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리니우스

플리니우스

다른 표기 언어 Gaius Plinius Secundus
요약 테이블
출생 23, 갈리아 포 강 북쪽 노붐코문
사망 79. 8. 24, 베수비오 산 근처 스타비아이
국적 로마

요약 로마의 학자·작가.
(영). Pliny the Elder.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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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물지
  2. 플리니우스에 대한 평가

플리니우스의 〈박물지 Natural History〉는 백과사전적 저서로 모두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중세에 이르기까지 과학적인 문제에 있어 권위를 지녔다(→ 과학사).

플리니우스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로마에서 공부했다. 23세에 독일에서 복무를 하며 군대 경력을 쌓았고 기병대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로마에 돌아온 그는 법학을 공부했던 것 같다. 네로 황제 시대 말기에 스페인의 행정장관이 되기 전에는 거의 은퇴한 상태에서 연구와 집필을 하며 살았다. 연구와 조사 기술에 대한 그의 헌신은 조카인 소(小)플리니우스가 잘 묘사한 바 있다. 69년 독일에서 군 복무를 할 때 함께 있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즉위한 뒤 플리니우스는 로마로 돌아와 여러 관직을 맡게 되었다.

그가 맡은 마지막 임무는 나폴리 만에 있는 함대의 사령관으로서 그곳의 해적을 진압하는 일이었다. 이상한 구름이 형성되는 것을 알고 (나중에 그 원인이 베수비오 산의 화산폭발이라는 것이 알려졌지만) 그 원인을 확인해 불안에 떠는 시민들을 안심시키려고 해변으로 갔다. 그의 조카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화산활동으로 생긴 연기에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유족은 여동생 하나 뿐이었다.

박물지

플리니우스는 7편의 작품을 썼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것은 〈박물지〉 밖에 없다. 문법에 관한 저서, 폼포니우스 세쿤두스의 전기, 로마의 역사, 독일에서의 로마 군의 전투에 대한 연구, 창 던지기에 관한 책 등은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다. 이 작품들은 이미 고대에 소실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플리니우스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그의 명성은 순전히 〈박물지〉에 근거해 있다.

〈박물지〉는 37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마무리 작업을 제외하고는 77년에 완성되었다. 티투스(그가 죽기 바로 전에 황제가 되었던 사람)에게 바친 서문에서 그는 '사물들의 본질, 즉 삶'에 대한 연구(서문 13행)라하고, 공리주의자적인 바탕에서 그의 목적을 설명하고 제목을 정의했다. 이전에는 아무도 '회담 형식의 지식'(enkyklios paideia : 백과사전, 즉 encyclopaedia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음)에 속하는 잡다한 옛 자료를 모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는 이것을 시도했다. 고도의 문학적 문체와 정치적 신화를 경멸했고 그의 목적에 가장 적합한 평이한 문체(그러나 그는 드물게 풍부한 어휘력을 구사했음)를 썼다.

〈박물지〉의 새로운 특징은 자료의 출전을 명시한 것으로 그는 100여 가지 출전을 언급하고 있다. 제1권은 나머지 36권의 요약으로, 플리니우스가 자료를 얻은 작가와 책 제목 목록이 나와 있다. 〈박물지〉의 본문은 사실상 제2권에서 시작된다. 제2권은 우주와 천체에 대한 것으로, 다른 데에서처럼 여기서도 그는 방대한 독서, 특히 그리스 원전의 독서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결과 때때로 세부적인 번역에 부주의하여 많은 기술·수학 분야의 의미들을 왜곡시키기도 했다. 고대 세계의 자연지리학과 역사지리학을 다룬 제3~6권에서 그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중요 도시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쏟았다.

