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표기 언어 Otto H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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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79. 3. 8,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사망 1968. 7. 28, 독일 괴팅겐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화학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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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핵분열 발견

개요

방사화학자인 프리츠 슈트라스만과 함께 핵분열을 발견했다.

1944년에 노벨 화학상을 받았으며, 1966년에는 슈트라스만, 리제 마이트너와 함께 엔리코 페르미 상을 받았다.

초기생애

그는 유리직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가 건축가가 되기를 원했으나 결국 마르부르크대학교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가정생활은 단순하고 검소했지만 마르부르크에서 한은 맥주와 엽궐련을 즐겼으며, 그의 대학시절에는 낭만적인 때도 있었다. 예술과 철학강의를 듣기 위해 물리학과 수학 강의에는 잘 빠지는 편이었지만 화학은 열심히 공부해 1901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군복무 후에 산업체에서 자리를 얻을 희망을 품고 화학 보조강사로 대학교에 돌아왔다. 1904년에 그는 주로 영어를 배우기 위해 런던으로 건너가,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방사능에 관심이 있었던 윌리엄 램지와 함께 연구했다.

램지가 정제하라고 준 조라듐(crude radium) 표본을 가지고 일하는 동안 그는 램지가 라디오토륨이라고 했던 새로운 방사성 물질이 존재함을 보였다. 이 초기 성공에 자극받아 그를 높이 평가했던 램지의 격려로 그는 산업체로 가지 않고 방사능 연구를 계속하기로 했다. 램지의 후원을 받아 그는 베를린대학교에서 자리를 얻었는데 그전에 방사능에 관한 더 많은 경험을 얻기 위해 몬트리올에서 몇 개월 간을 어니스트 러더퍼드(나중의 넬슨의 러더퍼드 경)와 함께 보내기로 결정했다.

1906년에 독일로 돌아온 직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와 공동연구했으며, 5년 후 그들은 베를린-달렌에 새로 설립된 카이저 빌헬름 화학연구소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그는 작지만 독립적인 방사화학과 과장이 되었다.

1913년에 슈테틴 시의회 의장의 딸인 에디트 융한스와 결혼하여 장래가 더 안정되었다고 생각했으나 다음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연대에 배치되었다.

1915년에 그는 화학전 전문가가 되어 모든 유럽 전선에서 복무했다. 전쟁 후 한과 마이트너는 새로운 방사성 원소인 프로트악티늄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때는 거의 모든 천연 방사성 원소가 발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후 12년간을 방사성 방법을 화학문제에 응용하는 연구를 했다.

핵분열 발견

1934년 한은 이탈리아의 물리학자인 엔리코 페르미의 연구에 강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페르미는 가장 무서운 천연원소인 우라늄을 중성자로 충격을 주면 몇 개의 방사성 생성물이 형성되는 것을 발견했다.

페르미는 이 생성물을 우라늄과 비슷한 인공원소라고 추측했다. 한과 마이트너는 젊은 슈트라스만의 도움을 받아 처음에는 페르미의 해석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해하기가 점점 더 어려운 결과를 얻었다. 마이트너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하기 위해 1938년 7월에 독일에서 도망쳤지만, 한과 슈트라스만은 연구를 계속해 1938년말에 이전의 기대와는 반대로 우라늄 생성물 중의 하나는 훨씬 더 가벼운 원소인 바륨의 방사성 형태라는 확실한 증거를 얻었다.

이는 우라늄 원자가 2개의 더 가벼운 원자로 쪼개졌음을 의미했다. 한은 이 연구에 관한 설명을 리제 마이트너에게 보냈다. 그녀는 조카인 오토 프리시와 협력하여 이 과정을 그럴듯하게 해석해 핵분열이라고 명명했다. 이 발견이 내포한 어마어마한 의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과학자들에 의해서 인식되어, 독일에서는 군사용 개발 가능성을 연구하기 위한 연구진을 만들었다.

한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전쟁 후 그와 다른 독일 핵과학자들은 영국으로 잡혀갔는데, 거기서 그 1944년에 자기에게 노벨상이 수여되었음을 알았으며, 1945년에 히로시마[廣島]에서의 원자폭탄 폭발 발표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66세였지만 여전히 원기 왕성한 사람이었으며, 일생 동안 등산을 다녔고 영국에 강제 수용되어 있는 동안 매일 달리기를 해서 건강을 유지했다.

독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카이저 빌헬름 협회(막스 플랑크 과학진흥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존경받는 저명인사, 과학계의 대변인, 그리고 독일 연방 공화국의 첫 대통령이었던 테오도로 호이스의 친구가 되었다.

그는 핵무기의 후속 개발과 실험에 반대하는 운동을 했다. 모든 쪽에서 영예가 주어졌다. 1966년 그는 마이트너와 슈트라스만과 함께 유명한 엔리코 페르미 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 시기에 외아들 하노와 며느리를 자동차사고(1960)로 잃는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 그후로 그의 아내도 이 충격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한은 1968년에 죽었으며, 2주 후에 그의 아내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