게 하여 비상계엄 하에서 국가행정을 조정하는 일과 같은 중요국정에 관한 국무총리의 통할권과 이에 대한 국무회의의 심의권을 배제시킨 것은 헌법기관인 국무총리와 국무회의의 권능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하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 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것은 행정에 관한 대통령과 국무회의의 권능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역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다."


다시 한 번 밝히지만 전두환은 내란죄, "즉 국토의 참절 또는 국헌문란(國憲紊亂)의 목적으로 폭동하는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폭도와 그 폭도에게 맞서 싸운 5·18민주화운동의 광주시민이 어떻게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 있습니까.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 부르시려면 우선 전두환이 일으킨 12.12 쿠데타와 5.17 쿠데타가 쿠데타가 아니라는 걸 입증해야하지만 12.12 쿠데타와 5.17 쿠데타가 쿠데타라는 명백한 사실은 위의 판결문에서 보시다시피 이미 90년대 재판에서 수차례 확인한 진실이랍니다. 이후에 사면을 받았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목차의 3.12를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3.12 전두환은 이후에 사면을 받았으므로 내란죄와 무관하다.


가소로운 말장난입니다. 사면은 "형벌의 면제"입니다.
  

 

3.13 당시 시민들은 전두환이 누군지도 몰랐다.


 
 

당시 금남로에서 찍힌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http://blog.naver.com/rapid81/120189943801

 

5.18민주화운동의 북한개입설에 대한 반박

 

대표적으로 임천용을 비롯한 몇몇 탈북자와 그 단체들이 주장을 하는게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설입니다.

하지만 전 도무지 이해할수가없는게 북한군 특수부대는 어떤방법으로 수백킬로미터 떨어진 내륙을 뚫고

광주로 들어왔으며 유유히 빠져나갔을까요?

 

임천용을 비롯한 탈북자단체의 증언에는 모순점이 많습니다.

 

우선 임천용만 봐도 항상 주장이 달라집니다.

 

북한 특수부대가 5.18에 개입했다는 임천용의 증언은 북한군의 침투인원, 침투경로, 퇴각경로, 귀환인원이 매번 달라지고 일관성이 없다. 또한 임천용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물증은 전혀 없다. 

http://i.imgur.com/55qAhrf.png

 

임천용은 2006년 8월 한국논단과 인터뷰에서 서해안 쪽으로 북한군 450명이 침투하고, 3분의 1이 귀환했다고 말했다. 특히 절반은 군복을 입고 계엄군 쪽에 침투하고, 절반은 시민군 쪽에서 활동했다고 말했다. 2006년 12월 기자회견에서는 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침투해서, 3분의 2가 귀환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2008년 임천용은 뉴스한국과 인터뷰에서 북한군 특수부대가 서해안과 동해안으로 각각 1개 대대씩 침투해서 절반이 귀환했다고 말했다. (참고: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는 300명으로 구성됨)

 

(1) 한국논단 인터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68300

(2) 2006년 기자회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19&aid=0000017557

(3) 뉴스한국 인터뷰

http://www.newshankuk.com/news/news_view.asp?articleno=k2007021120301185542

 

● 2006년 임천용이 "북한군 사망자가 민주화 투사로 둔갑된 사례가 있다면서 한 사망자의 시체 사진을 제시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1980년 5월 22일 총에 맞아 쓰러진 외삼촌 손광식을 구하러 갔다가 화정동 국군통합병원 앞에서 사망한 임정식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79&aid=0000125614

 

 

또한 이러한 자료도 있습니다.

 

인민군 출신 탈북자 단체인 탈북군인협회 회장은 5.18 북한군 침투설을 제기하는 자유북한군인연합에 대해 "탈북군인협회와 자유북한군인연합은 일하는 방법이 달라 같이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된다. 특히 보여주기 사업, 이벤트성 사업 등은 지양해야 한다. ‘북한 보급창고 등을 까고 나오자’ 식의 선동적이고 과격한 활동이나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주장 등도 현실과 맞지 않다."고 비판한 바 있다.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6100&num=53887

 

 

신원미확인자의 시체가 12구나 된다 이것은 북한군의 시체다?

