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

화폐

다른 표기 언어 money , 貨幣

요약 일반적 동의에 의해 경제적 교환의 수단으로 인정되는 물품.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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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역사
  2. 기능
    1. 개요
    2. 교환수단
    3. 지불수단
    4. 저장수단
    5. 가치척도
  3. 화폐와 유동성
  4. 화폐와 경제정책
  5. 한국의 화폐
    1. 개요
    2. 고려시대
    3. 조선 전기
    4. 조선 후기
    5. 일제강점기
    6. 광복 후

이것은 가격과 가치가 표현되는 수단으로서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 사이를 오가면서 거래와 무역의 편의를 도모하고 부를 축적하는 주요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화폐
화폐
화폐
화폐
화폐
화폐

역사

화폐의 역사
화폐의 역사

역사적으로 조가비, 유리알, 납작한 돌, 가축 등이 화폐로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가장 널리 쓰인 화폐는 동전과 지전이었다.

동전에 사용되는 금속, 특히 금·은은 이미 4,000년 전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화와 은화는 필요한 만큼의 금과 은을 함유했고 이론적으로는 시중에 유통되는 그 값어치만큼의 금과 은을 살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18, 19세기에 들어와 은행에서 일정 액수가 적혀 있고 휴대하기 편리한 지전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모든 지전은 그 액면가치만큼의 금과 은으로 바꿀 수 있었다. 유럽 각국의 공업경제가 발달하면서 이 같은 신용 발행의 화폐, 즉 다른 가치수단으로 바꿀 수 있는 화폐가 주된 화폐가 되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실용적 이유 때문에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동전들도 표시 액수만큼의 금과 은으로 교환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중 얼마 동안, 1930년대의 대공황 이후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금본위제를 폐지했고 이에 따라 지전은 더이상 금과 바꿀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국가의 신용을 바탕으로 발행되고 금·은과 교환이 되지 않는 화폐를 불환지폐라고 한다.

기능

화폐의 기능
화폐의 기능
개요

기본적인 경제이론에 의하면 화폐는 다음 4가지 기능을 갖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교환수단

재화와 서비스가 교환되는 주요수단이며, 부채의 변제 및 계약의 체결이 이루어지는 주요 매개체이다.

지불수단

가치의 기본단위 구실을 하며, 가격체제의 운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인이 된다. 또한 화폐를 통하여 손익이 계산되는 근거가 마련되고, 대부를 할 때나 선물거래가 이루어질 때 연불(延拂)의 수단으로서도 기능한다. 화폐가 없다면 돈을 빌고 빌려줄 때 적정한 기준이 마련되지 않을 것이며 오늘날의 경제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으로 떠오르는 신용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저장수단

천재지변, 외적 침입, 내란 등이 일어나 사회질서가 혼란스러울 때, 또 노후의 불안에 대비하여 재화를 비축해두고 싶을 때 적절한 저장수단이 된다.

이러한 외부적 요인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화폐를 저장해 두는 것 자체로도 심리적 충족감을 얻을 수 있으며, 따라서 화폐는 신변의 안전과 자유의 징표가 되는 한편 달성감의 표시가 되는 것이다.

가치척도

재화를 생산하여 소비하고 또 교환하고 지불하며 나아가 저장하는 것을 총칭하여 경제라고 한다면, 경제를 구성하는 사물은 제각기 평가를 받아 경제를 성립시키는 구성요소가 된다. 화폐는 사물이 각각의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는가를 나타내는 공통의 척도로서, 사회적으로 평가를 통합하는 수단이 된다. 재물의 평가뿐만 아니라 지불수단을 통하여 각각의 인간관계를 평가하는 척도로도 이용된다.

이 경우 화폐는 양적인 평가의 척도일 뿐만 아니라 질적인 척도도 된다.

화폐와 유동성

오늘날 화폐의 결제수단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는 현금통화와 예금통화, 즉 은행의 당좌예금을 들 수 있다. 또한 그 자체로는 결제수단으로 기능하는 것은 아니지만 손쉽게 현금통화로 바꿀 수 있는 금융자산이 존재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정기예금이다. 정기예금은 예금자가 6개월 또는 1년 단위의 기간을 정하여 이 기간 동안에는 인출을 하지 않는 대신 어느 정도의 높은 이자를 받는 것을 말한다. 또한 유가증권의 일부, 또는 비교적 쉽게 유통시장을 통해 매각할 수 있는 채권도 정기성예금과 같은 것으로 취급할 수 있다.

