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젠

헤르젠

다른 표기 언어 Aleksandr (Ivanovich) Herzen
요약 테이블
출생 1812. 4. 6(구력 3. 25), 모스크바
사망 1870. 1. 21(구력 1. 9), 프랑스 파리
국적 러시아

요약 러시아의 언론인·정치사상가.
(러). Aleksandr Ivanovich Gertsen. Herzen은 Hertzen이라고도 씀.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망명생활

개요

농민 인민주의(peasant populism)라는 이론을 창안하여 러시아에 독특한 사회주의 경로를 제시했다.

자신의 활동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회고록 〈나의 과거와 사상 My Past and Thoughts〉(1861~67)은 러시아 산문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의 하나로 꼽힌다(논픽션 산문).

초기생애

부유한 귀족 이반 알렉세예비치 야코블레프와 미천한 신분의 독일 여성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집에서 자라면서 프랑스인·독일인·러시아인 가정교사들로부터 엘리트적이며 광범위한 교육을 받았다. 출생에 대해 열등감이 있었던 그는 농노에 기반을 둔 러시아의 사회질서와 권위에 적의를 품었다. 이러한 적대감은 데카브리스트(Dekabrist:'12월 당원'이라는 뜻으로 1825년 황제 니콜라이 1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혁명집단)을 예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의 대담한 자유주의에 영향을 받은 그와 그의 친구 니콜라이 오가료프는 러시아인의 자유를 위해 데켐브리스트 투쟁에 평생을 바치기로 엄숙히 맹세했다.

헤르젠은 1829~33년에 모스크바대학교에 다니면서 '가슴을 향한 낭만주의에서 머리를 향한 관념주의로'돌아섰으며,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셸링의 '자연철학'(Naturphilosophie)을 지지하게 되었다. 결국 헤르젠과 오가료프를 비롯한 그들의 모임은 셸링의 범신론적 관념론과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앙리 드 생 시몽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를 결합하여 역사철학을 발전시켰는데, 이 사상은 세계정신(World Spirit)이 필연적으로 자유와 정의를 구현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형이상학적인 정치학은 헤르젠의 동료 집단을 체포하는(1834) 충분한 구실이 되었다. 헤르젠은 6년 동안 추방되어 뱟카(지금의 키로프)와 블라디미르에서 지방관료로 일했고, 이후에도 경찰에 대한 무분별한 발언 때문에 2년 동안 노브고로트에서 추방생활을 했다. 이 비참한 시기에 그를 구원한 것은 사촌 나탈리아 자하리나와의 매우 낭만적인 사랑과 초기의 행복한 결혼(1838)생활이었다. 8년에 걸친 부당한 경험과 이 경험을 통해 알게 된 러시아 정부의 활동은 헤르젠의 급진주의를 더욱 강화시켰다.

그는 셸링의 막연한 관념론을 버리고 다른 동시대 독일 철학자의 사상, 즉 G. W. F. 헤겔의 '현실주의 논리학'(realistic logic)과 L.A.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받아들였다(헤겔주의). 좌파 헤겔주의자가 된 그는 변증법(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이념들의 조정을 통한 발전)은 '혁명의 교과서'이며, 실체 없는 '과학'의 진리, 즉 독일 관념론은 '실천철학' 또는 프랑스 사회주의자가 선언한 정의(正義)를 위한 투쟁으로 귀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년에 그는 니콜라이 1세의 전제정치 아래서 행동이 불가능했고 따라서 순수한 사상만이 유일하게 자유로운 표현영역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세대에서는 정치학에 대한 형이상학적 접근이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철학적 무기로 무장한 헤르젠은 1842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서구주의자측에 가담했다. 슬라브주의자가 러시아의 발전은 정교회와 형제애적인 농민 공동체를 토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데 반해, 서구주의자는 러시아는 유럽의 합리주의와 시민의 자유를 바탕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의 와중에서 헤르젠은 좌파 헤겔주의를 효과적·성공적으로 보급시킨 〈과학에서의 어설픈 지식 Diletantizm v nauke〉·〈자연연구에 관한 편지 Pisma ob izuchenii prirody〉를 발표했으며, 사회비판 소설 〈누가 비난받아야 하는가? Kto vinovat?〉에서는 러시아 소설에 자연주의적 기법을 도입했다.

그러나 헤르젠은 곧 서구주의자와 결별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대부분이 자유주의적 개혁주의자인 데 반해 헤르젠은 프랑스의 사회이론가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의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무렵 아버지의 죽음(1846)으로 상당한 유산을 상속받은 그는 이듬해 러시아를 떠나 서구로 갔다(그의 이 행동은 잘한 일이었음이 밝혀졌음).

망명생활

헤르젠은 사회혁명의 승리를 고대하면서 유럽 급진주의의 본산인 파리로 갔다.