 

2001년 광주광역시에서 실종자, 장기 가출자, 행방불명자 가족 282명의 유전자 대조작업을 벌여 신원미상 시신 11구 중에 6구의 신원을 확인했다. 그 결과 권호영(당시 16세)·김기운(17세)·김남석(18세)·김준동(16세)·양민석(20세)·최숙일(21세)씨 등 6명의 시신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1949099


● 나머지 5구의 시신 중에서도 40세 가량의 남자, 4세 가량의 남자아이, 목포에서 비무장 상태로 차량 위에서 시위하다 추락해서 사망한 남성 등 적어도 3구는 불순세력과 연관짓기 어렵다.


http://i.imgur.com/cIM7D4E.png (40세 가량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검시자료)

http://i.imgur.com/2U0atGT.png (목포에서 차량 시위 도중 추락사한 23세 가량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검시자료)

http://i.imgur.com/9xTOsfg.png (효덕동 뒷산에서 사망한 4살 가량으로 추정되는 남자아이의 검시자료)


● 사망자, 실종자가 수백명이 되는 대형참사에서 모든 시신의 신원을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삼풍백화점 사건에서 신원미상 시신이 30구, 대구지하철 참사에서 신원미상 시신이 6구인채로 아직도 남아있다는 점을 비추어 보면, 5.18 민주화운동의 신원미상자는 다른 사건에 비해 전혀 많은 편이 아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03/2012110300062.html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18/2008021801357.html

 

 

 

5.18주도자중 월북한 사례가 있으니 이것은 북한의 명령을 받은 증거다?

 

 ● 윤기권은 1962년 전북 정읍 출신으로, 1980년에는 광주 대동고등학교 학생이었다. 5.18의 충격과 고문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다가 1991년 3월 영국의 북한 대사관을 통해 월북했다. 

 

● 윤기권은 5.18 당시 신원이 확실한 고등학생이었으므로 북한이 파견한 간첩이라고 보기 어렵다. 윤기권이 5.18에서 대단한 역할을 맡은 것도 아니다. 5.18 주역들의 집단 월북도 아니고, 단 한명이 월북했다고 5.18에 참여한 시민 20만여명 전부 매도할 수 없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986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987

 

 

5.18에 침투했다 사망한 북한군을 기리는 비석이 북한에 있다?

 

● 뉴데일리는 함경남도 청진시의 '인민군영웅들의 렬사 묘'라는 비석 사진을 게재하면서 5.18과 관련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비석 사진에는 5.18과 관련된 어떠한 문구도 없지만, 뉴데일리는 김주호 박사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해 비석이 5.18과 관련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사진 속의 '인민군영웅들의 렬사 묘'라는 비석은 우리나라의 현충탑처럼 북한에서 시군마다 하나씩은 있는 흔한 비석이다. 

 

북한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북한의 노동신문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베트남전쟁에서 희생된 비행사들을 한시도 잊지 않으시다가 이국땅에 묻혀있는 그들을 조국에 데려다 인민군영웅 렬사묘에 안치하도록 하신데 대해 뜨겁게 회고했다"고 보도한 적이 있다. 인민군영웅 렬사묘는 6.25 전쟁에서 전사한 청진시 출신 북한군을 추모하는 비석이거나,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 북한군과 관련된 비석일 가능성도 높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2355393

 

● 김주호는 어떤 문건과 비석의 명단에 있는 사망자 명단을 비교해서 5.18에 침투했다 사망한 북한군 158명을 확인했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김주호는 자신이 본 문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비석과 5.18이 관련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입증하기 위해서 김주호는 자신이 본 문건을 공개하고, 검증받아야 한다.  


● 어떤 사건의 사망자를 추모하는 비석인지 불분명하고, 5.18과 비석의 관련성을 입증한다는 문건의 존재도 불확실하다. 이 뉴데일리 기사는 북한 비석 사진과 김주호의 주장을 내세워 사람들을 현혹시킬 뿐, 북한과 관련성을 입증하는 실질적인 근거가 전혀 나와 있지 않다.

