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노

카르노

다른 표기 언어 (Nicolas-Léonard-) Sadi Carnot
요약 테이블
출생 1796. 6. 1, 파리
사망 1832. 8. 24,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과학자.

열기관(熱機關) 이론과 연관된 '카르노 순환'(Carnot cycle)을 기술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 당시 정치가로서 이름을 떨쳤던 라자르 카르노의 맏아들이었고, 그의 이름은 그가 태어날 당시 작품이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던 중세 페르시아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시라즈 출신인 사디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그의 초기생애는 불안정했으며, 그의 가족은 많은 운명의 기복을 겪어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카르노가 태어난 후 망명했다가, 1799년 돌아와 나폴레옹 휘하에서 육군장관을 지냈으나 곧 강제 은퇴당했다.

은퇴한 뒤 군사학·정치학 뿐만 아니라 수학과 역학에 대한 논문을 쓸 만큼 저명했던 그는 아들 카르노를 조기교육시켰다. 1812년 그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했다. 그 대학에서는 물리와 화학 분야에서 그당시의 최신 발전상을 이해하고 있었던 교수진이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고 있었다. 1814년 그가 졸업하던 당시 나폴레옹의 군대가 격퇴당해 파리 전체가 포위당하자, 그를 비롯한 여러 학생들은 도시 외곽지역에서 소규모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1815년 나폴레옹의 짧은 재집권기간 동안 그의 아버지인 라자르는 내무장관을 맡았으나, 프랑스의 제1제정시대가 끝나자 독일로 망명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디는 그의 소속부대의 전임자와 논쟁하고, 진급을 거부하고, 그가 교육을 받아왔던 분야에서 일을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생의 대부분을 군대에서 보내게 되었다. 1819년 당시에 만들어진 참모부로 전속되었으나 곧 퇴역하여 프랑스에서 살면서 군복무를 기다렸다.

친구들은 그당시의 그를 '신중하고 과묵하나 과학과 공업공정에 만족할 줄 모르는 호기심을 지닌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성숙되고 창조적인 그의 삶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그는 노동자를 위한 물리·화학 공개강의에 참석했다. 또한 유명한 물리학자이자 출세한 실업가인 N. 클레망 데소르메와 함께 한 긴 토론으로 많은 영감을 얻었다. 그는 그의 통찰력과 일반화하는 능력으로 클레망 데소르메의 이론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다.

그당시 카르노가 몰두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좋은 증기기관을 제작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증기력은 이미 양수작업·굴착작업·단조작업 등의 여러 용도로 이용되고 있었으나 비효율적이었다. 영국과의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에서 수입된 다른 나라의 발달된 증기기관을 본 그는 프랑스의 설계기술이 얼마나 뒤떨어졌는가 알게 되었다. 특히 그는 정식으로 과학교육을 받지 못한 몇몇 공학자의 지혜를 통해 이 정도까지 영국이 발전한 것에 대해 풀이 죽어 있었다.

또한 영국의 공학자들은 실제 작동조건하에서 얻은 여러 종류의 증기기관의 효율에 대한 신뢰성 있는 데이터를 축적하고 공개한 후였으며, 저압기관과 고압기관을 비롯한 단일 실린더와 다중 실린더의 이점에 대해 활발하게 논의중이었다. 증기력을 적절히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 프랑스 기술낙후의 요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자 그는 증기기관의 효율에 대한 저서를 냈다.

카르노 이전의 공학자들은 증기의 팽창량·압축량을 얻어진 일과 소모된 연료량에 비교하여 효율을 개선하려 했다. 1824년 〈Réflexions sur la puissance motrice du feu et sur les machines propres à développer cette puissance〉라는 논문을 저술했는데, 여기서 카르노는 다른 사람들이 역학적으로 상세한 부분에 관심을 가졌던 것과는 달리 공정의 본질에 역점을 두었다.

그는 증기기관에서 원동력이 발생되는 시기는 마치 물이 떨어지면서 물레방아에 동력을 공급하는 것처럼 열이 보일러의 높은 온도에서 응축기의 낮은 온도로 떨어질 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열이란 생성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는 기체'라고 가정하고 열소설(熱素說)의 체계 내에서 연구했다. 그 가정이 비록 틀렸고 기술하는 동안 카르노 자신도 그것에 대해 의심쩍어 했으나, 이상적 기관의 효율은 증기나 그밖의 유체와 같은 작동물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고온인 부분과 가장 저온인 부분의 온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예언을 포함한 연구결과는 정확했다.

이 연구결과는 과학 아카데미에 공식적으로 제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논평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무시당했다(카르노 효율). 그후 1834년 철도공학자인 E. 크라페롱이 카르노의 연구결과를 인용하고 확장시켰다. 그의 연구결과가 인정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로는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연구논문의 복사본이 제한되어 있었고, 둘째, 과학논문의 보급이 늦었으며, 셋째, 그당시에는 영국이 증기기관에 대한 기술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그러한 연구성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카르노의 의견은 독일의 R. 클라우지우스와 영국의 W. 톰슨(후에 켈빈 경이 됨)에 의해 발전된 열역학 이론에 포함되었다(1851). 카르노의 그뒤 행적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1828년 그는 자신을 '파리의 증기기관 제작자'라고 했다. 1830년의 7월혁명으로 인해 좀더 자유로운 정권이 들어설 가망이 보이자, 카르노에게 정부의 한 직책을 주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그는 학교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전제군주제가 복귀되었을 때 다시 과학연구에 몰두했으며, 이것은 1832년 파리에서 콜레라로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