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다른 표기 언어 페트라르카 , Francesco Petrar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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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304. 7. 20, 이탈리아 토스카나 아레초
사망 1374. 7. 18/19, 카라라 파도바 근처 아르콰
국적 이탈리아

요약 이상적인 연인 라우라에게 바치는 시들을 써서 르네상스 서정시의 개화에 기여했다. 탐구심이 강했고 고전작가들에 대한 애정을 지녔던 페트라르카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학자로 여겨졌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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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교육과 초기 시들
  2. 고전 연구와 경력(1330~40)
  3. 도덕적·문학적 변모(1340~46)
  4. 과거와의 단절(1346~53)
  5. 말년(1353~74)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교육과 초기 시들

법률가였던 페트라르카의 아버지는 1302년 피렌체를 떠나 아레초로 이주했는데, 그곳에서 페트라르카가 태어났다.

뒤에 가족은 유배된 교황청 소재지였던 남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에 있는 아비뇽으로 다시 이주했고(1312), 그곳에서 법률가인 아버지는 일자리를 얻고자 했다. 페트라르카의 초기 교육은 프랑스의 카르팡트라스에서 시작되었는데,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 공부를 하러 프랑스의 몽펠리에로 갔다(1316). 그는 몽펠리에에 있다가 동생 게라르도와 함께 볼로냐에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돌아갔다(1320). 그러나 이때 이미 그의 내부에는 훗날의 편지에서 '문학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열정'이라고 일컬었던 그 무엇이 싹트고 있었다.

페트라르카의 현존하는 초기 시들은 그의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것으로, 그의 모든 작품이 그러하듯 뒤에 많이 수정되기는 했지만 몽펠리에와 볼로냐 시절에 씌어진 것이다.

그는 고전 작가들에 대한 지식과 애정을 키워가는 한편 당시 새로이 씌어지기 시작한 속어 시에도 접했다. 1326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페트라르카는 법률 공부를 그만두고 자신의 관심분야들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아비뇽으로 돌아간 그는 하급 성직을 얻어 영향력 있는 추기경 조반니 콜론나의 집안에 드나들었다.

페트라르카는 아비뇽 생활을 즐겼으며, 궁정 생활에 어울린 페트라르카와 그의 동생을 멋쟁이 신사로 묘사한 유명한 글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학식과 우아한 교양으로도 명성을 얻었다.

페트라르카는 문학에 대한 애정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 깊은 종교적 신앙, 미덕에 대한 사랑, 인간사의 덧없음에 대한 깊은 통찰력 등을 지니고 있었다. 이 시기에 대한 반작용이기나 한 듯 방탕한 시절이 뒤따랐고, 라우라라는 이름으로만 알려진 여인에 대한 순결한 사랑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신원을 밝히려는 시도가 있어 왔으나 허사로 끝났고, 페트라르카 자신은 이를 중요시하지 않았던 듯 여겨지며 그녀의 신분에 대해 일체 침묵을 지켰다. 페트라르카는 1327년 4월 6일 아비뇽에 있는 생클레어 교회에서 처음 라우라를 보았다. 라우라는 그가 죽을 때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지만 페트라르카는 그녀를 사랑했으며, 이 사랑 때문에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 탄생했다. 그는 이 시들을 속어로 쓴 시시한 작품이라고 무시하는 척했으나 그러면서도 평생에 걸쳐 그것들을 모으고 수정했다.

고전 연구와 경력(1330~40)

페트라르카는 1330년 여름을 프랑스의 롱베에서 보냈는데, 그곳의 주교는 볼로냐 시절부터 사귀었던 오랜 친구 자코모 콜론나였다.