 

 

 

 

 

 

5.18이 김대중대통령때부터 민주화운동으로 불리게 되었다는것에 대한 반박

 

 ● 5.18은 1988년에 가동된「민주화합추진위원회」를 거치면서 노태우 정부로부터 처음「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공식 인정받았다. 1988년 13대 국회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진상규명에 나섰다.

http://media.daum.net/breakingnews/newsview?newsid=19930416164800533



● 1993년 5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5.13 담화, 1995년 12월 5.18 특별법 제정, 1997년 4월 12.12 5.18 사건 신군부 유죄판결 확정, 1997년 5월 정부의 5·18민주화운동기념일 제정을 통해 민주화운동이란 평가가 점차 확고해졌다.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209892&categoryId=200000431

 

 5.18 최초 사망자는 20일 밤에 사망한 경찰이다? 

 

● 5.18 최초 사망자는 1980년 5월19일 오전 3시 구타후유증으로 사망한 청각장애인 김경철이다. 5.18의 두번째 사망자는 19일 밤 10시 사망한 김안부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망진단서, 사망자 검시 자료가 있다. 

 

● 5.18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던 주영복은 1996년 5월6일 열린 12.12 5.18 사건 7차공판에서 공수부대원이 시위 진압하다 김경철이 최초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19일 밤 들었다고 증언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094030 

 

●김경철의 사망자 검시 자료

http://i.imgur.com/7Iv8Wfm.jpg

http://i.imgur.com/sVLaaLU.png

 

●김안부의 사망자 검시 자료

http://i.imgur.com/DVO907u.png

 

 

북한이 5.18을 광주인민봉기라고 부르고, 매년 5.18 기념식을 여는게 의심스럽다?

 

● 북한은 5.18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4.19혁명(남조선인민봉기), 6.3항쟁(남조선청년학생봉기), 6월항쟁(6월 인민항쟁), 부마항쟁(10월 민주항쟁) 등 남한의 주요 민주화운동을 모두 기념한다. 괄호 안은 북한에서 부르는 명칭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8&aid=000206500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23274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48039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0165622

 

● 북한은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이라고 왜곡하여 북한 주민에 대한 선전수단으로 삼는다. 북한에 있을 때 5.18 등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탈북자들은 남한에 와서야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http://www.rfa.org/korean/in_focus/nk_518-05182009134816.html

 

 

 

 

 

 

총을 들었으니 어쨋든 폭동이라는 것에 대한 반박

 

 

어쨌든 무력을 이용한 폭동이 일어난건 사실이니 군인은 시민을 사살해서라도 정당화시켜야 했다."라는 주장이다. 이 논리는 전형적인 명분론으로 신군부 자체적으로는 정당성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시민군의 정당성을 깎아내리려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분에 의한 책임전가는 오히려 신군부의 부당함을 성토하는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 "무력을 이용해 군사반란을 일으킨게 사실이니 시민은 군인을 공격해서라도 정당화시켜야 한다"라는 명제도 성립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발단이 된 12.12사태는 두말할 필요도 없는군사반란이며 이 시점에서 이미 신군부는 대한민국 군대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그러므로 신군부는 대한민국에 대하여 어떠한 물리력을 행사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5.18 진압의 주체는 최규하대통령 이었다"는 반론도 있지만, 이미 12.12 사태와 5.17쿠데타로 신군부가 정권을 탈취한 이후의 일이므로 그런 변명은 옹색하기만 할 뿐이다.
 
