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홀바인

한스 홀바인

다른 표기 언어 Hans Holbein the Younger 동의어 소 한스 홀바인
요약 테이블
출생 1497년경, 아우크스부르크 주교관할구 아우크스부르크
사망 1543년경, 잉글랜드 런던
국적 독일

요약 15~16세기 독일의 화가이자 헨리 8세의 궁정 화가로 주요 작품은 <죽음의 무도>와 <헨리 8세>와 <에라스무스>. 유명한 미술가 가문에서 태어나 16세기 독일 미술의 2세대 대가로 손꼽혔다. 1522년 바젤에 유입된 프로테스탄티즘으로 예술 정체 현상이 초래하자, 에라스무스의 소개로 영국으로 향했다. 영국에서는 헨리 8세의 궁정화가가 되었으며 그림뿐만 아니라 왕의 모든 예복과 궁정의 다양한 품목을 정교하게 디자인했다. 당시 화가들은 거의 대부분 종교화를 그렸기 때문에, 홀바인의 작품에는 종교적인 요소가 들어 있지 있다는 사실이 특징적이다.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엄밀한 자연주의를 기초로 한 소묘와 객관적인 사실주의를 기초로 한 초상화, 특히 영국왕 헨리 8세의 왕실을 기록한 그림들로 유명하다.

홀바인은 유명한 미술가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대(大)한스 홀바인과 삼촌인 지크문트는 다소 보수적인 성격을 띤 독일 후기 고딕 양식의 그림으로 유명했다. 홀바인과 형제인 암브로시우스도 화가가 되었지만, 그는 1519년경 미술가로서 성숙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었다. 홀바인 형제는 처음에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그들의 아버지에게 미술을 배웠음이 틀림없는데, 그들은 둘다 1515년경 스위스의 바젤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홀바인이 확실하게 16세기 독일 미술의 2번째 세대에 속하는 화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루카스 크라나흐는 모두 1470년경에 태어났으며 홀바인이 활동을 시작할 무렵에 이미 성숙한 걸작들을 그려내고 있었다. 사실 홀바인은 당대 독일 미술에서 유일한 대가이다.

홀바인이 1515~25년의 10년 동안 바젤에서 그린 그림들은 매우 다양한데, 이탈리아 북부(1517경)와 프랑스(1524)를 여행한 것이 확실히 그의 종교화와 초상화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일찍이 바젤의 출판업자 및 그들의 인문주의적인 친목회와 관계를 맺었던 그는 거기에서 초상화(예를 들면 〈보니파키우스 아머바흐의 초상화 Portrait of Bonifacius Amerbach〉)를 주문받았을 뿐만 아니라 특히 표지와 책의 삽화에 쓸 목판화들을 활발하게 도안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죽음의 무도 Dance of Death〉이라는 중세의 우화를 삽화로 나타낸 41점의 연작으로, 그가 도안하고 1523~26년경 다른 미술가가 조각했지만 1538년이 되어서야 출간되었다.

죽음의 무도(Dance of Death)
죽음의 무도(Dance of Death)

홀바인은 1519년 화가 조합에 들어갔으며, 1520년 한 제혁업자의 미망인과 결혼하고 바젤의 시민이 되었으며, 1521년경에는 바젤 시청의 대회의장에 벽화들을 그렸다.

1522년경 바젤에 들어온 프로테스탄티즘은 그뒤 4년 동안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526년경 격렬한 성상파괴 폭동과 언론에 대한 엄격한 검열이 그 도시를 휩쓸었다. 그당시 예술의 정체 현상을 초래한 상황에 직면해 홀바인은 1526년말 네덜란드의 인문주의 학자인 에라스무스의 소개장을 갖고 바젤을 떠나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으로 갔다.

그는 당시 28세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영국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기에 그려진 그의 가장 인상적인 작품들로는 정치가이며 작가인 토머스 모어 경을 위해 만든 것으로, 그 학자의 가족을 모델로 한 집단초상화(원작품은 없어지고 바젤 미술관에 그것의 모사품들과 예비 소묘가 보존되어 있음)와 이 인문주의자의 장엄한 개인초상화가 있다.

