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

지미 카터

다른 표기 언어 Jimmy Carter
요약 테이블
출생 1924. 10. 1, 조지아 플레인스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제39대 대통령. 1976년 11월 미네소타 주의 진보적 상원의원인 월터 F. 먼데일 대통령후보와 함께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여 공화당 후보인 리처드 포드 현직 대통령을 물리치고 미국 제3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지미 카터의 정치적 성과는 주로 인내심 있는 외교를 바탕으로 한 실용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1978년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를 캠프데이비드 별장에서 회동토록하여 전시상황을 종식시켰고, 1979년에는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타이완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재선에는 실패했으나, 퇴임 후 활발한 인권 증진, 국제 분쟁 해결을 위한 노력으로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목차

접기
  1. 정의
  2. 초기 생애
  3. 정계 진출
  4. 미국 제39대 대통령 당선
  5. 재임 중 활동
  6. 퇴임 후 활동
지미 카터(Jimmy Carter)
지미 카터(Jimmy Carter)

정의

미국의 정치가. 민주당 후보로 제39대 대통령을 지냈다. 본명은 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James Earl Carter Jr.)이지만, 애칭인 지미 카터(Jimmy Carter)로 더 많이 알려졌다.

초기 생애

지미 카터는 땅콩농장주이자 조지아 주 의원이었던 제임스 얼 카터 시니어(James Earl Carter Sr.)와 베시 릴리언 카터(Bessie Lillian Carter)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해군 장교가 꿈이었던 카터는 1941년 조지아 주 아메리쿠스에 있는 조지아사우스웨스턴칼리지(Georgia Southwestern College)에 입학했고, 이듬해 애틀랜타에 있는 조지아 공과대학으로 편입했다.

다음해인 1943년 아나폴리스에 있는 미국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카터는 1946년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 카터는 7년 동안 해군에서 복무했다. 그 가운데 5년은 잠수함 근무였고, 이때 히먼 G. 릭오버 제독과 함께 핵잠수함 계획에 참여했다. 1953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해군장교직을 사임하고 고향인 조지아로 돌아와 땅콩농장을 경영했다.

정계 진출

카터는 1962년 민주당 소속으로 조지아 주 상원의원에 선출되고, 1964년 재선되었다. 1970년에는 조지아 주지사가 되었다. 지미 카터는 취임연설에서 "인종차별의 시대는 끝났다"라고 선언하고, 조지아 주 공무원직을 흑인과 여성에게 개방했다. 또 혼란스러운 기존 주정부 기구들을 통폐합하여 재조직하는 동시에 보다 엄격한 예산관리 절차를 도입했다.

미국 제39대 대통령 당선

주지사 임기가 끝나기 직전(1974) 지미 카터는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지명전에 참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카터에게는 주요지지세력과 전국적인 정치기반이 취약했지만, 지칠 줄 모르는 체계적인 선거운동을 통해 광범위한 유권자의 지지를 확보하여 1976년 7월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되었다.

결국 1976년 11월 미네소타 주의 진보적 상원의원인 월터 F. 먼데일 대통령후보와 함께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여 공화당 후보인 리처드 포드 현직 대통령을 물리치고 미국 제3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지미 카터는 일반투표에서 51%의 지지를 확보했고,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포드의 240표에 대해 297표를 획득했다.

재임 중 활동

재임기간중에 지미 카터는 자신의 서민적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 공식석상에서 격식 없는 복장과 언사를 사용하고 기자회견을 자주 열어 대통령직의 화려함을 축소시켰다. 그러나 민주당이 상하 양원에서 다수의석을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미 카터의 야심적인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정책안은 반대에 부딪혀 입법화되지 못했다. 이러한 무능력으로 인해 1978년 카터의 인기가 크게 떨어졌다.

카터는 국제인권운동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의 외교적 성과는 주로 인내심 있는 외교를 바탕으로 한 실용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1977년 카터는 파나마와 2개의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의해 1999년까지 파나마파나마 운하의 통제권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그이후에는 파나마 운하의 중립성이 보장되었다.

