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태조

다른 표기 언어 T'ai tsu , 太祖
요약 테이블
출생 927, 중국 뤄양[洛陽]
사망 976. 11. 14, 카이펑[開封]
국적 중국, 송(宋)

요약 중국 통일의 대업을 시작한 인물이다. 군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조광윤은 20세에 이르러 곽위의 양아들인 세종의 군대에 참여했다. 과감하고 성공적인 전투를 여러 차례 수행한 그는 후주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959년 후주의 세종이 죽고 7세 된 어린 공제가 즉위하자 조광윤의 군대 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부하 장병들이 술에 취해 잠든 조광윤을 깨워 황제의 옷을 입히고, 말에 오르게 하여 황제로 옹립했는데, 조광윤은 부하들의 뜻을 받아들여 황제로 즉위했고, 국호를 송이라고 칭했다. 그 직후 중국 내의 군소 제후국들은 송에 복속해왔다. 976년에 이르러 북부의 군벌을 제외하고는 모두 평정되었다. 태조 조광윤은 49세 나이로 죽었다. 중국 통일은 3년 후 태조의 아우 태종이 이뤘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와 권력의 장악
  3. 태조의 인품과 시책
  4. 과거제도의 개혁
  5. 태조에 대한 평가
태조(太祖)
태조(太祖)

개요

이름은 조광윤(趙匡胤). 그는 중국 통일의 대업을 시작한 인물이었고 이 일은 대체로 그의 아우이며 후계자인 태종(太宗) 때 완성되었다.

초기생애와 권력의 장악

조광윤은 군관이었던 조홍은(趙弘殷)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출생할 시기에 중국은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한때 대제국을 형성했던 당조는 반란으로 인해 907년에 멸망했다. 중국계·반(半)중국계를 비롯한 이민족 출신의 군벌들이 황폐해진 화북지방에서 제위를 노리고 있었고, 비교적 번성한 화남지방은 명목적으로 또는 실력이 겸비된 군벌에 의해 분할되어 있었다. 조광윤의 가문은 3대조부터 이같은 제위 찬탈을 노리는 군벌 아래에서 군관으로 공로를 쌓아왔고 그의 아버지는 956년 사망할 당시에 상당한 고위직 군관이었다.

조광윤의 어머니 두씨(杜氏)는 지혜와 통찰력으로 조광윤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961년 두씨가 죽은 뒤 조광윤은 어머니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20세에 이르러 조광윤은 카이펑에 후주(後周)를 세운 곽위(郭威)의 양아들인 세종(世宗)의 군대에 참여했다.

세종은 954년 왕위에 올라 중국 남부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해나갔고, 산시[陝西] 북쪽에 근거지를 정하고 거란 제국의 도움을 받으며 중국의 왕위를 노리고 있던 정치적 반대세력의 제거를 시도했다(→ 요). 과감하고 성공적인 전투를 여러 차례 수행하고 난 뒤에 조광윤은 후주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959년 후주의 세종이 죽고 7세 된 그의 아들 공제(恭帝)가 즉위했다.

그 직후에 거란의 군대와 후주에 반대하는 정적의 군대가 연합하여 침공해왔다. 조광윤은 이들의 토벌을 위해 북상했고, 그같이 위급한 시기에 어린 공제가 군주로 옹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긴 조광윤의 군대 내에서는 불만이 높아갔다. 그의 군대가 카이펑 북교(北郊)의 진교역(陳橋驛)에 숙영(宿營)했을 때, 부하 장병들이 술에 취해 잠든 조광윤을 깨워 황제의 옷을 입히고, 마상(馬上)에 오르게 하여 황제로 옹립했다. 그리고 카이펑으로 군대를 돌려 어린 공제의 양위(讓位)를 받아낼 것을 강요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근거는 없지만 조광윤이 이같은 정변을 사전에 알고 있지는 않았던 듯하다. 부하 장병들의 절대복종 맹서를 받아내고 또 황실과 그 측근 및 공공기관 그리고 백성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조광윤은 그들의 강요를 받아들여 황제에 즉위했고 국호를 송이라고 했다.

