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븐 시나

이븐 시나

다른 표기 언어 Ibn Sina
요약 테이블
출생 980, 이란 부하라
사망 1037, 하마단
국적 페르시아

요약 이슬람에서 가장 유명하고 많은 영향을 끼친 철학자이자 과학자이며 의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연구에 기여한 업적으로 유명하다. 철학과 과학의 방대한 백과사전인 〈치료의 서〉와 의학사에서 가장 저명한 저작 중 하나인 〈의학 정전〉을 저술했다. 어릴 때부터 이븐 시나는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과 교제하는 혜택을 입었다. 평생 동안 특출한 기억력을 발휘했던 그는 10세 때 이미 〈코란〉과 많은 아랍의 시를 암송했다. 이븐 시나는 이슬람 세계의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의 대가로서 활약하면서 말년에 '동양 철학'의 체계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이것과 직접 관련된 그의 저술은 대부분 유실되었지만 그가 추구한 방향을 암시해주는 몇몇 다른 저작들 속에 충분히 남아 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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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저작
  4. 영향

개요

이슬람에서 가장 유명하고 많은 영향을 끼친 철학자이자 과학자이며 의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연구에 기여한 업적으로 유명하다.

철학과 과학의 방대한 백과사전인 〈치료의 서(書) Kitāb ash-shifā⁾〉와 의학사에서 가장 저명한 저작 중 하나인 〈의학 정전(正典) al-Qānūn fῑ aṭṭibb〉을 저술했다(→ 이슬람 철학).

초기생애

평생 동안 페르시아의 동부와 중부지방에서 생활한 이븐 시나는 이스마일파(신플라톤주의의 대중화된 형태에서 기원한 신학을 바탕으로 종교적·정치적 운동을 전개한 이슬람의 분파)인 아버지의 지도로 부하라에서 첫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이븐 시나 자신은 이스마일파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버지의 집이 학식있는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였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이븐 시나는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과 교제하는 혜택을 입었다. 평생 동안 특출한 기억력을 발휘했던 그는 10세 때 이미 〈코란〉과 많은 아랍의 시를 암송했다. 그후 선생들로부터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배웠지만 곧 그들을 능가했고 그후 18세가 될 때까지 독학하며 몇 해를 보냈다.

열심히 독서하면서 이슬람의 법학과 의학, 마지막으로 형이상학을 통달했다. 사만 왕조(아랍인의 정복 이후 최초로 페르시아에서 흥기한 위대한 토착 왕조)의 왕자 누흐 이븐 만수르를 치료하여 낫게 한 결과 장서가 풍부한 사만 왕조의 왕립도서관 출입자격을 얻은 것이 그의 지적 발전에 특별히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21세 때 이미 모든 정식 학문 분야에서 공부를 마쳤고 탁월한 의사로서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행정관으로 일해달라는 요청도 받았고 잠시 동안 정부에 들어가 사무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갑자기 그의 모든 생활 양식이 변화했다. 아버지가 사망했고 사만 왕조가 가즈나의 마흐무드에게 패배했다. 투르크인 지도자이자 전설적인 영웅인 마흐무드는 호라산(북동부 이란과 지금의 서부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가즈나 왕조를 창건했다. 이때부터 이븐 시나의 방랑과 혼란이 시작되었다.

그는 몇 번 드물게 평온한 시간들을 보낸 것을 제외하고 죽을 때까지 이러한 생활을 계속했다. 운명은 그를 페르시아 역사의 한 소란한 시기 속에 몰아넣었다. 이당시는 새로운 투르크적 요소들이 중앙 아시아에서 페르시아의 지배를 대신하여 자리잡아가고 있었고 지방의 군소 페르시아 왕조들은 바그다드(지금의 이라크에 있음)의 아바스 왕조 칼리프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얻으려고 노력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집중력과 지적 용감성을 가진 이븐 시나는 외부세계의 소란에 전혀 영향받지 않은 채 놀라운 일관성과 지속성을 가지고 지적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븐 시나는 호라산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닌 다음 중앙 페르시아를 다스리고 있던 부이 왕조의 번국(藩國)들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라이(지금의 테헤란 근처)로 갔다가 다시 카즈윈으로 가서 여느 때처럼 의사로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이들 도시의 어디에서도 그는 사회적·경제적 지원도 충분히 받지 못했고 연구를 계속하는 데 필요한 평온과 안식도 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또다른 부이 왕조의 번주(藩主)인 샴스 앗 다울라가 통치하는 중서부 페르시아의 하마단으로 갔다.

이제야 비로소 이븐 시나의 생애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궁정의원이 되었고 2번이나 재상으로 임명될 정도로 군주의 총애를 받았다. 당시의 세태가 그러했듯이 그도 또한 정치적 반격과 음모로 고통을 겪었고 한동안 피신생활을 했으며 한때 투옥되기도 했다.