이처럼 손쉽게 현금통화 또는 예금통화로 바꿀 수 있는 금융자산은 높은 유동성(liquidity)을 갖고 있다고 표현되는데, 이런 자산을 유동적 자산 또는 화폐유사자산(near money)이라고 한다(→ 유동자산). 이런 유동적 자산은 오늘날 화폐와 거의 다름없는 영향을 경제에 미치고 있다. 예를 들면 현대의 금융이론의 기초를 쌓은 J. M. 케인스는 매크로 경제의 금융적 측면을 유동성 선호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는데, 그 가운데 설명되어 있는 화폐에는 실제로 결제수단의 기능뿐만 아니라 화폐유사자산도 포함되어 있다.

케인스는 이들 자산이 확실한 결제수단으로 기능한다는 의미로서 유동적인 데 비해 다른 금융자산들은 유동적이지 못하므로, 이들 비유동적인 자산들을 보유할 때는 당연히 이자가 발생해야 한다며 이자율의 존재를 설명했다. 이러한 케인스의 이론에는 화폐의 가치저장수단 기능이 강조되어 있다. 어쨌든 오늘날 금융당국도 화폐에 관해 대단히 포괄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다. 어떤 화폐의 정의가 가장 중요한가는 어떤 경제정책을 따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화폐와 경제정책

제2차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국가들은 케인스의 경제학에 강한 영향을 받아 경제에 있어서의 총수요를 억제하는 정책(총수요관리정책)의필요성 및 유효성이 널리 인정되고 있었다.

이 정책에서 가장 유효한 것으로 인정된 방안은 정부 및 공공부문이 재화와 서비스를 구입하는 재정지출정책이었고, 화폐의 양을 조절하는 것은 2차적인 방책에 불과했다. 바꾸어 말하면 케인스 경제학은 화폐량의 변화는 사람들의 지출(수요행동)에 간접적인 영향밖에 미치지 못한다고 본 것이다. 그후 M. 프리드먼 같은 경제학자가 나와 화폐공급량의 조절이 경제정책에 중요한 요인이라고 보는 통화주의(monetarism)를 주장했는데, 이것은 고전적인 화폐수량설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1970년에 들어서서 화폐공급량의 급증으로 인한 세계적 인플레 현상의 심화로 정책당국자 사이에 통화공급량의 조절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이같은 인식에 힘입어 통화주의도 그 세력을 얻게 되었다. 미국과 독일의 중앙은행들은 화폐공급량의 사전 목표치를 정해놓고 이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금융정책을 운영했다.

이같은 화폐중시의 경제정책은 인플레이션 억제에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나라에 심각한 경제불황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화폐와 화폐유사자산 간의 경계가 급속히 붕괴되고 있기 때문에 중앙은행에 의한 화폐의 억제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한국의 화폐

개요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교환형태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물물교환이 지배적이었고, 무기·생산기구·장신구·가축·옷감·곡물 등이 교환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찍이 기자조선시대(箕子朝鮮時代)에 자모전(子母錢),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동전(銅錢)·철전(鐵錢), 동옥저(東沃沮)와 신라시대에 금·은무문전(金銀無文錢) 등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편 명도전(明刀錢)·포전(布錢)·오수전(五銖錢)·개원전 등 중국의 화폐가 유입되어 사용되었던 흔적도 있다.

고려시대

고려 초기인 996년(성종 15)에 정부가 집권적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철전을 주조·유통했다.

이것은 우리나라 역사상에서 정부가 정책적으로 화폐를 만들어 법화(法貨)로 사용하려 했던 최초의 시도이다. 그때부터 1세기가 지난 1097년(숙종 2)에 동전인 해동통보(海東通寶)를 만들어 사용했고, 그 이후 동국통보(東國通寶)·동국중보(東國重寶)·삼한통보(三韓通寶)·삼한중보(三韓重寶)·해동중보(海東重寶) 등이 주조·유통되었다. 또한 1101년 은병(銀甁)이 주조·유통된 이후 소은병(小銀甁)·쇄은(碎銀) 등 칭량은화(稱量銀貨)가 통용되고, 1392년(공양왕 4)에 송(宋)나라의 회자(會子)와 원(元)나라의 보초제(寶制)를 수용하여 저화(楮貨:紙幣)의 통용을 시도했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송·원·명(明) 등 중국의 각종 화폐가 유입되어 국내의 일부 유통계와 대외무역의 결제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화폐가 유통될 만큼 사회 경제적 기반이 성숙되지 않았고, 화폐원료의 공급도 원활하지 못했다. 따라서 당시 법화로 사용하려 했던 철전·동전·저화 등의 화폐는 계속 유통되지 못하고, 쌀[米]·포(布) 등 물품화폐와 칭량금화·칭량은화 등이 널리 유통되었다.