전자는 유럽 북부에서는 최초로 무릎을 꿇지 않은 인물을 그린 대형 집단초상화였는데, 그것의 효과는 불경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기보다는 모델들의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홀바인은 1526년 영국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내용상 루터파를 지지하는 작품과 반대하는 작품을 모두 구상했음이 틀림없다. 1528년 바젤로 돌아가자 그는 약간 망설이다가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것을 결정적인 변화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홀바인의 가장 뛰어난 종교화들은 그의 초상화들과 마찬가지로 겉으로 보기에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나 영성과는 무관했으며 실제의 현실을 뛰어나게 관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홀바인은 1530년경 이후로는 의식적으로 종교화를 거의 그리지 않았다. 1528~32년 바젤에서 홀바인은 시청의 대회의장을 위해 계속 중요한 작품들을 만들었다. 그는 또한 그의 작품에서는 유일하게 인물의 심리를 꿰뚫어보듯이 묘사한 아내와 두 아들의 초상화(바젤 미술관)를 그렸다. 이 그림은 유기된 가족의 불행한 일면을 뚜렷이 보여준다. 홀바인은 바젤 시로부터 충분한 대우를 받았지만 1532년 다시 2번째로 그의 가족을 떠났으며 주로 영국에서 생애의 마지막 11년을 보냈다.

1533년경 홀바인은 이미 궁정의 저명인사들을 그리고 있었으며, 4년 뒤에는 헨리 8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다.

헨리 8세가 맡긴 일거리들은 다양하고 엄격했지만 무엇보다도 이 미술가의 직업적·개인적인 야망을 충분하게 만족시켰을 것이 틀림없다. 생애의 이 마지막 10년 동안 홀바인은 왕족과 귀족을 모델로 한 초상화를 150점가량 그렸다고 여겨지는데, 실물 크기의 초상화도 있었고 세밀초상화도 있었다. 홀바인은 초상화가로서뿐만 아니라 궁정의 패션디자이너로서도 활동했다.

그는 왕의 모든 예복을 디자인했으며 그밖에도 왕족을 위하여 단추와 버클에서부터 행렬용 무기와 마구, 책의 장정에 이르기까지 250가지가 넘는 품목의 정교한 디자인을 남겼다. 여기에서는 홀바인이 마니에리스모 양식의 질감과 세부 표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아마 심오한 정신성의 표현을 방해했을 것으로 보인다. 홀바인은 1543년 런던에 퍼진 전염병으로 죽었다. 홀바인은 모든 시대에 걸쳐 매우 뛰어난 초상화가이며 소묘가였다.

그는 많은 작품을 만든 다재다능한 미술가로서 종교적인 패널화와 초상화, 세밀화를 그렸고, 목판화와 스테인드 글라스를 설계했으며, 건축물의 내벽과 외벽에 대형 벽화들을 그렸다. 그의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사실상 그가 영국왕 헨리 8세의 궁정에 퍼뜨린 양식과 그 궁정에 대한 기록이다. 홀바인의 초상화들이 모델의 성격이나 정신적 경향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 미술가의 생애에서도 그의 성격이나 정신적 경향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전기는 기본적으로 여러 가지 사실들의 열거에 불과하며,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직접 쓴 메모나 편지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들은 한결같이 애매모호하다. 홀바인의 모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에라스무스는 어떤 때는 그를 칭찬했지만 또다른 경우에는 그를 기회주의적인 사람이라고 경멸했다.

사실 유럽 대륙에 그를 보내 믿을 만한 초상화를 그려오게 함으로써 신부감을 고르는 데 도움을 얻은 헨리 8세만이 아마도 홀바인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홀바인은 자신의 창조적인, 그러나 매우 세속화된 힘을 억제시킬 수도 있는 권력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고 초연해짐으로써 아름다움과 뛰어난 작품들을 만들 수 있었다. 그가 좀더 경건한 그리스도교도였거나 당대의 혼란에 휩쓸렸다면 그의 미술은 아주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특히 16세기에는 유럽을 휩쓴 종교적 분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미술가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최근에는 그의 작품에 종교적인 요소가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특히 주목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홀바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인상은 종종 표현주의적이거나 감정적이라기보다는 예술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 평가되어왔다. 아마도 이것이 그의 미술의 유일한 한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