제7~11권에서는 인간(제7권), 포유류와 파충류(제8권), 어류와 다른 바다동물(제9권), 조류(제10권), 곤충(제11권) 등 동물학을 다룬다. 그는 대부분의 생물학적 자료들을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가져왔지만 그의 공적은 전설적인 동물과 민간전승까지 취급한 데 있다. 제12~19권은 식물학에 관한 것으로, 그가 과학에 어느 정도 진정한 공헌을 했다면 바로 여기에서이다. 그는 테오프라토스에 많이 의존했지만 독자적인 관찰들도 있고 특히 독일 여행중에 쓴 것들이 그러하다. 그의 저서는 오늘날 로마의 정원과 식물학에 관한 주요자료가 되고 있으며 이탈리아에 새로운 원예법과 농업 분야를 도입하는 역할도 했다.

농업에 대한 제18권은 특히 윤작, 농장 경영 등의 농사 기술과 콩과식물 및 기타 농작물의 이름들을 싣고 있어 중요하다. 갈리아의 소가 끄는 수확기계에 대한 그의 묘사는 오랫동안 학자들에 의해 상상에 의한 것이라고만 여겨져왔으나, 1958년 벨기에 남부에서 그런 종류의 도구를 돌에 새긴 부조가 발견됨으로써 확인되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 식물명을 라틴어 동의어로 적음으로써 이전에 나온 그리스 책에서 언급된 대부분의 식물명을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제20~32권은 의술과 약에 관한 것들이다. 많은 로마인들처럼 그도 도덕적이고 의학적인 견지에서 사치를 비난했다. 식이요법과 비싼 약재의 상업적 출처 및 가격에 대한 그의 언급은 그당시의 로마 생활에 대한 가치 있는 역사적인 증거를 제공한다. 제33~37권은 광물과 보석, 금속, 특히 로마의 장인들이 사용하던 광석 및 금속에 대한 것이다. 그것들의 사용을 설명하면서 그는 유명한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 로마 건축 양식과 기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플리니우스에 대한 평가

플리니우스의 영향력은 이전에는 서로 무관하던 많은 사실들을 조직적인 방식으로 모은 능력, 다른 사람들은 무시했던 세부적인 것을 인지한 통찰력, 실제적인 자료와 허구적인 자료를 연관 짓는 이야기들 등에서 비롯된다. 지지를 받지 못하던 주장들, 우화들, 과장들과 함께 마술과 미신에 대한 그의 믿음은 이후 시대에 과학과 의학의 이론들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가 심혈을 기울였던 과학적인 방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징후이론'(doctrine of signatures)일 것이다.

즉 식물·동물·광물의 외관과 질병의 외적 증세 사이의 유사점은 식물의 질병치유적 효용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고대 세계의 쇠퇴와 그가 많이 의존했던 그리스 원전의 유실로 인해 〈박물지〉는 일반적 교육의 대용품이 되었다. 중세의 많은 수도원의 도서관에는 이 작품의 사본이 있었다. 이 사본들과 많은 축약본들이 유럽 문학에서의 그의 위치를 지켜 주었다. 그의 권위는 어떤 도전도 받지 않았는데, 이는 좀더 믿을 만한 정보를 줄 책이 부족한데다 그의 주장이 검토되지 않았고 대개 검토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플리니우스의 저서를 최초로 공박한 니콜로 레오니체노의 〈플리니우스의 오류에 대하여 De errorbus Plinii〉가 1492년 페라라에서 출판되었다. 이후로 점차 더 많은 작가들이 그의 주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그의 영향력은 줄어들게 되었다. 17세기말에 이르면 〈박물지〉는 이미 선도적 과학자들에 의해 거부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도 특히 비과학적인 작가들에게 끼친 그의 영향은 줄어들지 않았다.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나 밀턴은 거의 확실히 그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플리니우스의 저서는 이후로 다시는 그 과학적 권위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19세기의 라틴 학자들은 〈박물지〉가 고대 로마의 가장 위대한 문학적 기념비임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었다. 1세기 로마의 정직한 개관을 원하는 이들에게 〈박물지〉는 여전히 가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