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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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최초의 인물 캐리커처는 16세기말에서 17세기초 무렵 이탈리아에서 나왔다. 18세기 영국에서 정치적 캐리커처를 그린 풍자적 인쇄물이 만들어졌다. 18세기 후반 석판인쇄술이 고안 이후 캐리커처가 신문잡지에 실리게 되었고 대표적인 것이 〈펀치〉지로 순수한 희극적 경향을 띠었다. 1880년대 인쇄의 혁명은 캐리커처를 대중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일간신문에 삽화를 넣는 것이 상업적으로 필수화되어 신문사에서 전문 카툰 화가를 채용하기도 했다. 미술 분야에서도 캐리커처를 발전시켰다. 20세기 중반에 만화잡지들이 인기를 끌면서 캐리커처는 인기를 잃게 되었지만 많은 만화가들이 이 양식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것을 시도하고 있다.

희극적으로 왜곡시킨 실례들은 고딕의 괴물 형상 조각과 필사본의 테두리 채식, 중세의 인쇄물 등에서 많이 볼 수 있지만, 최초로 알려진 인물 캐리커처는 16세기말 또는 17세기초 이탈리아에서 나왔다.

캐리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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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icatura'('부담지우다' 또는 '과중하게 부담지우다'라는 뜻의 'caricare'에서 유래)라는 이탈리아어는 화가 안니발레 카라치가 붙인 용어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또한 사실적인 외양을 유지하면서도 얼굴을 동물이나 채소 또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형시키는, 그뒤의 정치적 캐리커처 화가들이 많이 사용한 방법을 창안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정치적 캐리커처는 18세기 영국에서 처음으로 출현했다.

영국 귀족 출신의 아마추어 미술가들은 로마에서 피에르 레오네 게치가 그린 기지 넘치는 초상화들을 보고 영국에 소개하여 캐리커처를 크게 유행시켰다. 새롭게 유행한 이 미술 양식으로 가장 성공한 대표적 화가들 중 한 사람인 G. 타운센드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이나 저명한 예술인들에서 정치인들에 이르기까지 그림 대상의 범위를 넓혔다. 정치적 캐리커처는 곧 폭넓은 인기를 끌었으며, 1780~1820년 열광적인 정치적 분위기를 타고 엄청나게 많은 풍자적 인쇄물들이 판매 또는 임대용으로 만들어졌다.

지금은 캐리커처라는 폭넓은 용어로 표현하고 있는 당시의 이 정치적인 풍자화들은 카라치와 타운센드의 전통 못지않게 '교훈적 그림들'의 전통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솜씨로 종종 무심결에 유머를 전달한 18세기의 아마추어 화가들은 캐리커처의 독특한 양식을 형성했다. 다음 세대의 전문적인 캐리커처 화가들은 이와 비슷하게 의도적으로 미숙하면서도 생생한 표현을 발전시켰는데, 그들 중 J. 길레이라는 뛰어난 화가는 그의 독특한 드로잉 방식으로 주제의 조잡함을 훌륭하게 보충했다.

설명문과 그것을 적어 넣기 위한 풍선꼴 윤곽선 및 각 장면을 가르는 테두리선 등 널리 알려진 시사 풍자 만화의 많은 관행들이 주로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희극적인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이러한 방법들을 전문적으로 사용한 초기의 미술가로는 1829년에 석판인쇄로 〈페스투스 박사의 모험 Adventures of Dr. Festus〉을 출간한 스위스의 로돌프 퇴퍼가 있었다.

18세기 후반 석판인쇄술이 고안되자 이것은 그림을 출판하는 수단으로 프랑스에서 빠르게 발전했으며, 이에 따라 캐리커처가 신문잡지에 실리게 되었다.

특히 1830년대에 샤를 필리퐁이 출간한 풍자적인 두 잡지인 〈카리카튀르 La Caricature〉라는 주간지와 〈샤리바리 La Charivari〉라는 일간지는 거기에 삽입된 많은 훌륭한 석판화들을 통해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필리퐁). 석판 위에 미술가가 직접 그림을 그리는 신속하고 직접적인 방식인 석판인쇄술이 사용되면서 캐리커처도 뚜렷하게 신속하고 풍부한 표현양식을 발전시켰다.

루이 필리프 왕에 대항하여 그의 살진 얼굴을 배(프랑스어에서 'poire'는 '바보'라는 속어로도 쓰임) 모양으로 변형시켜 그리는 등 격렬한 정치적 캠페인들을 벌인 〈샤리바리〉지는 마침내 당국의 검열을 받았다. 이 잡지는 결국 사회적 풍자로 전향했으며, 주제를 풍자적이면서도 우의적으로 묘사하는 'portrait chargé'(과장된 초상화)라는 장르를 창안해냈다(포르트레 샤르제). 많은 잡지들이 필리퐁의 잡지에서 이 2가지를 모두 모방했는데, 유럽 대륙에서는 정치풍자적인 경향을 띠었으며 영국에서는 당시 점점 인기를 모으던 〈펀치 Punch〉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보다 순수한 희극적 경향을 띠었다.

