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러

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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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테이블
출생 1908. 1. 15,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적 헝가리/미국

요약 헝가리 태생 미국의 핵물리학자.
(헝). Ede Teller.

텔러(Edward Teller)
텔러(Edward Teller)

최초의 핵연쇄반응(1941)과 최초의 원자폭탄(1945) 개발에 참여했고, 세계 최초의 열핵무기인 수소폭탄 개발을 주도했다.

텔러는 유복한 헝가리계 유대인 가문 출신이었고, 어려서부터 지적인 것을 추구하도록 격려받았다. 발달기에 수학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고 자연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부다페스트공과대학을 다닌 뒤 독일의 카를스루에공과대학에서 화학공학학위를 받았다.

그뒤 뮌헨과 라이프치히에서 물리화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뮌헨에서 공부하는 동안 시가전차에 치어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이러한 비극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리한 지성과 매력적인 외모, 강건한 정신과 유머 감각으로 뛰어난 인물이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기간 동안 텔러는 핵물리학에 열중했는데, 처음에는 코펜하겐에서 닐스 보어 밑에서 공부했으며, 그뒤에는 괴팅겐대학교에서 가르쳤다. 1935년 텔러와 그의 아내 A. 호르코니는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 D. C. 의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가르쳤다.

1939년 원자분열에 대한 보어의 놀랄 만한 보고서를 접하고, "우리의 과학, 우리의 문화, 우리 미국의 자유와 우리의 문명"을 지키기 위해 과학자들과 정치가들이 함께 활동할 것을 요구했던 루스벨트 대통령의 말에 감명받은 텔러는 자신의 정력을 핵무기 개발에 바칠 것을 결심했다.

1941년경 미국시민권을 얻었고 E. 페르미 팀에 합류하여 첫번째 핵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고전적이고 성공적인 실험을 수행했다.

그뒤 J. R. 오펜하이머와 함께 원자폭탄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를 하기 위해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1943년 오펜하이머가 비밀로 로스앨러모스 과학연구소를 뉴멕시코에 설립했을 때 그도 처음으로 모집된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로스앨러모스의 임무는 핵분열폭탄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텔러는 점점 주된 연구로부터 벗어나 잠재적으로 더욱 강력한 수소 열핵분열 폭탄에 대한 개인적인 연구를 계속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는 관심이 수소폭탄으로 옮겨지기를 원했지만 히로시마가 로스앨러모스의 많은 과학자들에게 심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무기 개발을 계속하고자 하는 사람은 몇 명 없었다(맨해튼 계획).

1946년 시카고대학교 핵연구소의 자리를 받아들였으나 로스앨러모스에서도 여전히 장기간에 걸쳐 고문으로 일했다.

1949년 소련에서의 원자폭탄 실험으로 그는 미국이 초고성능 폭탄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지만 원자력위원회의 오펜하이머가 이끄는 일반 자문위원회는 이 대변혁적인 계획에 반대투표를 했다. 논쟁은 영국의 원자 과학자 K. 푸크스가 자신이 1942년 이후로 소련을 위해 스파이 노릇을 해왔다고 고백함으로써 해결되었다.

푹스는 초고성능 폭탄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알고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계속해서 무기를 만들 것을 명령했고 텔러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로스앨러모스에서 일했다. 텔러와 로스앨러모스 동료들은 수소폭탄 개발에 몰두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 1951년초 물리학자 울람이 2번째 원자로 노심을 압축하여 폭발시키는 기계적 충격법을 제안하면서 개발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 방법은 효과적이었으나 텔러는 기계적 충격보다 방사선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것은 원자폭탄 폭발에 사용된 방사선으로 원자로 노심을 점화하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생각들은 핵융합 무기 개발에 견고한 기반을 마련해 주었고, 1952년 11월 1일 태평양의 에네웨탁 환초에서 실시된 수소폭탄 실험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이때 폭발한 수소폭탄의 효과는 TNT 1,000 만t에 버금가는 폭발력이었다.

1954년 오펜하이머에 대한 국가안보 청문회에서 한 텔러의 증언은 자신의 이전 상관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것이었다.

그는 "만일 공적인 일이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진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더 안전하게 느낄 것"이라고 조사위원회에서 말했다. 그 이후 그는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다른 많은 과학자들과 소원해졌다.

텔러는 열핵기구를 주로 연구하는 미국 제2무기연구소를 캘리포니아 주 리버모어에 창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1958년부터 2년 동안 소장으로 일했다. 동시에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 물리학 교수직도 계속해서 맡았다. 1960년 리버모어에서 물러나 핵무기에 있어서 미국이 앞서도록 하기 위한 운동에 몰두했다.

1963년에는 지하에서 행해지는 실험을 제외한 모든 핵무기 실험을 금지한 핵실험금지조약에 반대했으나, 동시에 원자폭탄 문제에 관해 영향력 있는 대변인이자 원자폭탄의 평화적 사용법을 찾기 위한 연방정부 프로그램인 플라우셰어 계획의 옹호자이기도 했다. 그는 원자력 발전소나 지하 폭발로 인해 생기는 방사선 오염을 경계하기 위한 수단이 쉽게 발견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기름과 기체에 보다 자유롭게 접근하고 항구와 대운하를 만드는 수단으로서 핵폭발을 옹호했다.

그는 1970년 12월 한 공식석상에서 과학과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국가적인 논쟁을 명료화하기 위해 핵과학에 대한 연구를 포함한 각국의 많은 과학 연구를 둘러싸고 있는 비밀주의를 철폐할 것을 주장했다.

1975년 로렌스 리버모어 연구소(전에는 로렌스 리버모어 복사연구소)의 명예소장이 되었다. 1982~83년 그는 소련의 핵공격에 대항한 방위체제를 구축하려던 레이건 행정부의 전략방위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핵물리학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고 몇몇 연구들을 출판했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하늘과 땅으로부터의 에너지 Energy from Heaven and Earth〉(1979)로, 이 책에서 그는 환경·경제·안전 문제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모든 형태의 에너지 공급원과 현재와 미래에서의 사용에 관해 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