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리에

푸리에

다른 표기 언어 (Jean-Baptiste-)Joseph Baron Fourier 동의어 장바티스트 조제프 푸리에 남작, Jean-Baptiste Joseph Fourier
요약 테이블
출생 1768. 3. 21, 프랑스 오세르
사망 1830. 5. 16,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푸리에는 고체의 열전도를 수학의 무한급수로 분석하는 방법인 푸리에 급수를 제시하여 수리물리학 발달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나 저학년때 우수한 수학실력을 보여 수학교사를 했다. 1798년에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동반하여 1801년까지 이집트 고대 유물에 대한 폭넓은 연구와 공학 및 외교업무에 조언을 했으며, 프랑스로 돌아온 뒤에는 거대한 양의 이집트 자료들을 발행하는 일을 맡았다. 1815년 나폴레옹 세력이 몰락한 뒤 파리에서 조용한 학문연구 생활을 했다. 1817년 과학 아카데미에 선출된 후 종신간사가 되었다. 고대 이집트 문명 연구로 1826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와 의학 아카데미에 선출되었다.

푸리에(Joseph Baron Fourier)
푸리에(Joseph Baron Fourier)

이집트 학자이며 행정관이기도 했다.

〈열 분석 이론 Théorie analytique de la chaleur〉(1822)을 써서 수리물리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고체의 열전도를 수학의 무한급수로 분석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 급수를 '푸리에 급수'라고 한다. 그의 연구는 열전도라는 특정한 주제뿐 아니라 태양흑점·조수·날씨 같은 여러 자연현상을 둘러싼 수리물리학 연구에 자극을 주었다. 그 이래로 이 연구는 종종 경계치(境界値)문제의 해로 취급되었다.

그의 연구는 근대 수학의 주된 분과 가운데 하나인 실변수 함수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재봉사의 아들인 푸리에는 처음 베네딕투스회 수도승이 운영하는 지방 군대조직의 사립학교에 다녔다. 저학년 때 우수한 수학실력을 보여 뒤에 그 학교의 수학교사가 되었다. 당시의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마음을 빼앗겨 정치학에 관심을 가져 여러 번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겪기도 했다.

그는 1794년 사범학교가 세워진 첫 해의 학생 중 한 사람이었고 1795년 그곳의 선생이 되었다. 같은 해 에콜 폴리테크니크가 시작된 뒤 교수요원이 되어 몽주 및 다른 수학자들과 동료가 되었다.

1798년 몽주 및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동반했다. 1801년까지 이집트 고대유물에 대한 폭넓은 연구와 공학 및 외교업무에 조언을 했고 나폴레옹이 1798년에 카이로에 세운 이집트 연구소의 간사로 3년 동안 일했다.

프랑스로 돌아온 뒤 푸리에는 거대한 양의 이집트 자료들을 발행하는 일을 맡았다. 이것이 〈이집트의 묘사 Description de l'Égypte〉로 고대 이집트 문명에 관한 긴 역사적 서두를 첨가했다. 또 1802~14년 이제르 지방 지사로 본부가 있었던 그르노블에 머물렀다. 그는 소택지 배수공사 감독을 할 때 뛰어난 행정능력을 나타냈고 한편 고대 이집트 문명 및 수학 연구를 계속했다. 1809년 나폴레옹으로부터 남작작위를 수여받았다.

1815년 나폴레옹 세력이 몰락한 뒤 푸리에는 센의 통계국장으로 있으면서 파리에서 조용한 학문연구 생활을 했다. 1817년 과학 아카데미에 선출되고 1822년 종신 간사가 되었다. 고대 이집트 문명 연구로 1826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와 의학 아카데미에 선출되었다.

푸리에는 1807년 그르노블에서 '열 분석 이론' 연구를 시작해 1822년 파리에서 완성했다.

이 연구로 그는 2차원 물체(매우 얇은 판의 물질)의 열전도를 미분방정식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게 되었다(푸리에의 열전도 법칙).

u는 평면 위의 점(x, y)에서 시간 t일 때의 온도이고, k는 물질의 열확산도로 비례상수이다.

한 예로 시간 t=0에서 열전도판의 경계 및 평면의 각 점에서 온도가 주어질 때 열전도판의 온도를 알아내는 것이다. 1차원공간에서 이와 같은 문제의 해를 구하기 위해 푸리에는 사인과 코사인으로 된 급수 y=1/2a0+(a1osx+b1sinx)+(a2 cos2x+b2 sin2x)+……을 소개했다.

푸리에 급수는 이미 오일러와 18세기 다른 수학자들이 가끔 사용했지만 인정받지 못했고, 푸리에를 통해 현대수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는 또 이 개념을 푸리에 적분으로 확대시켰다. 푸리에 급수의 타당성에 대한 의심이 P. G. L. 디리클레, B. 리만, H. 르베그 등에 의해 해결되어 실함수 개념에 대한 근본 개혁을 가져왔다. 그는 거의 모든 생애를 그 이론연구에 바쳤다. 또 대수방정식의 근의 결정(푸리에 정리)에도 관심을 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