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2세

바오로 2세

다른 표기 언어 Paulus II
요약 테이블
출생 1417. 2. 23, 베네치아
사망 1471. 7. 26, 로마
국적 바티칸시티

요약 교황(1464~71 재위).
(영). Paul Ⅱ. 본명은 Pietro Barbo.

이탈리아의 도시 체르비아와 비첸차의 주교였다가 1440년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게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교황 니콜라오 5세와 갈리스토 3세 때 교황청에서 일한 뒤 1456년 캄파니아의 총독이 되었고, 1464년 8월 30일 교황 비오 2세의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이 된 직후에 고위 성직자들이 축성된 뒤에 지켜야 할 행위를 결정해놓은 규제 조항들이 새 교황에 대해서는 의무가 아닌 권고로만 영향을 줄 수 있으며, 따라서 교황은 재위 기간 끝까지 독재권을 갖는다는 내용의 '항목 일람표'(capitulations)를 선포했다.

또한 '부르주 국사조칙'(Pragmatic Sanction of Bourges)을 거듭 비판함으로써 프랑스 왕 루이 11세와의 관계에 손상을 끼쳤다. 부르주 국사조칙은 1438년 프랑스 왕 샤를 7세가 공포한 것으로서 프랑스 교회의 자유, 특히 프랑스 왕이 지명한 궐석 중인 고위 성직자를 선출할 수 있는 자유를 선언한 것이다.

다음으로 그가 관심을 돌린 곳은 후스파(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추종자들)와의 종교 갈등으로 손상을 입은 보헤미아 교회였다.

바젤 공의회(1431~37)는 후스파를 교황청의 검열에서 면죄된 합법적인 교회로 승인했기 때문에, 바오로는 이 공의회 법령을 무효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후스파를 지지한 보헤미아 왕 포데브라디의 지르지에 맞서 동맹을 형성한 로마 가톨릭파를 지원했다. 1466년 12월 23일 지르지를 파문하고 '양형영성체파'(兩形領聖體派:후스파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가 승인하지 않은 독립 민족교회)를 진압하기를 거절한 이유로 그의 폐위를 선포했으며, 더 나아가 모든 가톨릭교도들이 지르지에게 충성하지 말도록 금지했다.

1468년 3월 헝가리 왕 마티야슈 1세 코르비누스를 설득하여 지르지에게 선전포고를 하도록 했는데, 이때 지르지는 루이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마티야슈가 모라비아 대부분을 점령한 뒤 바오로는 1469년 3월 후스파를 정벌한 대가로 그에게 보헤미아 왕관을 씌워주었다. 당시 진격해 올라오던 투르크인들을 그리스도교 세계의 주요위협으로 본 바오로는 1468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에게 십자군을 일으켜 그들을 방어하려고 협상을 벌였으나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

그는 베네치아 정부가 이탈리아 내정에 간섭하는 것을 반대했고, 로마인들의 동의를 받아 로마를 위한 새로운 법령들을 공포했다. 1466년 영성파(프란치스코 수도회 극단주의자들)와 그들의 지지자들을 해산할 계획으로 그들을 철저히 기소하기 시작했다.

로마 아카데미와 그 설립자인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율리우스 폼포니우스 라이투스가 고대 세계를 열망하여 그리스도교 이상들을 반대하고 유물론적 인생관을 주장했다는 혐의를 받자, 바오로는 1468년 2월 그 아카데미를 해산하고 회원들을 체포한 뒤 주요 인문주의자 바르톨로메오 플라티나에게 공모죄를 적용해 고문형에 처했다.

이로써 인문주의자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는데, 그들은 이 교황을 학문의 원수로 보았다. 그러나 바오로는 학자들을 후원했고, 고대 문서들을 수집했으며, 유적들을 복원했다. 로마에 최초의 인쇄소를 세웠고, 유명한 산마르코 궁(지금의 팔라초 베네치아)을 지어 1466년부터 그의 주요거처로 삼았다. 1958년 로베르토 바이스는 〈베네치아 인문주의자:교황 바오로 2세 Un umanista veneziano:Papa Paolo Ⅱ〉를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