1335년에 그는 성당 참사회원직을 받았으나, 계속 아비뇽에 살면서 1337년까지 추기경을 섬겼다. 페트라르카에게 이 시기는 라우라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야망(특히 고전 라틴어 분야에 대한)과 부단한 연구로도 중요한 시기였다. 또한 그는 여행을 많이 했으며, 1333년에는 프랑스·플랑드르·브라반트·라인란트 등지를 두루 여행하면서 학식 있는 인물들을 만났고, 수도원 도서관들을 조사하여 '분실된' 고전 필사본들을 찾았다(리에주에서는 키케로의 연설문 2편을 찾아냄). 파리에서는 친구이자 영적 상담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사 산세폴크로의 디오니기로부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Confessions〉 사본을 받아 차츰 이 책을 영적 생활의 지침서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들로 인해 페트라르카는 고전 문화와 그리스도교 정신 간의 지속성을 고취한다는 사명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그는 풍성한 약속과 그것에 대한 신적 성취라는 외견상 상충하는 2가지 이상을 통합함으로써, 이른바 유럽 인문주의 운동의 선구자이자 대표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중세 스콜라주의가 빠져 있던 무익한 논의와 끝없는 변증법적 쟁론을 거부하고 고전 세계의 중후한 도덕에 사로잡혀 거기에서 진정한 가치와 영감을 찾게 되었다.

1337년에 처음으로 로마를 방문했으며, 그 폐허 속에서 엄연한 과거의 위대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비뇽으로 돌아간 그는 부패한 생활(당시의 교황청은 전적으로 세속적인 일들에 몰두해 있었음)로부터의 은둔처를 찾았으며 동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보클뤼즈라는 곳에서 '알프스 너머의 아름다운 고독'을 발견했다. 이곳은 그뒤 그가 매우 아끼는 휴식처가 되었다.

페트라르카는 자신의 작품을 개작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 연대기는 다소 복잡하다.

그러나 그가 보클뤼즈를 발견한 것은 이미 〈압운서간(押韻書簡) Epistolae metricae〉(라틴어 6보격 시로 씌어진 66편의 '서신들')에 싣게 될 상당수의 시와 라우라에게 바치는 몇 편의 연가를 쓴 후였다. 보클뤼즈에서 그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주제로 한 서사시 〈아프리카 Africa〉를 쓰기 시작했고 〈위인전 De viris illustribus〉이라는 로마 역사에 나오는 영웅들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그는 〈구약성서〉와 고전 세계, 그리스도교 세계의 이상들간의 지속성을 강조하기를 원했으므로 뒤에 아담으로부터 시작하는 모든 시대의 유명인들의 전기로 확대되었음).

도덕적·문학적 변모(1340~46)

학자로서의 그의 명성은 널리 퍼져 1340년 9월 파리와 로마에 계관시인으로 초대되었다.

그는 이 영예를 얻으려고 애쓰기도 했지만 개인적 야심 때문이라기보다는 1,00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후에 비로소 되살아난 시에 대한 숭배를 기리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주저없이 로마를 택했으며, 1341년 4월 8일 카피톨리누스 언덕 위에서 관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월계관을 성 베드로 바실리카에 있는 사도의 무덤 위에 바쳤는데, 이 또한 고전 전통과 그리스도교 정신을 잇고자 하는 의식이었다. 그는 로마로부터 파르마와 그 근처의 한적한 고장 셀바피아나로 갔다가 1343년 가을에 아비뇽으로 돌아갔다.

이 시기에 그는 일종의 도덕적 위기를 겪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자신의 생활을 종교적 신앙과 일치시킬 수 없다는 갈등과 동생이 카르투지오 수도원에 들어가기로 한 결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나의 비밀 Secretum meum〉(1342~43)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이다.

이 작품은 상상 속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주고받은 3편의 대화로 이루어진 자서전적 저술이다. 거기에서 그는 인간이 세속적 관심과 과오의 와중에서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일에 몰두할지라도 여전히 신에게 이르는 길은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그리하여 페트라르카의 영적인 '문제'는 일관된 해결을 얻었는데, 이는 페트라르카의 관점인 동시에 인문주의자의 종교적·도덕적 시각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페트라르카가 라우라에 대한 사랑을 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피조물에 대한 사랑이므로 그것은 세상에 대한 애착의 증거라고 결론지었다는 사실은, '위기'라기보다는 도덕적·문학적 '변모'였다.