조선 전기

정부는 조선건국 초기부터 집권적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물품화폐와 칭량금화·칭량은화 등이 유통되는 자연 경제적 유통질서를 극복하고 저화나 동전 등을 법화로 유통시키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1408년(태종 8)에 칭량은화의 통용을 금지시켰고, 이어 1410년부터 저화를 법화로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1423년(세종 5)에는 저화제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조선통보(朝鮮通寶)라는 동전을 주조해서 유통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통보 역시 법화로서의 기능을 못하자, 1445년부터 정부에서는 동전유통책의 실패에 대비하여 일찍부터 일반 유통계를 지배하던 물품화폐인 포의 법화화(法貨化)를 시도했다.

그러나 저화도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일부에서만 유통되었다. 국가화폐정책이 성과를 거둘 수 없게 되자, 1464년(세조 10)에는 포·쌀 등 물품화폐와 저화·동전 등 명목화폐를 절충·보완한 전폐(箭幣)를 철로 만들어서 비상시에는 화살촉으로, 평화시에는 화폐로 사용할 것을 결정·추진했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도 고려에 비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화폐가 유통될 정도의 사회경제적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고, 화폐원료의 공급난이나 화폐정책의 불합리성은 여전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저화나 동전 등은 법화로 계속 유통되지 못하고 포·쌀 등 물품화폐와 칭량은화가 유통되었다.

조선 후기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그 이전보다 화폐유통을 위한 여러 여건이 보다 성숙된 상황에서 동전을 법화로 유통시키기 위한 화폐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명목화폐 통용을 필요로 하는 조선 사회의 가치체계와 생산양식의 진보적 변화에 대응하는 한편, 전란으로 파탄에 직면한 국가경제 재건책의 일환으로 동전유통정책이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1624년(인조 3) 동전을 주조·유통하기로 결정한 이후 1633년 팔분서체(八分書體) 조선통보, 1646년 십전통보(十錢通寶) 등을 주조하여 법화로 유통·보급시키려 했다. 또한 조선 전기에 주조되어 전해오던 조선통보를 잠깐 시험적으로 통용했고, 후에는 중국의 각종 동전을 싼 값으로 수입하여 유통하기도 했다.

그결과 국가의 화폐유통정책이 호란(胡亂)이나 화폐원료의 공급난 등으로 중단을 거듭하는 중에서도 1640년대에는 동전이 개성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방에서 원활히 통용되었다. 국가의 화폐정책이 중단된 지 20년이 지난 1678년(숙종 4)부터 동전인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주조되기 시작했다.

상평통보(常平通寶)
상평통보(常平通寶)

그후 상평청·호조 등 중앙관서와 각 군영 및 지방관청에서 필요할 때마다 상평통보를 주조함으로써 상평통보의 유통범위는 점차 확대되고 화폐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이처럼 상평통보의 유통보급으로 확대·발전된 화폐경제는 조선 사회 성리학 중심의 중세적 가치체계와 농업 중심의 생산양식을 해체시키고 근대를 지향하게 하는 등 중요한 역사적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처럼 상평통보로 인해 유통체제가 비교적 안정되었는데, 흥선대원군이 발행한 악화(惡貨) 당백전(當百錢)과 중국에서 수입된 동전이 다량 유통됨으로써 유통체제는 극도로 문란해졌다(당백전). 이는 대체로 봉건 말기에 중앙정부의 급증하는 재정수요에 충당하기 위해 악화를 남발함으로써 나타난다는 화폐제도의 문란상과 본질적으로 성격이 같다.

당백전(當百錢)
당백전(當百錢)

조선정부는 화폐제도의 문란과 사회경제적 혼란을 주체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채 1876년에 개항을 단행하여 근대 화폐를 사용하는 일본 및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빈번하게 통상거래를 하게 되었다. 통상거래과정에서 품질이 통일되지 못하고 운반이 불편하며 가치변동이 심한 전근대적 상평통보 유통체제의 모순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정부는 상평통보 유통체제를 개혁, 서양의 근대 금은본위제도의 수용을 위해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화폐개혁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우선 1882년에 수공업적 기술로 금화·은화를 주조·유통시키려고 했다. 그 이듬해에는 상설 조폐기관으로 전환국(典圜局)을 설치한 후에 서양의 기계기술을 도입하여 근대 금화·은화의 주조·유통을 시도했다. 1894년에는 갑오개혁의 추진과정에서 상평통보의 주조·발행을 중단시키는 한편, 신식화폐발행장정(新式貨幣發行章程)을 공포하고 우리 역사상 최초로 근대 은본위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로써 본위화폐로 5냥 은화, 보조화폐로 1냥 은화, 2전(錢) 5푼(分) 백동화(白銅貨), 5푼 적동화(赤銅貨), 1푼 황동화(黃銅貨) 등 모두 5종류의 근대 화폐를 주조하여 통용되고 있던 다른 화폐와 병용했다.

