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

다른 표기 언어 J(ulius) Robert Oppenheimer 동의어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요약 테이블
출생 1904. 4. 22, 미국 뉴욕 시
사망 1967. 2. 18, 뉴저지 프린스턴
국적 미국

요약 제2차 세계대전 중 원자폭탄 개발기간 동안(1943~45)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했다. 1947~66년에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소장으로 재직중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충성심과 신뢰도를 문제삼아 기소당했고, 이로 인해 열렸던 정부 청문회 결과로 보안사항 취급허가와 정부 고위층의 자문역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정부 안에서 과학자의 역할과 관련된 정치적·도덕적 문제를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학계의 관심사가 되었다.
1925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한 후 케임브리지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연구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 러더퍼드 경의 지도 아래 원자구조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히틀러의 도발에 따라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계획'의 책임을 맡았다.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

원자폭탄 개발기간 동안(1943~45)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했다.

1947~66년에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소장으로 재직중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충성심과 신뢰도를 문제삼아 기소당했고, 이로 인해 열렸던 정부 청문회 결과로 보안사항 취급허가와 정부 고위층의 자문역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정부 안에서 과학자의 역할과 관련된 정치적·도덕적 문제를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학계의 관심사가 되었다(핵무기).

오펜하이머는 뉴욕 시에서 직물류 수입으로 부를 쌓은 독일계 이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버드대학교 학부과정 중 라틴어·희랍어·물리학·화학에서 탁월함을 보였고, 시집을 발간했으며, 동양철학을 공부했다. 1925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한 후 케임브리지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연구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 러더퍼드 경의 지도 아래 원자구조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캐번디시에서의 연구기간중 영국 과학자 단체들과 함께 원자연구의 대의 명분을 발전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할 기회를 가졌다.

막스 보른의 초청으로 괴팅겐대학교로 간 오펜하이머는 그곳에서 닐스 보어와 폴 디랙과 같은 저명한 물리학자들과 교류하게 되었으며, 1927년 괴팅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후에는 레이덴과 취리히의 과학센터에 잠시 머문 뒤, 미국으로 돌아와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와 캘리포니아공과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쳤다.

1920년대에는 새로운 양자론과 상대론이 등장하여 과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질량과 에너지가 등가이며 물질은 파동성과 입자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은 어렴풋한 함의만을 내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오펜하이머의 초기 연구는 주로 전자·양성자·우주선(宇宙線)과 같은 원자구성입자들의 에너지 과정에 관한 연구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에 양자론이 발표된 이래, 대학은 그에게 양자론을 연구하여 그 완전한 내용을 발전시키는 데 자신의 총력을 집중시킬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이와 더불어 그는 미국 물리학의 전세대를 교육했고, 그들은 오펜하이머의 지도력과 지적 독립성의 영향을 받았다.

독일에서 히틀러주의의 등장은 오펜하이머의 정치에 대한 최초의 관심을 일깨웠다. 1936년의 스페인 내전에서는 공화파의 편에 섰으며, 그곳에서 공산주의자 학생들과 친숙해지게 되었다. 1937년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상당한 유산을 남겨주었고, 그는 이 유산으로 반파쇼 단체들을 지원하기도 했지만, 스탈린의 탄압에 의한 러시아 과학자들의 끔찍한 고통을 본 후 공산당과 절연했으며(실제로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없음), 그와 동시에 자유민주주의 철학이 강화되었다.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레오 실라르드는 미국정부에 대해, 나치가 먼저 핵폭탄을 제조한다면 이는 전인류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때부터 오펜하이머는 천연 우라늄에서 우라늄-235(235U)를 분리시키는 공정과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우라늄의 임계 질량을 결정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1942년 8월 미국 육군은 핵에너지를 군사적 목적에 도입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영국과 미국의 물리학자들의 공동연구를 조직할 책임을 맡게 되었고, 이 연구계획은 '맨해튼 계획'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서 오펜하이머는 임무 수행을 위해 연구소를 설립했고 이를 관장했다. 1943년 그는 어린시절을 보냈던 기숙학교가 있던 뉴멕시코 샌타페이 근처의 로스앨러모스 고원을 연구소 부지로 선정했다. 이유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1942년 오펜하이머는 군 보안요원의 조사를 받기 시작했는데, 이 사건은 그와 친분관계에 있는 친구 몇 명이 소련의 간첩이었다는 혐의와 더불어 정점에 달했다. 한 친구는 이 사건으로 캘리포니아대학교의 교직에서 쫓겨났다. 1954년 안보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는 그들의 조사 가운데 자신의 기여부분은 거짓말투성이라고 진술했다.

독일이 항복한 후 탁월한 로스앨러모스 과학자들의 공동 노력의 성과는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앨러머고도에서 있었던 최초의 핵폭발로 그 정점에 이르렀다. 같은 해 10월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직책을 사임했다. 1945년에는 프린스턴대학교 부설 고등연구소 소장이었다가 원자력위원회 일반자문회의(General Advisory Committee of the Atomic Energy Commission) 의장(1947~52)으로 재직중이던 1949년 10월에는 수소폭탄 개발계획에 반대했다.

1953년 12월 21일 그에 관한 적대적인 내용을 담은 군 보안 보고서가 발표되어 과거 공산주의 활동 경력, 소련 간첩 명단 제출의 지연, 수소폭탄 제조 반대 등과 연루되었다는 명목으로 기소당했다.

보안 청문회는 오펜하이머의 모반혐의가 무죄임을 발표했으나 그의 군 기밀에 대한 접근을 금지시켰다. 그결과 원자력위원회와의 계약이 취소되었다. 미국과학자동맹(Federation of American Scientist)은 그의 기소를 반대하며 즉각적인 변론에 나섰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적 발견으로 야기된 도덕적인 문제들의 해결을 애써 시도하다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된 과학자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사상을 정립하는 데에 바쳤다. 냉전이 쇠퇴해가던 1963년에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오펜하이머에게 원자력위원회의 '엔리코 페르미 상'을 수여함으로써 공식적으로 그를 복권시켰다. 1966년 프린스턴을 퇴직한 오펜하이머는 다음 해에 후두암으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