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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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특정 인물을 시조로 하여 대대로 내려오는 단계 혈연집단. 한국의 성은 가족 전체를 표시하는 공동 호칭이 아니라 부계혈통을 본위로 한 호칭이다. 한국 사람은 누구나 성·본관·이름을 갖고 있는데, 성과 본관은 가문을, 이름은 항렬로 인해 가문의 대수를 나타낸다. 본관은 한 성이 속하는 시조의 발상지명을 표시하는 것으로, 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안동김씨·연안이씨 등과 같이 본과 성을 함께 이용해야만 비로소 동족을 나타낼 수 있다. 성씨는 형태상 한자로 성을 표기한다. 여기에는 이·김·박 씨 등의 한 글자로 된 단성과 남궁·선우·독고 씨 등 2글자로 된 복성이 있다. 역사상 모두 500여 가지 성이 나타났지만, 소멸되거나 통합되어 대략 250여 종류 안팎으로 사용되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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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1. 한국의 성씨
    2. 본관
    3. 분파
    4. 단성과 복성
  2. 성씨의 발생과 역사적 변천
    1. 고대의 성씨
    2. 한자식 성씨의 보급
    3. 본관체계의 정착
    4. 신분과의 관계
    5. 조선시대의 성씨
    6. 족보와 보학의 발전
    7. 조선 후기의 성씨
  3. 현대사회의 성씨와 관습

개요

성씨는 한 혈통을 잇는 족속(族屬)을 일컫는 개념으로, 특정 인물을 시조로 하여 대대로 이어져내려오는 단계(單係) 혈연집단을 가리킨다. 자기 혈족과 다른 혈족을 구별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하는 성은 원시사회부터 발생한 인류문화의 보편적 현상이다. 한국의 성씨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일찍부터 한자식이지만, 중국성씨가 보급되는 과정에서 한국의 역사적·문화적 독자성과 결합되었으므로 한국 고유의 특수성이 있다.

한국의 성씨

한국의 성은 다른 나라와 같이 가족 전체를 표시하는 공동 호칭이 아니라 부계혈통을 본위로 한 호칭이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성·본관·이름을 갖고 있는데, 성과 본관은 가문을, 이름은 항렬로 인해 가문의 대수를 나타낸다. 성은 본관과 결합함으로써만 자기의 혈족을 표시할 수 있다. 본관은 한 성이 속하는 시조의 발상지명을 표시하는 것으로, 혈족 계통을 표시함에 있어서 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본관

따라서 성만으로는 혈족을 표시할 수 없으며, 안동김씨(安東金氏)·연안이씨(延安李氏)·문화유씨(文化柳氏) 등과 같이 본과 성을 함께 이용해야만 비로소 동족을 나타낼 수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조선 후기 주요성의 본관수가 김씨 498개, 이씨 451개, 최씨는 325개 등이었다. 이와 같이 같은 성이기는 하지만 본관이 다른 경우가 많은데, 이는 같은 성을 사용하면서도 혈족이 다른 경우가 무수히 많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분파

그러나 성과 본, 그리고 동족의 관계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동일한 시조 밑에 2가지 성으로 나누어진 안동권씨(安東權氏)와 안동김씨, 김해김씨(金海金氏)와 김해허씨(金海許氏), 연안이씨와 연안허씨(延安許氏) 같은 이성동본(異姓同本)도 있고, 이와는 달리 외형상 동성동본(同姓同本)이지만 실제 시조를 달리하는 성씨도 있다. 김해김씨는 신라 경순왕과 가야의 수로왕(首露王)으로 시조를 달리 삼고 있으며, 강릉최씨(江陵崔氏)는 최문한(崔文漢)을 시조로 하는 파와 최입지(崔立之)를 시조로 하는 파가 있다.