그러나 신식화폐발행장정에는 일본 화폐의 국내 통용이 규정되었기 때문에 국가 화폐권의 자주독립성이 훼손되었다.

또한 은본위제도가 실시된 후 본위은화는 극소량이 주조되고 보조 백동화만 남발되어 화폐제도의 문란과 제반 사회경제적 혼란이 일어났다. 이에 조선정부는 화폐금융권의 자주독립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백동화 인플레이션 등 은본위제도의 모순과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1901년(광무 5)에 금본위제도의 수용을 골자로 하는 '광무5년화폐조례'(光武五年貨幣條例)와 '태환금권조례'(兌換金券條例) 등을 제정·공포했다.

그러나 이 개정안은 일본측의 간섭으로 시행되지 못한 채 부분적으로 수정·보완되어 1905년에 '광무9년화폐조례'로 공포·시행되었다. 이 개혁안은 우리나라 최초로 명실상부한 근대 금본위제도가 실시되었는데, 일본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 다이이치은행이 발권은행이 되어 화폐주조에 착수했으며, 1909년에는 한국은행이 설립되어 화폐발권을 포함한 제일은행의 업무 일체를 인계받았다. 즉 이러한 화폐정리사업은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준비단계로서의 재정정리의 일환으로 실시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한일합병 후인 1910년 12월 21일부터 일본 다이이치은행권을 대신하여 한국은행이 화폐발권을 시작했다.

1911년 2월 조선은행법을 공포하고 그해 8월 한국은행을 조선은행으로 개칭함에 따라 한국은행권은 조선은행권으로 인정되었다. 조선은행은 1914년 9월에 100원권을 발행했고, 이듬해 1915년 1원권·5원권·10원권을 발행했다. 발행된 조선은행권은 만주지방과 중국에까지 유통되었으며, 1945년 8·15해방 때의 발행액수는 49억에 이르렀다.

조선은행(朝鮮銀行)
조선은행(朝鮮銀行)
광복 후

해방 후 군정법령에 의해 조선은행권이 유일한 법화로서 계속 유통되었는데, 미군정의 거액지출 및 전후 경제질서의 혼란으로 통화발행고가 크게 늘어 1949년말에는 751억 원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이러한 통화팽창으로 인해 중심권의 종류가 10원권에서 100원권으로 바뀌었다. 또한 새로운 양식의 5원권과 10원권, 5전·10전·50전 등의 소액권도 발행하여 화폐제도를 정비하다가 1950년 6월에는 한국은행이 발족되었다. 그리하여 한국은행법이 제정되었는데, 이로써 완전한 관리통화제에 들어섰다. 이리하여 1950년 처음으로 한국은행권 1,000원권과 100원권을 발행했으며 조선은행권을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하는 제1차 통화조치를 단행했다.

1952년 10월 한국조폐공사를 설치하여 한국은행권의 인쇄권을 전담하게 되었으며, 그때부터 신1,000원권과 신500원권을 인쇄했다. 1953년 2월 제2차 통화조치로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해 원화에서 환화로 개칭해 100:1로 평가절하를 했다.

이때 인쇄된 지폐는 미연방국에서 인쇄된 화폐를 반입해 발행했는데, 이 지폐를 국내제조권으로 대체하기 위해 같은 해 3월 신10환권, 12월 신100환권을 발행했다. 1959년 정부의 승인을 얻어 100환 니켈화, 50환 백동화, 10환 청동화를 발행했다. 1961년 5·16군사혁명 이후 군사정권은 1962년 제3차 통화조치를 단행하여 화폐를 1/10로 호칭절하하는 동시에 화폐단위를 원으로 변경시켰다. 1962년에는 한국조폐공사에서 신10원권과 신100원권을 발행했고, 소액거래를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새로이 10전권과 50전권을 발행했으나, 통용되지 않았다.

1965년 이후에는 구50환 및 구10환에 대체할 목적으로 1원화 및 5원화, 새로이 10원화가 순수한 국내기술에 의해 동과 아연으로 주조되었다. 1970년대에는 화폐의 거래량이 늘어 5,000원권과 10,000원권이 발행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