이러한 사고의 변모로 인해 그는 고대에 대한 지나치게 배타적인 경외를 버리고 다른 권위자들의 음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예컨대 〈위인전〉이 세속사뿐 아니라 성사(聖史)의 자료까지 포함하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한편 〈고독한 생활에 대하여 De vita solitaria〉(1346)에서 그는 인간이 자연과 학문 및 기도의 위로를 즐기며 사는 '고독한 생활'을 묘사하며 신학적 기초를 다졌다.

과거와의 단절(1346~53)

이후 몇 년 동안 일어난 사건들은 한 사람의 인간이자 작가로서 그의 생애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그는 로마 공화국을 부흥시키고 로마에 민중의 정부를 재건하려는 콜라 디 리엔초의 노력을 열광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아비뇽의 교황청과 한층 더 소원해졌고 1346년에는 추기경 콜론나와의 우정마저 깨지게 되었다. 둘째, 1348년 흑사병으로 알려진 역병이 발생하여 그는 라우라를 위시한 많은 친구들을 잃었다. 라우라는 페트라르카가 처음으로 그녀를 보았던 기념일인 4월 6일에 죽었다. 셋째, 성년(聖年)인 1350년에 그는 로마로 순례여행을 했으며 그가 관능적 쾌락을 버린 것도 이 해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건들은 페트라르카의 생애에서 획기적인 사건들이었으나,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외교적 임무, 학문연구, 그리고 방대한 문학적 활동을 해나갔다. 1345년 페트라르카는 놀랍게도 베로나에서 키케로가 아티쿠스·브루투스·퀸투스에게 보낸 서한들을 발견했으며, 그리하여 대웅변가의 외관 뒤에 있는 인간 키케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 편지들에서 감명을 받아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고대 작가들에게 편지를 썼으며 전에 친구들에게 보냈던 자신의 편지들을 수집했다. 이 서한집은 페트라르카의 깊은 우정뿐만 아니라 그가 중세를 등지고 르네상스로 돌아서기까지 변모하는 온갖 태도변화들을 보여준다. 1345년말경 그는 다시 평화로운 보클뤼즈로 돌아가 그곳에서 2년을 보내며 주로 〈고독한 생활에 대하여〉를 손질하는 한편, 〈종교적 여가에 대하여 De otio religioso〉에서는 특히 금욕적인 맥락에서 고독의 주제를 발전시켰다.

1347년 11월과 1350년의 로마 순례 사이에 그는 베로나·파르마·파도바 등지에도 갔다. 당시 그는 교회에서의 직위를 승진시키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으나, 이 일에 따른 막후공작과 적대감정은 보클뤼즈의 평화를 한층 그리워하게 했다. 평생 동안 친구였던 시인 보카치오가 그를 방문하여 피렌체대학 교수직을 제의하기도 했지만 그의 결심을 바꿀 수는 없었다.

1351년 5월 페트라르카는 로마를 떠나 보클뤼즈로 갔다.

보클뤼즈에서 그는 〈시집 Rime〉을 위한 새로운 구상에 착수했다. 그 구상은 〈라우라 생전의 시들 Rime in vita di Laura〉·〈라우라 사후의 시들 Rime in morte di Laura〉로 나뉘며, 그는 시들이 자신의 영적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보여주도록 선별하여 배열했다.

더욱이 시들은 섬세한 미학적 취향과 대체적인 연대순으로 배열되었다. 라우라와 사랑에 빠지는 묘사부터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마지막 기도에 이르기까지, 젊은날의 과오로부터 '모든 세속적 쾌락은 한낱 덧없는 꿈'이라는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신에 대한 최후의 신뢰에 이르기까지 아주 폭넓다. 그러므로 그의 〈칸초니에레 Canzoniere〉(그의 시집의 일반적인 명칭)의 주제는 외관상의 주제인 라우라에 대한 사랑에 국한되지 않는다.

새로운 시의 역사상 처음으로 서정시는 독자적인 단일성을 지닌 새로운 문맥 속에 편입되었다.

