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켈수스

파라켈수스

다른 표기 언어 Paracelsus 동의어 테오프라스투스 필리푸스 아우레올루스 봄바스투스 폰 호엔하임, Theophrastus Philippus Aureolus Bombastus von Hohenheim
요약 테이블
출생 1493. 11. 10/14, 스위스 아인지델른
사망 1541. 9. 24, 잘츠부르크 대주교 관할구(지금의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국적 스위스

요약 독일 태생 스위스의 의사·연금술사.
본명은 Philippus Aureolus Theophrastus Bombast von Hohenheim.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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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전통적인 교육과 의학에 대한 거부
  4. 다양한 경력
  5. 파라켈수스에 대한 평가
파라켈수스(Paracelsus)
파라켈수스(Paracelsus)

개요

의학에서 화학의 역할을 확립했다.

1536년 〈대외과서 Die grosse Wundartzney〉를 출판했으며, 1530년 매독을 임상적으로 묘사했다.

초기생애

파라켈수스는 가난한 독일인 의사이자 화학자의 외아들이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사망했고 아버지는 남부 오스트리아의 빌라흐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소년 파라켈수스는 아우크스부르크의 부유한 은행가인 푸거가(家)가 세운 베르그슐레에 들어갔는데, 그의 아버지가 이 학교에서 화학이론과 실습을 가르쳤다. 그는 베르그슐레에서 철·알루미늄·황산염 광석은 물론 금·주석·수은 등의 광산 감독 및 분석자로 훈련되었다. 젊은 파라켈수스는 광부들이 금속은 땅속에서 '자란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고 커다란 용해통에서 금속이 끓어넘치며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연금술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언젠가는 납을 금으로 바꾸는 법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일찍이 얻게 된 야금술과 화학에 대한 통찰력은 그가 나중에 화학요법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발견을 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

14세 때(1507) 그는 중세 후기 이 대학교에서 저 대학교로 유명한 교사를 찾아 유럽을 방랑하던 많은 젊은이들 부류에 합류했다. 그후 5년 동안 바젤·튀빙겐·빈·비텐베르크·라이프치히·하이델베르크·쾰른 등의 대학교들을 다녔지만 그는 어느 곳에서나 실망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어떻게 고급 대학들에서 그렇게 많은 고급 바보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놀라웠다고 특유의 비웃음을 섞어서 기록했다.

전통적인 교육과 의학에 대한 거부

그의 태도는 많은 교육자들을 분노하게 했다.

그는 "대학교에서 모든 것을 가르치지 않으므로 의사는 할머니, 집시, 마법사, 방랑부족, 늙은 도둑이나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그러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의사는 여행을 해야만 하며…… 지식은 경험에서 나온다"라고 썼다. 파라켈수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갈레노스·아비세나 등 당대에 인정받던 그리스와 아랍 의학 권위자들의 무미건조한 형식주의보다 여인숙 주인, 이발사, 짐승 부리는 사람 등의 조잡한 언어가 훨씬 더 위엄있고 상식적이라고 주장했다.

파라켈수스는 17세 때 빈대학교에서 의학사학위를 받고 졸업(1510)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페라라대학교에서 갈레노스의 의학과 중세 아라비아 스승들이 비판받는 것을 보고 기뻐했으며, 그는 항상 자신이 이 대학교에서 1516년 의사자격을 획득했다고 주장했다(그해의 대학기록은 분실되었음). 페라라대학교에서 그는 항성과 유성들이 인체의 모든 부분을 통제한다는 당시 유행하던 견해에 대해 자유로이 거부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1세기경 로마의 유명한 의사인 켈수스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때쯤부터 '파라켈수스'('켈수스 이상' 또는 '켈수스를 뛰어넘는'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유형의 사람은 보통 어떤 자리에서도 오랫동안 정착하여 배우지 못하는데, 그도 학위를 따자마자 잉글랜드·아일랜드·스코틀랜드를 비롯하여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를 수년 동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당시에는 천한 직업이었던 군의(軍醫)로서 '네덜란드 전쟁'에 참여했다.

그후 그는 러시아의 타르타르에서 잡혔다가 리투아니아로 도망쳐서 헝가리를 거쳐 1521년 다시 이탈리아에서 군의로 복무했다. 그의 방랑은 이집트·아라비아·홀리랜드에서 마침내는 콘스탄티노플까지 흘러갔다. 어느 곳에서나 그는 가장 효과적인 의학적 치료수단을 찾아내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연의 잠재적인 힘'과 이를 이용하는 방법을 발견하기 위해서 연금술에 가장 박학다식하다는 인물들을 찾아다녔다. 그는 이렇게 썼다. "상상 속에서 태어난 사람은 자연의 잠재적인 힘을 발견한다…… 별들이 자리잡은 곳에는 새로운 별과 새로운 하늘을 만드는 또다른 것(상상)이 있다"

다양한 경력

약 10년에 걸친 방랑을 끝내고 그는 1524년 빌라흐의 집으로 돌아와 많은 기적적인 치료로 명성을 얻어나갔다.

