쾨르

쾨르

다른 표기 언어 Jacques Cœur 동의어 자크 쾨르
요약 테이블
출생 1395경, 프랑스 부르주
사망 1456. 11. 25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 왕 샤를 7세의 고문관 역할을 한 프랑스의 상인.

자크 쾨르(Jacques Cœur)
자크 쾨르(Jacques Cœur)

그의 생애는 백년전쟁 이후 프랑스가 번영하기 시작한 시기에 상인계급의 사회적 진보와 진취적 기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본보기로 남아 있다.

쾨르의 아버지는 옷감을 만들어 파는 상업도시 부르주의 모피상인이었다. 쾨르는 중동지역으로 다니며 장사를 하면서 현장교육을 받았다. 샤를 7세가 잉글랜드인들한테서 파리를 되찾은 뒤, 쾨르는 왕의 신임을 얻어 '아르장티에'(왕의 지출을 관리하는 재무관이자 왕실 대부업자)가 되었고, 이어서 왕실회의의 위원이 되었다.

그는 랑그도크 지역의 신분회의 위원으로서, 그리고 소금세 감찰관으로서 세금징수를 담당했다. 또한 외교 사명을 띠고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파견되기도 했다. 1441년에 귀족의 작위를 받은 그는 딸을 귀족과 혼인시키고, 아들 장을 위해 부르주 대주교 자리를 손에 넣었으며, 동생에게는 뤼송 주교 자리를 주었다. 그는 약 40개의 장원을 사들이고 부르주에 궁전을 지었는데, 이 궁전은 교회건축을 제외하고는 중세 말기의 가장 훌륭한 고딕 건축의 금자탑으로 꼽힌다.

자크 쾨르는 사업의 기회를 잘 포착하는 수완가였기 때문에, 모든 기회와 수단을 이용해 재산을 늘릴 수 있었다.

그는 정치가가 아니었지만 자신의 이익에 봉사하는 만큼 나라에 봉사할 수 있었다. '아르장티에'라는 지위는 그의 모든 활동을 뒷받침해 준 토대였다. 이 지위는 왕과 궁정신하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 뿐 아니라, 모든 원산지에서 물건을 사들일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해주었다. 투르에 있는 그의 가게들은 옷감·생사·보석·갑옷·향료 등을 사들여 비축했다. 쾨르는 또한 루아르 강과 론 강 연안에서 소금을 거래하고, 아키텐에서는 밀을 거래하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양모를 거래해 재산을 늘렸다. 그는 몽펠리에에 상인들을 위한 일종의 주식 거래소인 '로주'를 세웠는데, 몽펠리에는 그의 지중해 교역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지였다.

그는 피렌체의 견직물 제조공장을 소유하고, 이 도시의 '견직물 제조업자 동업조합'에 등록했다. 순회판매원과 마부들, 특히 선박 소유자들로 구성된 자문단은 그가 필요로 하는 통신과 수송수단을 제공해주었고, 쾨르 자신도 지중해에 최소한 7척의 배를 소유하고 있었다. 쾨르는 이탈리아인들처럼 교역의 각 지점에 별개의 회사를 세웠다.

제네바와 아비뇽, 피렌체 및 로마 시장에서 얻은 채권(대체 어음)이나 왕의 '르세트 피스칼'(국고 수입금)을 사업자금으로 이용했다. 그는 아라곤 왕인 알폰소 5세의 정치적 지지를 받았고, 제노바와 피렌체 및 바르셀로나 같은 도시들뿐 아니라 교황의 지지도 받았다. 교황은 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슬람교도들과 교역하는 것을 승인해주었다.

그의 막대한 부동산과 동산, 사치스러운 생활방식, 그리고 그의 지위와 영향력 및 정력은 참으로 인상적이었지만, 그의 번영은 사실 허약한 것이었다.

그는 유능한 공동 경영자를 갖지 못했고, 해상 교역은 항상 커다란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경쟁자들, 특히 몽펠리에의 경쟁자들은 무자비했다. 그는 많은 돈을 빌려 주었고, 쌓인 채권은 막대한 담보 대부를 의미했다. 채무자들의 물건을 사들이거나 되찾아옴으로써, 자본의 대부분을 비생산적인 물건(보석·가구·태피스트리 등)이나 시골 부동산에 묶어놓았다. 시골 부동산은 주의 깊게 관리해도 1년에 5% 정도의 낮은 수익밖에 내지 못했다.

항상 돈에 쪼들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1450년에 노르망디를 탈환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왕에게 빌려주고 대다수 귀족의 채권자가 될 수 있을 만큼 부유했다. 그래서 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샤를 7세의 정부인 아네스 소렐을 독살하려 했고 부정직한 투기에 가담했다는 터무니없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1451년에 체포되어, 막대한 벌금을 물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친구들의 도움으로 탈옥해 피렌체로 피신했다가 1455년에 로마로 옮겼다. 이듬해 11월, 교황 칼리스투스 3세가 투르크인과 싸우기 위해 조직한 해군 원정대를 지휘하러 갔다가 에게 해의 키오스라는 섬에서 죽은 듯하다. 그가 죽은 뒤, 프랑스 왕 루이 11세는 쾨르의 재산 가운데 일부를 그의 아들들에게 돌려주고 전직 '아르장티에'가 착수한 사업(리옹에 있는 견직물 공장과 중동 지역에 회사를 세우려는 최초의 시도)을 재개함으로써, 아버지 샤를 7세가 쾨르에게 저지른 잘못을 보상했다.

자크 쾨르는 그 세대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명예, 높은 지위, 토지 등에 대한 그의 야심은 전통적인 것이었다. 그의 계산법은 초보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금융방식은 단순하고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는 교역의 양과 범위, 대담성과 집착, 자신감, 자신을 사랑받거나 미움받는 존재로 만드는 재능, 그리고 특히 기회를 포착하는 감각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평범한 동시대인들과는 달랐다. 자기 세대에 주어진 사업의 기회를 이해했지만, 앞을 내다보는 안목은 갖지 못했다. 그는 상업에 종사하는 중산층의 번영을 상징하는 화신이었고, 리옹과 투르의 상인들은 그후 몇 세대에 걸쳐 그를 모방해 그와 똑같은 성공을 거두었다.

자크 쾨르의 전설은 여전히 여러 가지 측면을 갖고 있으며, 역사에 보존되어 있는 그에 대한 묘사는 서로 모순되는 경우가 많다.

오랫동안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왕국의 국고 수입금을 이용하고 주인을 속인 투기꾼으로 여겨졌다. 벼락부자에게 적대적인 대중은 그를 깎아내렸고, 그가 마법을 부렸다고 비난했다. 계몽주의 시대인 18세기 사람들은 그를 전제정치의 희생자로 동정했다. 그러나 19세기의 저명한 역사가인 쥘 미슐레는 역사상 처음으로 쾨르를 모든 세대의 본보기이며 그후 수세기에 걸쳐 등장한 강력한 부르주아 계층의 선구자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