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리

향리

다른 표기 언어 鄕吏

요약 전근대사회에서 지방 행정실무를 담당하던 계층.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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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려시대의 향리
  2. 조선시대의 향리

향리는 고려시대 군현에서 지방관의 지휘와 통제를 받으면서 민에 대한 조세수취와 역역징발에 관한 행정실무를 실질적으로 수행했다. 이들은 소속된 군현의 관격에 따라 부리·군리·현리·부곡리 등으로 호칭되었고, 장리·외리로 총칭되었다.

향리라 불리는 세력은 원래 신라 하대 이래 지방에 토착기반을 가진 촌주 또는 호족세력으로, 당시 중앙정부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자 이들이 당대등·대등과 같은 독자적 행정조직인 관반체제를 갖추고 각각 주변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려 건국 직후 중앙정부는 이들 호족세력을 국가의 관료기구 속에 포섭시키는 일련의 적극적인 대책을 펴나갔다. 이에 결국 지방세력은 외관을 보좌하면서 실질적으로 군현의 행정실무를 전담하는 향리층으로 자리잡았다.

고려시대의 향리

고려시대 향리제는 태조 때부터 일부지역에서 시행되기 시작했으며, 983년(성종 2)에는 당대등·대등과 같은 지방세력의 독자적인 통치기구를 호장·부호장 등으로 개편한 향리직제를 마련해 그 제도적인 골격이 형성되었다. 이후 일련의 군현개편과 함께 향리제는 제도적으로 정비되어갔다.

1018년(현종 9) 군현의 규모에 따라 향리의 정원을 제정했는데, 주·부·군·현의 경우에 최고 84명(1,000정 이상의 군현)에서 각각 61명(500정 이상)·51명(300정 이상)·31명(100정 이하)까지, 방어군·진의 경우 최고 52명(100정 이상)에서 각각 50명(100정 이상)·29명(100정 이하)을 두었다. 같은 해에 향리의 공복도 제정했다. 한편 1051년(문종 5)에는 9단계의 승진규정을 마련했다. 구체적으로 '제단사-병사·창사-주·부·군·현의 사(史)-부병정·부창정-부호정-호정-병정·창정-부호장-호장'의 순서로 승진했다.

이러한 향리는 크게 호장층·기관층·색리층의 3계층으로 구성되었다. 호장층은 지방관을 보좌하면서 그의 지시를 받아 기관층 이하의 향리층을 지휘·통제하는 향리집단의 수장층이었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향직과 동정직을 제수받았으며, 수령의 추천을 받아 임명되었다. 기관층은 부호장·병정·창정에서 주·부·군·현 사(史)급에 이르렀으며 조세·역역 등의 행정실무를 전담했다. 한편 색리층은 병사·창사에서 제단사층까지이며, 이들은 기관층을 보좌하면서 잡무를 전담했다. 이들 향리는 국가에 대하여 향역을 지는 대가로 외역전을 지급받았으며, 기인으로 중앙에 선상되어 역을 부담하기도 했다.

향리는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으나 제술업과 명경업에 응시할 수 있는 계층은 부호정 이상의 손과 부호정 이상의 자(子)로 제한되었다. 이와 같은 향리직제 정비와 함께 기인제도·사심관제도 등 중앙정부의 강력한 향리통제책은 지방 토호적인 성격의 향리를 국가관료 말단기구 내의 유역인으로 변모시켰다.

기인제도는 원래 토호적인 성격의 향리를 견제하기 위해 향리의 자제를 중앙에 머물게 하여 출신지역의 일에 대한 고문을 맡긴 것이었는데, 그후 기인은 중앙기관의 잡무를 전담하는 등 사역인으로 전락했다. 이에 따라 기인을 선상하는 자체가 향리의 고역이 되었고, 기인 역 자체도 천역화되었다. 또한 중앙정부는 중앙의 관료들을 그들의 본관에 파견하여 해당지역의 향리들을 지휘·통제하게 한 사심관제도를 시행했으며, 고려 중기 이후 농민항쟁, 몽골과의 전쟁 등으로 국가의 역역동원이 가중되면서 향리들은 과중한 역을 피하기 위해 도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무인정변 후 무인집정자들은 시문과 행정사무 능력을 겸비한 능문능리의 관료를 이상적인 관인층으로 생각함에 따라, 행정사무 능력을 갖추었던 향리들은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에 대량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기인제도, 사심관제도, 과중한 역부담, 대내외적인 정세변동 등으로 향리층은 고려 중기 이후 크게 분화되기 시작했으며, 향리제 자체도 동요되었다.

조선시대의 향리

고려 중기 이후 향리제도가 변하기 시작했는데, 그 추세는 고려말·조선초에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를 더욱 부추긴 것은 속현과 부곡제의 해체, 군현의 영역 조정과 병합과 같은 대대적인 군현개편이었다. 속현이나 부곡, 병합된 군현에 거주한 향리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상실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속됨으로써 정치적·경제적 입지가 크게 축소되었다. 따라서 경제적으로는 1445년(세종 27)에 그들에게 지급되던 외역전마저 철폐되었고, 그 대신 군현 자체 내의 수입 가운데 일정한 삭료만을 지급받게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향리층 가운데 기관층의 경우 일부는 6방층으로, 나머지는 색리층으로 분화되었다. 또한 정부에서 원악향리처벌법과 부민고소법을 제정하여 향리에 대한 통제를 강화시켜 그들의 입지를 축소시켰고 향리의 차역(差役)도 강화시켰다. 향리는 고유의 향역 외에도 땔나무를 공급하는 시탄공납의 역이 있었다. 비상시를 대비한 군사편제인 잡색군에 편성되었으며, 북계지역이 개척된 이후에는 그 지역의 향리가 입마역인 관군역을 부담하기도 했다.

향리가 전락해가는 현실 속에서, 향촌사회는 양반출신의 사족이 유향소를 통해 각 군현의 행정에서 수령의 자문 역을 맡으면서 사족지배체제를 구축했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사족이 고려시대 향리의 지위에 버금 가는 향촌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함에 따라 향리는 토호적인 성격이 거의 사라지고 사족의 지휘와 통제를 받는 군현의 행정 사역인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나 18세기 중반 이후 생산력의 발달로 인하여 사회가 점차 변화되면서 사족지배체제가 무너지고, 그대신 수령권이 강화되어 중앙정부의 군현에 대한 지배가 보다 강화되어갔다.

이런 추세 속에서 부를 축적한 향리층은 수령층과 결탁하여 부세 수취기구에 참여하면서 향촌사회의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족과 향리층 간에 향촌지배를 둘러싸고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다. 향리층은 자신들의 가계나 집단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사우를 건립하거나 안일방 등을 설립해 향리사회를 통제하고 향리에 대한 임면권을 가졌다. 이러한 가운데 향리층 내부에도 상당한 분화가 있었다. 수령권과 결탁한 향리는 이를 계기로 지배신분으로 편입되었고, 그렇지 못한 향리는 몰락하기도 했다. 특히 수령권과 결탁한 향리층의 지나친 대민 수탈은 19세기 농민항쟁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