〈펀치〉지는 수준 높은 소묘 솜씨와 공격적이지 않은 캐리커처로 종종 단순한 농담들을 그려내어 유럽의 잡지와 예전의 영국 잡지에서 볼 수 있는 정치적 공격성과 강한 대조를 이루었다.

1830년 이후 대중미술은 고대의 목판 인쇄물 양식을 제외하고는 영국의 일반 사회에서 곧 사라졌다. 빅토리아 시대의 거의 모든 기간에 걸쳐 영국의 캐리커처 전통을 이어받은 〈펀치〉 같은 잡지들은 복사본의 형태로 3펜스나 6펜스의 가격에 팔렸다. 영국에서 1840년대에 〈펀치〉 같은 잡지들에서 캐리커처를 인쇄하는 데 동판 에칭 방식을 대신하여 사용한 것은 석판인쇄술이 아니라 목판인쇄술이었는데, 미술가가 그린 밑그림을 기초로 장인들이 재작업하는 목판인쇄술은 대륙의 석판인쇄보다 더 절제되고 양식적인 효과를 만들어냈으며, 캐리커처 화가들의 양식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대조적인 민족적 특성이 나타났다.

〈펀치〉는 1843년 새로 지은 하원 의사당에 그려질 프레스코의 원형으로 사용된 일련의 진정한 카툰, 즉 실물 크기의 예비 소묘들을 풍자적으로 개작하여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자 캐리커처라는 무리한 명칭 대신에 카툰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뒤 주로 1860년대에 '진정한' 카툰이 등장하면서 카툰의 의미는 더욱 확장되었다. 가장 유명한 카툰은 존 테니얼 경의 〈훌륭한 지도자를 배척하다 Dropping the Pilot〉(1890, 독일의 빌헬름 2세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강제 사임시킨 것을 빗대어 그린 삽화)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시사풍자만화는 왜곡이나 해학이 없이 유추나 상징 또는 우의적인 인물들을 통해 당대의 사건들을 비평했다.

1880년대에 사진제판술로 인해 일어난 인쇄의 혁명은 캐리커처를 대중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 새로운 방법은 비용이 싸서 일간신문에 삽화를 넣을 수 있게 했으며, 그것이 상업적으로 필수화되었다. 1888년 〈펠 멜 가제트 Pall Mall Gazette〉지는 처음으로 카툰 화가인 F. C. G.(프랜시스 캐러더스 굴드)를 직원으로 채용했다. 단순한 형식의 채색판화법과 사진제판술로 찍어낸 값싼 만화잡지들이 양산되어 누구나 쉽게 캐리커처를 볼 수 있게 되자, 영국에서는 주간 연속만화집인 〈앨리 슬로퍼의 휴일 Ally Sloper's Half Holiday〉이 0.5페니의 가격에 팔려 '가난한 사람의 〈펀치〉'가 되었다.

1890년대의 미국 신문들은 정치적 카툰뿐만 아니라 연재만화들을 싣기 시작했는데, 〈개구쟁이 아이들 The Katzenjammer Kids〉은 1897년에 게재되었다. 제판술은 미술가가 선을 굵게 그리든, 필 메이처럼 펜을 재빠르게 휘갈겨 그리든 그대로 복제할 수 있으므로 양식적 완화를 가져다 주었다. 카툰 화가들은 개성적인 선을 개발하기 위해 이것을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카란 다슈, 앨버트 허슈펠드, 데이비드 로, 맥스 비어봄, 장 콕토, 미겔 코바루비아스, 비키 등은 단순히 시사풍자만화가로 지칭되기보다는 각각 독특한 삽화의 유형을 나타내는 대명사처럼 되었다.

그와 동시에 앙리 툴루즈 로트레크, 제임스 애버트 맥닐 휘슬러, 리오넬 파이닝거, 게오르크 그로스, 파울 클레, 윌리엄 그로퍼, 벤 샨 등을 비롯한 많은 화가들이 미술 분야에서 캐리커처를 발전시켰다.

20세기 중반에 전면 익살 만화와 연재만화, 만화잡지들이 인기를 끌면서 캐리커처는 그만큼 인기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세실 비턴, 제러드 호프눙, 로널드 설, 제럴드 스카프와 미국의 로버트 오스본, 데이비드 러빈, 에드워드 소렐, 패트릭 브루스 올리펀트 등의 많은 카투니스트들이 주축이 되어 이 양식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