 
우리나라말 폭동이라는 단어 자체에 부정적인 뜻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미국의 LA흑인폭동등과 비교해서 폭력사태니 어쨋든 폭동이라고 불러야한다는건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영어에서의 riot은 그대로 해석하면 폭동,봉기라는 뜻이되는데 정당하냐 정당하지않냐를 떠나서 폭력사태가 일어났다면 riot이라고 쓰는게 보통입니다.
광주 폭동, 광주 내란? 광주 민주화 운동이 민주화 운동인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전두환을 위시로한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는 것입니다.
전두환이 이후에 사형 선고를 받은 법률 상의 명목적 죄도 바로 내란죄죠.
광주 민주화 운동은 내란을 일으킨 정권에 시민들이 저항한 운동입니다.
무장 항쟁 때문에 그들을 폭도라 지칭하는 이유는 뭡니까?
진짜 폭도가 누굽니까?
내란을 일으킨 신군부 세력입니다.
이건 공정한 대한민국의 헌법 하 재판에서 확인한 엄연한 사실입니다.
폭도는 당시 신군부 세력이라는 걸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도 무장 항쟁을 했으니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독립군들도 맘껏 욕하십시오.
우리가 독립군의 항일 운동을 폭동이라 아닌 항일 운동이라 불러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조선총독부가 당시 조선 시민을 대표한다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조선총독부에게 정통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폭동 자체의 부정적인 뉘앙스를 고려하십시오. 김구는 정치적인 암살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사전적인 의미로는 테러리스트가 맞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김구를 테러리스트로 부르기 힘든 까닭은 뭡니까.
그 단어 자체에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외의 헛소리
 
  • 무기고를 털고 계엄군에 저항했으니 폭동이다.
말 그대로 계엄군, 즉 '정부'에 저항했으니 광주 시민군은 폭도라는 깔끔한 주장. <del>그러면 12.12쿠데타는 뭐냐?</del> <del>자기들은 정부를 저항한것도 모자라 갈아엎은 사건들은 오히려 미화하는데 힘쓰고 있는데엔 신경 안쓴다.계엄이 불법이여서 저항한거다.</del>

  • 최초 발포명령자는 전두환이 아니다?
이것은 애매하다. 문제의 애국가 발포 사건 당시에 직접 명령을 내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 다만 정황상 전두환일 가능성이 가장 높을 뿐이다. 문제는, 이 점만을 근거로 5.18 당시 공수부대의 각종 만행들을 부정하려 들거나 사건에 대해 전두환이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나온다는 것이다.
 
 

 

유네스코에서는 광주 민주화 항쟁등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http://www.unesco.org/new/fileadmin/MULTIMEDIA/HQ/CI/CI/pdf/mow/nomination_forms/Korea%20Human%20rights.pdf
(uprising은 폭동등으로 해석될수있다고 반박이 들어올수있지만 앞서말한대로 영미권의 폭동의 개념과 한국의 폭동의 개념은 다소 다릅니다.미국의 독립전쟁도 미국내에서는 uprising이라고 불립니다.)

 

당시의 외신보도:http://www.youtube.com/watch?v=sCXbu_Ekca4

 

과연 대한민국의 입장은?

 

헌법재판소, 대법원, 정부, 국회 등 국가기관은 진상규명을 거쳐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교과서에서 5.18 민주화운동으로 실려있습니다. 새누리당 등 보수 세력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은 신군부의 반민주적 5.17 쿠데타에 맞섰고, 신군부의 과격진압에 희생됐기 때문입니다. 5.18은 정치적인 입장을 떠나서 범국가적으로 기념하죠.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1980년 5월 초부터 학생 시위 과열을 명분으로 비상시국으로 몰아가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보위 설치'를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정권을 장악하려고 했습니다. 1980년 5월 15일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보안사령부는 김영삼, 김대중은 '국기문란', 김종필은 '부패혐의'로 잡아 가둔다는 계획도 세웠죠.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는 비상계엄 확대를 명분으로 군병력을 국회에 투입하고 정치인을 체포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신군부 인사로 채워진 국보위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정부를 장악하겠다는 의도에서 세워졌으며, 실제로 신군부의 의도에 따라 정국 흐름이 진행됐죠.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열어 정부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정부는 군의 압력을 받고 비상계엄 전국확대을 선포했고, 신군부는 계엄 확대와 동시에 정치인 체포, 정치활동 금지, 국회 폐쇄 등 정치탄압을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여 사전에 강도높은 시위진압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서울, 대전, 광주 등 주요 도시로 파견했습니다. 5월 18일 광주에서 전남대 학생 600여명의 계엄확대 반대 시위가 발생했는데, 공수부대가 무자비하게 전남대 학생 시위를 진압하면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광주시민이 분노한 것이 발단이 되서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을 강경진압한 신군부는 1980년 5월27일 국보위를 설치하여 실질적인 정권장악을 완료했습니다.  