지난 2세기의 서정시 전통에서 가장 세련되고 동시에 가장 힘찬 모든 것을 선별하여 그것을 고전에 대한 그의 새로운 이해를 통해 여과시킴으로써 그는 인간의 사랑과 슬픔, 환희와 비애에 대한 가장 명징하고도 열정적이며, 정확하고도 암시적인 표현을 인류사에 남겼을 뿐만 아니라 놀라운 감수성으로 현대 서정시의 형식과 언어를 개발하여 전유럽의 서정시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는 1350년에 착수했던 〈서한시 Metricae〉의 저술을 계속했으며, 그의 새로운 교육관에 대한 보수적 반대자들과의 논쟁에 뛰어들었다. 그는 당시의 학교들에 지배적이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배격하고 고전 작가들의 영적인 가치를 복권시키는 학문을 주창했는데, 이 새로운 학문은 '인문학'(litterae humanae)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그는 인간의 영혼이 지상적인 정념들로부터 신 안에서의 충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좀더 일반화된 형태로 그린 시 〈승리 Trionfi〉를 쓰기 시작했다.

말년(1353~74)

그는 가장 가까운 벗들의 죽음과 새로이 선출된 교황 인노켄티우스 6세에 대한 반감, 아비뇽 교황청과의 관계 악화 등의 이유로 마침내 프로방스 지방을 떠났다.

그는 밀라노에 거처를 정해 그곳에서 이후 8년을 보냈는데, 이 기간 동안 〈시집〉의 초판을 완성했다. 서한집 〈친사서(親事書) Familiares〉의 저술을 끈기있게 계속했고, 〈승리〉를 썼으며, 이전의 많은 저술들을 정리했다.

1361년초 그는 흑사병을 피해 파도바로 가서 1362년 9월까지 그곳에 머무르다가 다시금 흑사병을 피해 베네치아로 갔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그에게 집을 마련해 주어 그 답례로 자신의 모든 책을 공화국에 남기기로 약속했다. 딸 프란체스카가 뒤따라왔고, 그녀 가족의 조촐한 작은 행복은 그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그는 대재상 베닌텐디 데 라베냐니, 보카치오 등 가장 소중하고 유명한 친구들의 방문을 받았는데, 보카치오는 그에게 오랫동안 원했던 호메로스의 라틴어본을 선사했다. 그에게는 도시의 정치 및 제반사에서 영예로운 역할이 맡겨졌다. 그는 느긋하지만 대단한 집중력으로 자신의 다양한 저술들의 결정본을 완성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저술의 아랍 '자연주의적' 해석을 따르는 4명의 청년들로부터 모욕을 당한 뒤 1367년 파도바로 돌아갔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으며, 1370년 이후로는 파도바와 부근의 에우간네이 산지에 있는 아르콰(그곳에 작은 집을 가지고 있었음) 사이를 오가며 지냈다.

그곳에서 그는 베네치아에서 받은 비판적 공격에 대한 그의 인문주의적 옹호론 〈자기 자신과 많은 사람들의 무지에 대하여 De sui ipsius et multorum ignorantia〉를 썼다. 그에게는 여전히 외교적 임무들이 맡겨졌으며 1370년 우르반 5세의 부름을 받아 로마에 가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로마 교황청에 대한 자신의 꿈이 실현된 것을 보고자 기대에 차서 떠났으나 페라라에서 뇌졸중 발작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일을 중단하지 않고 이전 저술의 수정 외에도 새로운 소품들을 썼으며 〈후대인들에게 Posteritati〉에 새로운 장들을 덧붙였다. 〈후대인들에게〉는 후대에 보내는 자서전적 서한으로 〈노사서(老事書) Seniles〉의 결론에 해당한다.

그는 또한 〈승리〉의 마지막 부분을 썼다. 페트라르카는 1374년 아르콰에 있는 서재에서 일하던 중 죽었는데, 이튿날 아침 발견된 그는 베르길리우스의 원고에 머리를 묻고 있었다.

페트라르카 사상의 본질은 과거가 현재의 자양이라는 심오한 인식에 있다. 그가 이룬 지속적인 성과는, 세계를 주관하는 섭리가 있다면 그 섭리는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두었으리라는 사실을 인식한 데 있다. 페트라르카는 인간 생활을 풍요하게 하는 신학적 기초를 제공했다.

그러나 한층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없이는 르네상스로 귀결되는 15세기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적 태도가 불가능했으리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