저작

그가 가장 유명한 2권의 저서를 저술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치료의 서〉는 한 사람이 쓴 이런 종류의 책 중에서는 가장 방대한 저술일 것이다. 이 책은 논리학·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심리학, 4과(四科:대수·기하·천문·음악) 및 형이상학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윤리학과 정치학은 완전히 빠져 있다. 이 책에 나타난 이븐 시나의 사상은 상당 부분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다른 그리스인들의 영향과 신플라톤주의의 경향도 보인다.

그의 사상체계는 필요한 현존자로서의 신이라는 개념에 의존한다. 신 속에서만 유일하게 본질 즉 그를 규정하고 있는 것과 현존 즉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그가 일치한다. 존재하는 것들은 자신들의 자각의 결과로서 신으로부터 영원한 유출을 통해 점차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의학 정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의학사상 단행본으로서 가장 유명한 것이다.

체계적인 백과사전인 이 책은 내용의 대부분을 로마 제국 시대의 그리스 의학자의 업적과 아랍의 다른 의학서에 의존했고 그 자신의 경험에 따른 것은 그보다 약간 적었다(그의 임상 기록들은 여행중에 분실됨)(→ 의학). 낮에는 의사이자 관리로서 궁정에서 직무에 종사했고 돌아와서는 거의 매일 밤을 이용해 제자들과 함께 이 책과 기타 저서를 저술했으며 이와 관련하여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토론을 했다.

이러한 수업은 가끔 음악 연주와 함께 유쾌하게 진행되었고 밤이 깊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피신생활과 투옥 속에서도 그는 저술을 계속했다. 훌륭한 체력을 가진 이븐 시나는 허약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작업을 해냈다.

이븐 시나의 생애 마지막 시기는 에스파한(테헤란 남쪽 약 400㎞ 지점)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1022년 샴스 앗 다울라가 죽고 이븐 시나는 옥고를 포함한 어려움을 겪은 후 얼마 안 되는 측근들과 함께 에스파한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생애 말기의 14년 동안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보냈다.

그는 에스파한의 통치자 알라 앗 다울라와 그의 궁정에서 높은 존경을 받았다. 이때 하마단에서 착수한 2권의 주요저서를 끝마쳤고 거의 200편에 달하는 논문의 대부분을 썼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관한 페르시아어로 된 첫 작품을 저술했고 〈치료의 서〉에 대한 훌륭한 요약집인 〈구원의 서 Kitāb an-najāt〉도 만들었다. 이 책의 일부는 그가 알라 앗 다울라를 전쟁터까지 수행해야 했던 군사원정 동안에 씌어졌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주요철학저서이자 그의 사상에 있어 가장 개인적인 성서라고 할 수 있는 〈지시와 주의의 서(書) Kitāb al-ishārāt wa at-tanbῑhāt〉도 이 시기에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신앙의 출발에서부터 직접 방해받지 않고 신을 보게 되는 마지막 단계까지의 신비로운 영혼의 여행을 묘사했다. 그리고 에스파한에서 한 아랍 언어학의 대가로부터 언어학에 정통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자 그는 3년 동안 언어학을 공부하여 〈아랍어 Lisān al-⁽arab〉라는 방대한 책을 저술했다.

이것은 그가 죽을 때까지 초고 상태로 남아 있었다. 알라 앗 다울라를 수행한 전쟁에서 이븐 시나는 병에 걸렸다. 자가치료를 하려고 노력했지만 복통과 심한 탈진으로 끝내 죽었다.

이븐 시나는 이슬람 세계의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의 대가로서 활약하면서 말년에 '동양 철학'(al-ḥikmat al-mashriqῑyah)의 체계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이것과 직접 관련된 그의 저술은 대부분 유실되었지만 그가 추구한 방향을 암시해주는 몇몇 다른 저작들 속에 충분히 남아 있다.

그는 신비주의적 신지학(神智學)으로 가는 첫발을 내디뎠다. 이것은 그후 이슬람 철학이 특히 페르시아와 기타 이슬람의 동부 세계에서 취한 방향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영향

이븐 시나는 비록 위대한 스페인-아랍 철학자 이븐 루슈드의 경우처럼 '라틴 이븐 시나주의' 학파를 따로 형성시킬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구세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2세기에 〈치료의 서〉가 부분적으로 라틴어로 번역되었으며 〈의학 정전〉의 완역서도 나왔다. 이러한 번역서와 그의 다른 저서들을 통해 이븐 시나의 사상이 서양에 널리 전파되었다.

그의 사상은 그리스도교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과 혼합되어 많은 중세 스콜라 철학자(특히 프란체스코 학파) 의 사상에서 기본적인 요소로서 자리잡았다.

의학계에서는 〈의학 정전〉이 수세기 동안 의술의 권위서로 통했고 이븐 시나는 고대 그리스의 의학자 히포크라테스나 갈레노스에 필적되는 유일한 인물로서 확고부동한 명성을 누렸다. 동양에서 의학과 철학, 신학에서의 그의 압도적인 영향력은 시대를 뛰어넘어 지속되었고 현재까지도 이슬람의 사상계에 살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