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시우스 롱기누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다른 표기 언어 Gaius Cassius Longinus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BC 42, 마케도니아 필리피 근처
국적 로마

요약 BC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음모단의 주모자.

그의 초기 생애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BC 53년 콰이스토르(재무관)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밑에서 일했으며, 카르하이(지금의 튀니지 하란)에서 파르티아인에게 패배한 로마 군인들을 구했다. 그 다음 2년 동안 파르티아의 시리아 공격을 물리쳤다.

BC 49년 콘술(집정관)이 되어 시리아에서 착취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마침 그해에 카이사르와 옵티마테스 사이에 내전이 일어난 덕분에 재판을 면했다. 내전에서 그는 처음에는 카이사르의 적인 폼페이우스의 함대 일부를 지휘했다. 테살리아의 파르살루스에서 폼페이우스가 크게 패한(BC 48) 후 카시우스는 카이사르와 화해하고 그의 부관이 되었다.

BC 44년 그는 프라이토르 페레그리누스가 되었으며 이듬해의 시리아 총독직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자기 부하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프라이토르 우르바누스로 임명되자 모욕감을 느끼고 카이사르의 반대파가 되어 살해음모에 적극 가담했다. 카이사르 살해 후 군중들이 분노하자 이탈리아를 떠나 시리아로 갔다. 그곳에서 많은 군사를 일으켜, 원로원의 위임을 받아 시리아를 통치하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를 격파했다.

BC 43년 카이사르파 지도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뒤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제2차 삼두정을 형성하자 그는 동지인 브루투스와 함께 헬레스폰토스를 건너 트라키아(트라케)로 진격해 마케도니아의 필리피 근처에 진을 쳤다. 그들은 적을 포위해 굶기는 작전을 쓸 작정이었으나 교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브루투스는 옥타비아누스와 싸워 이겼으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패배한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해방노예에게 자기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브루투스는 그를 '최후의 로마인'이라 부르며 애통해 했으며, 그의 사체는 타소스에 묻혔다. 그의 아내이며 브루투스의 이복 여동생 유니아 테르티아는 22년까지 살았다.

상당히 유능했던 그는 훌륭한 군인이었으며 문학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허영과 야심에 들떠 있었으며 성급했고 독설을 잘했다.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 Julius Caesar〉에 묘사된 그의 성격은 생생하기는 해도 실제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