단성과 복성

한국에서의 성씨는 형태상 한자(漢字)로 성을 표기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이·김·박 씨 등의 한 글자로 된 단성(單姓)과 남궁·선우(鮮于)·독고(獨孤) 씨 등 두 글자로 된 복성(複姓)의 2가지 유형이 있다. 역사상 모두 500여 가지 성이 나타났지만, 소멸되거나 통합되어 대략 250여 종류 안팎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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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인구수 백분율
김(金) 10,689,959 21.51%
이(李) 7,306,828 14.70%
박(朴) 4,192,074 8.43%
최(崔) 2,333,927 4.70%
정(鄭) 2,151,879 4.33%
강(姜) 1,176,847 2.37%
조(趙) 1,055,567 2.12%
윤(尹) 1,020,547 2.05%
장(張) 992,721 2.00%
임(林) 823,921 1.66%
한(韓) 773,404 1.56%
오(吳) 763,281 1.54%
서(徐) 751,704 1.51%
신(申) 741,081 1.49%
권(權) 705,941 1.42%
황(黃) 697,171 1.40%
안(安) 685,639 1.38%
송(宋) 683,494 1.38%
전(全) 559,110 1.12%
홍(洪) 558,853 1.12%
기타 11,041,715 22.21%
49,705,663 100.00%
한국의 성씨 분포(인구 대비 1% 이상, 통계청, 2016)

성씨의 발생과 역사적 변천

고대의 성씨

한국 성씨의 역사는 성이 다만 한 개인의 혈연적 계통을 표시하는 것을 뛰어넘어 특정 시기의 사회구조, 그 변동과 밀접히 관련되었다. 성씨는 각 시대마다 그 사회적 역할과 의미가 달랐으므로, 성씨의 변화상을 통해 각 시대의 사회구조, 사상과 문화, 도덕, 관습을 살필 수 있다.

한국에서 성씨는 고대국가 형성기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는 국호인 고구려와 관련한 고씨(高氏) 성이 있었고 백제는 부여 계통인 시조 온조(溫祚)의 혈통을 딴 부여씨(扶餘氏)가 사용되었으며, 신라에는 박·석(昔)·김의 세 왕족 성씨와 6부의 6성(李·崔·鄭·孫·薛·裵)이 초기부터 이용되었다고 한다.

가야의 수로왕도 황금알에서 탄생했다 하여 김씨 성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외에도 왕족이나 일반가문들은 사서(史書)·가첩·족보(族譜)·구전 등을 통해 성씨를 획득한 시기가 고대국가 성립기 전후라고 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고대국가 초기에는 중국의 한자문화가 수입되지 않았으므로, 각각의 씨족·혈족을 구별하기 위한 명칭은 있었지만 성씨의 형태를 띤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고대국가 초기에 한자식 성씨가 형성되었다는 기록이나 이야기는 후대에 지어졌을 가능성이 많다.

한자식 성씨의 보급

한자식 성씨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 말부터인데, 당시 성씨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지배층이 정치적 편제를 이루는 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국왕이 특정 지역의 지배집단에게 성을 내리는 사성(賜姓) 형식을 통해 성씨가 주로 보급되어갔다. 왕실·귀족과 같이 최상층 지배집단이 성을 갖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백성은 윤랑(允良)이나 우로(于老), 지백호(智伯虎), 소벌도리(蘇伐都利) 식으로 이름만을 썼다. 또한 성을 쓰는 경우에 본관도 없는 것이 보편적이며, 지금과 같이 항렬을 맞추거나 한자식으로 작명하지도 않았다.

성씨의 수도 많지 않았다. 고구려에는 해(解)·예(禮)·송(宋)·목(穆)씨 등 10여 종류가 사용되었고, 백제·신라도 이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사(沙)·연(燕)·왕(王)·고이(古爾)·흑치(黑齒) 등은 백제의 성이며, 박·석·김의 3성을 비롯해 이·최·정 등은 신라 때의 성이다.

본관체계의 정착

고려시대는 한국 성씨의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때로, 오늘날의 성과 본관체계의 원형이 이 시기에 마련되었다. 940년(태조 23)경 태조 왕건이 전국 군현(郡縣) 각 지역의 유력한 토착호족들에게 특정한 성씨를 부여하는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는 태조가 실질적인 지배세력인 호족들을 새로운 국가질서 아래로 끌어들여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즉 태조는 전국의 크고 작은 호족을 제각기 출신 군현에 토성(土姓)으로 지정했는데, 그에 따라 토성은 출신지와 성을 아울러 의미하게 되었으며 본관은 그 출신지를 지칭했다. 예를 들면 수원(水原)에 사는 유력자에게 백(白)이라는 성을 사성할 경우, 본관은 수원이 되고 성은 백이 되는 식이다. 이리하여 고려초에는 이전에 있었던 구(舊)왕실, 귀족의 성씨와 중국에서 도래한 외래성에 새로운 성씨가 더해짐으로써 많은 수의 성씨가 생겨났다.