33세의 위대한 파라켈수스가 시의(市醫)이자 바젤대학교의 의학강사로 임명되었다는 것이 알려지자 유럽 각지에서 이 도시로 학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는 1527년 6월 5일 자신이 준비한 강의계획을 대학교의 게시판에 붙이고 학생들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초대했다. 학교당국은 그의 이러한 공개된 초대에 몹시 화를 내고 분개했다. 이보다 10년 앞서 루터는 비텐베르크 쉴로스키르헤의 문에다 〈신교의 자유에 관한 명제〉를 꽂아놓았었는데, 후에 파라켈수스는 이렇게 썼다.

"왜 당신들은 나를 의학의 루터라고 부르는가?…… 루터가 자신이 말한 바를 지키는 것은 그에게 맡겨두고 나는 내가 말한 바에 책임을 지겠다. 당신들은 루터에게 바라고 싶었던 것을 나에게 바라고 있다. 당신들은 우리 두 사람 모두를 불 속에 넣고 싶어하는 것이다" 3주 후인 1527년 6월 24일 그는 환호하는 학생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아라비아의 '의사의 왕자' 아비세나의 책들, 그리스 의사 갈레노스의 저서들을 대학교 앞에서 불태워버렸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의 적들은 꼭 6년 6개월 전인 1520년 12월 10일 비텐베르크의 엘스터게이트에서 루터가 자신을 파문하겠다고 위협한 로마 교황의 교서를 어떻게 불태워버렸는지 상기했다. 파라켈수스의 저서는 〈삭제부분 일람표 Index Expurgatorius〉에 실렸으나, 그는 죽을 때까지 가톨릭교도로 남은 듯하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그는 상용어를 좋아했기 때문에 라틴어보다는 독일어로 강의하고 책도 독일어로 썼다.

커다란 실수에도 불구하고 바젤에서 그의 다양한 경력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의 이름과 명성은 세계전역에 퍼졌고 그의 강의실은 학생들로 가득 찼다. 그는 자연의 치유력을 강조했고, 이끼나 마른 분뇨로 덧대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배농을 방해하는 상처치료법에 대해 격노했다. "여러분이 감염을 막으면 저절로 상처가 치유될 것"이기 때문에 상처를 마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악의에 가득 차서 당시 의학상의 많은 다른 잘못된 치료법을 공격했고, 쓸모 없는 알약, 연고, 달인 약, 발삼, 연약(煉藥:핥아 먹는 약), 훈증제(燻蒸劑), 물약 등을 무자비하게 비웃었으며, 그의 학생들은 이를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파라켈수스는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의 승리는 1년도 채 가지 않았다. 1528년 봄까지 의사·약제사·치안판사 들과 싸우다가 마침내는 한밤중에 살아남기 위해 도망쳐야 했다. 혼자서 한 푼도 없이 그는 바젤에서 약 80㎞ 북쪽에 있는 알자스 위의 콜마 지역으로 달아났다. 그후 8년 동안 여유 있는 여행을 하면서 그는 오래된 원고를 개작하고 새 논문들을 썼으며, 〈대외과서〉를 세상에 내놓아 깜짝 놀랄 만한 복귀를 했다.

이 책으로 전성기에 바젤에서 얻었던 전설적인 명성을 능가할 수 있었다. 그는 부유해졌고 궁전에서는 그를 불러들였다.

1538년 5월 2번째로 악명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늙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다시 빌라흐로 돌아왔으나 아버지는 이미 4년 전에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파라켈수스는 1541년 대주교인 바이에른의 에른스트 공작과 만나기로 약속한 잘츠부르크의 화이트 호스 여인숙에서 48세의 나이로 의문사했다.

파라켈수스에 대한 평가

의학상의 파라켈수스의 업적은 뛰어나다. 1530년 그는 당시로서는 매독에 관한 가장 뛰어난 임상적인 묘사를 기술하여 뉘른베르크의 시위원들을 화나게 했는데, 그는 정확하게 측정된 수은화합물을 체내에 주입시키면 매독치료에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1909년의 살바르산 치료법을 예고했다.

그는 또한 '광부병'(규폐증)은 금속의 증기를 들이마셔서 생기며 산신이 가한 형벌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진폐증). 그는 소량으로 투여하면 "병을 생기게 만드는 인자가 사람을 치료할 수도 있다"고 선언하여 근대적인 동종요법을 최초로 예측했다.

파라켈수스는 1534년 여름에 흑사병이 휩쓴 스테르트징의 마을에서 바늘 끝에 묻힌 환자의 배설물을 소량 섞은 빵으로 만든 알약을 경구 투여하여 많은 사람들을 치료했다고 한다. 그는 최초로 갑상선종을 식수의 무기질, 특히 납과 연관지었다. 또한 수은·황·철·황산구리 등을 포함한 화학적 치료제를 비롯하여 새로운 화학적 치료제를 제조하고 사용해, 1618년 최초의 〈런던 약전 London Pharmacopoeia〉이 지적했듯이 의학을 화학과 결합시켰다.

사실 파라켈수스는 정신과 치료를 비롯하여 근대의학 전반에 크게 공헌했다. 정신의학자 칼 구스타프 은 그에 대해 "우리는 파라켈수스를 화학적 의학분야의 개척자로서뿐만 아니라 경험적인 심리학적 치료과학 분야의 개척자로도 생각한다"라고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