그 직후 중국 내의 군소 제후국들은 송에 복속해왔다. 963년 두 제후국이 스스로 투항해왔고 다른 두 제후국은 정복되었다. 976년에 이르러 북부의 군벌을 제외하고는 모두 평정되었고 그 군벌을 지원하는 거란 세력도 여러 번 패퇴시켰다. 976년 송의 군대는 북부 군벌을 정복하기 위해 총동원되어 있었으나 그해 태조는 49세의 나이로 죽었다. 3년 후 태조의 아우인 태종이 그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중국을 통일했다. 그러나 베이징[北京] 주위의 일부 소규모지역은 여전히 거란의 세력 아래 있었다.

태조의 인품과 시책

중국 통일은 달성하기가 쉽지 않은 사업이었고,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지방군벌들의 반란은 통일대업을 더욱 어렵게 했다.

태조는 당을 멸망시키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된 지방군벌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전념했고, 자신이 창건한 송의 번성을 위해 노력했다. 태조의 시책이 그의 높은 인품과 깊은 관계가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 당시나 후대에서도 그의 폭넓은 인품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해져왔다. 그 일화들은 일부는 지어낸 것도 있겠지만 그의 동시대인들이 태조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상과 느낌을 전달해준다.

젊은 시절 뛰어난 기량을 갖춘 궁수이며 기사였던 태조는 매우 위험한 승마 정벌전에서 상처를 입지 않고 살아 남았다. 제위에 오른 뒤 자신이 황제가 된 것도 하늘의 뜻이고, 죽고 사는 것도 하늘의 뜻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을 거스를 수 없다고 말했다.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변장을 하고 백성들의 생활 형편을 살피는 미행(微行)을 고집했다. 그는 호신용 단검 선물을 화를 내며 물리쳤다.

그의 생활은 검소했으며 전 쓰촨[四川] 태수로부터 빼앗은 상감 야호(夜壺)를 보고는 그것을 부수어 없애버리게 했다. 그는 비공식적으로 대신들의 집을 방문했고 그들 앞에서 서슴없이 자신의 과오에 대한 회한을 표명했다. 재위 기간 마지막 해에는 그에게 헌상된, 통일을 달성하고 전국을 평정한 황제라는 칭호를 거부했다. 태조는 중대사에 대해서는 관리들의 책임을 철저하게 물었다.

그결과 측근들은 그를 무서워했다. 한편 그는 사소한 잘못이나 무례한 행동은 웃으면서 용서해주었다. 또 여간해서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는 가끔 난폭하게 행동하는 적도 있었고, 술에 지나치게 탐닉했다고도 하나 그 근거는 희박하다. 가끔 무례한 관리나 신하들 때문에 진노한 적도 있었으나 곧 냉정해져 화가 나서 내린 형벌을 경감해주거나, 그 불운한 피해자가 당한 어려움을 보상해주기도 했다.

태조는 천성이 활동적이었다.

황제로 즉위해서도 가끔 토벌전을 직접 지휘했다. 당의 황제들이 완성된 형태의 정부문서에 서명만 했던 것과는 달리, 태조는 대신들에게 문서의 초안을 올리도록 하여 미리 지적사항을 하교하곤 했다. 태조가 관장했던 정부는 기능적으로 잘 정비되어 있어서 그의 성격의 일면을 엿볼수 있다. 그는 3명의 동평장사(同平章事)가 재정·군사·총무의 3개 분야를 관장하는 기존의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여 각 대신의 권력을 제한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막중한 책임과 권한을 내려 군주와 대신 간의 기능이 원활하도록 했다.