이들 지배성씨들은 대개 군현의 읍치(邑治)를 중심으로 거주하며, 씨족가보(氏族家譜)·가첩·족보 등을 발행하여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후 지역을 본관으로 삼아 성을 정하는 정책은 고려의 지배층뿐만 아니라 농민을 비롯한 피지배층에게도 미쳐 군현 이외의 속현(續縣), 향(鄕)·소(所)·부곡(部曲)·처(處)·장(莊) 등의 특수 행정구역, 일반촌락 등에 사는 사람들도 이들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를 갖게 되었다. 이리하여 부곡성·소성·향성·촌성 등 거주지에 따른 성씨들이 생겨 노비 등의 천민층 외에는 대부분의 백성이 성씨를 사용했다.

신분과의 관계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 의하면 고려의 성씨는 약 250여 개 정도였다. 삼국으로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이러한 성씨체계 확립과정은 한국의 성씨가 신분제 사회구조를 그대로 반영하고 동시에 국가의 대민정책 속에서 형성된 것임을 알려준다. 이 시기에는 기자(箕子)를 선조로 하는 하는 청주한씨(淸州韓氏)·행주기씨(幸州箕氏)·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하우(夏虞)의 문화유씨, 한(漢) 문제(文帝) 때 관인의 후손인 고성이씨(固城李氏), 수(隋) 양제(楊帝) 때 관인의 후손인 진주강씨(晋州姜氏), 당나라 때 관인의 후손인 연안이씨, 공자 후손인 남원공씨(南原孔氏) 등 중국 고대의 위인들을 시조로 삼는, 비록 사실로 확인할 수 없는 귀화성씨(歸化姓氏)도 생겼으나 국가로부터의 사성에 의해 대부분 형성된 것이다.

고려 군현의 읍치, 속현, 향·소·부곡, 촌락 등은 개별적인 행정단위이기도 했지만 각 거주민들의 사회적 신분, 국가에 대한 의무 정도를 결정하는 지역적 구획이기도 했다. 따라서 군현의 읍치를 본관으로 하는 성은 지배층에 속했고, 촌락성이나 향·소·부곡성 등은 국가에 대한 조세·공부(貢賦)·역역(力役) 등의 부담을 져야 하는 피지배층이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본관을 통해서 그 성씨의 사회적 신분을 살필 수 있었다. 한편 이러한 성씨체계는 각 성과 본관의 우열을 결정하는 주요한 기준으로도 작용했다. 국가에 의해 정해진 본관은 그 바탕이 된 구역의 성격에 따라 격차가 있었고, 신분과 직역에 따라 본관이 가지는 의미는 서로 달랐다. 읍격(邑格)이 높은 토성이나 명문대족은 그 본관을 명예롭게 생각했으며, 역·진, 향·소·부곡을 본관으로 한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그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조선시대의 성씨

이와 같이 사회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고 드러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고려의 성과 본관 체계는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었다. 강상윤리를 중시하는 주자학이 발전함에 따라 동일혈족불혼(同一血族不婚)의 관습이나 동성불혼의 원칙 등이 이전 시기에 비해 훨씬 강화되기도 했으나 기본성격은 그대로였다. 양반과 중인, 양인, 천민의 차별적 신분이 엄격히 구분된 사회에서 성과 본관의 성격은 한 가문 또는 개인의 사회적 성격을 결정하는 주요한 지표였다. 양반은 양민이 지는 일체의 국역을 면제받을 뿐만 아니라 지배신분으로서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는데, 이를 보증하는 것은 양반의 성과 본관이었다.

한편 성과 본관은 양반 지배층 내부에서도 그 우열을 나타내는 중요한 근거이기도 했다. 기존 대성(大姓)과 명문들의 본관은 우월시되고 출세한 조상을 갖지 못한 무명의 벽관(僻貫)은 희성(希姓)·벽성(僻姓) 등과 함께 천시하는 풍조가 만연했다. 이에 따라 가세가 미약했던 본관에서는 개관하는 경우도 많아, 조선 초기에는 조씨 성을 가진 본관은 창녕조씨(昌寧曺氏), 한은 청주한씨, 문은 남평문씨(南平文氏) 등으로 바꾸어 이들 성씨의 수가 갑자기 늘기도 했다.