1979년 1월 1일 지미 카터는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타이완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1978년에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를 캠프데이비드 별장으로 회동시켜 협정체결을 중재했다. 이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 이래 양국간에 지속되어오던 전시상황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또한 이 협정에 의해 양국간에는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던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한다는 조건으로 공식적인 외교 및 경제 관계가 수립되었다. 1979년 지미 카터는 소련의 브레주네프와 쌍무조약인 전략무기제한협상(SALT Ⅱ)을 체결했는데, 이 협정의 골자는 전략핵무기 발사수단의 보유수에 있어 양국간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 협정에는 적절한 방법으로 협정의 이행이 확인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첨가되었다. 그러나 1980년 1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지미 카터는 상원의 심의사항에서 이 협정을 제외시켰다. 이러한 지미 카터의 외교적 성공은 곧 외교분야에서 미국이 직면한 심각한 위기와 국내 경제정책의 실패에서 비롯된 국민의 불만이 결합하여 퇴색되었다.

1979년 11월 4일 테헤란에서는 이란 학생들로 구성된 폭도들이 미국대사관을 급습하여 미국인 직원을 인질로 붙잡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란의 혁명정부는 이러한 행동을 공식적으로 승인했으며, 미국과 이란의 외교관계는 인질로 잡힌 대사관 직원들의 석방문제를 둘러싸고 교착상태에 빠졌다. 지미 카터는 이란 혁명정부와의 직접적 접촉을 피한 채 인질석방협상을 전개하는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여주었다(인질위기).

이러한 카터의 태도는 처음에는 국민의 지지를 받았으나, 1980년 4월 비밀리에 추진된 미군의 인질구출작전이 실패하자 그의 무능은 정치적 자질 문제로까지 비화했다. 그결과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지미 카터는 매우 강력하게 대응했다. 미국산 곡물의 소련 수출이 금지되었고, 미국 선수단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1980년 하계 올림픽 대회에 불참했다.

국내적으로는 지미 카터의 경제정책에 대한 우려가 널리 확산되었다. 카터의 집권 후 통화팽창률은 매년 증가하여 집권 당시인 1976년에는 6%였으나 1980년에는 12%를 넘어서고 있었다. 실업률은 계속해서 7.5%라는 높은 수치를 기록했고, 변동이 심했던 금리는 1980년 1년 동안 20% 또는 종전의 2배로 상승했다.

지미 카터는 국내의 개혁정책과 경제정책에서 실패했으며, 1979년에는 외교적 위기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터는 1980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다시 지명되었다. 그러나 카터의 정치적 자질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만회할 수 없을 정도로 추락되어 있었다. 결국 같은 해 11월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카터는 공화당의 레이건 후보에게 완패했는데, 그가 일반투표에서 얻은 득표율은 41%였다.

퇴임 후 활동

1982년 카터는 대통령 재임시절을 회고한 〈신념을 지키며(Keeping Faith)〉를 출판했고, 1985년에는 〈아브라함의 후손 : 중동에 대한 통찰(The Blood of Abraham : Insights Into the Middle East)〉을 발표했다. 지미 카터와 그의 부인 로잘린은 카터 대통령 센터를 설립했다. 이 센터에는 대통령 도서관, 연방기금에 의해 운영되는 박물관, 싱크 탱크(think tank), 질병을 퇴치하고 농업생산성을 증대하기 위한 국제원조기구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카터는 퇴임 후에 민간차원의 외교관으로서 수많은 나라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종류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니카라과에서는 미스키토 인디언을 그들의 조국으로 돌려보내는 데 성공했고, 파나마에서는 불법적인 투표절차를 감시하고 그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에티오피아에서는 에리트레아 인민해방세력과의 협상을 중재했다.

인권을 중요하게 여겼던 카터는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이 이어지던 당시 한국 정부와 인권 문제로 갈등을 겪기도 했으며, 그의 재임중이이던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를 창설하여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도록 했다. 1994년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회동했으며, 2011년에도 북한을 방문하여 남북 평화 기조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2002년 국제적인 인권 증진과 갈등 중재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