지방정부에 대한 중앙정부의 감독기능도 또한 강화했다. 963년부터 각 주(州)의 행정은 다루기 어려운 절도사(節度使)에서 조정에서 파견한 문관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주 이하의 지방행정 단위는 조정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했다. 965년부터 조세는 직접 국고에 귀속되었다. 송대 전운제도(轉運制度)의 시초인 전운사제도(轉運使制度)가 도입되어 지방의 세수관리들을 감독했다.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군사반란에 대비하여 태조는 최정예 군대를 수도에 주둔시켰고, 적절한 기회를 이용하여 세력이 강대해진 군지휘관들을 퇴임시켰다.

과거제도의 개혁

태조의 시책은 혈연이나 정실보다는 실력이 입증된 재능에 바탕을 둔 관료제도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조치가 과거제도를 정비한 것이다. 963년 태조는 궁중의 관리들이 신임관리를 추천하는 관습을 금지시켰고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이 과거시험위원을 자신들의 후견인으로 존대하는 관습을 폐지시켰다(중국문관제도). 그는 과거에 낙방한 사람의 청원을 받아들여 재시험을 명하기도 했고, 과거합격과 선정과정이 공정하지 못했다는 기미가 조금만 있어도 재시험을 치르도록 했다.

973년 태조는 어전시(御前試)의 최종시험제도를 확립하여 급제 순위를 확인했고 합격자의 명단을 공개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여러 등급에 걸쳐 많은 수의 합격자를 내기도 했다.

태조의 시책에는 인자함과 인간적인 정조가 스며 있었는데 이는 대체로 유교적 정신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패배한 적장에게 늘 관용을 베풀었고, 후주의 추종세력들에게도 관심을 보였다. 부장(部將)들에게는 정복한 지역의 백성들에게 쓸데없는 피해를 입히지 말라고 거듭 경고했다.

심지어 정복지에서 포획된 사병이나 장수들의 목숨을 살려주라고 하기도 했다. 태조의 신임을 잃은 신하들도 좋은 대접을 받았다. 행형제도(行刑制度)의 개혁에서도 관리들의 부패와 무책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혹한 형벌을 부과했지만 염전과 주조(酒造)의 국가통제권을 위반한 사례에 대해서는 처벌을 감해주었다. 또 사형집행에서는 수도의 궁중에서 사전검토하는 것을 의무사항으로 규정했다. 태조의 초기 시책들은 궁핍한 평민들의 경제사정을 개선시키고 조세의 부담을 경감해주는 쪽에 큰 관심을 기울인 것이었다.

태조에 대한 평가

16년의 치세를 통해 태조는 송대라는 획기적인 시대의 정치제도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기반을 닦아놓았다. 송의 정치체제는 놀라울 정도로 토론의 자유, 관료제도의 개혁, 내부개혁, 평화, 안정을 유지하고 추진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송대에는 경제기술의 개발, 과학의 진보, 철학·예술·문학의 빛나는 업적이 이루어졌고 이것이 송대의 특징이 되었다.

태조가 죽었을 때 송나라의 국가기반이 완성되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후대의 평화와 번영은 새로운 해결을 요구하는 문제를 가져왔다. 후대의 송 황제들 중 경륜이나 인품에서 태조에 필적할 만한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유교에서 강조하는 조상숭배의 영향력 때문에 태조가 내놓은 시책은 그 후대 황제들에 의해 계속 존중되어 더욱 위력을 발휘했다. 행정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관료체제에 대한 깊은 이해는 태조가 세워놓은 전통으로서, 후대의 송 황제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전통을 그대로 따랐다. 후대의 국가발전은 대체로 태조가 지시한 방향으로 움직여나갔다.

태조의 시책에 장점만 있고 단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군부의 반란을 지나치게 경계했기 때문에 군부의 힘이 약해져 강력한 외세의 침입을 막아내는 데 미흡했다는 것은 단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후대 황제들이 국민복지를 증진하고 관직에 인재를 등용하며 국가의 안전을 도모함으로써 3세기에 걸쳐 국가를 지키게 된 배경에는 태조가 다져놓은 통치술이 크게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