족보와 보학의 발전

이와 같이 성과 본관이 같는 의미가 중요함에 따라 가계의 내력과 구성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족보가 활발히 편찬되고 이를 밑받침하는 보학(譜學)이 크게 발전했다. 1565년(명종 20) 〈문화유씨가정보 文化柳氏嘉靖譜〉의 발간 이래 양반 성씨·가문에서 일반화되었던 족보 간행은 가문의 우월성을 지키고 양반으로서의 특권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고려의 씨족가보·가첩·족보의 전통을 이은 이 시기 족보는 이념적으로는 적장자 상속, 부계 혈연의 계승을 강상윤리 실천의 핵심으로 여기는 주자학적 종법에 바탕하면서도, 사회적으로는 혈연의 순수성을 확보하여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보장할 수 있는 주요한 근거였다.

조선 후기의 성씨

사회신분제가 해체되던 조선 후기에는 노비나 양민이 신분상승을 위해 양반의 족보를 위조하거나 구입하는 방법 또는 몰래 끼어드는 방법 등으로 양반 성씨를 획득하여 신분을 상승시키고자 했다. 전근대사회에서의 이러한 성과 본관 체계가 갖는 특성은 불완전하지만 1894년 갑오개혁에서의 신분·계급 혁파 선언과 1909년의 민적법(民籍法) 시행을 계기로 많이 완화되고, 일제강점기에는 거의 해소되었다. 신분에 구별 없이 성과 본관을 누구나 갖출 수 있고 사회적 지위도 신분과는 무관하게 되었으므로, 성씨체제는 이전의 신분적 표징으로서의 의미를 떠나 출생의 혈통을 표시하는 각 개인의 호칭 개념으로 국한되었다.

현대사회의 성씨와 관습

전근대사회에서 형성된 성씨에 대한 관습과 의식은 현대로 들어와 이전의 의미를 많이 잃었다. 신분과 사회계급을 드러내는 역할이나 성씨제도를 통한 국가의 대민통제 등 정치사회적 성격은 완전히 없어졌다. 이와 같이 오늘날 한국의 성씨제도의 특징과 사회적 역할은 과거에 비해 크게 다르지만, 여전히 과거의 관행과 의식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다. 오늘날 호적에 본관을 반드시 기재한다든지, 각 문중에서 다투어 족보를 편찬하는 등의 일이나 부계의 성을 유지하는 '동성불변'의 원칙, '동일혈족불혼'의 원칙이 지켜지는 것은 전근대사회의 성씨에 관한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유습으로 인해 결혼·재산상속 등 실생활과 관련된 관습, 법제도 등 많은 영역에 뿌리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85년 당시 경제기획원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사용 성수는 총 274개이며 이 가운데 단성은 263개, 복성은 11개였다. 그중 김·이·박·최·정 씨와 같이 각 성별 인구가 100만 명이 넘는 대성이 있는가 하면, 돈(頓)·동방 씨 등 100명 미만의 희귀성도 있다. 각 성의 본관의 수는 하나인 것에서부터 200여 가지 본관을 가진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를 보여주었으며, 성의 본관 중에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도 있고, 1945년 8·15해방 이후에 새로 창설된 것도 있었다.

2015년 인구 센서스를 기반으로 발표된 2016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5인 이상의 분포를 보이는 성씨는 532개로 나타나는데, 이는 인구 조사 과정에서 한자가 다른 희성을 사용하는 경우를 모두 구별한 것과, 한자를 사용하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국내 이민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그중 1,000명 이상의 인구 분포를 보이는 성씨는 모두 154개이며, 총 인구 대비 1% 이상의 분포를 보이는 성씨는 20개로, 이 20개의 성씨 인구의 합은 77.79%에 이른다. 그중 김(金)씨의 분포는 21.51%로, 한국인의 5분의 1명이 김씨이며, 김씨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김해김씨(金海金氏)가 8.30%로, 대략 열 명 중 한 명에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