 

 

참고링크,출처:

http://blog.daum.net/kbsicom/49 

http://blog.daum.net/kbsicom/51
http://blog.naver.com/chiyahn/20171304853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전두환이 대통령선거 나오는 걸 반대한게 아니고 전두환의 정권장악 프로젝트 중에 하나였던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전두환의 정권장악을 반대하여서 일어난 것이 5.18 민주화운동입니다.

 

계엄군이 진압을 하였을 때, 시위를 한 대학생들은 물론 무고한 시민들까지 때려잡았습니다. 그리하여 그에 대한 분노에 광주시민들도 시위에 동참하여 시위를 벌였고, 계엄군이 총을 쏘기까지하며 시위를 진압하려고 하자 무기고를 털어 시민군을 편성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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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6사태 이후 전두환이 대통령선거에 나올려 했던것은 아닙니다.

 

전두환은 당시 보안사령관(합동수사본부장) 으로, 참모총장(계엄사령관) 이었던 정승화와 대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정승화는 10·26 사태 당시에 김재규와 밥 약속이 있었는데,

그걸 가지고 전두환이 물고 늘어집니다.

"정승화가 김재규에게 묵시적으로 동조했다"  라면서 12·12 사태를 일으키게 됩니다.

 

하지만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1979. 12. 12. 당시 보안사가 주축이 된 합수부는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무력으로 강제 연행했다.

합수부는 육군참모총장 대장 정승화가 1979. 10. 26. 당시 박정희 대통령 시해현장인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의 근처인 별관에 있었음에 불구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묵시적으로 동조했다는 혐의를 내세웠다. 그러나 ‘12․12’를 주도했던 보안사령관 소장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1) 군내의 반발을 무릅쓰고 계엄사령관을 강제 연행한 것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전보 발령시키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대통령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주요 보직을 독점해온 일부 정치군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육군참모총장 대장 정승화가 ‘인사조치안’을 작성하여 실행하려고 계획했기 때문이다. 신군부세력은 육군 참모총장의 강제연행이 부당하다며 원상복귀를 주장하던 3군사령관 중장 이건영, 수도경비사령관 소장 장태완, 특전사령관 소장 정병주,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소장 하소곤 등에 대해 하극상의 대항을 감행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며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신군부측 병력의 무력진압에 대항했던 특전사령관 부관 소령 김오랑 등이 사망했다. 12․12사건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군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권력 공백기에 있어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정승화가 전두환을 비롯한 몇몇의 정치군인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만든 '인사조치안'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12·12 사태를 일으킨 전두환은 최고 권력자가 되어 한국의 권력을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은 81년 3월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됨)

 

전두환이 선거에 나올려 했던 것은 아니고,

당시 대통령은 최규하 대통령이었습니다.

 

질문자님은 당시에 국민들이 억압되어 왔나고 물으셨는데,

맞습니다.

 

전태일 분신자살, YH 여공 사건 등등에서 알수 있듯이

박정희 시대에 노동자에 대한 억압과 차별은 엄청났고,

또한 민주주의 사회도 아니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들고 일어나면 무력으로 진압하였습니다.

10·26 사태 이후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시기를 흔히 '서울의 봄' 이라 부릅니다.

그때는 전국 각지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시위가 들끓던 시기였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은 그 시기를 미루긴 했으나 민주주의 정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만,

전두환의 군부 쿠데타로 인해 그 꿈도 산산조각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분노가 쌓이고 쌓여 광주에서 폭발하게 된 것입니다.