그러나 1848년 그는 파리와 아탈리아에서 혁명적 격동을 목격한 후 자신의 생각을 수정했다. 그는 서구 '혁명가들의 웅변'은 지나치게 과거의 가치에 물들어 있어서 기존의 사회질서를 타파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역사적인 세력으로서 유럽의 역할은 끝났으며, 서구의 제도들은 사실상 '죽었음'을 확신했다. 더 나아가 그는 헤겔주의와는 달리 역사에는 어떤 '합리적'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으며, 사회의 운명은 우연과 인간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이 주제들을 훌륭하지만 다소 혼동스러운 저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온 편지 Pisma iz Frantsii Italii〉·〈여러 지방으로부터 Stogo berega〉에서 더욱 발전시켰다. 더욱이 아내가 독일의 급진적인 시인 게오르크 헤르베크와 불륜을 저지른 뒤 죽자(1852) 그의 서구에 대한 환멸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서구에 대한 신념의 상실은 러시아로의 정신적 복귀를 자극했다. 헤르젠에 따르면 '풍요로웠던 과거의 족쇄를 차고 있는 늙은' 유럽은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할 수 없음이 입증되었고, '젊은' 러시아는 과거로부터 보존할 가치가 있는 어떤 것도 물려받지 않았기 때문에 급진적으로 새 출발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헤르젠은 고전적인 슬라브주의자의 이념을 빌려 집단주의적 농민 공동체 속에서 미래 사회주의 체제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자원을 발견했다. 러시아의 혁명적 잠재성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신념은 1850, 1851년에 프랑스의 역사가 쥘 미셸레와 이탈리아의 혁명가 주세페 마치니에게 보낸 〈편지 Letters〉 속에 잘 나나타 있다.

헤르젠은 1852년에 런던으로 옮겼고 이듬해에는 폴란드 망명객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검열을 받지 않는 '런던의 자유러시아출판사'를 세웠다.

1855년 니콜라이 1세가 죽은 후 즉위한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해방 의지를 표명했다. 이 전례 없는 '해빙기'를 맞아 헤르젠은 러시아에 밀반입할 목적으로 〈북극성 The Polar Star〉(1855)·〈러시아에서 온 소리 Voices from Russia〉(1856) 등의 정기간행물을 발간했고, 1857년에는 오랜 친구 오가료프(그 역시 망명자였음)의 도움을 받아 신문 〈콜로콜 Kolokol〉을 창간했다.

헤르젠의 목표는 정부와 국민 모두에게 영향을 미쳐 농민해방과 관대한 토지배분 및 러시아 사회의 자유화를 이룩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온건화하여 사회주의 혁명 자체보다는 알렉산드르의 개혁 속에 포함된 구체적인 쟁점들을 옹호했다. 한때 그는 알렉산드르에게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죽기 직전에 예수에 대해 말한 "너는 정복했도다, 오 갈릴리 사람이여!"라는 찬사를 보내면서 이 계몽군주에 대한 신뢰를 피력하기도 했다(1856). 〈콜로콜〉은 곧 정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차르의 대신들과 혁명 반대세력들도 이 신문을 읽었다.

그러나 개혁과 혁명의 어중간한 위치에 있던 헤르젠은 곧 지지를 잃었다. 1858년 이후에 이반 투르게네프와 같은 온건한 자유주의자들은 헤르젠의 무모한 이상주의를 비난했다. 1859년 이후에 벌어진 정치작가 N. G. 체르니셰프스키 및 젊은 급진주의자들의 언쟁에서 헤르젠은 이들의 비타협적 태도가 개혁에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부를 믿지 않았고, 1861년 농노해방법이 제정되었을 때 이 법을 농민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난했다.

헤르젠은 다시 좌익으로 전향했고 젊은 학생들에게 러시아의 사회주의를 호소하면서 직접 "인민에게 가라"라고 촉구했다.

또한 미하일 바쿠닌의 간청을 받은 그는 〈콜로콜〉을 통해 1863년의 폴란드 봉기를 지지했으나 이 봉기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행동은 혁명가들의 신임을 다시 얻기 전에 러시아 내 모든 온건분자들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으므로 그는 자신의 성급함을 곧 후회했다. 〈콜로콜〉의 영향력은 현격히 감소되었다. 1865년 헤르젠은 〈콜로콜〉의 본부를 젊은 러시아 망명객들이 있는 제네바로 옮겼으나 대중의 반응은 냉담했고, 〈콜로콜〉의 발행은 중단되었다.

정치적 좌절에 휩싸인 헤르젠은 회고록 〈나의 과거와 사상〉을 저술하는 데 온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일화 및 러시아의 급진주의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간직하기 위해 씌어진 이 회고록은 느슨하게 구성된 개인 담화로서, 러시아와 서구의 정치가에 대한 예리한 묘사와 함께 철학적·역사적 여담이 틈틈이 실려 있는 동시대 유럽 급진주의에 대한 훌륭한 프레스코이다.

때로는 재치 있고 분방하며 쾌활한 문체로, 때로는 서정적·열정적·열광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이 책은 러시아 산문 가운데 가장 독창적이고 설득력 있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범위와 질을 고려해볼 때 이 책은 예술적 지위면에서 19세기의 뛰어난 러시아 소설이라 할 수 있다. 1869년에 쓴 바쿠닌에게 보내는 편지 〈오랜 동지 바쿠닌에게 K staromu tovarishchy〉에서 헤르젠은 혁명의 대가를 고려해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자유주의적 개혁주의를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헤르젠은 마르크스의 노동계급 연합조직인 제1인터내셔널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경력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태도는 그의 정치적인 유산이 되었다. 그의 이러한 모호한 견해 때문에 러시아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모두 그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