 

'5·18은 정치인들의 싸움에서 기인한 것이다' 라고만은 볼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에 맺힌 한 때문에 일어난 것이 광주 민주화운동입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큰 비극 중에 하나로 평가되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수 많은 사상자와 실종자를 나타내고, 심지어 우리나라 사람 끼리 총을 겨누고 대치했던 
안타까운 사건이었습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79년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되면서 
나라는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그 틈을 타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하는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고, 또 다시 군부세력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계엄령을 선포하여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발생하게된 사건입니다. 

지금은 5.18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그 당시에는 민주화 운동을 폭동 이라고 규정하고, 
북한 간첩들이 조종한 것이라는 둥 온갖 유언비어를 퍼트리면서 광주 이외의 지역 국민들에게 
혼란을 일으킨 사건이기도 합니다. 

제가 주저리 늘어 놓는 것 보다는 우선, 두산백과 사전에 정리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행과정을 옮겨 봅니다. 

또한 여유가 있으시면 2005년에 MBC에서 방영되었던 '제 5공화국' 이라는 드라마를 보시기 바랍니다. 
50회 정도 되는데 그중에 찾아보시면 5.18과 관련된 편이 있습니다. 
 
글로 읽는 것 보다는 드라마로 한 번 보시면 이해가 빠르실 수도 있습니다. 


진행과정
10일 간의 시민항쟁 주요 사건 진행과정은 다음과 같다.  
  
5월 17일(토) : 비상계엄 전국확대. 학생운동 지도부 검속. 광주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5월 18일(일) : 전남대생 50여 명 등교 저지. 학생들의 '계엄 해제', '휴교령 철폐' 시위. 공수부대원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학생들 금남로로 이동 시작. 
  
5월 19일(월) : 11여단 병력 증파.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파출소 방화. 공수부대 원들과 투석전 전개. 시내 기관장 및 유지들 시위 진압 완화 건의.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학생 김영찬군이 계엄군 총에 부상. 
  
5월 20일(화) : 고등학교 휴교조치. 가톨릭센터 앞 남녀 30여 명이 속옷채로 구타당함. 공수 부대와 시민간의 공방전 계속. 금남로에서 200여 대의 택시 차량시위. 시위대 버스에 경찰 4명 사망. 광주MBC건물 방화. 시민 2명 사망. 
  
5월 21일(수) : 시외전화 두절. 시체 2구 싣고 금남로에 등장. 광주KBS건물 방화. 시위대 20사단 병력과 충돌. 공수부대원 전진 배치. 광주세무서 전소. 대형헬기 도청 도착. 시위대 장갑차 1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공수부대 사격 시작. 청년들 공수부대 집중사격으로 계속 쓰러짐. 헬기에서 도지사 시위해산 종용 방송. 시민들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트럭, 장갑차 수십대 획득. 시민들 탄약고에서 TNT  입수. 공수부대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에 조준사격. 외지에서 온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기관총(LMG) 2대 설치. 공수부대 도청에서 조선대로 철수. 
  
5월 22일(목) :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출혈자를 위해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도청 옥상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수습대책위원회’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분소 방문 7개항 수습안 전달.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결과 보고.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박충훈(朴忠勳) 신임국무총리 '광주 치안 부재 상태'라고 방송. 
  
5월 23일(금)  :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시민 5만여 명 도청광장 집회.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작업 시작.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 시내전역에 살포.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4일(토) : 공수부대원,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전교사부대간의 오인 총격전 발생.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일) : 김수환 (金壽煥) 추기경 메시지와 광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원 전달.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 만장일치 답변확정.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발생 예방과 식량공급, 청소문제 등 논의. 
  
5월 26일(월) : 계엄군,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진입 저지를 위해 죽음의 행진 감행.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상황 브리핑.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 귀가시킴. 시내전화 일체 두절. 
  
5월 27일(화) :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가두방송. 금남로에서 시가전.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 시민군에 무차별 사격. 계엄군, 도청과 시내전역 장악, 진압작전 종료.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무선 방송.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시내전화 통화 재개. 

사후 처리
5·18 광주 학생-시민운동에서의 희생은 1988년 제6공화국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바에 의하면, 사망 191명, 부상 852명이었다. 그 희생은 6·25 전쟁 이래 최대의 희생자를 낸 사건이었다. 그 후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이나 보상, 책임자 처리 등 사후처리에 대한 시민의 요구가 이어졌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5·18 진상 규명, 학살책임자 규명, 배후세력 규명 요구 -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미국 지목, 미문화원 방화 사건 - 6월항쟁 폭발(1987) - 6·29 민주화선언(1987)(군사독재 국민에 굴복) - 제6공화국 탄생(대통령 직선제) - 국회 ‘광주특별위원회’ 구성(1988). 광주청문회 실시. 광주민중항쟁을 '5·18 민주화운동'으로 규정. 책임자 처벌 요구 -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 제정(1995). 광주 희생자에 대한 보상 및 희생자 묘역 성역화 - ‘5·18 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제정(1997) - 역사 교과서에 정식 명칭 사용 

이상의 과정을 거쳐 광주 희생자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고, 그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중요한 것은 5·18광주민중항쟁이 민주화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되어 '5·18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되었다는 데에 있다. 이에 따라 1997년부터 정부주관 기념행사를 가지게 되었으며, 2011년 5월에는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출처] 5·18 민주화운동 | 두산백과

5.18민주화운동진실은 이거아닌가여?

... 말하면 5.18광주사태는 민주화운동이 아니라고... 결국 정치인들의대립이 이사태를 만든게 아닌가 싶내염... 희생된거지요 이걸두고 민주화운동이라고 하는건 정말 아니라고...

5.18 민주화운동진실

... 진짜 진실은 폭동인건가요 민주화운동인건가요?? 택시운전사 이름은 김사복이며 74년... 이건 뭐 빼박 증거들이 있지만, 당연히 좌익들은 애써 무시합니다. 원래 지들 싫은건...

5.18 민주화 운동 (내공 50걸어요!!)

... 5.18 민주화 운동이 추구한 민주주의의 이념은? 2. 5.18... 때문이 아닌가요???? (수많은 의문점 중 이 부문이 제일... 이건 우파들 특히 자한당들에게 한 소리 도대체 이 나라는...

5.18 민주화운동 폭동인가 아닌가?!

안녕하세요 저는 중3인데요 학원에서 5.18 민주화운동 에대해서 토론을 하는네 제가... 참으로 안타까운건 광주 사건과 관련된 어떠한 반론이나 진실된 내용의 발설은 모두...

5.18 광주민주화운동

... 아닌가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겁니다. 지식인에서 그럴듯하게 뻥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5.18은 전두환 신군부 패거리의 내란(쿠데타)에 항거한 민주화운동입니다....

5.18 사건 이거 민주화 운동 맞나여?

... 최초 사망자 - 경찰 4명 버스로 압살 5.18 전후과정에... 봉기 아닌가여? 경찰 죽이고 폭탄 설치하고 교도소 습격 후 군인과 싸운다 저는 이걸 민주화 운동이라고 말할 수...

5.18은 왜 민주화운동인가요??

... 폭동이아닌가5.18은 전두환 신군부 패거리에 항거한 민주화운동입니다. 무기 들었어도 민주화운동입니다.... 역사의 고비마다 정의와 진실을 위해 앞장서온 분들을 매우...

5.18 민주화운동? 폭동?

... 자기입으로 이건 민감한 사항이라 자세한 설명은 하지... 오늘날 5.18 은 객관적으로,보편적으로 민주화운동이자... 계획되어진것이 아닌가하는 의문도 남아있습니다) 그...

5.18 민주화 운동

5.18 민주화 운동은 그말대로 민주화 운동입니까 아니면... 민주화 운동이라고 보는 것이 좀 더 타당한 것이 아닌가... 진보가 주장하는 민주 열사에 의한 투쟁이 아니라 이겁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